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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지의 시 - 2014-2015 이성복 시론집
이성복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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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시를 대표하는 이 시대의 지성.
염세주의로 빠진듯하면서도 미묘하게 희망을 찾아 울부짖는듯한 그의 감수성에 한표를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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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 애니멀 - 인간은 왜 그토록 이야기에 빠져드는가
조너선 갓셜 지음, 노승영 옮김 / 민음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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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왜 그토록 이야기에 빠져드는가’ 라는 부제처럼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류는 이야기를 듣고 이야기를 하며 이야기에 빠져 살아가고 있다. 인간에게서 ‘스토리텔링’을 뺀 삶을 상상할 수 있을까?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스토리텔링은 인류의 생존을 보장하기 위해 진화한 기술이다. 스토리텔링은 까마득한 과거부터 있어왔고 현재까지 더욱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 진화론적 입장에서 퇴화되지 않고 더욱 발전되고 있다는 것만 살펴보더라도 분명 생존을 보장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조너선 갓셜은 진리에 가까운 이러한 이야기를 어렵지 않게 다양한 사례를 들어 마주앉아 이야기를 하듯이 전해주고 있다. 책을 읽고 난 지금 나는 그와 함께 차 한잔을 하며 재미난 이야기를 나눈 기분이다.

 

인간은 잠시도 사고를 멈추지 않는다. 실제 발화를 제외하고라도 머릿속에서는 온갖 다양한 상상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인간은 찰나의 시간에서도 상상을 하는데 하루 동안 인간이 만들어내는 생각의 가지 수는 대략 4만5천여 개 쯤 된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이야말로 《스토리텔링 애니멀》이란 제목을 잘 드러내주는 고증인 것 같다. 저자는 글 속에서 진화생물학, 심리학, 신경 과학, 종교 등 다양한 접근을 통해 논거를 내세운다.

 

"심리학자이자 소설가 키스 오틀리는 이야기를 인간 사회생활의 모의 비행 장치라고 부른다. 모의 비행 장치가 조종사를 안전하게 훈련하듯 이야기는 사회생활의 어려움을 헤쳐 나갈 수 있도록 우리를 안전하게 훈련한다."(p84)

 

실제로 인간은 직접경험이 아닌 간접경험에 의해 대리강화 받기도 하는데 이는 뇌파측정을 통해 직간접경험이 모두 같은 영향을 받고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증명한다. 최근 다양해진 매체만큼 이야기는 다양한 경로를 통해 접할 수 있고 이로 인해 많은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특히 영화나 TV프로그램, 스토리담긴 멜로디(노래), 책 등은 우리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지금 이 순간 나 역시 영화 속에 등장하는 멋진 작가의 모습이 떠오르며 내가 이 리뷰를 멋지게 써내려 가는 걸 몇 초간 상상하며 웃었다. 이처럼 이야기를 뺀다면 인생이 훨씬 단조로워 질 것 이며 그런 삶이 가능할지 의문이 든다.

 

 

저자는 픽션을 많이 소비하는 사람은 삶의 거대한 딜레마를 시뮬레이션을 해보았기 때문에 논픽션을 즐기는 사람보다 사회 활동에 더 능숙할 것이라 말한다. 픽션 독자가 논픽션 독자에 비해 높은 공감 능력과 사회적 능력을 보이는 한 연구를 예로 들었다. 즉 이야기는 단순한 유희가 아니라 실제적 삶을 더 잘 살아나가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어떠한 힘든 상황 속에서 소설 속 인물이나 자신이 어디선가 들었던 이야기 속 주인공을 떠올려 유사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깨닫기도 한다. 비단 이러한 효용론적 관점이 아니라 일반론적 관점에서 바라봤을 때 이야기는 재미와 쾌락이라는 매우 중요한 요소를 가지기도 한다. 과거 중국 송나라때는 전문 이야기꾼, 즉 ‘설화인’ 이 있었다. 그들은 전문적으로 설화라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공연하는 이야기꾼이었는데 그들의 존재가 바로 이야기가 인간 삶에 얼마나 깊숙이 자리잡고있고 얼마나 중요한것인지를 반증해준다. 우리나라 역시 판소리, 마당놀이 등에 음악적 요소 외에도 스토리라는 이야기가 가미되어 있어 더욱 민중들의 사람을 받아왔다. 이처럼 이야기는 쾌감과 교훈을 주고 현실에서 더 잘 살 수 있도록 세상을 시뮬레이션 한다. 스토리텔링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 필수 불가결한 부분임은 틀림이 없다.

