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불 1
최명희 지음 / 한길사 / 199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어둔 밤, 먼 여정을 떠나는 사람들에게 길을 인도해주는 줄이 있다. 어둠에 발이 빠지고 손이 묶여 걸음걸이 하나조차 쉽지 않을 때, 줄은 사람들의 손과 발을 타면서 이제 줄이 아닌, 사람들의 운명이 된다.

수 만가지 허공에 널려 있는 동아줄, 그 중에 더 좋은 줄 하나를 잡으려고 사람들은 아옹다옹하지만 사람들이 쥐는 줄은 결국 자기의 몫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어쩌면 운명이라는 것도 이처럼 이미 주어지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줄은 사람들의 손모가지에 비틀려 조금씩 벗겨지지만 결코 끊어지는 법이 없다. 색이 바래면 바래는 대로, 칠이 벗겨지면 벗겨지는 대로 그저 묵묵히 사람들의 손을 탈뿐이다. 그 질긴 생명력 때문에 어쩌면 인간은 살아가는 동안 내내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건 아닐런지.

<혼불>에서는 그러한 줄타기가 지향하는 바는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 그것은 가문일 수도 있고 혈통일 수도 있다. 또 망자의 응어리진 한일수도 있고 살아 있는 자의 아옹다옹하는 모습일 수도 있다. 그것도 아니라면 시대에 부응하는 거국적인 철학일 수도 있고 또, 그 무게에 합당한 무거운 짐일 수도 있으리라.

<혼불>을 통해 대다수 보편적인 양반들이 고결하고도 아름답게 지켜온 도덕과 생활규범의 참된 모습을 다시 한번 발견하게 되는데, 이러한 기억은 내 인생 언저리의 어느 시점에 이르면 으깨어진 꽃물로 그려지고, 형상은 없어도 세월의 무늬는 결이 삭아 그대로 내게 남아 있으리라.

빛은 부서져야 색이 되고, 옷감은 가위질을 거쳐야 옷이 되며, 세월도 토막나야 붙이고 이어서 '덕의 옷'을 완성할 것이다. 자를 때가 있으면 이을 때가 있고, 벗을 때가 있으면 입을 때가 올 것이며, 시작이 있었으니 끝도 있다 하지 않았는가. 작고한 최명희 여사가 무려 17년 동안이나 집필해온 집념의 작품 <혼불>, 이 책을 통해 인생의 진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전통에 대한 고집스런 집착이 아닌, 애정어린 따뜻한 관심의 전유물인 <혼불>... 그 문학적 가치와 미학적 본질을 어찌 내 가벼운 독서로 서평할 수 있겠는가 싶지만은, 이 작품에 서려있는 전통의 숨결과 맥은 한민족된 내 혼백을 감싸돌고 있을 것이다.

삶의 가치를 판단하기 곤란하고 미래에 대한 전망이 부재한 현실, 첨단 문명에 발맞추지 못하여 처지고 소외되어 부유하는 실존들, 그 앞에서 방황하고 있을 사람들에게 이 책이 얹어주는 무게는 그만큼 값지지 않을까.

사람이 죽기 전에 반드시 눈에서 밤에 불덩이가 나간다고 했으니, 이러한 '혼불'에 내포된 의미의 폭과 깊이를 어찌 내 한 번의 독서로 쉽게 이해할 수 있으랴. 인간이기 때문에 지닐 수밖에 없는 치명적인 약점, 그 '죽음' 앞에서 내가 이렇게 겸허해지는 이유는 또 무슨 까닭일런지... 그러나 그 겸허함을 이고서 나는 '인생'이라는 줄타기 속에, <혼불>에서 체득한 삶의 의미를 덧붙여 오늘도 그윽하고도 아름다운 향연의 밤을 보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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