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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사람이 더 합리적이다 / 생각연구소
먼저 부끄러운 고백을 하고 시작하자면, ‘의미는 있으나 재미는 없겠구나.’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이 책 <가난한 사람이 더 합리적이다>를 펼쳤다. 하지만 이러한 나의 선입견은 서문의 첫 문장, 첫 문단에서 부끄럽게 느껴졌다. 아니 부끄러움보다는 책의 주제와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두 아이라는 상징적 그리고 현실적 스토리로 만든 '읽는 재미'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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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살 무렵, 에스테르(참고로, 이 이야기의 두 아이 ‘에스테르’와 ‘아비지트’는 이 책을 집필한 두 명의 저자의 이름이다.)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헌신한 테레사 수녀의 이야기를 만화책으로 읽었다. 테레사 수녀가 살던 인도의 캘커타는 1인당 거주 면적이 0.9제곱미터에 불과할 만큼 인구밀도가 높은 도시였다. 혹시 그곳은 거대한 바둑판처럼 생기지 않았을까? 도시의 바닥에 가로 30cm, 세로 30cm의 격자가 그려져 있고 격자마다 사람 모양의 바둑알이 하나씩 놓여있는 것은 아닐까? 에스테르는 이런 상상을 하며 자신이 그 도시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세월이 흘러 어느덧 스물두 살이 된 에스테르는 MIT대학원에서 경제학을 공부하던 중에 켈커타를 방문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 택시 안에서 아무리 바깥 풍경을 둘러보아도 만화책에서 생생하게 묘사돼 있던 가난이 보이지 않았다. 나무도 있고 풀도 있었지만 정작 그곳에 있어야 할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가난한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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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아비지트는 이미 여섯 살 때부터 가난한 사람들이 어디에 사는지 알고 있었다. 그들은 아비지트가 사는 캘커타 뒷골목의 다 쓰러져가는 작은 집에 살고 있었다. 가난한 집 아이들은 늘 밖에 나와 놀았고 가끔은 장난삼아 아비지트를 때리기도 했다. 아비지트는 그들과 어울려 구슬놀이를 했는데 구슬은 언제나 실력이 월등한 그들의 차지였다. 그들의 해진 반바지 주머니가 구슬로 불룩해지는 것을 볼 때마다 아비지트는 샘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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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한 분야에서도 ‘빈곤의 경제학 economics of poverty’은 경제학의 빈곤 poor economics 현상을 보이고 있다. 많은 경제학자가 가진 것이 적다는 이유로 가난한 사람들의 경제적 현실에 흥미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현실은 세계적인 빈곤 문제 해결 투쟁을 크게 약화시킨다.
그러나 문제를 단순화하면 해결책도 단순해지는 법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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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나의 선입견이 부끄럽다고는 했지만, 다른 사람들도 이 책을 처음 접할 때, 재미보다는 존재의 이유, 책과 메시지가 갖는 가치 등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물론 이 책은 (제목이 말해주듯) 가난한 나라와 사람들을 바라보는 진지한 성찰과 담론이 담겨있는 의미 있는 책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책은 우리가 가진 선입견의 프레임에 갖히지 않는다. 앞에서 인용한 이야기처럼 독자지향적으로 읽는 이가 쉽고 재미있게 내용을 이해할 수 있도록 세심히 배려를 했으며, 단순히 가난한 나라와 사람을 도와야한다는 원조 찬성론자의 이야기가 아닌 원조에 대한 찬성과 반대 양진영의 논리를 중립적인 시각에서 다루었으며, 그런 점에서 지난 해 우리나라에서 선풍적인 호응을 얻었던 ‘정의란 무엇인가’의 국제원조편이라 생각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진지한 성찰을 담았다.
책은 굉장히 감성적이면서 동시에 논리적이다. 아니 감성적이라기 보다 논리적인 사고의 결론으로 ‘감성적 접근’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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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문은 두 종류였고 연구진은 우선 무작위로 선정한 학생들에게 다음의 내용을 보여주었다.
‘말라위에서는 300만명 이상의 어린이가 식량 부족으로 고통받고 있습니다. ... 앙골라의 인구의 1/3에 해당하는 400만명이 집을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이어 나머지 학생들에게는 어린 소녀의 사진과 함께 이런 글귀를 담은 안내문을 보여주었다.
‘로키아는 일곱 살로 아프리카 말리에 살고 있습니다. 지금 이 아이는 몹시 가난해 굶주림과 아사 위협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당신의 기부가 로키아의 생활에 보탬이 될 것입니다. ... 로키아의 가족과 로키아에게 음식, 교육, 기초 의료, 위생 교육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안내문을 본 학생들은 평균 1.16달러를 기부했다. 반면 한 소녀의 곤경으로 표현을 했을 때는 2.83달러를 기부했다. 학생들은 한 소녀에게 초점을 둔 안내문에서는 로키아를 도와야 할 책임을 느꼈지만, 세계적인 규모의 문제와 맞닥트렸을 때는 그런 열의를 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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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접근은 어떻게 보면 생각에 관한 생각 등에서 말하는 행동경제학과 어느 부분 닿아있기도 하다. 이처럼 원조에 대한 찬반 양진영을 바라보는 중립적인 시각과 논리적 분석에 그치지 않고 지금 이 순간 현장의 최전선에서 고민하고 있는 깊은 성찰까지. 무엇을 기대하건 기대 이상의 고민과 성찰을 느낄 수 있어 더욱 매력적이다.
그 논리의 결론이 설령 ‘우리가 진정으로 그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은 없다’일지라도 말이다.
“여기서 핵심은 우리가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이 세계에서는 일회성 증여로 누군가의 소득을 영속적으로 늘어나게 할 수 없다. 일회성 증여는 고작해야 약간 더 빨리 이동하도록 도울 뿐 도달 지점을 바꿔놓지는 못한다.”
(책의 결론이 원조가 그들을 도울 수 없다는 것은 아니다.)
원조나 기부를 하거나 하지 않는 건 개개인의 선택의 문제이기에 기부를 하지 않는 건 상관없지만, 전 세계가 충분히 먹고도 남을 만큼의 식량이 생산되고 있지만 여전히 수백만명의 사람들이 굶어죽고 있는 현실만큼은 외면하지 말고 인지하고 살았으면 하는 두 저자의 바람에 적극 공감하며, 그들의 깊은 성찰을 함께 느껴보길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