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세대를 위한 사기 - 미래를 준비하는 당신에게 권하는 인간학의 고전
사마천 지음, 김원중 엮음 / 휴머니스트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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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날을 미리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큰 재산도, 높은 명예도 쉽게 얻을 수 있을 테지만, 공평하게도 신은 인간이라면 그 누구에게도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 지난날을 기록하고 곰곰이 생각해보는 지혜를 인간에게 주었다.


사마천이 기록한 사기는 이러한 지혜의 보고로 수 천 년 간 인정 받아왔다. 긴 세월,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는 사실은 사기가 단순한 과거의 기록을 넘어 미래를 대비하는데 유용했음을 뜻한다. 미래가치가 없는 과거 기록을 누가 보존하겠는가.

 

그러나 사기 읽기는 만만치 않다. 일단 옛 중국의 글과 역사에 능통해야 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분량이 엄청나다.  새로운 세대를 위한 사기는 바로 이러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후학들을 위해 김원중 교수께서 간추리고 풀어한 사기의 입문서다. 이쯤 되면 청소년을 위한 쉽고 밋밋한 글을 떠올릴 수도 있다. 그러나 사기는 사기다. 사람이라면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삶의 지혜가 가득하다.

사람이 세상에서 실패하는 이유 중 하나는 자기 자신을 과대평가한다는 점이다. 보통 사람들은 남이 주는 점수보다 후한 점수를 자신에게 준다. 이것이 인생의 독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사건이 바로 치욕이다. 사기의 저자 사마천은 궁형을 당했다. 궁형은 남자의 생식기를 자르는 형벌이다. 한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자존감을 완전히 상실케 한다. 이것이 옛 부터 가장 수치스러운 형벌하면 궁형을 떠올리는 이유다.

사마천은 궁형이라는 치욕을 통해 세상에서 자신의 위치를 새롭게 잡아 나간다. 이를 세상에 처하는 방법, 즉 처세라고 한다. 위치가 달라지니 자연스레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도 달라진다. 새로운 정보는 새로운 해석을 낳는다. 사마천은 세상과 인생의 밑단에 흐르고 있는 지하수를 맛 봤다. 그것은 어쭙잖은 자존심이 아니다. 생명이었다. 단순한 생존이 아니다. 관계와 상황 속에서 명분과 함께 숨 쉬는 자세다. 명분은 항상 힘과 사람 사이를 오갔다.

사기를 읽으면서 가장 어려운 부분 중 하나는 서로 모순되는 가르침이 여기저기서 발견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노자와 장자에서는 무욕과 자유를 주장하다가, 진평과 이사에서는 출세를 위한 결단력과 기회포착을 말한다. 인생을 한두 가지 원리로 단정 짓는 것은 금물이다. 삶은 각 상황마다 독특한 뉘앙스를 내뿜는다. 당시 상황에 맞는 철학과 행동이 그 때와 장소에서 특별한 형태로 빚어진다. 모든 사태에 딱 들어맞는 만능열쇠 따윈 인생에 없다.

바로 이 지점에서 사기의 진가가 발휘된다. 사기는 절대반지는 없다고 선언한다. 각 상황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삶의 지혜가 잠시 반짝거릴 뿐이다. 다른 때와 장소에서는 당연히 다른 색깔과 속도로 반짝인다. 사기의 지혜는 치욕을 맛보지 않은 사람에겐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다. 죽지 않고 살아남아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인생 해설서가 바로 사기다. 삶에는 결이 있다. 지혜는 이 결 속에 칸칸이 쌓인 이야기 속에 저장되어 있다. 사기는 죽음과 치욕 사이에서 삶의 이유를 찾았던 한 사람이 편집한 생존법칙인 셈이다.

자칫 어렵고 딱딱해서 수박 겉핥는 식으로 읽기 쉬운 사기를 잘 풀이해주신 저자에게 감사드린다. 편집과 교열에 무리가 없다. 읽기 편하다. 청소년뿐만 아니라, 기존 사기의 무게와 난해함에 눌려 선뜩 용기내지 못했던 성인에게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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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스 해밀턴의 그리스 로마 신화 현대지성 클래식 13
에디스 해밀튼 지음, 서미석 옮김 / 현대지성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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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왜 신화를 만들었을까? 인간은 좀처럼 불확실성을 참지 못한다.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인간의 한계는 설명욕구를 만들었고, 설명욕구는 이야기를 낳았다. 그 어떤 사건이던지 이야기가 되면 고개가 끄덕여졌다. 설명된 사태는 인간을 위협하지 못한다. 이야기를 통해서 인간은 자신의 삶과 죽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번개, 풍랑, 일식, 화산폭발 등 도무지 알 수 없었던 자연현상까지 신이 되고 이야기가 되었다. 인간은 이야기로 과거를 해석하고 미래를 예상했으며, 결국 안정 속에서 현재를 살 수 있었다.