 

 

사람은 생각하는 동물이다. 그러하기에 상상을 하고 그를 통해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말 그대로 ‘스토리텔링 애니멀’ 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정보화 사회의 물결 속에서 디지털 매체의 일방향성에 빠져 생각하지 않고 무비판적으로 정보를 받아들이고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현실의 테두리가 아닌 사이버세계에 탐닉해 현실과 동떨어지게 사고하고, 사색이나 몽상 등의 시간을 가지지 않은 채 멍하니 아무 생각 없이 살고 있는 사람들이 늘어간다는 것이다. 하루 중 잠시라도 모든 디지털매체, 특히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자신만의 ‘네버랜드’를 여행해 본다면 지금의 삶보다 좀 더 풍요롭고 행복한 삶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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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1
헤르만 헤세 지음, 안인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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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주위의 압력에 떠밀려 읽고는 한동안 잊고 지냈었는데, 이번에는 주위의 압력보다는 자발적으로 읽었다. 많은 이들이 최고의 성장소설로 『데미안』을 꼽는다. 성장소설, 주인공 에밀 싱클레어의 자신의 성장기를 그리는 만큼 성장소설이란 말이 맞지만, 그것을 어린 나에게 강요(?)한 주위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과연 나에게 무엇을 기대한 것인지... 청소년기를 지나고 삶에 대해 어느 정도 생각이 정립해 있는 지금 읽은 『데미안』은 어릴적 하품을 하면서 읽은 『데미안』과는 다르게 보다 크게 다가왔다. 하지만 아직도 몇 가지 의문이 들었다.

 

 먼저 가장 먼저 든 의문은 예전에도 든 의문이긴 하지만, 왜 싱클레어가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막스 데미안, 그가 제목을 차지하고 있을까였다. 언젠가 읽은 오르한 파묵의 『소설과 소설가』에서 파묵은 『안나 카레니나』와 같은 주인공을 제목으로 하는 소설을 쓰고 싶다고 한 적이 있는데, 『안나 카레니나』나 『파우스트』등의 작품을 보면 어렵지 않게 그들의 이야기임을 알 수 있었다. 물론 『안나 카레니나』의 초반에도 안나는 등장하지 않고, 『파우스트』에도 메피스토펠레스라는 걸출한 주인공이 등장하긴 하지만 안나나 파우스트가 주인공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유독 『데미안』에서만 『싱클레어』가 아닌 『데미안』일까? 사실 이제는 『싱클레어』는 어색하기도하다. 마치 아이폰을 ‘애플’이 아니라 ‘피치’가 만들었다고 하는 것처럼^^ 해설을 통해 처음에 헤르만 헤세의 이름이 아닌 에밀 싱클레어의 이름으로 발표되어서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데미안』은 성장한 싱클레어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마치 신이 직접 자신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기라도 하듯이 언제 어디서나 시원하게 이야기를 하지만 자신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고 시작하는 부분은 처음부터 적어도 싱클레어는 거짓으로 꾸민 이야기를 하지 않을 거라는 신뢰감을 주었다.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으로 나누고 밝은 세계에서 살아가는 싱클레어는 불량한 친구인 크로머의 괴롭힘으로 어둠의 나락으로 떨어지지만 우월하고 차가웠고, 도전적일 정도로 확고하게 자신의 본질에만 머물러 있는 데미안의 도움으로 크로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온다. 그때부터 그의 삶이 바뀌기 시작한다. ‘인위적으로 반으로 나눈 다음 공식적으로 인정한 절반만이 아니라 세계 전체를 존중하고 거룩하게 여겨야 한다.(75쪽)’는 데미안의 말은 싱클레어에게 뿐 아니라 나에게도 무언가를 생각하고 깨닫게 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데미안과 잠시 떨어진 싱클레어는 방황을 하면서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지만 자신이 이름을 붙여준 베아트리체를 짝사랑하고 그림을 그리고, 또 다른 구도자인 피스토리우스를 만난다. ‘우리가 보는 것들은 우리 안에 있는 것과 같은 것들이다. 우리 안에 있는 현실 말고 다른 현실은 없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토록 비현실적으로 산다.’는 피스토리우스도 독특한 인물이었다. 그래도 싱클레어의 마지막 구도자인 에바 부인보다는 평범해보였다. 데미안의 어머니인 에바 부인은 싱클레어의 꿈에서도 나타나고 그가 찾아올 것을 미리 알고 있는 등 평범한 인물이 아니었다. 많은 대목에 나타나는 꿈의 이야기에도 의문이 들었다. 꿈 이야기가 왜 많은 부분을 차지할까? 꿈은 말로 하지 않은 자신의 깊은 내면을 대변해주는 것이어서 그런가?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부상을 당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을 맺지만, 1차 세계대전 당시의 많은 젊은이들이 그랬듯이 많은 울림과 공감을 가지게 해준 이야기이다. 데미안, 베아트리체, 피스토리우스, 에바 부인 등 내 안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것에 따라 살려고 하는 싱클레어에게 영향을 주는 그래서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대목이 많으나 그 중에서 나에게 가장 큰 울림을 주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아닌 싱클레어였다.

