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둥이도 군주를 가엾게 여긴다.'


왜 문둥이는 이토록 건방을 떠는 것일까? 문둥이가 누구인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장 천대받고 멸시받는 불우한 존재, 그가 바로 문둥이 아닌가! 그런 문둥이가 어떤 근거로 권력과 부와 명예의 대명사인 군주를 감히 가엾게 여기는 것일까? 한비자는 그런 문둥이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한비자가 알았다는 문둥이의 마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은 자신을 속일 수 없다는 점이다. 문둥이의 지혜는 정확한 한계의 인식에서 출발한다. 무슨 말인가? 문둥병에 걸리면 추방된다. 사랑하는 가족으로부터, 생존의 터전인 고향으로부터 축출되어 죽은 자처럼 살아야 한다. 그래서 문둥병자들은 자신의 병증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몸을 꽁꽁 동여매어 보지만, 나병균은 4월 벚꽃처럼 속절없이 피어나 신체를 갈아먹는다. 숨길 수 없다. 속일 수도 없다. 속성과 현상이 동일한 병, 그것이 바로 하늘이 내린 형벌, 문둥병이다. 문둥이는 더 이상 자신을 감출 수 없을 지경까지 내몰린다. 죽음의 상황 속에서 자유를 얻는다. 자유란 한계의 벼랑에서 뛰어내린 넉넉한 추락이다.


한비자는 이 점을 알았다. 권력의 핵심은 은폐성으로부터 나온다. 군주는 예측되어서는 안 된다. 그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싫어하는지 신하들에게 간파되면, 신하들은 자신의 이해득실에 맞게 계산에 들어갈 것이고, 한정된 공간에서 제한된 정보만을 듣게 되는 군주로서는 그들을 단도리할 여지가 없게 될 것이 뻔하다. 그렇다면 군주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법과 원칙 뒤에 자신을 숨겨야 한다.


법과 원칙 뒤에 자신을 숨긴다는 뜻은 무엇인가?

군주도 사람이다. 혈육에 묶여 있다. 좋고 싫음이 있다. 감정의 기복과 선입견에 좌우된다.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군주가 아무런 말도, 아무런 의사결정도 하지 않는다면 나라꼴이 어찌 될까? 뭔가 자신의 생각을 객관적으로 표출해야만 한다. 법과 원칙이 필요한 이유다. 법과 원칙은 명분이다. 명분은 보편적 기준이다. 누구나 설득할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는 잣대인 셈이다. 군주가 법과 원칙에 맞게 상과 벌을 내린다면, 자신이 무능하고 아프고 겁쟁이라는 사실에서 벗어나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보편성을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한비자는 이 점을 분명히 알았다.


국내외 권력구조는 수시로 변한다. 변화무쌍한 정치판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신의 입장을 최대한 노출하지 않아야 한다. 나와 적을 알면 백번 싸움에 나가도 두렵지 않다고 했다고 했다. 불확실성에 빠져있는 적은 두려운 상대가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불확실한 상황에서는 행동에 나서지 못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법과 원칙에 의거해서 명분있는 결정을 하는 군주를 만만한 상대로 여기기란 쉽지 않다. 인간은 천명, 윤리, 원칙 등 보편적 권위에 약한 법이다.


한비자는 읽는 내내 회사의 사내 정치가 투영되어 곤란했다. 특히, 그 동안 너무 솔직한 언행을 일삼은 나로서는 불안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문둥이가 나를 구원했다. 문둥이의 지혜가 나를 해방시켰다. 문둥이가 군주를 가엾게 여기는 것은 군주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싶어도 그래선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군주는 자유롭지 못하다. 한비자가 파고드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다. 군주를 법과 원칙 안에서 자유롭게 하고, 그 틈에서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를 숙고하라는 것이다. 나는 문둥이를 통해서 한비자의 기본 전제를 알았고, 그래서 더 이상 나를 다그칠 이유가 없었다. 한계를 정확히 알면 다양한 전략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기 때문이다.

 

한비자는 두꺼운 책이다. 나에게 그 두꺼운 책을 한 문장으로 줄이라고 한다면, 이렇게 할 것이다.

"군주여,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항상 기억하라!"  


