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1
헤르만 헤세 지음, 안인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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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주위의 압력에 떠밀려 읽고는 한동안 잊고 지냈었는데, 이번에는 주위의 압력보다는 자발적으로 읽었다. 많은 이들이 최고의 성장소설로 『데미안』을 꼽는다. 성장소설, 주인공 에밀 싱클레어의 자신의 성장기를 그리는 만큼 성장소설이란 말이 맞지만, 그것을 어린 나에게 강요(?)한 주위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과연 나에게 무엇을 기대한 것인지... 청소년기를 지나고 삶에 대해 어느 정도 생각이 정립해 있는 지금 읽은 『데미안』은 어릴적 하품을 하면서 읽은 『데미안』과는 다르게 보다 크게 다가왔다. 하지만 아직도 몇 가지 의문이 들었다.

 

 먼저 가장 먼저 든 의문은 예전에도 든 의문이긴 하지만, 왜 싱클레어가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막스 데미안, 그가 제목을 차지하고 있을까였다. 언젠가 읽은 오르한 파묵의 『소설과 소설가』에서 파묵은 『안나 카레니나』와 같은 주인공을 제목으로 하는 소설을 쓰고 싶다고 한 적이 있는데, 『안나 카레니나』나 『파우스트』등의 작품을 보면 어렵지 않게 그들의 이야기임을 알 수 있었다. 물론 『안나 카레니나』의 초반에도 안나는 등장하지 않고, 『파우스트』에도 메피스토펠레스라는 걸출한 주인공이 등장하긴 하지만 안나나 파우스트가 주인공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유독 『데미안』에서만 『싱클레어』가 아닌 『데미안』일까? 사실 이제는 『싱클레어』는 어색하기도하다. 마치 아이폰을 ‘애플’이 아니라 ‘피치’가 만들었다고 하는 것처럼^^ 해설을 통해 처음에 헤르만 헤세의 이름이 아닌 에밀 싱클레어의 이름으로 발표되어서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데미안』은 성장한 싱클레어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마치 신이 직접 자신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기라도 하듯이 언제 어디서나 시원하게 이야기를 하지만 자신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고 시작하는 부분은 처음부터 적어도 싱클레어는 거짓으로 꾸민 이야기를 하지 않을 거라는 신뢰감을 주었다.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으로 나누고 밝은 세계에서 살아가는 싱클레어는 불량한 친구인 크로머의 괴롭힘으로 어둠의 나락으로 떨어지지만 우월하고 차가웠고, 도전적일 정도로 확고하게 자신의 본질에만 머물러 있는 데미안의 도움으로 크로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온다. 그때부터 그의 삶이 바뀌기 시작한다. ‘인위적으로 반으로 나눈 다음 공식적으로 인정한 절반만이 아니라 세계 전체를 존중하고 거룩하게 여겨야 한다.(75쪽)’는 데미안의 말은 싱클레어에게 뿐 아니라 나에게도 무언가를 생각하고 깨닫게 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데미안과 잠시 떨어진 싱클레어는 방황을 하면서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지만 자신이 이름을 붙여준 베아트리체를 짝사랑하고 그림을 그리고, 또 다른 구도자인 피스토리우스를 만난다. ‘우리가 보는 것들은 우리 안에 있는 것과 같은 것들이다. 우리 안에 있는 현실 말고 다른 현실은 없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토록 비현실적으로 산다.’는 피스토리우스도 독특한 인물이었다. 그래도 싱클레어의 마지막 구도자인 에바 부인보다는 평범해보였다. 데미안의 어머니인 에바 부인은 싱클레어의 꿈에서도 나타나고 그가 찾아올 것을 미리 알고 있는 등 평범한 인물이 아니었다. 많은 대목에 나타나는 꿈의 이야기에도 의문이 들었다. 꿈 이야기가 왜 많은 부분을 차지할까? 꿈은 말로 하지 않은 자신의 깊은 내면을 대변해주는 것이어서 그런가?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부상을 당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을 맺지만, 1차 세계대전 당시의 많은 젊은이들이 그랬듯이 많은 울림과 공감을 가지게 해준 이야기이다. 데미안, 베아트리체, 피스토리우스, 에바 부인 등 내 안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것에 따라 살려고 하는 싱클레어에게 영향을 주는 그래서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대목이 많으나 그 중에서 나에게 가장 큰 울림을 주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아닌 싱클레어였다.

 

 싱클레어는 방황 끝에 피스토리우스를 만나는 대목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 “흔히 말하듯 ‘우연’을 통해서 였다. 하지만 그런 우연이란 없다. 무언가를 꼭 필요로 하는데 제게 꼭 필요한 그것을 찾아낸다면, 그것은 우연이 가져다준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그 자신의 갈망과 필연성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것이다. (117쪽)” 문득 예전에 본 이런 비슷한 이야기가 생각이 났다. 어느 예능프로그램에 나온 안철수 교수가 한 이야기였는데, 바로 “운이라는 것은 기회와 준비가 만나는 순간이다.”라는 말이다. 우연이 아니라 갈망이 가져다주었다는 싱클레어, 기회와 준비가 운을 만든다는 안철수 교수. 이 둘은 어쩐지 비슷하면서도 다른 말로 나에게 큰 파장을 가져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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