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조세희 지음 / 이성과힘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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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가에 텅 빈 하늘을 향해 가슴을 열면 내면으로 부드러운 음성이 들린다. '너 지금 거기서 무엇을 하느냐.' 음악가는 소리를 모아 음악을 만들고, 화가는 색을 모아 그림을 그리는데, 나는 텅빈 백지 위에 무슨 생각을 담을지 난망하다. 다만 왠지 모를 마음의 불편함을 느끼며 작지만 깊은 양심의 소리에 귀기울여 본다. 칠흑같은 어둠의 시대. 빈익빈부익부 현상이 점점 심화되어 가는 시대에서 '못 가진자'의 육체는 노예의 가치와 별반 다를 바가 없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사회구조적 모순을 관망하고 묵시하는 모든 사람들 역시 죄인으로 지적하며 날카롭게 비판하는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공'은 그만큼 읽는 이로 하여금 가슴속 깊이 묻어놓았던 치부를 드러내어 한참동안을 부끄러움으로 갈팡질팡하게 만든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인간이 사회에 부단한 관심을 갖고 끊임없이 상호 작용을 하는 것도 이에서 기인한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가난'이라는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 태고 때부터 '신분의 상하'와 '부의 쏠림 현상'이 있어왔고, 수많은 사람들이 가난하고 못가진자들의 눈물 냄새를 맡아왔다. 타인의 문제와 자신의 문제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이 '묶음'에 대한 인식은 부자도 죄인이고 가난한 사람도 죄인이 되는 아이러니를 낳는다. 급기야 잘못은 신에게도 있다는 독한 냉소와 심각한 문제의식이 도출되기에 이른다.

난쟁이와 그 주변 인물들을 통해 우리 사회가 지닌 병폐와 모순을 적나라하게 확인하고나서 가슴끝으로 아련한 시대의 아픔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 아픔은 나에게 각성된 자아의 고통을 수반한다. 난쟁이가 쏘아올린 '공'은 쏘아올릴 때는 작은 공이었지만 내려올 때는 엄청난 무게를 지닌 매머드의 상아가 되어 '강 건너 불구경 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죄값을 묻고 중벌을 내린다. 더러는 가슴팍에 서슬 파란 꼬챙이에 찔려 비명횡사하는 사람이 있고, 더러는 능지처참하여 흔적조차 남지 않을 만큼 가혹한 형벌을 받는 사람도 있다. 지식인의 행동과 그 양심의 왜곡이 가져오는 중벌은 이처럼 인식적 부끄러움과 그에 따른 실제적 고통의 재갈을 우리에게 물린다. 가끔은 이러한 단죄 행위가 인간적인 반감을 불러오나 모든 상황을 그대로 두고 보며 참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해방은 더더욱 아니다.

바쁜 걸음을 멈추고 일탈의 시간을 마련하여 마음으로 난 길을 걸어 본다. 마음의 손이 비루하다 못해 처절하다. 그곳에도 난쟁이가 만들어놓은 수도꼭지가 놓여있을 것만 같다. 아니 어쩌면 앙상한 뼈와 가시에 두 눈과 가슴지느러미만 단 큰 가시고기들이 나의 그물에 걸려 들어올지도 모를 일이다.

나 스스로가 짊어져야 할 사회의 역할이 너무 부담스러워 '13월 13일'이나 '제 8요일'처럼 달력에도 없는 시간들, 때로는 그러한 곳에서의 생활을 꿈꾸어 보기도 한다. 부조리한 사회에서 자신의 '살아있음'에 대한 신념과 그 지조를 지키기 위한 괴로움은 얼마나 가혹하던가!

이럴 때 잠시 숨을 고르며 뒤를 돌아보면 시야 가득 펼쳐질 마음의 숲이 침묵으로 위로한다. 이웃이 있고 내가 있는 세상은 이루어야 할 사랑으로 가득찬 의무의 텃밭이다. 지금은 참회하고, 내일 동이 틀 것을 믿고, 사랑할 것을 약속한다면 더 이상 우리는 죄인이 아니다. 나는 작은 사랑이라도 실천할 마음으로 서랍에서 도장을 꺼내든다. 오늘 나는 전입신고를 할 작정이다.