인간은 하늘로부터 버림받은 존재이다. 생노병사와 전쟁이 그 증거다. 군주는 하늘과 인간 사이에서 가장 크게 버림받은 자이다. 문둥이와 같은 처지다. 그러나 문둥이가 문둥이라는 사실은 온 세상이 다 알지만, 군주가 군주라는 사실은 법과 원칙만이 보장해 준다. 군주는 자신의 문둥이됨, 즉 한계를 지닌 존재임을 알려서는 안 된다. 철저하게 불투명해야 한다. 불투명을 통해서 신하와 적국을 투명하게 만들어야 한다. 불투명과 투명 사이로 법과 원칙이 위치한다. 인간에게 법과 원칙이 필요한 이유다.


한비자는 이러한 밑생각을 깔고 패망하는 군주의 열 가지 잘못을, 노자의 도처럼 비우고 채워지는 권력의 속성을, 신하들을 통솔하고 파악하는 방법을, 법와 원칙에 의한 정치의 기술들을 당시의 시대 배경에 맞게 전달하고 있다. 사실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역사에서 사례를 찾아 제시한다. 또한 당대 주된 정치철학이었던 유가와 묵가의 한계를 정확히 진단하고 그 대안으로 법가의 장점과 남모르는 비애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두껍지만 부담스럽지 않은 이유다.


동양의 고전을 나같은 무지몽매한 사람까지 읽게 해 주신 김원중 교수님께 항상 감사드린다. 원전과의 싸움 없이 고전의 참맛을 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하지만, 선배들의 분투 속에서 후학들 중 누군가는 또다른 고전을 집필할 수 있는 역량을 얻게 되지 않을까. 매권과 편마다 해제를 달아 전체적인 내용의 대강을 이해시키고, 한비자의 핵심적 메시지를 요약하여 주신 덕에 길고도 긴 여정이 외롭거나 불안하지 않았다.


한비자의 생각이 오늘날 현실적인 대안으로 요청되는 이유는 그 인간관이 자본주의의 합리적 인간관과 닮아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인간에 대한 한계, 인간 본성의 민낯을 분식하지 않고 공개함으로써 사회적 제도의 필요성과 그 중요성을 부각시키기 때문이다. 보편적 권위를 어떻게 획득할 것인가에 대한 무거운 고민과 제안이 한비자로부터 나온다. 


최근 한국과 미국 정부는 한반도에 사드(THAAD, 미국의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를 배치하기로 전격 결정했다. 한비자라면 어떻게 했을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많은 분들이 이 책을 읽고 그 궁금증을 함께 풀어나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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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동서대전 - 이덕무에서 쇼펜하우어까지 최고 문장가들의 핵심 전략과 글쓰기 인문학
한정주 지음 / 김영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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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글쓰기 동서대전

 

글쓰기란 무엇인가? 생각을 토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토하고, 사람을 토하고, 시대를 토하는 것이다. 토하면서 자신을 더럽히고 세상도 더럽히는 것, 그것이 글쓰기다. 왜 더럽혀야 하는가? 그 동안 깨끗이 정리되었다고 믿어왔던 것들을 의심의 걸레로 닦아내면서 흔들려야 하기 때문이다.

 

위 글은, 글쓰기 동서대전을 읽으면서 계속 되었던 질문, 왜 글을 써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이다. ‘글쓰기로 분류된 책들을 30여권 정도 읽었다. 무슨무슨 글쓰기, 누구누구의 문장론 등. 그러나 글쓰기는 다시 닦기 위한 토()함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은 이 책을 읽고 난 후다. 글쓰기가 번호 매겨진 어떤 기교나 절차를 지켜서 가능하다면 우린 아마 책을 읽지 않았을 것이다. 번호는 관념의 막연함을 만회해 보려는 전략이지만 씁쓸함만 더 한다.

