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0학년 수학 - 고등 수학을 위해 반드시 봐야 할 예비 고1~3용 중학 수학 과정 총정리
김우섭 지음 / 키출판사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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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셋이다. 이 책은 셋 모두에게 필요하다. 특히, 학교와 학원에 과외까지 수학에 시간과 열정을 온전히 투자하고 있는 고1 딸에게 꼭 필요하다고 느꼈다. 수학은 추상적인 개념을 숫자와 도형 등으로 시각화한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주는 셈이다. 처음 수학을 배울 때 어려운 부분이 바로 이 점이다. 분명히 글로 써 놓은 개념을 읽었는데 딱 떠오르는 그림이 없다. 개념을 대충이라도 이미지화할 수 없으면 수학은 어려워진다. 개념 없이 문제를 푼다는 건 설령 정답을 맞쳤다고 해도 금방 흥미를 잃기 십상이다.

 

이 책을 처음 소개받았을 때 생각났던 건 살만 칸의 공부방법이다. 그는 나는 공짜로 공부한다에서 수학을 낙오자였던 조카에게 대수학을 가르쳤던 경험을 자세히 소개했다. 칸은 이렇게 말한다. “수학은 교육과정이 전부 연결되어 있어서 아주 쉬운 개념이라도 한 가지를 놓치면, 반드시 그 다음 단계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그래서 처음부터 공부를 차근차근 빠짐없이 해야 한다.” 고등학교 0학교의 저자도 이와 같은 관점에 서 있다. 중학교 수학과정 어느 한 부분이 막히면 고등학교 수학을 푸는데 반드시 문제가 된다. 그걸 해결하고 넘어가자는 기획 의도가 돋보인다.

 

아이의 자존심이 상하지 않도록 잘 이야기 했다. 여름방학 때 이 책으로 쫙 기초를 잡을 예정이다. 혼자해 보라고 격려한다. 그만큼 책이 친절하고 자상하다. 일단 이 책은 한 달 안에 끝낼 수 있도록 배려되어 있다. 그리고 수학을 눈으로 보여주기 위해 그림을 많이 사용했다. 풀이 과정도 색깔별로 상세히 잘 되어 있다. 잘 아는 내용은 넘어가도 된다. 하지만 공부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은 뭘 알고 뭘 모르는지 그 구분이 잘 서지 않는 것이다. 이 책은 그걸 찾는데 좋은 나침반이 되리라 생각한다.

 

피타고라스처럼 온 우주를 숫자로 설명할 수 있다고 믿지 않더라도, 숫자는 경이롭다. 수학은 우리 뇌를 고차원으로 끌어올리는데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수포자, 즉 수학학습 포기자가 속출하는 요즘 이 책이 많은 학생들에게 꿈을 주었으면 좋겠다. 인공지능이 다 할 계산을 왜 배워야 하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의 지적 특이점은 바로 추상화 능력을 극대화하고 그것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때라고 한다. 수학은 바로 추상력과 논리력을 수와 도형으로 표현하고 설명하는 능력을 길러준다. 단순한 계산 능력이 아니라, 논리적으로 추론하고 증명할 수 있는 능력개발에 수학은 단연 으뜸이다. 특히 중학교 수학의 기본개념들은 바로 그 작업의 출발점이다.

 

사실 나도 이 책을 통해서 내심 한 번 다시 수학을 맛볼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설렘을 동시에 가졌다. 아이들과 수학을 가지고 놀 수 있다면 얼마나 놀라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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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 인생을 위한 고전 명역고전 시리즈
공자 지음, 김원중 옮김 / 휴머니스트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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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알고 있듯이, 고전은 읽을 때마다 울림이 다르다. 더 깊고 커진다. 그러한 울림의 누적이 적게는 몇 백 년, 길게는 몇 천 년 계속되었다. 따라서 고전은 인간이라는 집단지성이 함께 쓴 책이라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독자가 빼곡하게 채워놓은 고전의 행간은 여전히 넉넉하다. 우리가 고전을 통해서 발견하고 창조해낼 의미와 가치가 아직도 많이 남은 셈이다.  

