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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그땐 이렇게 싸웠군요 - 그림으로 보는 우리나라 전쟁사 ㅣ 위풍당당 만화도서관 16
김진 지음, 이혁 그림, 이덕일 감수 / 주니어김영사 / 2002년 10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옛날에 사람들이 어떠한 방법으로 싸웠는지 알려주는 책 입니다. 저는 이 책을 읽고, 어떠한 방법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전쟁에 임하였는지 적어보았습니다.
백제와 신라의 연합군은 고구려의 남평양에서 전투를 하였다. 백제와 신라연합군과 고구려군들은 치열히 싸웠다. 하지만 고구려에게 빼앗긴 땅을 찾기위해 준비해 온 백제군의 위력으로 고구려 군은 후퇴하였다. 그럼으로써 백제와 신라는 한강지역의 일부분들을 차지하였지만 신라의 진흥왕이 백제군을 기습하라는 명령이 내렸고, 신라군의 갑작스런 배신에 당황한 백제군은 결국 한강지역을 빼앗기고 말았다. 이에 분노한 백제 성왕은 군사를 보내어서 전쟁을 하였고 태자 여창이 지휘하는 백제군은 관산성 근처 구타모라에 보루를 쌓고 신라와 싸웠다. 이 승리고 백제군은 한강지역의 2/3를 차지하였다. 그 후 백제 성왕은 아들을 보기 위하여 신라로 온다고 하자 신라군들은 잠복을 하고 있다. 성왕이 나타나자 기습하였고 성왕은 간신히 도망쳤지만 '고도'하는 천한 노비로 하여금 성왕을 죽이도록 하였다. 존경받는 왕을 천한 노비의 손에 죽게 하여 백제인들에게 씻을 수 없는 모욕감을 주기 위해서다.
532년 금관가야의 구해왕은 신라에게 항복하였고, 562년대가야에서는 9월 이사부가 이끄는 신라군이 처들어왔다. 이사부는 우산국을 정복하고, 왕에게 '국사'편찬을 건의한 사람이였다. 이미 한강의 주인이 된 신라는 자신감이 넘쳤다. 대가야군도 조상 대대로 일구고 가꾸어 온 땅을 지키려는 마음으로 혼신을 다해 싸웠다. 그러나 견고한 대가야의 성도 끝내는 뚫리고야 말았다.
고구려와 수나라의 제 1차 전쟁은 598년 고구려가 먼저 랴오시 지방을 공격하면서 시작하였다. 랴오시 지망은 고구려를 침략하는 중국에서 매우 중요한 곳이였다. 그러나 수나라 영주의 총관 위충에게 고구려군은 격퇴되었다. 수나라 문제는 육군 30만명을 보내 고구려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하였다. 하지만 수나라가 출발할 무렵 장마가 시작되었고, 육군은 수나라와의 보급이 끊기고 식량 또한 물에 떠내려 갔으며, 점염병에 시달렸다, 수군 또한 폭풍우를 만나 대부분의 병선을 잃고 말았다. 할수 없이 문제는 철수명령을 하였다. 고구려는 수나라의 30만 대군을 격퇴했다는 사실에 기운이 쏫았다. 결국 604년 문제는 태자 광에게 살해되고 광이 황제가 되었다. 612년 광은 수나라의 군대와 군수 물자가 탁운에 머였다. 수군과 육군, 전쟁에 필요한 물건을 시르는 사람을 포함하니 약 570만명에 이르렀고 이 인원수는 고구려의 전체 인원수와 거의 같다. 612년 고구려의 요동선은 구나라 대군에 겹겹이 호위되었다. 그러나 고구려군의 기세에도 불구하고 요동성은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다. 고구려군은 성이 함략될 듯하면 항복하고, 수나라 군이 되돌아 갈 때에 성을 수리하여 다시 싸우는 일을 여러번 반복하자 수나라군은 지치기 시작했다. 한편수군은 고구려군들을 무찌르고 평양성 60리 밖까지 왔다. 그러나 수나라의 군대는 고구려군이 파놓은 함정에 결려 크게 페하고 말았다. 한편 고구혀의 총사령관이 을지문덕 장군이 수나라군과 맞서고 있었다. 을지문덕은 거짓으로 수나라에세 항복한다 한 후에 자신의 진으로 되돌아 오고 수나라군은 돌격해왔다. 고구려군은 수나라 군과 7번 싸워 7번 모두 지는 작전을 썼다.수나라 군은 마침내 살수를 건너 평양성 30리 되는곳까지 와서 진을 쳤다. 그러자 을지문덕 장군은 수군에게 거짓 항복을 하였고, 수나라군은 그 항복을 핑계삼아 자신의 나라로 되돌아 가려고 살수를 건널 때 고구려군은 맹공격을 하여 수나라 군은 30만명에서 2,700만명밖에 살지 못했다. 이 전투가 바로 살수대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