이런 이야기 중 그리스 로마 신화는 단연 독보적이다. 그리스라는 인류 태초의 이성과 로마라는 인류 역사상 가장 크고 오래된 문명이 함께 썼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 로마 신화는 인간만의 독특한 정신과 문명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정신과 영혼만을 찬양하거나, 물질과 육체만을 향락하지 않는다. 전쟁과 살육, 배신과 암투의 현상인 고대 국가에서, 정치공동체를 형성하고 운영하기 위해 꼭 필요했던 정치, 경제, 종교, 사회, 예술적 형식과 내용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특히 에디스 해밀턴의 그리스 로마 신화는 영어권에서 신화의 기준이 되는 책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는 단행본으로 전해지지 않는다. 다양한 이야기가 여러 형태와 버전으로 각 지역에 흩어져 있다. 따라서 이런 다양성을 어떤 관점에서 해석했는지가 매우 중요하다. 그가 쓴 서론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리스의 등장과 함께 인류는 우주의 중심이며 가장 중요한 존재가 되었다. 이것은 가히 사고에 있어서 혁명이었다. 이전까지 인간은 하찮은 존재로 생각되었다. 그리스에서 비로소 사람들은 인간이 무엇인지 처음으로 깨닫게 되었다.”


헤라클레스는 괴물들과 맞서 싸웠으며, 그리스가 인간 위에 비인간적으로 군림하는 기괴한 사상으로부터 세상을 해방시켰듯이 세상을 괴물들로부터 구했다.”


생각하는 인간에게 자유는 가장 중요한 권리다. 당연히 신화를 구성해 나가는 핵심 원리 중 하나다. 이것이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신들도 죽는 이유다. 그들도 한계가 있다. 어떤 일은 할 수 있지만, 어떤 일은 할 수 없다. 신이라고 불리지만, 히브리의 유일신과는 달리 전지전능하지 않다. 어딘가에 묶여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신이다. 왜냐하면 자유를 위해 도전하기 때문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의 신들은 인간정신의 다양한 특성들을 인격화한 셈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신화가 탐난다. 신화 속엔 나이 듦에 따라 발견되는 인간의 진면목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신을 핑계대면서 자신의 욕망과 한계를 조율하고자 했다. 현실과 이상을 하나의 이야기 속에서 화해시키고자 했다. 제우스, 헤르메스, 아프로디테 등은 이러한 조율과 화해의 흔적들이다.


현대지성은 좋은 번역자를 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탁월한 원전을 충실한 번역이 지지해 주니 나 같은 게으른 독자에겐 더 없이 행복한 일이다. 언어의 장벽이 기존 생각의 틀을 넘어 또 다른 의미를 불러내는 기회가 되도록 애써준 번역자에게 감사드린다. 중간 중간 등장하는 신화관련 명화와 조각상 사진은 흥미를 높이고 상상력을 자극한다. 무시할 수 없는 두께의 서양고전을 합리적인 가격으로 국내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출판사의 마음 씀에도 고개 숙여 사의를 표한다.


일리아스부터 만화까지 신화를 담은 책들은 많다. 하지만 그리스 로마 신화라는 카테고리 안에서 전체적인 이야기의 구조를 쉽게 파악하면서 깊이 있는 설명까지 얻을 수 있는 책은 흔치 않다. 혼자서 소파에 기대 앉아 편히 만날 수 있는 그리스 로마 신화는 더욱 드물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처음 도전하시는 분들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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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로 읽는다 세계 5대 종교 역사도감 지도로 읽는다
라이프사이언스 지음, 노경아 옮김 / 이다미디어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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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일련의 정치적 사건을 보면서 다시 한 번 종교의 힘을 느낀다. 무당이라고 하는 샤머니즘도 그 체계적 형식이나 교리적 내용면에서 투박하고 원시적이지만 엄연한 믿음이요, 신념이다. 인간이 믿음을 바탕으로 인지구조를 설계하고 선악 판단 등 가치관을 형성한다는 일반적 설명이 옳다면, 어떤 사람과 사귈 때 그 사람의 종교를 아는 것은 매우 유용하다. 어릴 때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면 다른 사람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선택을 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더 이상 에둘러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은 이에 대해 너무나도 많은 것을, 너무나도 분명하게 시사해 준다.