 

 싱클레어는 방황 끝에 피스토리우스를 만나는 대목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 “흔히 말하듯 ‘우연’을 통해서 였다. 하지만 그런 우연이란 없다. 무언가를 꼭 필요로 하는데 제게 꼭 필요한 그것을 찾아낸다면, 그것은 우연이 가져다준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그 자신의 갈망과 필연성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것이다. (117쪽)” 문득 예전에 본 이런 비슷한 이야기가 생각이 났다. 어느 예능프로그램에 나온 안철수 교수가 한 이야기였는데, 바로 “운이라는 것은 기회와 준비가 만나는 순간이다.”라는 말이다. 우연이 아니라 갈망이 가져다주었다는 싱클레어, 기회와 준비가 운을 만든다는 안철수 교수. 이 둘은 어쩐지 비슷하면서도 다른 말로 나에게 큰 파장을 가져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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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시 - 禪詩, 깨달음을 노래한 명상의 시, 개정신판
석지현 엮음 / 현암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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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시가 무엇인지 알려면 선과 시에 대해 각각의 이해가 필요하다. 선은 사고와 감정의 근원을 추적해 들어가는 수행법이고 존재의 본질을 깨닫는 깨달음이라고 한다. 시는 수많은 정의가 있지만, 선시와 관련해서는 도학적인, 개성주의적인, 기교적, 직관적인 네 가지 견해가 있다고 한다. 그러면 선과 시가 합쳐진 선시는 간단히 말하면 깨달음의 노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인으로서 수행자의 길을 걸어온 석지현 선생이 40년 만에 선시의 개정판을 펴냈다. 시상을 중심으로 서로 묶어 총 18분류로 나뉘는데, 각각의 여(餘), 청(淸), 묵(黙) 등의 표제는 그 시상을 짐작할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한문 원시에 한글 음을 달아 초보자도 읽기에 무리가 없고, 낱말 풀이 및 해설도 덧붙여 시의 이해를 돕고 있다.

 

비록 한 두 페이지에 실을 수 있는 시라고는 하나 그 양이 만만치가 않다. 총 384편이 실려 있어 하루에 한 수씩 감상한다고 해도 1년을 꼬박 채우고도 한 달 가까이 더 감상할 수 있는 양이다. 게다가 그냥 시가 아니라 깨달음, 선을 노래한 시이기에 그 정수를 느끼기도 만만치 않다. 오죽하면 “선시(禪詩)란 무엇인가? 선이면서 선이 없는 것이 시요. 시이면서 시가 없는 것이 선이다. 그러므로 선시란 언어를 거부하는 ‘선’과 언어를 전제로 하는 ‘시’의 가장 이상적인 만남이다.”는 책 뒤의 선시를 소개하는 글조차도 도무지 갈피를 잡지 못하니 말이다.

 

이제껏 불교에 대한 특히 승려들에 대한 이미지는 새벽, 저녁으로 예불을 하고 경전을 외고, 가부좌를 틀고 수행을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분들이 시를 쓸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인지 서산대사로 유명한 청허 유정의 시는 더욱 인상 깊게 다가 왔다.