 

논어는 고전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채워나갈 공동작품이다. 그렇다고 함부로 해석할 수는 없는 법. 그 본령에 어긋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렇다면 논어의 본령은 무엇일까? 공자의 사유는 인()에서 출발한다. 우주의 원리인 인()은 이 땅에서 예()로 태어난다. ()는 나의 삶에서 충()과 서()라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실현된다. ()이 우주를 구성하고 만물과 사람이 맺어야 할 관계의 근본이라면, ()는 사람이 다른 사람과 맺은 관계가 인()의 관점에서 옳은지 틀린지를 판단해 주는 기준역할을 한다. 충서(忠恕)는 예()의 구체적인 행동지침이지만, 그 속에는 인()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논어의 울림은 나에겐 엄격해지도록, 이웃에겐 유연해지도록 돕는다. 우리 사회는 개인적 기능을 더 높게, 더 빠르게, 더 강하게 만들고자 한다. 마치 운동경기의 응원구호를 연상케 한다. 여기에는 인간정신과 관계까지 관리하고 통제하려는 유물론적 사고가 깔려있다. 현대인의 뇌는 근육과 다르지 않다. 누가 센지 경쟁하고 이긴 사람에게 너무 큰 보상을 몰아준다. 이에 따라 경쟁은 치열해 진다. 치열한 경쟁은 이웃보다는 나에게 집중하게 한다. 밖이 너무 삭막하니, 자꾸 내면으로 들어간다. 나를 채찍질하다가 위로하며, 타이르고 윽박지르다가 쉼과 치유를 찾는다. 그 가운데 TV와 대중문화가 있다. 우리는 TV속에서 이웃의 아픔을 본다. TV로부터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듣는다. 그러나 보고, 들을 뿐, 생각하게 하는 힘을 주진 않는다. 잠깐 반짝이다 커지는 꼬마전구 같다. 다음 날, 우린 이렇게 말할 뿐이다. “어제 그거 봤어?”

 

내 손에 들려 있는 논어는 그렇지 않다. TV와 다르다. 생각하게 한다. 그 생각이 한계에 부딪치도록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스스로 질문하고 답을 찾도록 돕는다. 내가 내 놓은 답을 이웃에게 전하고 싶도록 한다. 이웃은 어떤 답을 가졌는지 궁금하게 만든다. 모임을 만들고 이웃을 만든다. 그 모임과 이웃들은 이 우주에 단 하나 뿐인 고유한 이야기를 만든다. 이게 고전이 주는 행복 아닐까.

 

그렇다면, 당신이 만난 논어는 뭐냐고 묻고 싶을 게다. 수도 없이 많지만, 딱 두 가지만 소개한다.

첫째, 우리 책 73쪽에 나오는 내용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사람이면서 믿음이 없다면, 그것이 옳은지 모르겠구나. 큰 수레에 예(끌채)가 없고, 작은 수레에 월(끌채)이 없다면, 그런 수레를 어찌 몰고 갈 수 있겠느냐?”

 

이 내용을 수레를 끄려면 끌채가 있어야 하듯이, 사람을 내 뜻대로 움직이고 싶으면 그 사람의 신념체계를 알아야 한다.’고 읽으면 곤란하다. 왜 곤란한가? 공자의 믿음을 보면 알 수 있다. (), (), 충서(忠恕)가 오롯이 하나 된 믿음이 공자의 믿음이다. 그런 공자가 사람 작동법을 말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오늘 논어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자기가 믿는 대로 말하고 행동한다. 믿음이 바로 그 사람인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너를 움직이게 하는 믿음은 무엇이냐? 그 믿음은 어디에서 왔느냐? 그 믿음은 온전한 것이냐? 그 믿음으로 이웃을 아프게 하지 않았느냐? 너는 네 믿음에 맞는 것만 옳다고 하지 않느냐? 너는 네 믿음을 진리로 생각해 이웃과 친구에게 강요하진 않았느냐? 누군가 수레를 끌기 위해 끌채를 부여잡는 것처럼, 그 어떤 존재가 너를 끌기 위해 허망한 믿음을 주었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셈인가?’나는 이렇게 하기로 한다. 지금 내가 옳다고 확신하는 것들을 찬찬히 비판적으로 검토해 본다. 그 생각한 것들을 쓴다. 내가 쓴 것을 다른 책들과 비교하며 공부한다. 공부한 내용을 친구들과 나눈다.