 

700페이지에 이르는 분량, 그러니까 잘못하면 시간과 정력의 소비도 만만치 않으리라는 예상이 경험에 비춰볼 때 당연했다. 그래서 스킵(skip)하면서 서평을 쓸 생각이었다. 허나 막상 목차를 보니 만만치 않았다. 구성도 새롭고 알찼다. 700페이지가 필요한지 공감이 되었다. 읽으면서 건너뛰기는커녕 곰곰이 생각하면서 머물러야 할 문장이 많았다. 인용된 글들이 박지원, 이탁오, 루소, 니체, 나쓰메 소세키, 베이컨, 루쉰, 괴테, 쇼펜하우어 등의 것이니 더 말해 무엇 할까.

 

글쓰기 동서대전을 통해 글쓰기 전략을 배웠냐고 누군가 질문한다면, 나는 자신있게 말하겠다. 그런 것은 결단코 없노라고. ()하는데 무슨 비법이 있겠는가? 저자는 동심의 글쓰기, 소품의 글쓰기, 풍자의 글쓰기, 기궤첨신의 글쓰기, 웅혼의 글쓰기, 차이와 다양성의 글쓰기, 일상의 글쓰기, 자의식의 글쓰기, 자득의 글쓰기라고 소제목을 달았다. 그러나 그것은 글쓰기의 전략 따윈 없다는 등불을 밝히기 위한 어둠에 불과하다. 다양한 등산로가 표시된 게시판을 처음에야 눈여겨보지만, 정상에 올라 운해를 바라보는 순간, 그 게시판이 기억나지 않는 이치와 같다고나 할까.

 

그럼, 정상에 올라 운해를 바라보는 듯한 글쓰기를 저자는 뭐라 하는가?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미쳐야 한다고 한다.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어린아이처럼 놀면서 쓰고, 쓰면서 놀고, 일상이 기적인 것처럼 경이롭게 보이고, 그래서 남들의 시선은 온대간대 없고, 스승과 시대를 맞지 않는 옷처럼 미련 없이 벗어버려 이 우주의 단 하나의 의미로서 잠깐 그러나 영원히 반짝거리는 별 같은 글. 그것이 바로 쓰기라고 한다.

 

그런 불가능한 쓰기를 누가했냐고? 저자는 우리나라 17, 18세기의 문필가들 예컨대, 이덕무, 이익, 박지원 등을 필두로 내세운다. 그들뿐일까? 중국, 일본 그리고 서양의 대문호들의 대표작들을 적절하게 발췌요약하면서, 저자만의 시각으로 통찰력 있게 풀어냈다. 책 제목 그대로 글쓰기 동서대전답다.

 

책이 두꺼워진 이유는 저자가 글쓰기 대가들의 인용문을 포기하지 못한 탓이리라. 글쓰기 비법이 어디 있나? 지금까지 읽히고 있는 동서고금의 문장들을 많이 봐야 할 것 아닌가? 조그만 더, 조금만 더 하다가 늘어났으리라. 그냥 보여주기만 하면 되는가? 왜 이들이 글들의 이토록 생명력이 긴지를 나름 꿰뚫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 엄청난 작업을 저자는 매우 훌륭하게 잘 해냈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목적에 맞게 간결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명문장들을 읽게 되면 자연스럽게 더 읽고 싶다. 덕분에 읽는 도중 휴대폰을 꺼내들어 소개된 책들을 주문하는 일이 잦았다. 우스운 말로 다단계 책이다. 자꾸 책을 읽고 싶게 만들고, 사게 만들고, 뭔가 쓰게 만드는 마법 같은 책이다.

 

꼭 한 번 읽고, 읽으면서 뭔가 써보길 권한다. 정말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가? 없다면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내 옷, 내 밥, 내 집은 그렇게 자랑하면서 정작 내가 사는 이야기가 없다면 뭔가 수상하지 않은가? 나와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아이들, 남편, 아내, 직장 동료, 이웃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글이 없다면, 혹시 어디가 크게 아픈 것은 아닐까? 정작 첨단장비로 정밀 진단해야 할 곳은 내 몸이 아니라, 마음 아닐까? 그 마음이 아프거나 아예 존재하지도 않기에, 난 그 동안 글을 쓰지 못했으리라. 문제는 기교가 아니었다. 끼워 팔리는 삶, 1+1 판매 행사처럼 얹혀사는 삶, 내 삶 자체가 문제였다.

