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테의 신곡 - 영원의 구원을 노래한 불멸의 고전
단테 알리기에리 지음, 다니구치 에리야 엮음, 양억관 옮김, 구스타브 도레 그림 / 황금부엉이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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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면서도 읽지 못했던 고전 중의 고전, 단테의 신곡은 나에게 밀린 숙제와 같은 책이다. 대략적인 단테의 삶과 신곡의 내용은 알고 있고, 구스타브 도레의 그림은 어디선가에서 봤을 테지만, 그래도 신곡은 신곡 아닌가. 물론 편저자가 있는 이 책을 통해서 신곡의 정수를 만나기엔 많이 부족하지 않을까, 건방진 걱정도 없진 않았다.

 

인간은 그 시대를 넘어설 수 없다. 인간 단테 역시 마찬가지. 그는 그리스 신화와 철학이 기독교적 가치관과 교리에 적절히 조화되어 지배적인 담론을 형성하고 있던 시대에 태어났다. 신곡은 지옥, 연옥, 천국이라는 큰 틀 속에서 카론, 미노타우노스, 헬레나, 켄타우로스 등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상징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있다. 환상 혹은 꿈의 요소가 몇 만 년에 걸친 상징물에 의해 채워지는 것은 당연하다. 상징은 언어 이전의 영역과 문학이라는 언어 영역을 뚫어내는 터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읽어보니 신곡이 고전 중에 고전인 이유는 문학적 상징 해석 때문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테의 신곡이 그토록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읽혔던 이유는 다름 아닌 인간에 대해서 너무나도 솔직하게 고백했기 때문이다. 다른 고전들이 모두 그렇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신곡 속에서 발견되는 진솔한 인간성이란 무엇인가?

 

첫째, 나는 구원받고 싶다.

인간에게 구원이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인생을 버티게 하는 진통제 역할을 한다. 단테의 굴곡 깊은 삶을 감안했을 때, 그가 얼마나 구원을 갈망했는지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사랑하는 사람은 죽음이 앗아가고, 자신의 지상 이상향인 피렌체는 정적들이 강탈해 갔다. 당시 교회와 정치와의 밀착을 생각한다면 종교적 구원까지도 의심스러운 상태. 그는 신곡을 통해서 현실의 자신을 부정하고 보다 높은 곳에서의 자유를 꿈꾼다. 베르길리우스, 당시 교회의 성인들, 베아트리체 등이 그 여행의 안내자 역할을 한다. 그러나 단테에게 있어 구원의 시작은 복수다.

 

둘째, 복수는 나의 것.

신곡에서 화해나 용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단테의 신곡은 복수의 장이다. 자신의 정적(政敵)들을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일곱 가지 죄악에 해당하는 자들로 재단하고 지옥의 구석구석에 배치한다. 자기편을 패배의 질곡으로 몰아넣었던 배신자 역시 놓치지 않는다. 성경이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악인 캐릭터들도 복수의 대상으로 등장하지만, 그들은 단테의 정적들이 과연 지옥에 갈 수밖에 없음을 증명하는 비교 도구에 불가하다. 예수를 팔아넘긴 유다 역시 배신의 대명사 아니던가. 베르길리우스라는 시성(詩聖) 역시 복수의 정당성을 담보해 주는 확인 도장 역할에 불과하다.

 

셋째, 신비주의적 구원.

지금의 나를 부정하고 보다 숭고한 존재로의 승화를 꿈꾸는 것 역시 인간의 본성 중 하나다. 특히, 지옥과 연옥에서 끈질기게 붙잡고 있었던 ‘자아’의 해소야 말로 고등 종교에 자주 등장하는 신비주의적 공통점이다. ‘참나’, ‘진아’, ‘아트만’ 등으로 불려지는 나의 존재 의미는 ‘일자’, ‘부처’, ‘브라만’ 등과의 완벽한 조화를 통해서 비로소 완성된다. 천국편에서 사랑, 빛과 합일되는 단테 자신의 모습은 이러한 전통에 충실하다. 단테는 인간 바로 그다.

 

고전이 힘이 있는 이유는 나를 되돌아보게 하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단테의 신곡 역시 예외가 아니다. 구원받고 싶지만, 정의의 이름으로 혹은 신의 이름으로 복수하고 싶은 인간. 그 후, 나를 잊고 완전한 빛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은 인간. 이왕 돌아갈 것이라면, 복수 말고 화해를 할 수도 있을테지만, 아직 몸을 입고 있는 입장에서 오히려 그것은 위선이다. 단테는 금칠한 납 망토를 입고 침묵하던 위선자들의 행렬 속에 있길 원하지 않았다.