 

둘째, 우리 책 105쪽에 나오는 내용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교과서에도 등장하는 유명한 구절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르게 읽혔다. 논어답다. 오늘 논어는 이렇게 말했다.

아침에 도를 들었다는 것은 이미 내가 非道를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말이다. 내가 들은 가 과연 진짜 일까? 내가 꾸며낸 가짜 일 가능성은 전혀 없는가? 그걸 가능이 크다. 아니, 어쩌면 내가 들은 는 항상 가짜일 수 있다. 그래? 상황이 그렇다면 너는 어떤 선택을 하고 싶은가? 어차피 진짜 를 알 수 없으니까 아무렇게나 살 것인가?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숨과도 맞바꿀 만한 의미와 가치를 찾아 나갈 것인가?’나는 후자를 선택한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심정으로. 장황설이라고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 쯤 되면 논어는 내 것이다.

 

나는 논어를 원어로 읽을 능력이 없다. 김원중 교수님은 이러한 후학들에게 보다 쉽게 고전을 풀어 주셨다. 자신의 해석을 고집하지 않고, 너도 한 번 도전해보라면 원어를 함께 적었다. 한글만 있거나, 한문만 있으면 아무래도 없는 쪽이 궁금하기 마련이다. 한글 번역과 한문 원어를 비교하면서 나름의 해석을 해 보는 것도 재미있다. 논어와 같은 고전은 하드커버가 좋다. 오래, 자주보기 때문이다. 시원시원한 편집 덕분에 책에 이런저런 메모를 할 수 있었다. 이런 메모들이 모여, 나중에 나만의 논어로 묶여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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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소매틱스(Somatics, 몸학)를 배웠다. 여기서 몸이란 유물론적 물질이 아니다. 전체적이고 통합적인 인간 몸의 총칭이다. 나와 너의 1차적 구별은 몸의 차이점이다. 몸에 따라 사건에 대한 반응 양식과 그 해결책이 달랐다. 기억도 해석도 달랐다. 이렇게 몸에 대한 이해와 신비가 깊어갈수록, 몸을 구성하고 있는 세포에 대한 관심과 경외감이 따라 높아지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이 책의 서평을 써야겠다고 결정하게 만든 동기 중 하나다.

 

물질이 더 이상 쪼개지지 않는 최소 단위, 원자로 이뤄졌다는 생각은 뉴턴의 창작물이 아니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로 불리는 많은 사람들이 우주의 구성 기본단위들을 고민했고, 나름 제시해 왔다. 엠페도클레스는 물, , , 공기를 제시 했다. 이런 4원소를 현대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엉성하고 유치하기 짝이 없지만, 그들이 체험한 시각정보와 인식체계를 고려한다면 설득력 차원에서는 오늘날 우리에게 결코 뒤지지 않는다. 여전히 우리는 우주 삼라만상의 기본단위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 그러나 현미경의 발달에 힘입어, 우리는 그들과 전혀 다른 시각정보를 갖게 되었다. 급기야 생명의 기본단위라고 부를만한 그것을 보았다. 로버트 훅은 그것을 세포라고 불렀다.

 