 

주말 이틀을 통째로 투자했다. 전혀 아깝지 않다. 오히려 저자의 다른 책도 하나 더 구해 읽었다. 글을 쓰고자 고민하는 사람들은 꼭 읽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 책 때문에 아팠으면 좋겠다. 그래서 아픈 시대에 맞서는 면역력이 생기길 바란다. 그들이 쓴 책들이 누군가를 건강하게 할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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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신의 나라는 네 안에 있다.

 

지금껏 책 제목을 신의 나라는 안에 있다로 알고 있었다. “안에 있다와 안에 있다는 큰 차이가 있다. “안에 있다는 선언은 주관적 확신만 있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선언이지만, “안에 있다는 선언은 자신의 주관적 확신을 객관적 수준으로까지 끌어올려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과 삶을 반성하도록 기능하기 때문이다. 톨스토이 자신 안에 이토록 확고한 신의 나라는 무엇이었을까? 얼마나 실재처럼 느껴졌기에 지금 이 책을 읽고 있는 너에게도 그 나라가 당연히 있다고 선언하는 것일까? 어쩌면 이 제목은 독자들이 신의 나라를 느낄 수 없는 환경에 둘러싸여 있다는 현실인식에서 나온 것은 아닐까?

 

이 책은 톨스토이 자신이 머리말에서 밝혔듯이 나의 신앙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책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비판에 대한 해명이다. 나의 신앙은 어디에 있는가?를 읽지 않은 나로서는 두 권의 책이 어떻게 얼마나 다른 지 알 수 없지만, 전체적인 주장의 맥락이 크게 다르지 않음을 옮긴이의 해제 등을 통해 쉽게 추론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톨스토이가 과감하게 너의 내부에도 존재하고 있다고 선언한 신의 나라란 어떤 것일까?

 

톨스토이가 말하는 신의 나라는 악에 대한 비폭력무저항으로 표현되는 새로운 삶의 방식이다. 예수의 가르침이라고 하고 있지만, 결코 기독교 교리에 얽매이지 않는다. 오히려 국가와 교회를 밀어내는 저항의 천국이다. 톨스토이는 국가와 교회를 부정한다. 자연스럽게 국가를 전제로 한 징병제, 세금, 국교, 권력, 전쟁 등을 거부한다. 양심적 병역거부를 진정한 기독교인의 당연한 결정이라고 옹호한다. 러시아 정교회를 포함한 집합 개념으로서의 기독교 교회를 권력의 음흉한 사생아로 본다. 기독교 교리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천지창조, 노아의 방주 사건, 신의 아들로서 예수의 신성, 부활과 재림 등은 현재 이 시대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한다. 그를 이단, 정신병자, 아나키스트로 부르는 이유는 이런 과격한 주장 때문이리라.

 

톨스토이는 권력을 부정한다. 이것은 상식적 삶을 포기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20세기 초 러시아에서 국가와 정교회의 권력과 대항하면서 자신의 삶을 사막으로 내몬 것이다. 나는 어떤가? 국가와 교회가 항상 정의롭고 아름다운 결정을 하기에 추종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그냥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비겁하게 침묵하면서 기생하고 있는가? 이런 삶을 사는 자의 천국을 타자인 너에게도 있다고 선언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 책에 대한 가장 흔하고 강력한 비판은 비현실적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현실은 무엇인가? 파자(破字)해 보면, 현실(現實)이란 권력()이 이것이 결과()이므로 이렇게 봐야()한다고 강요한 것 아닐까? 이것이 결론이므로 너의 마음을 여기에 짜 맞추어야 한다고 한 누군가의 이야기, 그것이 바로 현실이다. 그러므로 이 책이 비현실적이기 때문에 의미가 없다고 하는 비판 자체가 이미 이 책의 진가를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이 책이 간디와 루터 킹 목사 등 비폭력 운동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훌륭한 사람들이 읽었기에 우리도 따라 읽자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 책이 불편한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내가 놓치고 있었던 양심 혹은 폭력의 문제에 대한 자각이 일어난다. 이러한 자각이야말로 변화의 시작이다. 톨스토이는 이 변화를 말로만 주장하지 않았다. 자신의 삶을 통해 실천했다. 그것이 이 책을 읽게 하는 가장 큰 힘이다.

