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평] 신의 나라는 네 안에 있다.
지금껏 책 제목을 「신의 나라는 “내” 안에 있다」로 알고 있었다. “내” 안에 있다와 “네” 안에 있다는 큰 차이가 있다. “내” 안에 있다는 선언은 주관적 확신만 있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선언이지만, “네” 안에 있다는 선언은 자신의 주관적 확신을 객관적 수준으로까지 끌어올려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과 삶을 반성하도록 기능하기 때문이다. 톨스토이 자신 안에 이토록 확고한 신의 나라는 무엇이었을까? 얼마나 실재처럼 느껴졌기에 지금 이 책을 읽고 있는 너에게도 그 나라가 당연히 있다고 선언하는 것일까? 어쩌면 이 제목은 독자들이 신의 나라를 느낄 수 없는 환경에 둘러싸여 있다는 현실인식에서 나온 것은 아닐까?
이 책은 톨스토이 자신이 머리말에서 밝혔듯이 「나의 신앙은 어디에 있는가?」 라는 책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비판에 대한 해명이다. 「나의 신앙은 어디에 있는가?」를 읽지 않은 나로서는 두 권의 책이 어떻게 얼마나 다른 지 알 수 없지만, 전체적인 주장의 맥락이 크게 다르지 않음을 옮긴이의 해제 등을 통해 쉽게 추론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톨스토이가 과감하게 너의 내부에도 존재하고 있다고 선언한 신의 나라란 어떤 것일까?
톨스토이가 말하는 신의 나라는 악에 대한 비폭력․무저항으로 표현되는 새로운 삶의 방식이다. 예수의 가르침이라고 하고 있지만, 결코 기독교 교리에 얽매이지 않는다. 오히려 국가와 교회를 밀어내는 저항의 천국이다. 톨스토이는 국가와 교회를 부정한다. 자연스럽게 국가를 전제로 한 징병제, 세금, 국교, 권력, 전쟁 등을 거부한다. 양심적 병역거부를 진정한 기독교인의 당연한 결정이라고 옹호한다. 러시아 정교회를 포함한 집합 개념으로서의 기독교 교회를 권력의 음흉한 사생아로 본다. 기독교 교리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천지창조, 노아의 방주 사건, 신의 아들로서 예수의 신성, 부활과 재림 등은 현재 이 시대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한다. 그를 이단, 정신병자, 아나키스트로 부르는 이유는 이런 과격한 주장 때문이리라.
톨스토이는 권력을 부정한다. 이것은 상식적 삶을 포기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20세기 초 러시아에서 국가와 정교회의 권력과 대항하면서 자신의 삶을 사막으로 내몬 것이다. 나는 어떤가? 국가와 교회가 항상 정의롭고 아름다운 결정을 하기에 추종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그냥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비겁하게 침묵하면서 기생하고 있는가? 이런 삶을 사는 자의 천국을 타자인 너에게도 있다고 선언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 책에 대한 가장 흔하고 강력한 비판은 ‘비현실적’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현실은 무엇인가? 파자(破字)해 보면, 현실(現實)이란 권력(玉)이 이것이 결과(實)이므로 이렇게 봐야(見)한다고 강요한 것 아닐까? 이것이 결론이므로 너의 마음을 여기에 짜 맞추어야 한다고 한 누군가의 이야기, 그것이 바로 현실이다. 그러므로 이 책이 비현실적이기 때문에 의미가 없다고 하는 비판 자체가 이미 이 책의 진가를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이 책이 간디와 루터 킹 목사 등 비폭력 운동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훌륭한 사람들이 읽었기에 우리도 따라 읽자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 책이 불편한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내가 놓치고 있었던 양심 혹은 폭력의 문제에 대한 자각이 일어난다. 이러한 자각이야말로 변화의 시작이다. 톨스토이는 이 변화를 말로만 주장하지 않았다. 자신의 삶을 통해 실천했다. 그것이 이 책을 읽게 하는 가장 큰 힘이다.
나를 나로 규정하는 일의 첫 단계는 양심적 결단이라고 믿는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나로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권력 기계의 부속품으로서 이익만을 계산하고 있다. 사람이 아니라 계산기로서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톨스토이는 권력 기계를 기계라고 선언하면서 인간으로서의 삶, 양심의 소리에 귀기우리면서 실천하는 삶을 살아냈다. 죽은 눈과 잔인한 이빨로 이웃의 목덜미를 노리는 좀비의 삶을 버리고 마치 아이처럼 틀린 것을 틀렸다고 아무런 계산 없이 기록했다. 옳은 결정을 하는 사람들을 응원했다. 그의 응원소리는 지금도 많은 양심들을 위로한다.
개인적으로 톨스토이의 예수관과 천국관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한 점은, 내 주장은 말에 그치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예수관과 천국관에 동의하지 않는 것 자체가 어떤 의미를 빚어내는가? 다르다는 바로 그 예수관과 천국관으로 나의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 그 점에선 나 역시 톨스토이에게 빚지고 있다. 그가 선언한 대로, 신의 나라는 “네”(독자인 나) 안에도 있으니 말이다. 그 나라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말이나 글이 아닌, 삶 전체가 필요하다고 이 책은 말한다.
옮긴이의 대단한 열정에는 박수를 보내지만, 아무래도 쉽게 읽히는 번역은 아니다. 원전이 어려워서 그런 결과가 나왔다면 할 수 없지만, 좀 더 의역을 하더라도 문장을 간결하게 다듬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본다. 반면 전체적인 책의 편집은 깔끔하다.
권력이 재봉한 인형의 삶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차분히 이 책을 읽는 것으로 시작하자. 권력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을 바꾼다는 것은 톨스토이의 삶이 말해주듯, 결단코 쉽지 않다. 순간적인 감상이나 호들갑으로 될 일이 아니다. 다시 태어나야 한다. 즉, 한 번은 꼭 죽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톨스토이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많은 분들에게, 특히 제도권 교회에 의해 세뇌당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는 기독교인들에게 강력히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