 

이 책을 통해서 단테의 신곡에게 느꼈던 부담감에서 해방되었다. 숙제를 다 한 것 같기도 하고, 복수를 한 것 같은 묘한 마음이 든다. 구스타프 도레의 그림은 신곡의 주요 장면을 너무나도 잘 묘사해서 다시 읽을 때는 그림만 보아도 대강의 내용이 떠오를 정도다.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불어 넣어 주었던 단테의 신곡은 나에게 어둡고 무거운 인간의 본성으로 다가온다. 인간은 무엇인가? 인공지능과의 차이점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오늘날, 인간됨의 역설적 가벼움을 신곡에서 읽는다.

 

이 책은 출판사가 무상으로 제공한 책을 읽고 작성한 서평이다. 그렇지만, 편저자의 뛰어난 역량과 상상력 그리고 100점 넘게 그려져 있던 구스타프 도레의 그림, 매끄러운 번역을 칭찬하는 것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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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신화 - 바이킹의 신들 현대지성 클래식 5
케빈 크로슬리-홀런드 지음, 서미석 옮김 / 현대지성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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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로마신화를 읽으면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다. 성경 속 설화들과 너무나 비슷했기 때문이다. 서양 문화가 헬레니즘과 히브리즘의 절묘한 조화로 만들어졌다고 하니, 그럴 수 있는 것 아니냐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성경은 단 하나밖에 없는 신이 절대 진리를 인간에게 전달하기 위해 쓴 책이 아닌가. 그런 성경이 어떤 이야기의 표절이거나 많은 이야기와의 혼합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만으로도 교회에서 태어나 교회에서 만난 사람과 교회에서 결혼하고 그 아이들까지 세례받게 한 사람에게는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서양이라는 같은 지역이라 그럴 수 있다고 치고, 이번엔 동양 신화로 넘어와 보자. 마치 한 사람이 똑같은 이야기를 각 지역의 문화에 맞게 잘 고쳐 썼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유사한 모티브와 캐릭터가 대거 등장한다. 이 역시 충격이었다. 위대한 단군의 후손들까지도 신화의 주제에서 예외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와 비슷한 성장 배경을 가진 사람들은 특히, 다양한 분야의 책을 폭넓게 그리고 많이 읽어야 한다. 그래야 충격을 덜 받는다.

 

 

신화학자들의 설명처럼,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 자신의 욕망과 두려움을 설명하기 위해 신화를 만들었다. 인간이기에 알고 싶고 갖고 싶은 것들, 인간이기에 피하고 싶은 것들, 인간이기에 어찌할 수 없는 것들, 그래도 인간이기에 꼭 해야만 했던 것들이 신화 속에 담겨있다. 그래서 신화는 일정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을 정도로 비슷하다.

 

 

「북유럽 신화」역시 마찬가지. 북유럽이라는 지역적 차이점을 강조하긴 했지만, 신화는 신화다. 현대의 북유럽은 복지, 인권, 교육 등 다양한 분야에서 단연 선망의 대상이지만, 고대의 북유럽은 야만의 대명사라고 할 정도로 무시되고 피하고 싶은 혐오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선망의 대상이던지 혹은 혐오의 대상이던지 상관없이 ‘신화’인 이상 인간의 작품이다. 즉, 인간의 욕구와 공포가 이 책 「북유럽 신화」에도 녹아들어가 있다.

 

 

북유럽의 창조신화는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얼음으로부터 시작한다. 암소가 얼음을 햝자 나온 최고의 신이 오딘이고, 거인 이미르의 겨드랑이 땀에서 나온 것이 인간이다. 그들의 우주는 상, 중, 하의 3층 구조 속 9개의 세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9개의 구역은 당시 사회지배구조를 잘 보여주고 있다. 오딘-지배계급(왕, 귀족), 토르-생산계급(자유농민), 트랄-노예계급(농노, 노예)으로 대응되는 전형적인 외모와 의식주 문화가 등장한다. 역시 신화는 인간의 작품이다.