 

나를 나로 규정하는 일의 첫 단계는 양심적 결단이라고 믿는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나로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권력 기계의 부속품으로서 이익만을 계산하고 있다. 사람이 아니라 계산기로서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톨스토이는 권력 기계를 기계라고 선언하면서 인간으로서의 삶, 양심의 소리에 귀기우리면서 실천하는 삶을 살아냈다. 죽은 눈과 잔인한 이빨로 이웃의 목덜미를 노리는 좀비의 삶을 버리고 마치 아이처럼 틀린 것을 틀렸다고 아무런 계산 없이 기록했다. 옳은 결정을 하는 사람들을 응원했다. 그의 응원소리는 지금도 많은 양심들을 위로한다.

 

개인적으로 톨스토이의 예수관과 천국관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한 점은, 내 주장은 말에 그치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예수관과 천국관에 동의하지 않는 것 자체가 어떤 의미를 빚어내는가? 다르다는 바로 그 예수관과 천국관으로 나의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 그 점에선 나 역시 톨스토이에게 빚지고 있다. 그가 선언한 대로, 신의 나라는 ”(독자인 나) 안에도 있으니 말이다. 그 나라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말이나 글이 아닌, 삶 전체가 필요하다고 이 책은 말한다.

 

옮긴이의 대단한 열정에는 박수를 보내지만, 아무래도 쉽게 읽히는 번역은 아니다. 원전이 어려워서 그런 결과가 나왔다면 할 수 없지만, 좀 더 의역을 하더라도 문장을 간결하게 다듬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본다. 반면 전체적인 책의 편집은 깔끔하다.

 

권력이 재봉한 인형의 삶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차분히 이 책을 읽는 것으로 시작하자. 권력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을 바꾼다는 것은 톨스토이의 삶이 말해주듯, 결단코 쉽지 않다. 순간적인 감상이나 호들갑으로 될 일이 아니다. 다시 태어나야 한다. , 한 번은 꼭 죽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톨스토이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많은 분들에게, 특히 제도권 교회에 의해 세뇌당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는 기독교인들에게 강력히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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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개 한자로 읽는 중국 - 왕조 이름 12개로 푸는 중국 문화의 수수께끼
장일청 지음, 이인호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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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꼭 읽고 싶다.’라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개인마다 그리고 책의 주제마다 다르다.

나는 이 책이 꼭 읽고 싶었는데, 그 이유는 너무나도 설득력 있는 다음과 같은 질문 때문이었다.

 

사람의 이름도 함부로 짓지 않는 법인데, 하물며 나라의 이름은 얼마나 많은 의미를 담았을까?’

중국 왕조의 이름 12자는 중국문화와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위 질문은 사실 저자가 이 책을 집필하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저자는 정확한 지식과 함께 효과적인 전달 방법이 생명인 TV프로그램의 대중 강연자이다. 그래서인지 책 또한 쉽고 정확하게 전달하고자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다. 본격적인 왕조의 이름 풀기로 들어가기 전에 중국 신화를 곁들인 한자의 탄생 부분이 그 대표적 예이다. 창힐, 허신 등의 이야기와 함께 드러나는 갑골문자의 발견 이야기는 한자가 단순한 기호를 넘어서 인간 삶의 그릇이요, 역사적 저수지임을 잘 설명하고 있다.

 

 

왕조 이름의 해석 부분에 들어와서는 해당 글자의 가장 쉬운 뜻부터 설명을 시작한다. 예컨대 하()나라는 여름 하()와 관련이 있을까라는 식이다. 마치 이제 막 한자를 배운 초등학생의 질문처럼 시작한 이야기는 그러나 결코 유치하게 끝나지 않는다. 역사적, 문헌적 고증을 거친 후, 학자들의 논쟁 등과 함께 인문학적 노력으로 정리된다. 인문학적 노력이란 사람 중심의 가치를 각 글자에서 발견하고자 한 저자의 노력을 의미한다. 이를 통하여 그냥 주문처럼 외웠던 -----양진------은 당시 지배계급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잘 담고 있는 훌륭한 거울이라고 된다.