 

종교란 무엇인가? 종교는 초월적인 신념이 지리적 환경 그리고 역사문화적 가치관과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체계화된 제도다. 이러한 개념 정의에 따르면 종교는 생명체와 유사하다. 그 발행지역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으면서 진화하기 때문이다. 종교가 그 역사와 규모를 확장할수록 개인을 넘어 부족, 지역, 국가에 이르기 까지 엄청난 영향력을 미침을 우리는 수많은 종교전쟁을 통해 잘 알고 있다.

 

지금까지 설명한 종교의 중요성을 미뤄 볼 때, 이 책은 대표적인 종교에 대해 얇고 빠르게 정리하고 싶은 독자를 위해 기획되었다. 세계 5대 종교, 즉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 힌두교, 불교의 발상지에서 출발해, 그 역사적 발전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할 수 있도록 간단명료하게 구성되었다. 특히 각 종교별 핵심 정보를 사진과 도표 등으로 컬러풀하게 설명해 낸다. 처음 책을 받았을 때 생각했던 것보다 두께가 얇고 문장간격이 시원시원하게 배치되어 읽기가 좋았다. 다만, 평소에 종교에 관심이 있어 종교별로 다른 책도 몇 권 읽었다면 사실 너무 쉽다. 자신이 가진 종교적 지식과 소양을 잘 파악한 후 선택해야 한다.

 

아이들이 무슨 책을 읽는지 묻기에 사진을 중심으로 몇 페이지 함께 봤다. 이미지 때문인지 퍽 관심 있어 했다. 중간 중간, 아빠의 상세하지만 잔인하고도 긴 설명만 없었다면 진도를 더 나갈 수 있었을 텐데 아쉽다. 이 사건을 밝히는 이유는 이 책이 아이들에게도 잘 읽힌다는 점을 말하기 위해서다. 세계 뉴스, 경제, 전쟁 등을 이해할 도움이 되도록 목차 자체가 그렇게 설계되어 있다. 신문을 통한 학습을 할 때, 혹시 종교관련 이야기가 나온다면 이 책을 함께 놓고 토론해도 좋으리라 생각해 봤다.

 

어떤 사람이 직선적이고 결정론적 세계관을 가진 유일신교를 믿는지, 아니면 순환적이고 관계론적인 다신교를 믿는지에 따라 완전히 다른 우주에 사는 사람이 된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화해나 용서가 불가능한 경우도 있다. 그래서인지 대부분의 문명국가는 헌법에 종교의 자유에 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종교가 한 사람의 인격형성에 중요한 요소이자,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상대적 성격임을 최상 법에서 확인함으로써 극단적인 대립을 막고자하는 취지일 것이다.

 

인간은 믿음의 존재다. 종교는 그 중심에 있다. 기초적인 교리와 특징을 안다면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가 좀 더 분명하게 설명된다. 결국 사람이 제일 중요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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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을 위한 한국고전문학사 - 상고부터 조선까지, 단군부터 홍길동까지, 2016년 개정증보신판
류대곤.김은정 지음 / 미다스북스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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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은 얼마나 중요한가! 뚝배기보다 장맛이라고 하지만, 뚝배기와 장()은 일단 잘 어울린다. 하지만 된장뚝배기에 담긴 최고급 와인을 생각해 보라. 상상만 해도 인상이 구겨진다. 제대로 뭔가 되려면 기본도 물론 중요하지만, 가치를 극대화시키는 도우미들도 꼭 필요하다. 특정 개인을 만족시킬 목적이라면 더욱 그렇다.

 

서평을 쓰면서 형식 타령부터 하는 이유는 이 책이 학생시절 수도 없이 봤던 참고서 형식이었기 때문이다. 이 책을 통해 편집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딱 읽기 싫었다. 삽입 그림과 좌우에 나열된 주석도 그렇고 무엇보다 제목자체가 교과서 그 자체였다. 그제야 제목에 청소년을 위한이라는 수식어와 임용고시필독서’, ‘수능국어필독서가 왜 책 표지에 크게 있는지 알게 되었다.

