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잘 지내나요, 내 인생
최갑수 글.사진 / 나무수 / 201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처음에는 흔한 여행에세이거니 했습니다.
읽어나가다보니 여행책 같기도 하고, 시 같기도 하고, 단편 소설 같기도 하고,
사랑이야기 같기도 하고, 이별 이야기 같기도 하고, 삶 이야기 같기도 하고..
어디 여행 가서 사진 좀 찍고 있었던 일 얘기 곁들이는 일반 여행서와는
달라도 너무 다른 책이었어요. 뭔지 모르게 심오하고 깊이가 있어 보인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몇 시간이면 후루룩 읽어치울 수 있는 책들과 달리 읽는데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이런 표현에서는 감탄도 해가면서 말이지요.
어느덧 날씨는 배부른 고양이처럼 순해졌다.
순해진 날씨를 배부른 고양이에 비유하다니, 독특하기도 하고 기발하기도 하고..
내가 오다가다 간식 주는 주차장 고양이는 배 고플 때는 막 비벼대다가 배부르면
언제 봤냐는듯이 쌩까고 돌아서 '이그, 저 얄미운 거..' 싶은데 말이지요.ㅎ
보통 고양이들은 먹고난 후 다가와서 고맙다는 듯이 애교를 피우는데
얘는 그 반대더라구요. (새끼 넷의 어미인데 성묘가 되지 않았는데도 출산을 해서
그런지 허벅지가 비쩍 말라 만지면 안쓰러운 마음이 왈칵 일어납니다.
그래서 사료 주는 사람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닭고기나 참치캔을 사서 주곤 합니다.)
내가 갖고 싶은 것을 갖는 일은 분명 쉽지만은 않다.
하지만 오래 전부터 가지고 싶었던 것을 포기하는일, 그것 역시
새벽 두 시에 잠들어 세 시에 깨는 것만큼이나 힘든 일이다.
새벽 두 시에 잠들어 세 시에 깨 본 적이 없어 체감은 못하겠지만
암튼 굉장히 그럴 듯한 비유라 여겨졌습니다.
모르긴 해도 저자는 그런 적이 꽤 있지 않았나 싶어요.
여행 다니다보니 자야 할 시간에 잠 못 잔 적도 많을 것 같구요.
책에 나온 음악들 찾아들어가며 이 글 쓰고 있는데 craig douglas 의 on the sunny of street 는
유튜브에 없어 프랭크 시나트라와 딘 마틴, 그리고 조 스타포드의 목소리로 한번씩 들어봤습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의 옛날 느낌이 물씬 풍기는 게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슈베르트의 밤과 꿈은 피아노곡보다 기타로 연주한 게 영롱한 느낌이 들어 더 나은 것 같아요.
제목대로라면 영롱한 것보다 뭔가 어슴프레한 것이 더 어울리겠지만요.
우리가 두려워해야 하는 건..이라는 챕터의 글은 뭐라 감상을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모자부터 가방까지 온 몸을 브랜드로 뒤집어쓰고 두 시간 내내 자신이 보낸 가장 지루했던 휴가
이야기를 하는 클라이언트의 말을 들어주느라 헤드폰으로 귀를 막아버리고 싶었다는,
더 화나는 건 카페를 나와 그가 모퉁이를 돌아 사라질 때까지 얼굴에 웃음을 짓고 서 있어야 했다는,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배낭을 꾸리고는 그에게 거절 메일을 썼다는 이야기..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하는 건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을 못하는 것이다...라는 것이 그 일에서 저자가 얻은 교훈이라는데
클라이언트가 때려 죽이고 싶을 만큼 싫어도 거절할 입장이 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게
세상의 비극이 아닌가 싶습니다. 거절해도 충분히 살아갈 자신이, 믿는 구석이 있었던
(글솜씨와 사진) 저자를 부러워할 사람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저자로 하여금 아이슬란드에 가보고 싶어지게 만들었다는, 음악을 듣고 있는 동안
마치 거대한 오로라 아래 서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는 그룹, 시규어 로스의 곡을 듣고
있습니다.
브릿지경제라는 신문에선 시규어로스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군요.
긴 눈과 얼음의 시간을 음악에 녹여낸 밴드. 팔세토 창법으로 자신들의 언어
‘희망어(Hopelandic)’를 더욱 몽환적으로 전한다.
(팔세토 창법이 뭔가 검색해보니 성악에서 사용되는 발성법으로 높은 음을 내기 위해
내는 가성인 것 같습니다.)