큰 딸 아이가 감탄사를 그만 좀 해주웠으면 부탁할 정도로 이 책이 제공하는 사진들은 경이로웠다. 무엇을 본다는 것은 사고를 구체적으로 만든다. 본 것을 그리도록 만들고, 그리려면 관찰에 관찰을 더해야 한다. 보이는 것의 부분과 전체를, 그 관계와 비율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이름도 생소한 차등간섭위상차현미경, 주사전자현미경, 투과전자현미경으로 찍은 다양한 세포 사진들은 천문학 관련 다큐멘터리에서 보았던 별을 닮았다. 치밀하게 설계되어 있었고, 그 어떤 건축가도 실현하지 못할 디자인으로 꼼꼼하게 건축했다. 물론 세포염색기술이라는 인위적 간섭이 없진 않지만, 내 몸 안에, 우리 집 강아지 안에 그리고 땅과 공기 속에 저렇게 아름답고 독보적인 생명체들이 가득 차 있다니 놀라울 뿐이었다. 나아가, 그걸 사진으로 찍어 지금 내 눈으로 볼 수 있다니. 생명을 다룬 그 어떤 철학적 설명과 감동적인 영화보다 생명에 대한 경외감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생명의 근원이 우주 운석에서 발견된 핵 염기이지, 별똥별에 묻어 들어온 단백질의 구성요소, 아미노산인지 알 도리는 없단다. 그러나 분명 우리는 몸을 가지고 산다. 그 몸은 세포로 이뤄져 있고, 그 세포는 자신이 해야 할 역할과 있어야 할 위치를 잘 알고 있다. 세포분열시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상은 세포의 자살에 힘입은 바 크다고 한다. 세포는 자기 자신을 전체와 구별해서 인식하지 않는 모양이다. 어떤 세포의 죽음은 전체 몸에게 있어선 오히려 자연스런 삶의 과정이다.

 

생식과 유전, 진화를 둘러싼 인간의 노력은 단 한 번도 멈춘 적이 없지만, 우리가 잊고 있는 사실 중 하나는 현대 인간의 삶이 너무나 파편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전제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그 전체가 나아가는 방향과 의미를 현대인은 알지 못한다. 아니,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각 세포가 전체 몸을 위해 자리 잡고 움직이듯이, 개인이라는 나는 어떤 목적에 이끌려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나의 위 세포는 내 얼굴을 모른다. 내가 무슨 음식을 먹는지도 모른다. 내가 좋아하는 혹은 싫어하는 음식도 모른다. 그러나 위 세포는 단 한 번도 이에 불만을 표시하지 않고 그냥 일하다가 스스로 죽어갔다. 그 자리를 자신의 후손이 다시 담당하게 되더라도 세포는 전체를 미워하지 않는다. 그냥 그곳에 있을 뿐이다. 그 있음이 그의 의미다. 인간만이 이러한 철학을 거부하는 듯하다.

 

몸에 좋다는 콜라겐, 몸에 나쁘다는 지방도 모두 세포였다. 그들의 면면을 보니, 인간의 편견이 얼마나 가소로운지. 이 책의 사진들은 단순히 감탄사만 만들지 않는다. 사진 너머에 있는 인간중심의 패권주의가 생명을 얼마나 경멸하며 돈벌이에 이용하고 있는지를 고발한다. 물론 저자에게는 뜻밖의 반응이겠지만.

 

아내와 아이들에게 사진을 중심으로 책을 소개했다. 생물교과서에서 봤다면서 시큰둥했다가도, 쉴 새 없이 펼쳐지는 세포들의 화려한 퍼레이드에 놀라는 표정이다. 게다가 깨알 같은 설명을 읽고 나면 한 번 더 놀랄 수밖에 없다. 저렇게 아름다운 형형색색의 표정들이 대장균, 탄저균, 식중독균이라니. 우리의 병은 이들과의 관계에서 비롯된다.

 

