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세 만화 한국사 바로보기 4 - 남북국 시대 이현세 만화 한국사 바로보기 4
이현세 만화, 김미영 글, 한국역사연구회 감수 / 녹색지팡이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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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남북극 시대부터 후삼국의 통일까지의 내용이 들어있는 책입니다. 저는 이책을 간단하게 정리하여 썼습니다. 

 통일 신라 시대의 원래 이름은 남북극 시대이다. 당나라 군은 고구려 사람들이 부흥 운동을 막기 위하여 자신의 나라로 대리고 왔다. 당나라 사람들은 고구려 사람들과 거란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조금만이라도 잘못하면 큰 벌을 내렸다. 이에격분한 고구려 군과 거란족은 마침내 696년 거란족과 고구려족을 모아 군대를 만들어 반란을 하였다. 이진충이 이끄는 부대는 조홰의 목숨을 거두고, 영주성을 습격하여 함락시켰다. 당나라 에서는 제 3대 고종의 황후인 측천무후는 690년에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 측천무후는 거란과 고구려의 반란군의 소식을 듣고 당장 군사를 내보내었지만 번번히 지고 말았다. 이 무렵 대조영이 이끄는 군대는 영주 동쪽으로 가서 랴오둥의 안동도호부를 공격하여 큰 타격을 입혔다. 하지만 점차 당나라의 세력이 커지며 거란이 밀리기 시작했다. 그 후 당은 거란  장수 이해고를 앞세워 곧바로 고구려 유민들을 쫒아왔다. 먼저 걸사비우가 이끄는 말갈인이 이해고와 싸웠으나 크게 패하고 걸걸중상마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들과 말갈인을 이끌고 동쪽으로 도망쳤고, 당나라군은 이를 계속 추격하였다. 대조영군은 나중에 천문령 이라는 곳에서 잠복을 하다가 당나라 군이 나타나자 맹공격을 하였다. 이 전투로 당나라는 크게 패하였다. 이 전투가 바로 '천문령 대첩'이다. 그 후 고구려 유민들과 말갈인들은 동모산에서 새로운 나라인 발해를 건국하였다. 

 발해는 영토를 크게 넓히며 자신감을 얻고 특히 3대 문왕은 첫 도읍지인 구국에서 중경 현덕부와 상경 용천부로 차례로 도읍을 옯겨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발해는 모두 4차례 도음을 옯겨 결국은 상경 용천두가 오랫동안 발해의 수도가 되었다.  

 이 때에는해적이 나타나서는 신라 사람들을 당나라로 끌고 가서는 노예로 삼았다. 하지만 장보고는 이 장면을 모격하고 신라왕 흥덕왕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왕은 해적이 우리나라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는 명령과 동시에 돌과 흙을 쌓아서 길고 탄탄한 성곽을 만들고 수십 척의 배가 한꺼번에 들어와도 끄떡없는 큰 부두를 거설하였다. 청해에 진영이 만들어지자 장보고는 가장 먼저 해적 무리를 소탕하는 일에 힘을 쏟았다. 그 후 얼마 후 염장은 장보고를 암살할 계획을 새웠고, 드디어 장보고의 침실에서 죽이고 말았다. 그 후에는 청해진 폐쇠를 하였다.  

 신라의 귀족들은 세금을 한달에 수차례 씩이나 내개 하였고내지 못하는 자는 관가에 끌고가서 곤장을 때렸다.이에 격분한 농민들은 귀족들과 싸움을 벌였고 신라 정부는 당장 군사를 보내 농민군을 토벌하도록 했지만 토벌군은 농민군의 깃에 눌려 쉽사리 진격하지 못하였다. 원종과 애조가 이끈반란은 농민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첫 사건이었고 이후 지방에는 새로운 세력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이 바로 견훤과 궁예이다. 이렇게 어지러운 시대에 주인공으로 등장한 견훤과 궁예는 마침내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 먼저 견훤은 전라도 일대에 세력을 모아 900년에 완산주에 후백제를 세우고 901년 궁예는 송악에서 고구려의 부활을 위치며 후고구려를 세웠다. 드디어 후삼국 시대가 열렸다. 하지만 궁예족의 사람들은 궁예가 점점 포학해지자 사람들은 왕건에게 관심을 갖는다. 왕건은 다른 사람들의 뜻을 받아들여 궁예를 몰아낼 계획을 새운다. 

 발해는 넓은 영토를 15개의 부로 나누어 다스렸고 그 중 중요한 5개의 부에는 '경'을 두었는데, 5경은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다. 또한 중국은 907년 주전충이 후량을 세움으로써 당은 멸망했지만 후량 또한 오래 못가 후당에게 멸망하였다. 그때 거란은 906년 랴오둥으로 돌진하였다. 발해는 신라, 후고구려, 후백제에게 도움을 했지만 거절당하였고 결국 926년 발해는 멸망하였다. 이때쯤에는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기 위하여 궁으로 가고 있엇다. 왕건이 궁예가 있는 궁으로 도착하자 이미 모여 있던 1만여 명의 부리가 북을 치며 왕건을 반겼다. 궁예는 겁에 질려서 도망쳤지만 결국 백성들에게 잡혀 맞아죽고 말았다. 그후 왕건은918년 나라 이름을 '고려'라고 지었다. 920년 견훤은 군사 1만명을 이끌고 신라에 쳐들어가 대야성을 함략하였고 김해 일대를 차지했다. 하지만 신라는 왕건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왕건은 곧바로 군사를 보내어 견훤의 군사를 물리쳐 주었다. 그 후 신라와 후백제는 전쟁을 막는 대신 자신의 아들들을 인질로 주었지만 후백제의 아들이 죽으며 이에 격분한 후백제는 신라로 처들어가서는 왕을 죽인 다음 김부가 신라의 왕이 되였다. 그 후 후백제군과 고려군은 싸움을 계속하여 930년 고창군 고창성에서 왕건이 이끄는 고려군이 후백제군을 제합하였다. 그 후 견훤은 아들에게 왕권을 빼앗겨서 고려군과 동맹을 하여 후백제를 명항시켰고 드디어 통일이 되었고 고려라는 나라 이름을 같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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