 

40대 하고도 중반. 시험용 참고서처럼 편집된 한국고전문학사를 읽는 기분은 묘했다. 사실 이 책을 읽게 된 계기는 얼마 전에 읽었던 한국 신화의 재미 덕분이다. 고전문학은 신화에서 풀려나와 보다 예술적으로 다듬어진 형태다. 특히 고대 가요, 향가, 한시, 설화 등 소위 상고 시대의 문학작품을 읽는 재미는 쏠쏠하다. 구지가, 공무도하가에서 학생 땐 느끼지 못했던 원초적인 감정이 느껴진다. 큰 딸 말처럼, 시험을 보지 않기에 느끼는 행복일 게다.

 

그렇다. 독서에 본령이 있다면 행복일 것이다. 우리 조상들이 노래했던 삶의 맛을 느끼는 행복, 이것이 이 책의 본령이다. 인용된 원문을 여러 번 읽었다. 짧지만 감동은 길었다. 오늘날 전혀 쓰지 않는 단어들은 긴장감을 자아냈지만, 입에선 꿈틀꿈틀 리듬이 느껴졌다. 머리가 맑아졌다.

 

나는 허난설헌을 좋아한다. 그녀가 지은 규원가의 한 토막이다.

도로혀 풀쳐 혜니 이러ᄒᆞ여 어이ᄒᆞ리. 청등을 돌라 노코 녹기금 빗기 안아, 벽련화 한 곡조를 시름 조ᄎᆞ 섯거 타니, 소상야우의 댓소리 섯도ᄂᆞᆫ ᄃᆞᆺ, 화표 천 년의 별학이 우니ᄂᆞᆫ ᄃᆞᆺ......"

 

맞춤법이 틀렸다고 빨간 밑줄이 아우성이지만, 흐뭇하기 그지없다. 참 좋다. 맞다. 나는 이런 행복을 위해 이 책을 읽겠노라고 손을 번쩍 들었다.

 

읽다보니 왜 진작 이렇게 고전문학을 공부하지 못 했나 아쉽다. 참고서와 비슷한 편집 때문에 읽기를 거부하는 중년 남자는 나 혼자만은 아닐 것이다. 시험 중심의 공부에서 해방되어 큰 소리로 우리 조상의 글을 읽는 재미는 우리 민족만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이다. 감수성이 만발했던 그 때 그 시절에 이렇게 옛 글을 만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기출문제가 아니면 그 가치를 몰랐던 그 때가 너무 아쉽다. 조상님께 송구하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다시 편집해서 중년들을 위해 소개하는 건 어떨까? 시장성이 많이 떨어지려나. 책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를 한다면 어렵겠다. 하지만 중년들의 입속에 춤출 우리 옛 글을 생각해 보면 한 번 도전해 볼 만하지 않을까.

 

덕분에 추억여행을 했다. 게다가 흥얼거리면서 옛 사랑과 정취에 흠뻑 취했다. 편집자에게 깊이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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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허 (완역판) - 그리스도 이야기 현대문화센터 세계명작시리즈 47
루 월리스 지음, 심은경 옮김 / 현대문화센터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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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상에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하는 종교는 모두 세 가지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이들은 모두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강력히 주장한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점은 왜 중요할까? 그 이유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아브라함의 후손이란 하나님께 선택받은 사람의 후손이란 의미다. 하나님께 선택된 인간! 이만한 삶의 명분이 또 있을까. 그래서 이들에게 누구의 아들이란 이름은 살아야할 명분 그 자체다.

 

벤허는 허의 아들이란 뜻이다. ‘’(Huh)는 성경에 등장하는 의 영어식 발음이다. 훌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아말렉이라는 이방 민족과 전쟁할 때 모세를 도왔다. 이스라엘과 아말렉의 전쟁은 피비린내 나는 전쟁임에 분명하지만 우스꽝스럽게 전개된다. 모세가 팔을 올리면 이스라엘이 이기지만, 내리면 진다. 훌은 아론과 함께 모세의 팔을 떠받쳤다.