< 전 입 신 청 서 >
전입지 : 소망시 낙원구 행복동 사랑의 번지 나눔의 호
전입자 : 박 성 주
기타 전하는 말 :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찾습니다. 누구라도 그 공을 보시거든 먼저 발로 걷어찰 생각부터 하지 마시고, 그 공에 맺힌 허구와 병리, 그리고 자유에의 열망의 힘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는 와중에 행여 그 공에 배인 눈물냄새를 맡게 되거든 행복동 한 쪽 구석에 묻힌 난쟁이의 값진 교훈이라 생각하시고 힘찬 발걸음으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겠노라고 다짐하면서 이름묻힌 묘비의 영혼에게 명복을 빌어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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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평전 - 개정판
조영래 지음 / 돌베개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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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던 사건이 세인에게서 잊혀질 때쯤이면, 시간의 뒷길에서 자그마한 양심의 소리가 강렬하게 피어오르는 듯하다. 지금으로부터 약 13년 전,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보며 '60~70년대의 왜곡된 사회상을 처음 접했던 기억이 문득 떠오르니 말이다. 그러나 어린 나이로 그 당시의 사회부조리와 모순을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만 그 때 나의 일기장에는 그 당시의 충격을 다음과 같이 고스란히 옮겨놓았을 뿐이었다.

'세상에는 불쌍한 사람들이 참 많은 것 같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해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자그마한 가슴속에 깊은 여운을 남긴지 어언 13년이 되어 간다. 그러나 시간의 장단을 무색케 할 만큼 '전태일 평전'은 13년 동안 묻혀있던 나의 양심을 자극했다. 소위 말하는, '밑바닥 인생' 속에서 전태일은 지고지순한 인류애를 키워왔으며, 모든 것을 빼앗기고 모든 것으로부터 거부당하고 밀려난 소외된 인간의 아픔들이 그의 외마디 절규를 통해 내 가슴 속으로 파고 들었기 때문이다.

결국 한 청년의 심지에서 그칠줄 모르게 타오르는 '역사인식'과 '인간사랑'에 그동안 사회의 껍데기만 보며 욕심만 키워온 나에게 값진 교훈을 준 셈이다. '무언가 잘못된 것 같다.' 라는 조그마한 자각 속에서 전태일은 사회의 부조리를 깨치기 시작했다. '60~70 년대에 한국 노동자들을 지배했던 괴물자본주의 논리 속에서, 노동자이기에 앞서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권리와 존엄성을 찾으려 했던 그는 '진정한 승리자'이리라.

'투쟁을 위한 투쟁'이 아닌, '인간을 위한 그의 투쟁'이었기에, 전태일이 상아탑의 배움의 끈은 짧았어도 오늘날 수많은 지성인들이 그를 추모하고 사랑하는게 아닐까.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평화시장'에서 그의 육골은 참담하게 불타오르고, 또 한 편으로는 자기 소임을 다한 데 따른 '평화로운 죽음'을 맞이했다.

이 책 속에는 자신의 몸도 불사를 정도로 커다란 전태일의 사회에 대한 사랑과 정의감이 눈부시게 빛을 발하고 있고, 조영래 작가의 냉철하면서도 섬세한 묘사가 마치 그의 숨결과 하나가 되어 살아 숨쉬는 듯 읽는 이로 하여금 깊은 감명을 준다. '사실'이면서 '사실보다 더 사실다운' 그런 책이라 하면 너무 과장된 표현일까?

