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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다시 읽는 친절한 세계사
미야자키 마사카츠 지음, 김진연 옮김 / 제3의공간 / 2017년 5월
평점 :
품절
세상에는 삶이 굴러가는 기본 틀이 있다. 이러한 기본 틀은 주어진 자연환경과 오랜 세월 적응해 얻은 해법이요, 주변 사람들과 치열하게 조율해 온 이해관계의 결과물이기에 좀처럼 잘 바뀌지 않는다. 그 중 세계사는 가장 큰 틀이다. 환경과 이웃 사이에서 각 공동체들이 그린 욕망의 동선을 대륙단위 혹은 바다중심으로 묶어 다시 그린 초대형 그림이다. 어떤 것은 다른 공동체에 의해 억지로 그려져 속상하겠고 어떤 것은 스스로 그렸다며 자부할 수도 있겠지만, 그 그림들이 오늘을 살고 있은 각자의 개인사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음은 분명하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세계사를 다룬 책을 얼마나 읽었는지가 궁금해 서재를 둘러보았다. 책 제목 때문이다. ‘처음부터 다시 읽는’다고 하니 앞서 뭘 읽었을까 궁금했고, ‘친절한’ 세계사라고 하니 비교대상도 필요했다. 세계사를 거시사와 미시사로 나눌 때, 미시사로 분류될 만한 것 중에는 총, 균, 쇠, 커피, 설탕, 사전, 빵 등으로 사람 사는 이야기로부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꿴 것도 있고, ‘역사란 무엇인가’처럼 역사 담론 자체를 다룬 것, 서양이 세계를 지배하는 이유, 문명의 충돌 등 문명사, 철학사, 종교사 등 거시사에 해당할 만한 것까지 30여권 쯤 보였다. 나름의 방법에 따라 다른 풍경과 맛을 보여준 좋은 책들이다.
앞선 30여권의 책들과 비교할 때 이 책의 장점은 무엇일까? 나는 주저 없이 책머리에 수록된 ‘지도로 보는 세계의 역사와 지리’라고 말한다. ‘세계 지역을 구분하는 명칭’, ‘대지구대에서 4대 문명으로’, ‘기마유목인에 의한 유라시아의 일체화’ 등 10여장의 그림에는 두루뭉술하여 뾰족하게 사용할 수 없었던 세계사의 주요 굴곡들이 지도와 도표로 단순화되어있다. 단순화는 장단점을 모두 가지고 있다. 일목요연한 정리가 가능한 반면, 다양한 맥락을 놓쳐 역사를 기계적 환원주의로 해석할 위험성도 있다.
그러나 세계사 공부에서 빼놓을 수없는 학습방법 중 하나는 과감하게 맺고 끊은 후, 그 범주 내에서 나름의 역사적 의미를 유기적으로 엮는 훈련이다. 이에 동의한다면 단순화를 통해 나름대로 시대와 지역을 확정하는 것이 세계사 공부의 첫걸음이라는 생각에도 크게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그 후에 여기서 저자의 관심과 방법론에 따라 달리 해석될 수 있는 부분들, 그래서 왜곡되거나 빠졌다고 쟁점화 될 수 있는 초경계적 사건들을 보충하면서 자신만의 식견을 만드는 것이 효과적이다. 이를 통해 초기의 단순 범주가 끊임없이 허물어지고 다시 세워진다. 따라서 세계사적 의미 또한 변화를 거듭한다. 이 과정이 세계사 공부의 백미라고 생각한다. 선생님들께서 사건의 발생 연도를 외우라고 하셨던 이유를 이제야 좀 알 것 같다.
이 책에는 중간 중간, 세계사를 관통하는 키포인트 35개가 놓여 있다. 짧지만 역사의 맥을 짚는데 유용하다. 놓치기 쉬운 배경지식은 ‘1초 리뷰’를 통해 보충하고 있다. 키포인트와 1초 리뷰를 머리에 넣고 앞으로 돌아와 ‘지도로 보는 세계의 역사와 지리’를 이리저리 살피다 보면, 역사 속 인물들이 살아나 말을 달리고 함성을 지르고 고민하고 있는 상상이 펼쳐진다. 역사에 관심 있는 대중들에게 학문적 보편성과 엄밀성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세계사를 보다 쉽게 전달하고자 노력해 온 저자의 열정과 노하우를 살펴볼 수 있는 부분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 책은 좀 제대로 된 세계사를 공부하고자 하는 분들에게 추천할 만 하다.
중간 중간 들어간 삽화와 지도들은 단락마다의 핵심 이해에 큰 도움이 된다. 텍스트 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부분은 음영으로 구별해 복습할 때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 물론 초급 입문서인지라 거칠게 요약된 부분이 없지 않다. 그러나 한 권으로 세계사 전체의 맥을 잡는다는 기획의도로 볼 때, 양과 질 두 가지 모두를 잡았다는 평가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세 아이의 아빠로서 중․고등학생들이 교과서를 읽기 전에 먼저 읽는다면 참 좋겠다는 욕심이 커져갔다.
간혹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명분을 시대정신에서 찾곤 한다. 시대정신을 이해하는데 세계사의 이해는 필수다. 인간의 본능과 감정이 빚어놓은 세계사를 이해하지 못한 시대정신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으니 말이다. 인공지능, 빅데이타, 제4차 산업혁명 등 우리에게 불안을 더해 주고 있는 개념들 속에서, 세계사는 가장 안정적인 삶의 이정표를 제공하고 있다. 지나온 과거가 인간을 통해 매순간 되살아난다는 사실을 안다면, 이 책을 통해 세계사의 큰 틀을 그려보면서 미래를 가늠해 보려는 태도에도 공감하리라 믿는다.
저자가 일본사람이기 때문일까? 세계지도에 일본 열도 4개의 섬은 비교적 크게 그려져 있는데, 한반도는 빠져있다. 이게 자꾸 눈에 거슬리는 것도 내 안에 이미 들어와 있는 세계사의 한 맥락이겠다. 이러한 불편한 감정을 설명하려는 노력도 공부의 방편 중 하나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