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 논술로 되새기는 한국의 인물 6
민병덕 지음, 원유일 그림, 손민정 / 혜원출판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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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졍약용의 살면서 세상에 남긴 업적과, 그 시대때의 정약용이 하였던 일을 적은 책 입니다. 저는 이 책을 읽고, 중요한 부분만 간략하게 정리하여 썼습니다. 

 정약용은 1762년 때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정약용이 9세가 될때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1783년 정약용의 나이 22세 때 소과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섰다. 28세 때에는 대과에 합격하여 규장각 초계문신이 되었고, 한강에 놓을 배다리를 설계하여 정조의 신임을 받았다. 그자가 31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정약용은 화성과 거중기를 설계하였다. 또한 암행어사로도 활약을 하였었다. 그가 39세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오다 정조가 세상을 떠났다. 1801년 천주교를 탄압한 신유사옥에 관련되어 경상도 장기로 귀향을 갔다. 하지만 천주교도 황사영이 비밀 편지를 보내려다 발각된 사건으로 다시 전라도 강진으로 귀양가게 되었다. 그가 1808년 때 다산으로 거처를 옴겨 많은 책들을 제자와 함께 기르면서 써나갔다. 그가 55세가 될 때에 둘째 형 정약전이 흑산도에서 숨을 거두었고, 56,57세 때에는 책 경세유표와 목민심서를 완성하였다. 그후 1년 뒤 흠흠신선을 완성하고 17년 뒤 세상을 떠났다. 

 정약용에서는 실학이 많이 나왔는데 실학이라는 학문이 생겨난 까닭은 조선 후기에는 정치를 맡는 관리들이 서고 권력을 잡으려고 다투기만 하는 통에 백성들의 삶이 날로 힘들어졌다. 백성들의 생활이 안정되어야 비로소 나라가 발전할 수 있는데도 말이다. 이때 실학자들은 백성들의 삶을 개선할 수 있는 실용적인 학문을 연구하기 시낙하였다. 잘못된 제도를 바꾸고 백성들이 잘사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고 한 것이다. 17, 18세기 실학자들은 먼저 백성들이 가난한 이유를 따져보았다. 그 뒤 각자 자기들이 생각하는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방법을 내놓았다. 정약용은 19세기가 되어도 실학자들이 생각이 실제 정치에 반영되지 못했다. 오히려 사회는 더욱 혼란해지고 실학자들은 권세가들에게 탄압을 받기도 하였다. 정약용은 권세가들이 모함으로 귀양살이를 하면서도 실학을 도욱 깊이 있게 발전시켰다. 정약용은 그동안 여러 실학자들이 내놓은 생각들을 모두 모아 백성이 잘살고 나라가 안정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였다. 정약용은 평생 동안의 연구 결과를 500여 권의 책으로 정리하여 실학을 완성했다는 평가를 받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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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28 20: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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