 

 

저자의 뛰어난 설명과 역자의 꼼꼼하고 정확한 번역과 역주는 전체적인 책의 설명력을 높이고 있다. 책 중간 중간에 삽입된 갑골문자 및 설문해자의 설명 그리고 다양한 유적지의 그림과 왕조 등 도표는 쉽게 딱딱해 질 수 있는 역사 이야기는 보다 편하게 전달해 준다.

 

 

한편, 현재 중국에 살고 있는 50여 소수 민족 모두의 중국이 되려는 의도도 감추지 않는다. 우리는 흔히 중국의 지배계급은 한족(漢族)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저자는 현재의 중국은 과거 중국 전체의 역사가 빚어 낸 작품임을 강조한다. 한족만의 중국이 아니라, 중국 땅을 생활의 터전으로 삼아 살고 있는 모든 민족들의 위대한 국가로서의 중국인 것이다. 이런 관점은 고구려 역사까지도 자연스럽게 자신들의 역사에 포섭하려는 동북공정과 맥을 같이 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 씁쓸했다.

 

이제 중국을 모르면 안 된다고 한다. 중국을 공부하고 싶은데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 모른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자고로 그 나라를 알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그 나라의 역사와 문자를 아는 것이라고 했다. 이 책은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도록 친절하게 돕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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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전집 1 - 그리스와 로마의 영웅 50인 이야기, 전2권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6
플루타르코스 지음, 이성규 옮김 / 현대지성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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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은 누구인가? 국어사전은 영웅을 지혜와 재능이 뛰어나고 용맹하여 보통 사람이 하기 어려운 일을 해내는 사람으로 설명한다. 사전이 옳다면, 영웅을 영웅답게 만드는 것은 보통 사람들의 무지와 무능 그리고 비겁함일 것이다. 영웅은 보통 사람과의 비교를 통해 탄생한다. 비교는 비교기준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지므로 어떤 기준을 선택하느냐는 사실, 비교하는 사람이 사전에 어떤 결과를 염두하고 있느냐가 핵심이다.

 

그렇다면 플루타르코스는 자신의 영웅전에서 어떤 결과를 의도하고 50명을 선택했을까? 플루타르코스가 이 책을 쓴 시기를 통해서 추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은 A.D.105~115년에 쓰여 진 것으로 전해진다. 로마가 가장 넓은 영토를 갖게 되는 트라야누스 황제의 메소포타미아 원정이 A.D.117에 완료된 점을 상기해볼 때, 영웅전은 로마의 가장 전성기에 쓰여 진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하다는 로마 제국의 최전성기, 그것도 비교 형식의 영웅 전기를 아무런 집필 목적 없이 썼다고 말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새빨간 거짓말이다. 쉽게는 조선의 용비어천가를 떠 올릴 수도 있겠다. 잘 나가는 제국을 찬양하기 위한 용도로 로마 건국의 아버지인 로물루스부터 역대 황제들과 장군들을 나열했다면 오히려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의 체계는 그렇지 않다. 그리스와 로마의 영웅을 서로 비교한 뒤, 그 비교 결과를 적고 있다. 예컨대 1번 그리스의 건국자인 테세우스, 2번은 그에 걸 맞는 로마의 건국자 로물루스, 3번은 로물루스와 테세우스의 비교. 1, 2. 3번의 삼단 구조는 하나의 세트인 셈이다.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에는 총 50명의 영웅이 등장하니까 모두 25세트가 있다고 보면 쉽다.

 

그럼 이제 쟁점은 플루타르코스가 왜 이런 세트 형식을 취했는가로 옮겨진다. 플루타르코스가 어떤 인물인지를 알면 그의 속셈을 엿볼 수 있지 않을까? 그는 그리스 출신이다. 그리스 최고 지식공동체인 플라톤의 아카데미아에서 공부했고 로마에서 철학을 강의하기도 했다. 또한 원로원의 의원 등 로마의 유력인사들과 교분을 나누었고,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명을 받아 지방 행정관을 지냈다. 이렇게 로마에서 잘 나갔던 그는 아폴론의 비의종교에 입문하여 만년에는 델포이의 신관과 가깝게 지내면서 신탁 해석자로 활동했다고 전해진다. 요컨대 그는 그리스의 정신으로 로마의 전성기를 산 사람이다.