초등학생이나 중학생 자녀가 있다면 꼭 함께 읽었으면 좋겠다. 읽으면서 생명의 경외감은 물론 인간 중심의 가치체계에서 벗어나는 이야기를 나눴으면 한다. 이 지구는 호모 사피엔스 혼자의 것이 아니다. 개체 수만 보자면 단세포 생물이 지구의 주인일 수도 있다. 인간은 주변 이웃 생물들에게 너무 가혹한 존재는 아닐까. 작지만 엄연히 살아 숨 쉬고 있는 세포들과의 관계도 생각할 수 있도록 마음의 지평을 열어준 저자에게 깊이 감사한다. 작디작은 세포와 크디큰 우주의 세계가 닮아도 너무 닮아있음에, 그 사이를 생각과 이야기로 연결하려는 인간으로 살고 있음에 감사한다. 생명은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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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다시 읽는 친절한 세계사
미야자키 마사카츠 지음, 김진연 옮김 / 제3의공간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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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세상에는 삶이 굴러가는 기본 틀이 있다. 이러한 기본 틀은 주어진 자연환경과 오랜 세월 적응해 얻은 해법이요, 주변 사람들과 치열하게 조율해 온 이해관계의 결과물이기에 좀처럼 잘 바뀌지 않는다. 그 중 세계사는 가장 큰 틀이다. 환경과 이웃 사이에서 각 공동체들이 그린 욕망의 동선을 대륙단위 혹은 바다중심으로 묶어 다시 그린 초대형 그림이다. 어떤 것은 다른 공동체에 의해 억지로 그려져 속상하겠고 어떤 것은 스스로 그렸다며 자부할 수도 있겠지만, 그 그림들이 오늘을 살고 있은 각자의 개인사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음은 분명하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세계사를 다룬 책을 얼마나 읽었는지가 궁금해 서재를 둘러보았다. 책 제목 때문이다. ‘처음부터 다시 읽는다고 하니 앞서 뭘 읽었을까 궁금했고, ‘친절한세계사라고 하니 비교대상도 필요했다. 세계사를 거시사와 미시사로 나눌 때, 미시사로 분류될 만한 것 중에는 총, , , 커피, 설탕, 사전, 빵 등으로 사람 사는 이야기로부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꿴 것도 있고, ‘역사란 무엇인가처럼 역사 담론 자체를 다룬 것, 서양이 세계를 지배하는 이유, 문명의 충돌 등 문명사, 철학사, 종교사 등 거시사에 해당할 만한 것까지 30여권 쯤 보였다. 나름의 방법에 따라 다른 풍경과 맛을 보여준 좋은 책들이다.

 

앞선 30여권의 책들과 비교할 때 이 책의 장점은 무엇일까? 나는 주저 없이 책머리에 수록된 지도로 보는 세계의 역사와 지리라고 말한다. ‘세계 지역을 구분하는 명칭’, ‘대지구대에서 4대 문명으로’, ‘기마유목인에 의한 유라시아의 일체화10여장의 그림에는 두루뭉술하여 뾰족하게 사용할 수 없었던 세계사의 주요 굴곡들이 지도와 도표로 단순화되어있다. 단순화는 장단점을 모두 가지고 있다. 일목요연한 정리가 가능한 반면, 다양한 맥락을 놓쳐 역사를 기계적 환원주의로 해석할 위험성도 있다.

 

그러나 세계사 공부에서 빼놓을 수없는 학습방법 중 하나는 과감하게 맺고 끊은 후, 그 범주 내에서 나름의 역사적 의미를 유기적으로 엮는 훈련이다. 이에 동의한다면 단순화를 통해 나름대로 시대와 지역을 확정하는 것이 세계사 공부의 첫걸음이라는 생각에도 크게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그 후에 여기서 저자의 관심과 방법론에 따라 달리 해석될 수 있는 부분들, 그래서 왜곡되거나 빠졌다고 쟁점화 될 수 있는 초경계적 사건들을 보충하면서 자신만의 식견을 만드는 것이 효과적이다. 이를 통해 초기의 단순 범주가 끊임없이 허물어지고 다시 세워진다. 따라서 세계사적 의미 또한 변화를 거듭한다. 이 과정이 세계사 공부의 백미라고 생각한다. 선생님들께서 사건의 발생 연도를 외우라고 하셨던 이유를 이제야 좀 알 것 같다.

 

이 책에는 중간 중간, 세계사를 관통하는 키포인트 35개가 놓여 있다. 짧지만 역사의 맥을 짚는데 유용하다. 놓치기 쉬운 배경지식은 ‘1초 리뷰를 통해 보충하고 있다. 키포인트와 1초 리뷰를 머리에 넣고 앞으로 돌아와 지도로 보는 세계의 역사와 지리를 이리저리 살피다 보면, 역사 속 인물들이 살아나 말을 달리고 함성을 지르고 고민하고 있는 상상이 펼쳐진다. 역사에 관심 있는 대중들에게 학문적 보편성과 엄밀성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세계사를 보다 쉽게 전달하고자 노력해 온 저자의 열정과 노하우를 살펴볼 수 있는 부분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 책은 좀 제대로 된 세계사를 공부하고자 하는 분들에게 추천할 만 하다.