 

 

이 책의 백미는 무엇보다도 저자의 친절한 서론이다. 거대하고 상징적인 신화의 미로 속으로 무턱대고 들어갔다가는 미아(迷兒)가 되기 십상인데, 저자는 이 책 전체의 요약본이요, 길라잡이라고 할 수 있는 서론을 통해 이를 방지하고 있다. 서론을 천천히 그리고 꼼꼼히 읽은 후에 본문의 개별 신화를 읽게 되면 신화의 깊은 곳까지 도달할 수 있다. 중간 중간 삽입된 그림

 

 

은 신화의 내용을 잘 요약했을 뿐만 아니라, 시각적 이미지를 활용하여 상상력을 보다 자극한다. 책 표지의 홍보 문구처럼 ‘스타워즈’, ‘어벤져스’ 등 할리우드의 많은 블록버스터 영화들의 모티브가 된 북유럽 신화. 인간의 상상력이란 구체적인 모습에선 다소의 차이와 특징을 가지고 있지만, 근원적인 출발점은 여전히 갇혀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스-로마신화」를 읽어 본 사람이라면, 이 책과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북유럽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의 모습과 그리스-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의 모습은 성격, 수, 하는 일 등에서 너무나 비슷한 점이 많기 때문이다. 레비-스트로스의 「신화학」을 옆에 두고 구조주의적 접근을 해보는 것도 추천한다. 신화의 새로운 세계가 열리리라 믿는다.

 

 

전체적으로 친절한 책의 구성과 자연스러운 번역 그리고 휴게소 역할을 하는 그림 덕분에 꽤 두꺼운 북유럽 신화를 단시간에 그것도 매우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좋은 책이다. 추천한다.

 

 

- 이 서평은 출판자에서 제공한 책자를 읽은 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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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공부의 기초 - 역사가처럼 생각하기
피터 N. 스턴스 지음, 최재인 옮김 / 삼천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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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을 넘어서 진짜 공부를 시작하자고 다짐한 후 첫 테마로 잡은 것이 세계사였다. 문명사나 철학사로 시작해서 역사학 입문서, 커피의 역사나 빵의 역사 등 미시사도 읽었다. 무심코 지나쳤던 시대의 구분, 지역의 명칭, 시기별 문명의 비교 등이 어떤 기준으로 가능했는지를, 이 책은 원리적으로 접근한다. 그렇다. 세계사 공부의 기초는 정리되고 요약된 깔끔한 세계사가 아니다. ‘역사가처럼 생각하기라는 부제(副題)처럼 정리되고 요약되기 이전에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 지를 보여주는 책이다.

 

 

 

 

이러한 저작 목적에 따라, 세계사라는 개념부터 질문 세례를 받는다. 세계사란 무엇인가? 한 나라의 국사와는 어떻게 다른가? 비교론적인 문명사나 최근의 거대사와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저자의 근본적인 질문에 너무나 당연시 했던 세계사에 대한 선입견이 흔들렸다. 좋았다. 독서의 참 맛은 기존 생각의 흔들림과 새로운 관점의 정립이 아니던가. 특히, 세계사의 골격을 고전시대, 고전시대 후기, 근대초기, 장기 19세기, 현대로 나눈 부분은 독특하고 신선했다.

 

 

 

 

모든 인간은 의식적이던 무의식적이던 의미에 종속적이다. 세계사를 다루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역사가들이 선별한 사료는 객관적인 동시에 주관적이다. 선택된 사료를 어떤 기준으로 분류하고 비교할 것인지, 공통점과 지속성을 강조할 것인지, 차이점과 단절성을 강조할 것인지는 역사가의 가치관과 결부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사전 작업을 생략한 채 정리되어 있는 연도표만을 외운다면 바닷가에서 모래알갱이만 쳐다보고 있는 격이다. 이런 측면에서 이 책의 관점은 전체적인 조망이 가능한 높은 곳이다.

 

 

 

 

시간, 공간, 접촉과 교류는 저자가 세계사를 구성하고 조직하는 원리들이다. 각 원리별로 설명은 하되, 딱 부러진 정답을 제시하진 않는다. 논의 가능성이 열려 있음을 공개하면서 그 어떤 절대적 기준도 없음을 독자에게 지속적으로 상기시킨다. 이 책의 또 다른 매력이다. , , 로부터 상당한 충격과 깊은 인상을 받았던 사람으로서,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지역에 대한 접근법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세계사 연구자는 거의 없다는 지적은 매우 따끔했다. 한 권도 읽지 않은 사람보다, 딱 한 권의 책만을 읽은 사람이 더 무섭다는 이야기에 동의한다.

 

 

 

 

책을 읽고 난 후, 국정 역사교과서 문제로 한 동안 시끄러웠던 우리 사회의 폐쇄적이고 획일적인 역사 담론을 자연스럽게 돌아보게 되었다. 고체(固體)처럼 딱딱하기만 했던 시대와 지역과 문명에서 벗어나 나름의 시대와 지역과 문명관을 고민해도 틀린 역사 공부가 아니다. 이미 결정 나서 지나가 버린 과거사가 아니라, 가능성으로서의 세계사도 허락된 것이었다. 직역에 충실한 번역자의 수고가 조금 아쉽지만, 결정적이지 않다. 좋은 책이다. 추천한다.