 

그리스의 정신이란 민주주의와 인문주의로 집약된다. 그리스의 정신으로 보았을 때 로마의 전성기는 마냥 위대한 것만은 아니다. 로마는 일단 황제정이다. 원로원을 통한 견제가 가능했지만 황제라는 1인 체제가 제국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게다가 로마는 제국이었기 때문에 이를 유지하기 위한 비용 확보가 절실했고, 세금 확보와 군사력 증가로 연결하기 위한 강력한 행정력이 필수적이었다. 그러므로 그리스의 도시국가와 같은 자생적인 다양성을 보장하기는 어려웠다.

 

플루타르코스가 볼 때 로마의 물질적 풍요는, 그리스의 도시국가와 같은 수많은 인문적 다양성의 희생 위에 세워진 것이다. 그러므로 로마의 영웅을 찬양 일색으로 채색할 순 없다. 아폴론의 비의종교에까지 입문하고, 신탁 해석자로서 생을 마감했다면 그는 뼈 속까지 그리스인이었을 것이다. 그리스의 눈높이로 볼 때 로마의 정치, 사회, 문화를 리드하던 황제와 귀족들의 세계관과 가치관의 수준은 만족할 만한 것이 아니었으리라 쉬이 짐작된다. 결국 영웅전의 삼단 세트 형식은 그리스 정신의 자존심을 세우면서 로마 상류층에 성찰과 자각의 기회를 주기 위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때는 로마의 전성기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위대한 업적들이 눈앞에 엄존한다. 플루타르코스가 아무리 뛰어난 그리스 정신의 화신이라고 하더라도 그리스의 영웅들 또한 무턱대고 칭송할 입장이 아니었다. 삼단 세트는 최전성기의 제국에게 일침을 주되 트집 잡힐 핑계거리를 제공하지 않으려는 고도의 전략인 셈이다.

 

이러한 전략을 바탕에 깔고 책을 읽어나가면 영웅전의 재미는 배가된다. 그리스인다운 철학과 로마인다운 가치관이 상호 교차하면서 묘한 질문들을 생산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본성은 변하는가, 믿음 또는 배신이란 무엇인가, 정의란 무엇인가를 통해서 그리스의 지식인으로서 로마를 살아가는 슬픔과 기쁨을 동시에 맛볼 수 있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읽는 내내 예수의 족보를 설명한 마태복음 1장이 생각났다. 마태복음 1장은 예수의 족보를 추적하면서 태어남과 죽음 사이에 갇혀 있는 인간의 한계를 지리하게 반복하는데, 영웅전의 주인공들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영웅들도 태어나고 죽는다. 그들은 신비한 탄생, 남다른 용모와 능력, 고난을 통한 운명의 발견, 고난의 극복과 뛰어난 성취 따위의 전형적 구조를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지만, 실수하고 배신하고 어처구니없는 실수도 하는 인간적인 면모까지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 신의 조상이건 영웅이건 인간이라면 태어나고 죽는다. 그러므로 의미 있는 삶이란 자신의 삶을 자신만의 방법대로 사는 것이리라. 나는 나만의 방법으로 나의 삶을 살아내고 있는가? 나의 무지와 무능 그리고 비겁함과 얼마나 대결하고 있는가?

 

이 책은 비록 원본의 영역본을 다시 국역한 것이지만,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국내에서 유일하게 전2권으로 완역해 냈다. 두 권을 합쳐서 거의 2,000페이지에 이른다. 막중한 분량이지만 기존의 그리스-로마 신화나 만화로 된 영웅전을 읽었다면 지루하지 않게 읽을 수 있다. 번역은 매우 만족스럽다. 물론 번역가의 역량이 뛰어난 덕분이겠지만, 아서 휴 클러프가 7년 동안 개정 작업을 한 영역 원본의 탄탄한 번역도 한 몫 했다.

 

천병희 선생님의 역본과 만화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읽은 분들에게 강력하게 추천한다. 그 책들이 놓치거나 각색했던 부분들이 새롭고 알차게 전개되어 있기 때문이다.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을 깔끔하게 두 권으로 완독하는 기회라고 생각하고 독하게 읽은 보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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