지금 Olsen Olsen 이란 곡을 들었는데 웅장하면서 신비스러운 것이 현대의 교향곡 같은 느낌입니다.
이어서 들은 다른 곡들은 그보다는 덜 웅장하지만 긴 눈과 얼음의 시간을 음악에 녹여냈다는
평에 수긍이 갈 만큼 신선하고 신비하고 몽환적입니다.
Svefn-g-englar 는 차분한 느낌이 좋고 Popplagið 란 곡은 처음에는 조용하더니 나중에는
상당히 박력 있어지는군요.
예전의 프로그레시브록 밴드들의 곡들과 좀 비슷하면서도 그보다는 좀더 진보한 느낌이랄까요.
전체적으로 마녀나 요정이 등장하는 판타지풍의 영화에 나오면 아주 잘 어울릴 듯한 분위기의
환상적인 음악들이라 오로라 밑에서 들어도 정말 딱일 것 같습니다.^^
참 세상은 넓고 음악 세계도 넓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밴드가 아닌가 싶습니다.
책에 실린 사진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고양이 사진입니다.
저자는 '저 멀리 어딘가를 응시하는 듯한 망연한 눈빛'이라 표현했는데 눈빛, 각도 포착을
아주 잘 한 것 같습니다. (그저 고양이라면 헬렐레 하는 고양이 매니아.^^)
어느 날 인생은 물끄러미..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스스로에게 뭔가 존경할 만한 질문 하나를 가지고 살아 보자..
오늘부터 인류를 위한 걱정도 조금 하면서, 파키스탄 사막고양이와 북극곰의
개체 수에 대한 걱정도 조금 하면서, 만델라의 생일도 축하하면서, 좀 쉬어가면서,
스스로에게 칭찬과 격려와 위로도 날리면서...
인류,만델라,북극곰은 몰라도 사막고양이라면 조금 걱정해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생긴 고양이인지 찾아보니 얼굴 형태가 우리가 아는 고양이들이랑 약간 다른 것
같네요. 그래봐야 어쨌든 귀여운 고양이지만요.^^
이제 막 여행을 시작한 이들이 저자에게 꼭 하는 질문이 있다고 합니다.
여행 도중 지치고 힘들 때는 어떡하느냐, 처음이라 두려운데 어떻게 준비를 해야 하나,
여행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나, 여행이 언제나 즐거운가, 일상은 피곤한가, 훌륭한 여행이란
어떤 것인가 등등...
여행이 언제나 즐겁냐는 질문에 저자는 여행에 관해 말하는 그 자체가 즐거움이라고 합니다.
이건 질문이 좀 잘못됐다고 봐요. 여행이라 해도 결국 삶인데 어떻게 늘 즐거울 수가 있겠어요?
한곳에 붙어 지루하게 사는 것보다야 즐거울 수 있을지 모르지만 어딜 가나 사람 상대는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고 그 사람들이 늘 즐거운 사람들일 수만은 없는데 말이지요.
그리고 부유해서 아무 걱정 없이 맘놓고 자유롭게 여행을 한다면 몰라도 툭하면 등 뒤에서
생계걱정의 바람이 서늘하게 불어오는 상황이라면 더욱 그렇겠지요.
느긋하게 여행하고 싶은데 취재를 위해 빨리빨리 다녀야 하거나 가슴에서 우러나지 않는데
마감 때문에 억지로 쥐어짜내듯 글을 써야 할 때나, 사랑이, 우정이 고픈데 주변에 아무도 없을 때나...
막상 여행 다닐 때는 힘들었는데 지나고나서 그 여행에 관해 얘기할 때는 즐거운,
뭐 그런 케이스도 간간이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찰리 해이든과 팻 메쓰니가 함께 한 연주곡 The Moon Is A Harsh Mistress 를 듣고 있습니다.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의 곡..(팻 메쓰니는 조금 알고 조금 호감을 가지고 있지만 찰리 해이든은
처음 들어본 이름인데 작년에 죽었고 특이(?)하게도 베이스 연주자였네요.)
카페 그루브..라는 곳에 올라와 있는 설명글 보니 다소 멋져보이는 인물이에요.
음악과 연주 그 자체보다는 '진보와 혁명'으로 가득한 가치관에 따르는 평가가 우선했던
베이시스트 찰리 해이든은 우습게도 팻 메시니와의 듀엣 앨범 'Beyond the Missouri Sky'
를 통해 본격적으로 국내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후 녹턴과 볼레로의 미적 감성을
아름답게 조화시킨 앨범 'Nocturne'과 곤잘로 루발카바와의 내한 공연을 통해 국내에서의
인지도와 인기가 뒤늦게서야 올라갔다.