 

"이 서평은 출판사의 제공받은 도서로 작성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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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와 묵자, 자유를 찾고 평화를 넓히다 - 무유의 세계를 대표하는 두 거장의 이야기 시대와 거울 포개어 읽는 동양 고전 3
신정근 지음 / 사람의무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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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가 자유를 찾고 묵자가 평화를 넓히고자 했다면, 노자의 억압과 묵자의 전쟁을 생각하는 것이 먼저다. 자유는 억압에 대한 반동이요, 평화는 전쟁에 대한 반작용일 테니까. 춘추전국시대라는 대혼란의 현실적 출구로서 노자가 자유를, 묵자가 평화를 선택했다는 주장은 자연스럽다. 또한 유가라는 기득의 사상에 대한 비판과 대안으로서 노자와 묵자는 충분한 사상적 특징과 사회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 유가의 제도를 통한 인위 통치에 대해 노자가 무위자연으로 맞받아치고, 유가의 별애(別愛)를 묵자가 겸애(兼愛)로 대응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무와 유의 대별을 전제로 노자를 무에, 묵자를 유에 배치한 것에 대해서는 적지 않게 당황했다. 그 이유는 첫째, 무와 유의 구분은 관념의 소산인데 반하여 노자와 묵자의 사상은 현실을 개혁하고자 한 실천적 정치담론이기 때문이다. 둘째, 노자의 사상은 무의 세계를 설명하거나 강조하기 보다는 도()를 설명하기 위해 무와 유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의 본질을 탐구한 것이 아니라, 무와 유의 관계를 통해서 도를 드러내는 방식이다. 그러므로 노자를 무에 배치한 것은 오해를 만들 수 있다. 셋째, 묵자의 적극적인 현실 참여적 성격 때문에 그를 유에 배치했다면, 사실 제자백가 중에서 유의 세계에 속하지 않을 사상은 없을 것이다. 구분과 배치의 실익이 없다.

 

사실 위의 비판이 겨냥하고 있는 것은 포개어 읽는동양 고전이라는 방법론이다. 비교 혹은 대조라는 그물은 두 개의 사물이나 생각의 본질보다는 피상적 대칭 관계를 보다 많이 건져낸다. 쉽게 설명하면 이렇다. 여기 호빵과 호떡이 있다고 치자. 호빵을 호빵답게 하는 것, 즉 호빵의 본질을 갈파하기 위해서는 호빵이 아닌 모든 것과의 차이점을 상정해야 한다. 그러나 호빵과 호떡을 대조하는 방법론은 그 중에서 오직 호빵과 호떡의 차이점에만 주목하면 된다. 천만다행으로 호빵다움이 호떡다움과 서로 맞닿아 있다면 매우 유용하겠지만, 대부분의 비교론은 제한적 대립각을 강조하기 쉽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포개어 읽는방법론은 노자와 묵자의 사상이 서로에게 본질적으로 의존적이라서 선택 했다기보다는, 새로운 관점의 제시라는 환기 정도라고 해야 할 것이다. 많은 연구자들이 공자-노자, 공자-묵자를 비교하는 것은 사실 양자의 관계가 본질을 설명할 수 있을 만큼 상호 의존적이기 때문이다. 노자와 묵자는 공자를 의식적 토대로 삼고 있다. 사후적이던 집단적이던 공자는 그들의 사상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저자께서 이러한 점까지 잘 알고 계시다는 점은 비판의 대상이 아니다. 이 책의 구성만 봐도 금방 알 수 있다. 저자는 노자와 묵자를 무와 유로 배치한 이유에 대해 짧게 서론에서 밝힌 후, 노자다움과 묵자다움을 놓치지 않기 위해 책의 대부분을 각자의 사상에 할애했다. 두 사상가 모두 수수께끼 같은 역사성을 갖고 있는 터라, 인용한 문헌적 근거와 최근의 사진까지 세심하게 편집되어 있다.