13년 전 한 소년의 마음 속에서 난장이가 추구하던 세상과..13년 후 한 청년의 마음 속에서 전태일이 소망하는 세상의 모습은 아마도 같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26세 먹은 지금의 한 청년이 꿈꾸는 세상의 모습과도 일치할런지 모른다. 맥박이 뛰는 글을 쓰지 않으면 글쓰기는 귀(貴) 티로 전락해 버리고 말 것이다. 글자의 살이 깎여질까 조심하듯 인격의 칼로 마음을 다듬으며 오늘도 일기를 쓸 생각이다. 13 년전, 많다고는 할 수 없는 나이로 느낀 '시대의 아픔'이 이제는 좀더 구체적이고 깊이 있게 나의 일기 속으로, 나의 삶 속 으로 파고 드는 것을 느끼며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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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아메리카의 도전과 좌절 - 격동하는 정치사회, 사회비평신서 22 사회비평신서 22
김병국 외 엮음 / 나남출판 / 199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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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국제화, 세계화의 추세 속에서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관심이 점점 고조되고 있다. 더군다나 세계 경제의 유기적 연결 관계 때문에, 세계는 그동안 종종 지적되었던 '곪아 터진 중남미 경제'를 예의주시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관심이 그 누구보다도 더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중남미의 영광과 좌절'을 통해 우리는 우리나라와 중남미 여러 국가와의 'IMF구제 금융을 지원받은 특수성과 그 공통분모'를 제대로 알아야 하고 또한,우리는 이를 좋은 타산지석의 예로 보아 국가발전의 원동력으로 승화시켜야 하는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세계 유수의 학자들이 지적한 바와 같이, 중남미 정체의 가장 큰 원인은 바로 '경제 문제'에서 파생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흥공업국, 중후진국에 공통적으로 드러났듯이, 총칼로 잡은 정권의 총수는 무소불위의 그릇된 정치로 국가의 선진화에 사뭇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 또한 간과해서는 안될 중요한 사실이다.

이와 함께 중남미인 특유의 느긋한 기질은 라틴아메리카를 가난의 참상에서 벗어나게 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 원동력이 되었다. 세계의 판도를 거머쥐었던 서구 강대국들의 경제정책과 국수주의를 현명하게 대처하고 극복하지 못한 라틴 아메리카는 그 모습이 '영양실조'로 대변될 정도로 정체되어 있다. 10세 소년이 노동판에서 막노동을 하는 것이나 인구의 절반이 영양실조로 허덕이고 있다는 것은 그 심각성을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예이다.

이 책에서는 나무가 햇볕을 많이 쬐면 그 만큼 가리워지는 공간도 많아진다는 것을 '풍요 속의 제약'으로 나타내고 있다. 짧은 시기이기는 했으나, 라틴 아메리카의 경제 부흥은, 제대로 된 사회 패러다임의 부재로 인해 국민소득의 소수 집중화를 조장했고, 이는 결과적으로 인간 삶의 황폐화를 부르고 오늘날의 좌절된 그들의 꿈과 소망으로 귀결시킨 것이다.

우리나라는 라틴 아메리카와는 사뭇 다른 경제시스템을 지녔고 정치, 사회, 문화적으로도 다소 긍정적인 요소를 더 많이 지니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는 유동적이며 그 변화의 모습 역시 매우 빠르다'는 것이다. 이를 현명하게 대처하지 못한다면 결국 우리도 또다시 암울한 터널을 지나야 할 것이고 제 2의 라틴 아메리카의 전철을 밟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내용이 쉽지만은 않은 책이지만, 그 만큼 얻는 것도 많은 책이라 본다. 이 책을 읽고 간접적으로 우리의 애국심에 다시 한 번 불을 지피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듯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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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1
최명희 지음 / 한길사 / 199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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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둔 밤, 먼 여정을 떠나는 사람들에게 길을 인도해주는 줄이 있다. 어둠에 발이 빠지고 손이 묶여 걸음걸이 하나조차 쉽지 않을 때, 줄은 사람들의 손과 발을 타면서 이제 줄이 아닌, 사람들의 운명이 된다.

