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둥이도 군주를 가엾게 여긴다.'


왜 문둥이는 이토록 건방을 떠는 것일까? 문둥이가 누구인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장 천대받고 멸시받는 불우한 존재, 그가 바로 문둥이 아닌가! 그런 문둥이가 어떤 근거로 권력과 부와 명예의 대명사인 군주를 감히 가엾게 여기는 것일까? 한비자는 그런 문둥이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한비자가 알았다는 문둥이의 마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은 자신을 속일 수 없다는 점이다. 문둥이의 지혜는 정확한 한계의 인식에서 출발한다. 무슨 말인가? 문둥병에 걸리면 추방된다. 사랑하는 가족으로부터, 생존의 터전인 고향으로부터 축출되어 죽은 자처럼 살아야 한다. 그래서 문둥병자들은 자신의 병증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몸을 꽁꽁 동여매어 보지만, 나병균은 4월 벚꽃처럼 속절없이 피어나 신체를 갈아먹는다. 숨길 수 없다. 속일 수도 없다. 속성과 현상이 동일한 병, 그것이 바로 하늘이 내린 형벌, 문둥병이다. 문둥이는 더 이상 자신을 감출 수 없을 지경까지 내몰린다. 죽음의 상황 속에서 자유를 얻는다. 자유란 한계의 벼랑에서 뛰어내린 넉넉한 추락이다.


한비자는 이 점을 알았다. 권력의 핵심은 은폐성으로부터 나온다. 군주는 예측되어서는 안 된다. 그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싫어하는지 신하들에게 간파되면, 신하들은 자신의 이해득실에 맞게 계산에 들어갈 것이고, 한정된 공간에서 제한된 정보만을 듣게 되는 군주로서는 그들을 단도리할 여지가 없게 될 것이 뻔하다. 그렇다면 군주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법과 원칙 뒤에 자신을 숨겨야 한다.


법과 원칙 뒤에 자신을 숨긴다는 뜻은 무엇인가?

군주도 사람이다. 혈육에 묶여 있다. 좋고 싫음이 있다. 감정의 기복과 선입견에 좌우된다.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군주가 아무런 말도, 아무런 의사결정도 하지 않는다면 나라꼴이 어찌 될까? 뭔가 자신의 생각을 객관적으로 표출해야만 한다. 법과 원칙이 필요한 이유다. 법과 원칙은 명분이다. 명분은 보편적 기준이다. 누구나 설득할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는 잣대인 셈이다. 군주가 법과 원칙에 맞게 상과 벌을 내린다면, 자신이 무능하고 아프고 겁쟁이라는 사실에서 벗어나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보편성을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한비자는 이 점을 분명히 알았다.


국내외 권력구조는 수시로 변한다. 변화무쌍한 정치판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신의 입장을 최대한 노출하지 않아야 한다. 나와 적을 알면 백번 싸움에 나가도 두렵지 않다고 했다고 했다. 불확실성에 빠져있는 적은 두려운 상대가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불확실한 상황에서는 행동에 나서지 못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법과 원칙에 의거해서 명분있는 결정을 하는 군주를 만만한 상대로 여기기란 쉽지 않다. 인간은 천명, 윤리, 원칙 등 보편적 권위에 약한 법이다.


한비자는 읽는 내내 회사의 사내 정치가 투영되어 곤란했다. 특히, 그 동안 너무 솔직한 언행을 일삼은 나로서는 불안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문둥이가 나를 구원했다. 문둥이의 지혜가 나를 해방시켰다. 문둥이가 군주를 가엾게 여기는 것은 군주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싶어도 그래선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군주는 자유롭지 못하다. 한비자가 파고드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다. 군주를 법과 원칙 안에서 자유롭게 하고, 그 틈에서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를 숙고하라는 것이다. 나는 문둥이를 통해서 한비자의 기본 전제를 알았고, 그래서 더 이상 나를 다그칠 이유가 없었다. 한계를 정확히 알면 다양한 전략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기 때문이다.

 

한비자는 두꺼운 책이다. 나에게 그 두꺼운 책을 한 문장으로 줄이라고 한다면, 이렇게 할 것이다.

"군주여,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항상 기억하라!"  


인간은 하늘로부터 버림받은 존재이다. 생노병사와 전쟁이 그 증거다. 군주는 하늘과 인간 사이에서 가장 크게 버림받은 자이다. 문둥이와 같은 처지다. 그러나 문둥이가 문둥이라는 사실은 온 세상이 다 알지만, 군주가 군주라는 사실은 법과 원칙만이 보장해 준다. 군주는 자신의 문둥이됨, 즉 한계를 지닌 존재임을 알려서는 안 된다. 철저하게 불투명해야 한다. 불투명을 통해서 신하와 적국을 투명하게 만들어야 한다. 불투명과 투명 사이로 법과 원칙이 위치한다. 인간에게 법과 원칙이 필요한 이유다.


한비자는 이러한 밑생각을 깔고 패망하는 군주의 열 가지 잘못을, 노자의 도처럼 비우고 채워지는 권력의 속성을, 신하들을 통솔하고 파악하는 방법을, 법와 원칙에 의한 정치의 기술들을 당시의 시대 배경에 맞게 전달하고 있다. 사실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역사에서 사례를 찾아 제시한다. 또한 당대 주된 정치철학이었던 유가와 묵가의 한계를 정확히 진단하고 그 대안으로 법가의 장점과 남모르는 비애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두껍지만 부담스럽지 않은 이유다.


동양의 고전을 나같은 무지몽매한 사람까지 읽게 해 주신 김원중 교수님께 항상 감사드린다. 원전과의 싸움 없이 고전의 참맛을 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하지만, 선배들의 분투 속에서 후학들 중 누군가는 또다른 고전을 집필할 수 있는 역량을 얻게 되지 않을까. 매권과 편마다 해제를 달아 전체적인 내용의 대강을 이해시키고, 한비자의 핵심적 메시지를 요약하여 주신 덕에 길고도 긴 여정이 외롭거나 불안하지 않았다.


한비자의 생각이 오늘날 현실적인 대안으로 요청되는 이유는 그 인간관이 자본주의의 합리적 인간관과 닮아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인간에 대한 한계, 인간 본성의 민낯을 분식하지 않고 공개함으로써 사회적 제도의 필요성과 그 중요성을 부각시키기 때문이다. 보편적 권위를 어떻게 획득할 것인가에 대한 무거운 고민과 제안이 한비자로부터 나온다. 


최근 한국과 미국 정부는 한반도에 사드(THAAD, 미국의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를 배치하기로 전격 결정했다. 한비자라면 어떻게 했을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많은 분들이 이 책을 읽고 그 궁금증을 함께 풀어나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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