 

소설 벤허는 그리스도의 탄생을 계시받은 동방박사 세 사람의 신비로운 만남 장면에서 시작한다. 벤허는 예수가 태어난 로마시대를 살고 있다. 모세와 허의 관계처럼 그리스도와 벤허 또한 만나게 될까? 만난다면 언제 어디서 일까? 이방인과의 싸움터일까? 로마는 아말렉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구약의 그리스도로 불리는 모세가 그랬던 것처럼 예수도 누군가에게 의지해야 할까?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다투어 이겼다는 뜻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출발한 민족이다. 하나님과 싸워 누가 이길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사가 그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했다면, 그건 분명 하나님께서 일부러 싸움에서 져주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리라. 이스라엘은 곧 하나님의 배려요, 용서하심의 증거자로 이 땅에 존재한다.

 

벤허도 마찬가지다. 자기이름 없이 그저 누군가의 아들로 불린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처럼 그도 누군가의 배려와 용서를 보여주기 위해 살아야 함을 보여주는 건 아닐까? 벤허의 삶은 그야말로 한 순간 우연한 사건을 통해 나락으로 떨어진다. 이스라엘의 명문 귀족 집안의 도련님에서 사랑하는 어머니, 아직 어린 여동생은 고사하고 자기 몸조차 보호할 수 없는 노예가 되어 버린다. 이러한 비극은 로마 총독 머리 위로 떨어진 기와 조각에서 비롯되었다. 어쩌면 인간의 비극적 운명이란 중력이 만든 우연의 산물일지도 모른다.

 

켈리선의 노예. 노예는 배가 움직이도록 노를 젓는다. 그러나 배가 어딜 향하는지는 모른다. 그저 북소리에 맞춰 같은 노동을 반복할 뿐이다. 우리의 삶도 다르지 않다. 매일 같은 노동을 한다. 그러나 어디를 향해 가는지 모른다. 같은 면이 있다면 모두 죽음 앞에 놓여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왜 죽어야만 하는지는 묻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죽음을 피할 수 있을까만을 질문하다가 결국 죽는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죽은 자로 태어난다. 노예는 죽은 자의 근육이다.

 

죽은 자의 근육에 불과한 노예가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사랑이 필요하다. 그 사랑은 노예가 받을 만한 것이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노예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 따지지 않는다. 거저 준다. 계산하지 않는다. 이런 사랑만이 진정한 자유를 만든다.

 

문둥병은 인간이 본래 죽은 자로 태어남을 보여준다. 하늘로부터 버려진 존재. 그래서 땅의 노예로 살면서 하늘을 그리워하는 인간. 그것이 밖으로 표출되어 더 이상 감출 수 없게 된 가장 솔직하고 건강한 몸, 그것이 문둥병자다. 벤허는 어머니와 동생이 문둥병에 걸렸다는 사실에 절망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존재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죄 없이 대신 죽는 하나님의 피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

 

영혼의 구원자마저 속세의 억압을 타파할 전략적 대상으로 삼는 인간.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에게 휘둘리지 않고 묵묵히 죽을 뿐이다. 그리고 다시 살아난다. 버려진 자로 살아가는 인간들을 자신의 몸 안에 넣어 구원한다. 진짜 인간은 자기 몸을 열어젖힌 사랑으로 창조된다. 반면, 하나님은 인간의 도움을 필요치 않는다. 모세의 팔은 훌이 떠받쳐야만 버틸 수 있었을까? 모세의 팔은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었다. 어쩌면 모세의 팔이 땅으로 떨어질 때 비로소, 하나님만의 승리가 꽃처럼 피었으리라.

 

벤허가 영화인 줄만 알았다. 영화사에서 명장면 중 하나로 손꼽히는 전차경기는 더 이상 짜릿하고 황홀한 승리만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복수하려는 인간 본성이 문둥병마저 치료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대비를 이룬다. 피 사랑이 없다면 아무리 큰 승리를 거머쥐어도 인간은 언제나 문둥병자에 불과하다.

 

눈을 떼지 못하고 읽었다. 이 책은 상세한 풍광과 인물 묘사까지 놓치지 않고 번역해 원작의 완성도를 그대로 전달했다. 소설 벤허를 통해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사랑과 복수 사이에서 문둥병처럼 감출 수 없는 죄악이 어떻게 치료되고 용서받는지 느꼈다. 인간은 믿지 못할 존재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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