 

무와 유의 구별이 서양철학의 존재론적 접근이므로 노자와 묵자가 가지고 있는 동양철학의 관계론적 특성이 훼손되지나 않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앞에서 말했듯이 무유(無有)의 대별은 창문을 열어 새로운 공기를 방안에 주입시킬 목적이지, 그것으로 방청소를 대신하려는 게으름의 소산이 아니다. 특히 묵자 부분은 노자와 비교해서 많이 읽히지 않고 있는데, 묵자를 처음 읽으시는 분들에게는 매우 유용하다고 생각된다. 묵자의 이름부터 그의 사상의 대강과 요지를 빠른 시간 내에 정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노자가 어렵다고만 알고 계신 분들은 이 책을 통해 노자를 보다 친숙하게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도덕경을 덥석 읽기 보다는 이 책을 먼저 읽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동양고전을 많이 읽으신 분들보다는 이제 시작하려는 분들께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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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의 노래 - 19세기 말 활약한 어느 의병 선봉장의 이야기
전영학 지음 / 생각정거장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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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의 노래]

 

나를 가장 나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 박윤진 -

 

아군(我軍)과 적군(敵軍)의 구별.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빙하기라는 불확실성에 대처하기 위해 3만년 넘게 발달시켜 온 전략이다. 인간은 나를 살릴 쪽과 죽일 쪽을 본능적으로 알아채는 법.

 

보통 민족과 국가는 나를 살릴 쪽에 위치한다. 인간은 나보다 먼저 존재하고 있는 국가와 민족 속에서 태어난다. 그 속에서 진리인양 언어와 경제 구조를 공유한다. 이러한 대단위의 습관체계, 즉 문화는 교육을 통해 계승 발전하게 된다. 교육은 개인을 문화의 부품으로서 재생산한다. 나보다 먼저 존재했던 국가와 민족은 후손에게까지 물려주어야 할 지고의 가치다. 뭐라 딱 잘라 규정할 수 없는 그 무엇이기에 윤리적, 종교적 가치까지 부여받게 된다. 결국 국가와 민족은 나와 일체를 꿈꾼다.

 

이렇듯 국가와 민족은 생물학적 유기체를 사회적 로서 전환시키는 기계적 변환 시스템이다. 내가 인식하고 있는 나다움은 국가와 민족적 맥락에 뿌리를 두고 있다. 국가와 민족을 거세한 나를 상상할 수 있을까?

 

을의 노래는 국가와 민족이 뿌리 채 뽑혀지고 있는 과정 중에 과연 나를 가장 나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전영학 선생님의 답변이다. ()이라는 명칭은 갑()과의 대비 속에서 상대적이고 일반적인 의미만을 표출하기 쉽다. 그러나 이 작품은 이러한 약점을 의식한 듯 각 개인들의 구체적인 삶의 맥락을 표현하기 위해 애쓴 노력이 역력하다. 특히, 등장인물들을 담고 있는 시공간의 표정을 인상적으로 잡아내었다.

 

을의 노래에서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 나다움을 받아들이게 하는 방법은 크게 윤리, 종교, 시대정신 그리고 인간애이다. 민이식에겐 왕비와의 개인적 인연과 혈연적 관계가, 안승우 등에겐 소중화의 화맥이 나다움을 구성하고 있는 타협 불가능 윤리적 근거다. 신이백이나 차미 등은 인내천의 종교가 바로 그런 역할을 한다. 개화사상에 충실했던 김규식은 시대정신을 부르짖으면서 죽는다.

 

문제적 인물은 김백선이다. 그는 윤리, 종교, 시대정신으로는 범주화할 수 없는 묘한 인물로서 신분상승의 욕구나 경제적 동기로 의병이 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자기 주변의 사람들을 사랑하고 싶었다. 신분과 경제적 불평등이 표면적 구호가 된 것은 그것이 자신의 사랑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표출된 그의 도전과 눈물은 그 무엇으로도 찾을 수 없었던 나의 발견인 셈이다.

 

나라와 민족이 없어질 수도 있는 상황. 그 어느 개인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까. 흔들림은 단순한 왕복 운동이 아니다. 삶과 죽음의 선택적 과정이다. 생존을 위해 필요한 건 밥만이 아니다. 삶의 의미! 생존해야 할 이유! 인간이기에 배고픈 가치! 그러나 그것을 무엇이라 부르든 나를 넘어 타자에 대한 배려와 사랑 없이는 찾을 수 없다.

 

나라 전체가 을이요, 시대에 뒤떨어진 사상이 을이요, 총검 앞에 죽어가는 유기체적 생명이 을이지만, 을과 갑의 이분법을 넘고자 도전하고 서로의 삶을 끌어안고 애도한다면, 그들이 그토록 원했던 새로운 세상은 이미 도래한 것이 아닐까.

 

국가와 민족이 예전처럼 힘을 발휘하지는 못하는 오늘, 내가 을인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혹시 있지도 않은 갑을 있다고 믿기 때문은 아닐까? 남이 규정한 갑과 을의 이분대립적 세계에서 빠져나와 나를 나답게 만드는 것을 찾아 도전해야 할 때이다. 김백선이 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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