감나무 아래 쌓였던 첫눈이 녹은 날, 저자가 듣고 또 들었다는 파블로 카잘스의
the song of the birds를 듣고 있습니다. 새의 노래가 꽤나 우울해 보이는군요.
이어서 카잘스가 연주한 Bach Cello Solo Nr.1, BWV 1007 이 자동적으로 재생되어
어쩔 수 없이(?) 듣게 됐는데 무게감 있는 첼로 소리도 들을 만 한 것 같습니다.
밤과 꿈을 다른 사람의 연주로 한번 더 들어보고 싶어 유튜브 영상을 검색하다보니
서혜경씨 연주가 있어 클릭해봤습니다.
아까의 피아노나 기타보다 훨씬 좋군요. 같은 곡이라도 연주하는 악기와 사람에 따라
느낌이며 분위기가 180도 달라진다는 사실..
서혜경씨의 연주로 들으니 밤과 꿈이 대단히 아름다운 곡이라 여겨집니다.
세번 반복해 들어주시고...
총 81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책 내용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챕터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 49장입니다. 이 부분이 몹시 마음에 들어요.
자기가 원하는 물건을 아무런 고민 없이 다 살 수 있다는 건 어떤 느낌일지 궁금해 하며
건널목을 건너다가 한눈파는 운전자가 모는 자동차에 치일 뻔했고, 그 순간 밴프의 겨울을
잠깐 떠올렸다. 자동차는 무덤덤하게 지나갔고 운전자는 나를 노려보았다.
그 찰나의 순간, 나는 은하수를 여행하는 백패커가 지구에 잠시 들른다면, 이런 곳에서
내리는 게 아니었어 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지나갔을 거라고 생각했다.
저는 어떤 책을 읽다 은하수를 여행하는..이라는 말만 나오면 눈이 쫑긋해집니다.
우주 여행 할 때 들고 가고 싶은 책 단 한 권을 뽑으라면 망설일 것도 없이 저는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선택할 겁니다.(다섯 권 합본으로 된 한 권! ^^)
히치하이커가 아니라 백패커라 한 부분에서 살짝 삐끗하긴 했지만 뭐 거의 사촌이니까..^^
자기가 원하는 물건을 아무 고민 없이 다 살 수 있다는 건 어떤 느낌이냐구요?
저는 알 것도 같아요. 예전에 LP시절에는 듣고 싶은 음악이 있으면 비싼 판을 구입해서
들어야 했고 설령 돈이 많다 해도 한국에 수입되지 않은 판에 있는 곡은 거의 들을 수가
없었지요. 그때는 원하던 음반 하나를 구입하면 참 뿌듯하고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유튜브에 곡명만 쳐넣으면 못 듣는 곡이 없습니다. 책 속에 등장하는
모르는 음악들, 바로바로 들을 수 있습니다.
편리해서 좋기는 하지만 예전과 같은 흥분, 설레임, 행복감, 이런 걸 느끼긴 불가능하지요.
지나친 결핍은 불행을 유발하지만 어느 정도의 결핍은 삶을 역동적으로 만드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요. 그렇지만 빌 게이츠 정도의 부자가 되는 것과 어느 정도 결핍을
느끼며 사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숨도 쉬지 않고 빌 게이츠를 고를 겁니다.
하지만 빌 게이츠가 된다 해도 늘 돈에 대한 결핍을 느낄 것 같아요. 그 정도로 돈이 많다면
전 지구적으로 빈곤과 질병과 무지를 퇴치하는 일에 손발 걷고 뛰어들어야 할 텐데 그렇게
되면 빌 게이츠의 재산도 새발의 피정도밖에 안 될 테니까요.
가능하다면 나와 가족 먹고 사는 고민에서 벗어나 전 지구적인 고민 좀 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의외로 길어진 후기, 이만 마무리할까 합니다.
책과 덜 관련되는 소리가 많은 듯도 한데 이런 후기를 금정연 스타일이라고 한다지요? ^^
금정연씨는 한국, 아니 세계, 아니 우주 최고의 평론가입니다.
그 긴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자그마치 두 번인가 세 번 읽은
사람이니까요. 그리고 이 책의 저자 최갑수 씨도 우주급 작가입니다.
안내서를 읽은 것 같으니까요.ㅎㅎ (아, 이 다정한 편견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