수 만가지 허공에 널려 있는 동아줄, 그 중에 더 좋은 줄 하나를 잡으려고 사람들은 아옹다옹하지만 사람들이 쥐는 줄은 결국 자기의 몫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어쩌면 운명이라는 것도 이처럼 이미 주어지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줄은 사람들의 손모가지에 비틀려 조금씩 벗겨지지만 결코 끊어지는 법이 없다. 색이 바래면 바래는 대로, 칠이 벗겨지면 벗겨지는 대로 그저 묵묵히 사람들의 손을 탈뿐이다. 그 질긴 생명력 때문에 어쩌면 인간은 살아가는 동안 내내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건 아닐런지.

<혼불>에서는 그러한 줄타기가 지향하는 바는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 그것은 가문일 수도 있고 혈통일 수도 있다. 또 망자의 응어리진 한일수도 있고 살아 있는 자의 아옹다옹하는 모습일 수도 있다. 그것도 아니라면 시대에 부응하는 거국적인 철학일 수도 있고 또, 그 무게에 합당한 무거운 짐일 수도 있으리라.

<혼불>을 통해 대다수 보편적인 양반들이 고결하고도 아름답게 지켜온 도덕과 생활규범의 참된 모습을 다시 한번 발견하게 되는데, 이러한 기억은 내 인생 언저리의 어느 시점에 이르면 으깨어진 꽃물로 그려지고, 형상은 없어도 세월의 무늬는 결이 삭아 그대로 내게 남아 있으리라.

빛은 부서져야 색이 되고, 옷감은 가위질을 거쳐야 옷이 되며, 세월도 토막나야 붙이고 이어서 '덕의 옷'을 완성할 것이다. 자를 때가 있으면 이을 때가 있고, 벗을 때가 있으면 입을 때가 올 것이며, 시작이 있었으니 끝도 있다 하지 않았는가. 작고한 최명희 여사가 무려 17년 동안이나 집필해온 집념의 작품 <혼불>, 이 책을 통해 인생의 진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전통에 대한 고집스런 집착이 아닌, 애정어린 따뜻한 관심의 전유물인 <혼불>... 그 문학적 가치와 미학적 본질을 어찌 내 가벼운 독서로 서평할 수 있겠는가 싶지만은, 이 작품에 서려있는 전통의 숨결과 맥은 한민족된 내 혼백을 감싸돌고 있을 것이다.

삶의 가치를 판단하기 곤란하고 미래에 대한 전망이 부재한 현실, 첨단 문명에 발맞추지 못하여 처지고 소외되어 부유하는 실존들, 그 앞에서 방황하고 있을 사람들에게 이 책이 얹어주는 무게는 그만큼 값지지 않을까.

사람이 죽기 전에 반드시 눈에서 밤에 불덩이가 나간다고 했으니, 이러한 '혼불'에 내포된 의미의 폭과 깊이를 어찌 내 한 번의 독서로 쉽게 이해할 수 있으랴. 인간이기 때문에 지닐 수밖에 없는 치명적인 약점, 그 '죽음' 앞에서 내가 이렇게 겸허해지는 이유는 또 무슨 까닭일런지... 그러나 그 겸허함을 이고서 나는 '인생'이라는 줄타기 속에, <혼불>에서 체득한 삶의 의미를 덧붙여 오늘도 그윽하고도 아름다운 향연의 밤을 보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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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체 불만족
오토다케 히로타다 지음, 전경빈 옮김 / 창해 / 199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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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이라 생각하면 훈훈하고, 활자 공해라 생각하면 참담하여 글을 쓰고 싶은 욕구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자신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진술한 이 책을 보면서 나역시 대다수의 사람들처럼 장애인에게 값싼 동정을 하고 있지는 않았는가 하는 자책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草綠(초록)은 同色(동색)이요, 가제는 게 편이라 했다. 나역시 그동안 내 의식의 잣대로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구별해 왔던 사실에 새삼 내자신이 부끄러워진다. 몇 푼 되지도 않을, 형편없는 동정심으로 마치 어항 속에 갇힌 금붕어를 쳐다보듯 '넌 왜 이 어항 속에 갇혀 있니?' 라는 식으로 장애인을 대해왔고, 또 그만큼 그들의 아픔을 잘 이해하지 못한 나였으니까.