 

중간 중간 들어간 삽화와 지도들은 단락마다의 핵심 이해에 큰 도움이 된다. 텍스트 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부분은 음영으로 구별해 복습할 때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 물론 초급 입문서인지라 거칠게 요약된 부분이 없지 않다. 그러나 한 권으로 세계사 전체의 맥을 잡는다는 기획의도로 볼 때, 양과 질 두 가지 모두를 잡았다는 평가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세 아이의 아빠로서 중고등학생들이 교과서를 읽기 전에 먼저 읽는다면 참 좋겠다는 욕심이 커져갔다.

 

간혹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명분을 시대정신에서 찾곤 한다. 시대정신을 이해하는데 세계사의 이해는 필수다. 인간의 본능과 감정이 빚어놓은 세계사를 이해하지 못한 시대정신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으니 말이다. 인공지능, 빅데이타, 4차 산업혁명 등 우리에게 불안을 더해 주고 있는 개념들 속에서, 세계사는 가장 안정적인 삶의 이정표를 제공하고 있다. 지나온 과거가 인간을 통해 매순간 되살아난다는 사실을 안다면, 이 책을 통해 세계사의 큰 틀을 그려보면서 미래를 가늠해 보려는 태도에도 공감하리라 믿는다.

 

저자가 일본사람이기 때문일까? 세계지도에 일본 열도 4개의 섬은 비교적 크게 그려져 있는데, 한반도는 빠져있다. 이게 자꾸 눈에 거슬리는 것도 내 안에 이미 들어와 있는 세계사의 한 맥락이겠다. 이러한 불편한 감정을 설명하려는 노력도 공부의 방편 중 하나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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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서 찾은 자유 - 천년 지혜의 보고 장자에서 배우는 삶의 자세
뤄룽즈 지음, 정유희 옮김 / 생각정거장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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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서 찾은 자유장자는 그 동안 잘 알려졌던 내편의 제물론뿐만 아니라, 외편 등 33편 전체에서 우화 성격이 강한 부분을 저자가 골라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다시 쓴 것이다. 장자 원문에 가장 충실하다는 작품 중에서 골랐다고 하는데, 그런 탓에 처음 보는 텍스트가 상당히 많았다. 평소 장자를 좀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글도 장자에 있구나.’ 내심 놀랐다. 팔리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편향된 장자를 다수 읽었던 내겐 신선했다.

 

한 페이지에 이야기 하나가 있다. 이야기가 끝나고 페이지 하단에는 국립타이완대학교 역사연구소에서 문학박사 과정을 수료한 저자의 각주가 있다. 이는 나 vs 자유, 사심없는 인간 vs 이기적 인간이라는 충돌의 굉음 속에서 어리둥절하고 있던 내게 소중한 이정표가 되었다. 통찰력 있고 대담한 해석이 주는 힘이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특히 인상 깊었던 구절은 아래와 같다.

 

세상에서의 삶은 장자의 관점에서 생명이 없는 질서이다. 그런데 장자가 추구하는 것은 생명이 있는 무질서이다.”

 

위 문장처럼 자본주의를 사는 오늘날의 현대인에게 장자는 생선가시처럼 걸려있다. 경제학은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인간을 합리적인 인간으로 인정하면서 출발한다. 반면, 장자는 사사로운 이익에 매달리는 마음, 즉 사심(私心)을 인간이 주의해야 할 제일 함정이라면서 시작한다.

 

뭔가 따끔거리는데, 뭘까?’