 

논어에서 공자는 아들 백어에게 시경을 공부하지 않으면 마치 담장을 마주 하고 있는 것과 같아 학업이 더 나아갈 수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삼경의 하나인 시경을 유학자들의 필수 과목이 된 것이 바로 이런 연유에서 일 것이다. 그렇다면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도 선시를 공부해야 할 것인지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성철 큰스님의 가르침인 단박에 깨치고 단박에 닦는다는 돈오돈수(頓悟頓修)가 왠지 더 끌리기에 어려운 선시를 공부한다는 것은 부담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적지 않은 시가 실려 있지만 정작 눈에 익은 작품은 고등학교 문학 시간에 배운 향가 제망매가와 찬기파랑가 2작품이 고작이었다. 그만큼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시들이 많이 있는 <선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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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의 고독
파올로 조르다노 지음, 한리나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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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작은 소수인 2부터 시작하여 개수가 무한하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증명이 되었으나 아직 진행형인 가장 큰 소수까지, 1과 자기 자신만을 약수로 갖는다는 소수(素數)는 특별한 수이다. 오죽하면 소수를 Prime Number라고 할까? 다양한 뜻을 가진 Prime이긴 하지만 그래도 Prime이니 뭔가 특별해 보인다. 그래서 오일러를 비롯하여 리만, 메르센 등 많은 수학자들이 소수에 빠져 살았고 불규칙적으로 보이는 소수들 속에서 규칙을 찾으려고 했었다. 그럼에도 소수는 자신의 진면목을 보여주지 않은 채 아직까지 도도한 모습을 유지하며 그리스 신화의 세이렌처럼 많은 학자들을 홀리고 있다.

 

 파울로 조르다노의 소설 <소수의 고독>의 두 주인공 알리체 델라로카와 마티아 발로시노는 소수와 같은 인물들이었다. 어릴 적 스키사고로 인해 불편한 다리를 가지고, 거식증을 가지고 학창시절 심한 괴롭힘까지 겪는 알리체나 같은 반 금우의 생일잔치를 가던 중 정신지체를 앓는 쌍둥이 여동생 미켈라를 잃어버림으로써 자해적인 성격으로 변해버린 마티아, 그들은 스스로 세상에게 거부당하고 스스로 세상을 거부하는 오직 누구와도 어울리기 힘든 자신만의 수를 가지고 살아가는 소수(少數)였다. 자신들이 의도치 않게 어느 생일파티에서 만나게 되는 알리체와 마티아는 서로가 소수이기에 서로를 좀 더 이해할 수 있었다.

 

 11과 13, 17과 19와 같은 소수쌍을 쌍둥이 소수라고 부른다고 한다. 가운데의 짝수 때문에 만나지 못하는 소수쌍, 마티아는 알리체와의 사이를 쌍둥이 소수라고 생각을 한다. 가깝지만 실제로 서로 닿기에는 충분하지 않은 쌍둥이 소수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쌍둥이 소수라기보다 한 명이 소수 그 자신이라면 나머지는 1인 존재인 것 같다. 소수를 소인수분해를 하면 1과 그 소수자신만 나오듯이 그들의 삶을 소인수분해 해버리면 결국은 둘 밖에 남지 않으니 말이다.  아픈 몸을 이끌고 간 병원에서 우연히 마티아의 동생과 닮은 여자를 보고는 필사적으로 쫓아가려다 기절한 알리체나 외국대학에서 ‘넌 여기와야 해’란 간단한 문구가 적힌 사진을 받고는 중요한 논문도 제쳐두고 알리체를 찾아간 마티아나 그들은 소수를 구성하는 1과 그 소수인 것 같았다.

 

 마티아는 소수에 경의를 느끼는 이유가 소수는 의심 많고 고독한 수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누어지는 수가 없기 때문에 고독한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공동체를 속하지 않은 그들의 삶을 보면 고독해 보인다. 신체적인 문제로부터 유발되었건, 정신적인 문제로부터 유발되었건 알리체나 마티아는 고독해 보였다. 하지만 모든 소수에는 공약수 ‘1’이 있듯이 그들은 서로의 1을 공유함으로써 그 고독에서부터 이겨낼 수 있었을 것이다.

 

 문득 멀리 이탈리아뿐 아니라 우리주위에도 신체적이든, 정신적이든, 경제적이든 여러 가지 이유로 세상으로부터 혹은 세상을 거부당하거나 거부한 소수(少數)인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수가 서로 같지 않듯이 그들과 많은 차이가 있겠지만 가장 고독해 보이는 소수(素數)도 1이라는 공약수를 가지고 있기에 그들과의 공약수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고독한 숫자들이 조금은 줄어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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