값싼 동정을 콸콸 쏟아 붓는 것보다 장애인의 팔을 한 번 거들어 주는 것이 더 값지지 않을까 싶을 만큼 '가치'에 자를 대면 스스로 주눅이 든다.

햄릿이 되어보지 않고서는 햄릿의 운명에 얽히고 설킨 그의 처절한 절규를 모두 이해할 수 없듯이, 오토의 상황에 부딪치지 않고서는 우리 역시 진정으로 그의 인간적 설움과 고통을 모두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독자성을 전제로한 절대 절명의 근원적 고독이 아닐까. 다만 그러한 고독이 사회 구성원들에게 어떻게 비추어지고, 또 그들에게 어떻게 대접받느냐에 따라 제 각자가 인간의 집단에 속하면서 평생 짊어져야 할 삶의 무게가 결정되는 것이라고 본다.

오토의 글을 읽고 있노라니 문득, 초등학교 시절의 장애인 친구 00가 생각났다. 선생님의 세심한 배려와 아이들의 맑은 웃음으로 우리는 장애인 친구에 대한 나쁜 편견은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부모님들의 반응은 상당히 예민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함께 학교 옥상에 올라가 잔뜩 부풀어있는 풍선을 하늘로 띄어 보내면서 얼마나 자지러지게 서로 웃어댔던가. 그때 우리는 모두 어깨동무를 하며 서로의 따뜻한 동료애를 마음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풍선은 적당하게 부풀어져야 하고 알맞게 떠야 제 격이다. 사람마다 자신이 불어 넣어야 할 풍선을 가지고 있고, 그 풍선의 모양과 크기 역시 각자가 적당한 양의 바람을 불어 넣어 결정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본다. 장애인 역시 그들에게 맞는 양의 바람으로 얼마든지 제격의 모습을 갖출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오토가 비장애인보다 더 당당하고 떳떳하게 살아갈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이러한 이유때문이라고 본다.

그러나 풍선은 홀로 뜰 수 없다. 나의 입김을 불어 넣어야 비로소 하늘로 그 가벼운 몸을 날릴 수 있듯이 장애인 역시 우리의 따뜻한 사랑과 관심을 함께 불어 넣어 줄 때에 비로소 자신들의 꿈을 아름답게 가꾸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성급한 바람 넣기는 초라한 완성을 부르고 무거운 바람도 풍선에게는 애정이 아니다. 누구보다도 열등의식에 사로잡히기 쉽고, 욕구불만에 적나라하게 노출될 수 밖에 없는 장애인에게 우리가 우리의 체온이 담긴 따뜻한 바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한 인간의 정을 그들에게 불어줄 때, 비로소 장애인과 우리들은 자연스럽고도 바람직한 공생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이다.
삶의 1회성, 그것이 늘 풀포기와는 다른 고뇌를 몰고 오지만, 꿈꾸는 사람에게는 만남이 이루어지고 이는 서로의 아름다운 부름이요, 영혼의 따뜻한 교감이라 해야 할 것이다.

진실을 불러야 진실이 답하고, 풍선의 메시지를 보내야 비로소 바람은 방향을 잡는다. 이 세상에 대리 진실은 없다고 했다. 건강한 정신이 바탕을 이루지 못한 상태에서 '장애인 사랑'을 부르짖는 것은 헛된 구호일 뿐이며 지나친 착각이다. 힘에 의한 모욕적인 술수만이 고도화되어가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좋은 삶이 될지 난제 중의 난제이지만, 차서 넘치도록 받아온 사랑을 우리도 이제는 장애인들에게 다시 나누어 줄 때가 되지 않았을까.

오색 찬란한 꿈을 불어 넣으며 서로가 함께 기뻐할 수 있었던 내 어릴적 기억들을 떠올리며,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내 값진 양심의 소리를 듣게된다. 끝으로 인류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손수 보여준 오토에게 진심으로 가슴벅찬 박수를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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