 

우리는 자아를 계발하거나 개발하여 돈 잘 버는 영웅이 되라고 교육받았고, 똑같이 아이들을 가르친다. 성행위를 연상케 하는 몸동작을 하는 집단 춤도 돈을 잘 벌기 때문에 온갖 언론매체가 주목한다. 이런 노래와 춤은 한류가 되고, 똑같이 생긴 아이돌은 수출역군이 되어 있다. 물신숭배사회에서 온전히 돈을 예배하고 있는 우리에게 장자는 아예 자체를 위험한 존재로 전제한다. 나를 아예 없는 것으로 취급하라 한다.

 

허참, 무시할 수도 없고, 계속 신경 쓰이네.“

 

이 책은 장자 앞에 내 안에서 찾은 자유라는 수식어를 달았지만, 나는 자유는커녕 읽는 내내 이러한 가시 걸림에 시달렸다. 그도 그럴 것이, 같은 동양사상이라 하더라도 유학과 장자는 매우 다르다. 공자나 맹자는 분명한 내가 있다. 이상적 나일지언정 자기(自己)를 놓지 않는다. ()를 통해 이기심을 죽이고 남을 사랑하도록 몸을 훈련시키되(克己復禮), 나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훗날 주자가 유학을 새롭게 해석하는 과정에서 불교나 노장사상의 형이상학적인 관념을 수용했지만, 여전히 유학은 입신양명(立身揚名) 또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큰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유학의 틀에서 보면 내 안에서 찾은 자유란 오해되기 쉽다. 나 있고, 그 나를 훈련하여 이상적인 자아에 도달하고, 그 후 남과 맺는 관계에서 느끼는 결과론적 자유로 읽히기 쉽다.

 

그러나 이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장자는 끊임없이 나라는 관념과 씨름한다. 그렇다면 아예 나를 죽여 없애버린 상태를 절대 자유처럼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나를 죽이면 다른 문제가 생긴다. 자유를 느끼는 주체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자유는 나 아닌 생명을 기본 골격으로 한다. , 남 속에서 자기 자신을 찾고 만들어가는 과정이 자유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장자사상은 삶 속에서 항상 진행형이다. 장자가 재미있으면서 동시에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장자의 사유는 더욱 까칠하고 미끈거렸고, 질문은 집요해 졌다. 내가 없는 자유와 내 안에 있는 자유는 과연 어떤 차이일까? 주체와 객체라는 서양철학의 이분법에 내가 너무 길들여진 것은 아닐까?

 

결국 나는 장자사상을 생명을 향한 끊임없는 부정(否定)운동이라고 이해했다. 부정운동이란 고정된 모든 것을 없애나가는힘이다. 왜 없애야 하는가? 생명을 위해서다! 자유는 전혀 없는 나로서는 맛 볼 수 없다. 자유란 내가 있긴 있으되 그 나에게 얽매이지 않고, 끊임없이 생명과 사이좋게 지내려는 과정에서 생겨난다. 돈 잘 버는 자본주의의 영웅을 없애나가는 과정에서, 나 말고 다른 생명을 위해 나를 내어주는 과정에서, 나를 둘러싼 일상과 지식과 목표를 심각하게 의심하는 과정에서 자유는 비로소 자유다. 쓰고 보니 헤겔 변증법의 영향일 수도 있겠다 싶어 씁쓸하다. 어쩌면 나는 근대 서양인의 후손일지도 모르겠다.

 

장자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가 쉽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있는 나를 고스란히 보관한 채, 무엇을 이해했다는 건 오해일 가능성이 더 크다. 나를 구성하고 있는 선입견에 꼭 맞는 장자의 글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깨달았다는 순간이 지나면 곧 더 강력한 편견으로 진화하는 법이다. 고로. 계속 없애 나가야 한다. 자신의 이해와 깨달음이 불편해야 한다. 실눈을 뜨고 의심해야 한다. 그렇게 살다보면 어느 샌가, 장자처럼 붕새와 참새 사이에서, 나비와 자아 사이에서 차별 없이 자유로울 수 있지 않을까?

 

책이 전체적으로 깔끔하다. 특히 번역이 좋다. 쉽게 읽혀 무궁무진한 장자의 역설을 이해하는데 보다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있었다. 장자 사상에 관심이 있다면 이 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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