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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 인생을 위한 고전 ㅣ 명역고전 시리즈
공자 지음, 김원중 옮김 / 휴머니스트 / 201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다들 알고 있듯이, 고전은 읽을 때마다 울림이 다르다. 더 깊고 커진다. 그러한 울림의 누적이 적게는 몇 백 년, 길게는 몇 천 년 계속되었다. 따라서 고전은 인간이라는 집단지성이 함께 쓴 책이라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독자가 빼곡하게 채워놓은 고전의 행간은 여전히 넉넉하다. 우리가 고전을 통해서 발견하고 창조해낼 의미와 가치가 아직도 많이 남은 셈이다.
논어는 고전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채워나갈 공동작품이다. 그렇다고 함부로 해석할 수는 없는 법. 그 본령에 어긋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렇다면 논어의 본령은 무엇일까? 공자의 사유는 인(仁)에서 출발한다. 우주의 원리인 인(仁)은 이 땅에서 예(禮)로 태어난다. 예(禮)는 나의 삶에서 충(忠)과 서(恕)라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실현된다. 인(仁)이 우주를 구성하고 만물과 사람이 맺어야 할 관계의 근본이라면, 예(禮)는 사람이 다른 사람과 맺은 관계가 인(仁)의 관점에서 옳은지 틀린지를 판단해 주는 기준역할을 한다. 충서(忠恕)는 예(禮)의 구체적인 행동지침이지만, 그 속에는 인(仁)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논어의 울림은 나에겐 엄격해지도록, 이웃에겐 유연해지도록 돕는다. 우리 사회는 개인적 기능을 더 높게, 더 빠르게, 더 강하게 만들고자 한다. 마치 운동경기의 응원구호를 연상케 한다. 여기에는 인간정신과 관계까지 관리하고 통제하려는 유물론적 사고가 깔려있다. 현대인의 뇌는 근육과 다르지 않다. 누가 센지 경쟁하고 이긴 사람에게 너무 큰 보상을 몰아준다. 이에 따라 경쟁은 치열해 진다. 치열한 경쟁은 이웃보다는 나에게 집중하게 한다. 밖이 너무 삭막하니, 자꾸 내면으로 들어간다. 나를 채찍질하다가 위로하며, 타이르고 윽박지르다가 쉼과 치유를 찾는다. 그 가운데 TV와 대중문화가 있다. 우리는 TV속에서 이웃의 아픔을 본다. TV로부터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듣는다. 그러나 보고, 들을 뿐, 생각하게 하는 힘을 주진 않는다. 잠깐 반짝이다 커지는 꼬마전구 같다. 다음 날, 우린 이렇게 말할 뿐이다. “어제 그거 봤어?”
내 손에 들려 있는 논어는 그렇지 않다. TV와 다르다. 생각하게 한다. 그 생각이 한계에 부딪치도록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스스로 질문하고 답을 찾도록 돕는다. 내가 내 놓은 답을 이웃에게 전하고 싶도록 한다. 이웃은 어떤 답을 가졌는지 궁금하게 만든다. 모임을 만들고 이웃을 만든다. 그 모임과 이웃들은 이 우주에 단 하나 뿐인 고유한 이야기를 만든다. 이게 고전이 주는 행복 아닐까.
그렇다면, 당신이 만난 논어는 뭐냐고 묻고 싶을 게다. 수도 없이 많지만, 딱 두 가지만 소개한다.
첫째, 우리 책 73쪽에 나오는 내용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사람이면서 믿음이 없다면, 그것이 옳은지 모르겠구나. 큰 수레에 예輗(끌채)가 없고, 작은 수레에 월軏(끌채)이 없다면, 그런 수레를 어찌 몰고 갈 수 있겠느냐?”」
이 내용을 ‘수레를 끄려면 끌채가 있어야 하듯이, 사람을 내 뜻대로 움직이고 싶으면 그 사람의 신념체계를 알아야 한다.’고 읽으면 곤란하다. 왜 곤란한가? 공자의 믿음을 보면 알 수 있다. 인(仁), 예(禮), 충서(忠恕)가 오롯이 하나 된 믿음이 공자의 믿음이다. 그런 공자가 사람 작동법을 말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오늘 논어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자기가 믿는 대로 말하고 행동한다. 믿음이 바로 그 사람인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너를 움직이게 하는 믿음은 무엇이냐? 그 믿음은 어디에서 왔느냐? 그 믿음은 온전한 것이냐? 그 믿음으로 이웃을 아프게 하지 않았느냐? 너는 네 믿음에 맞는 것만 옳다고 하지 않느냐? 너는 네 믿음을 진리로 생각해 이웃과 친구에게 강요하진 않았느냐? 누군가 수레를 끌기 위해 끌채를 부여잡는 것처럼, 그 어떤 존재가 너를 끌기 위해 허망한 믿음을 주었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셈인가?’나는 이렇게 하기로 한다. 지금 내가 옳다고 확신하는 것들을 찬찬히 비판적으로 검토해 본다. 그 생각한 것들을 쓴다. 내가 쓴 것을 다른 책들과 비교하며 공부한다. 공부한 내용을 친구들과 나눈다.
둘째, 우리 책 105쪽에 나오는 내용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교과서에도 등장하는 유명한 구절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르게 읽혔다. 논어답다. 오늘 논어는 이렇게 말했다.
‘아침에 도를 들었다는 것은 이미 내가 道와 非道를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말이다. 내가 들은 道가 과연 진짜 道일까? 내가 꾸며낸 가짜 道일 가능성은 전혀 없는가? 그걸 가능이 크다. 아니, 어쩌면 내가 들은 道는 항상 가짜일 수 있다. 그래? 상황이 그렇다면 너는 어떤 선택을 하고 싶은가? 어차피 진짜 道를 알 수 없으니까 아무렇게나 살 것인가?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숨과도 맞바꿀 만한 의미와 가치를 찾아 나갈 것인가?’나는 후자를 선택한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심정으로. 장황설이라고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 쯤 되면 논어는 내 것이다.
나는 논어를 원어로 읽을 능력이 없다. 김원중 교수님은 이러한 후학들에게 보다 쉽게 고전을 풀어 주셨다. 자신의 해석을 고집하지 않고, 너도 한 번 도전해보라면 원어를 함께 적었다. 한글만 있거나, 한문만 있으면 아무래도 없는 쪽이 궁금하기 마련이다. 한글 번역과 한문 원어를 비교하면서 나름의 해석을 해 보는 것도 재미있다. 논어와 같은 고전은 하드커버가 좋다. 오래, 자주보기 때문이다. 시원시원한 편집 덕분에 책에 이런저런 메모를 할 수 있었다. 이런 메모들이 모여, 나중에 나만의 논어로 묶여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