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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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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억이란 제 스스로 기억하고 싶은 대로 기억하는 속성까지 있다. p.20


윤아!

처음 정윤이라는 이름을 활자로 만났을 때, 이름 위에 살며시 검지를 대 보았어. 마치 수 억만 개의 모래알 속에서 모난 자갈처럼 존재증명이라도 하듯이 삽시간에 내 눈길을 잡아끈 그 이름을 끝이 동그란 검지 안에 언제까지고 가둬두고 싶었어. 속박해서 마구마구 학대하고 못살게 굴고 싶었어. 나는 어느새 정윤이라는 이름을 네 이름인 임윤으로 읽고 있었던 거야. 나는 정윤이 나오는 부분에서 나도 모르게 몇 번이나 네 이름을 되뇌고 있었단다. 임윤이... 임윤은... 임윤을... 이렇게 말이야. 그러면서 이런 생각도 했던 것 같아. 왜 윤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외자가 많을까? 최윤, 정윤, 임윤.... 우습지도 않은 말장난에 잠시 도취된 사이, 문득 너의 이름을 기억해 낼 때마다 바늘처럼 뾰족한 것이 명치끝을 찌르는 것 같던 아픔이, 너의 이름 뒤에 자동으로 두근방 세근방 뜀박질하며 어쩔 줄 몰라하던 분노가, 어느새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린 걸 깨달았어. 너와 나 사이에 켜켜이 쌓인 세월의 더께 덕분일까? 아니면 너를 뺀 내 인생이 더 이상 초라해지지 않기를 바랐던 마음의 암시가 너와 관련된 모든 기억을 왜곡해 버렸기 때문일까? 어느 쪽이든 나는 안심했어. 이제야 말로 봉인된 기억의 실타래를 풀어야 할 때가 되었음을 깨달았거든.


- 인생이란 각기 독자적이고 한번 뿐이다. p.23


윤아!

만약 네가 내 앞에 있었다면 넌 분명 호기심천국이라는 별명답게 이렇게 물었을 거야. 정윤이 누구냐고. 글쎄... 누구일 거 같니? 내 인생에 윤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을 두 번 만날 확률은 그리 많지 않을 거야. 일단 흔한 이름이 아니니까. 어물쩍 넘어가려는 나를 향해 넌 또 이렇게 묻겠지. 남자니? 여자니? 이 질문에도 난 묘한 여운을 남기며 얼렁뚱땅 넘어갈 거야. 넌 언제나 나에 대해선 모르는 게 없었고 난 언제나 너에 대해선 조금만 알고 있었지. 돌아보니까 연인사이에도 묘한 힘의 역학관계가 존재한다는 걸 알았어. 난 너보다 널 조금 더 사랑했을 뿐이었지만 누군가를 사랑함에 있어 언제나 더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라는 걸 그땐 몰랐지.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으니까. 손을 잡고 체온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었으니까. 이젠 알아. 누군가를 사랑하더라도 아주 조금씩만 나를 보여줘야 한다는 걸. 감질나도록 소위 ‘밀땅’을 잘해야 한다는 걸 이젠 나도 분명히 알아. 하지만 너와 헤어진 후 아직 그런 사람을 못 만났으니 실행에 옮겨볼 기회는 없었어. 만약 타임머신이 있어, 너와 함께 있는 것이 한없이 설레기만 했던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간다면 나, 실수 없이 잘 할 수 있을까? 그럴까? 하지만 인생에 만약은 없구나. 인생의 각별한 어느 순간은 안타깝게도 딱 한번 뿐이로구나.


- 우리 엄마는 나에게 누군가 미워지면 그 사람이 자는 모습을 보라고 했어. 하루를 보내고 자는 모습이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이라고. 자는 모습을 보면 누구도 미워할 수 없게 된다고. p.195


윤아!

너와 헤어진 후 내겐 습관 하나가 생겼어. 일요일이면 네가 사는 아파트 근처 공원을 배회하는 거야. 마치 몽유병 환자처럼 너와 내가 함께 앉았던 벤치를 서성거렸고 멀리 네 방이 깨알같이 보이는 15층 건물을 한없이 올려다보곤 했지. 밤이면 네가 손가락을 짚어가며 알려주었던 카시오페이아, 북극성 따위의 별자리를 찾아다녔어. 어린왕자가 산다는 B-612 소행성을 무턱대고 찾아보기도 했어. 일요일의 습관은 한동안 계속되었어. 네가, 나도 아는 여자후배를 데리고 너의 아파트로 들어가는 것을 보게 된 그날까지. 그날은 우리가 헤어진 지 2주일이 채 안된 날이었고 너도 어쩌면 나처럼 조금의 미련이 남아있으리라 착각했던 거야. 그렇게 나는 어리석었던 거야.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더 놀라운 이야기를 듣게 되었어. 네가 그 후배에게 나와의 사이는 실수였다고 해명했다는....... 실수.... 실수.... 네가 나한테 어떤 실수를 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정말 한 남자에게 헌신하다가 헌신짝 난 꼴이 되어 버렸지, 내가. 이별의 이유를 화려한 언변으로 아름답게 포장하기에 바빴던 네가 그 후배에게 또 어떤 립 서비스로 혼을 빼았았을지 그때의 내 아둔한 잔머리로도 상상이 가더구나. 한동안 잠을 이룰 수가 없었어. 내 생애 처음으로 지독한 배신감에 끙끙 앓았고 너를 파멸시키는 꿈까지 꾸었어. 어리석게도 말야. 만약... 또 만약에 말이야... 정윤의 충고처럼 피곤에 지쳐 자는 너의 모습을 볼 수 있었더라면 더 이상 널 미워하고 증오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럴 수 있었을까?



- 사랑은 이 세상의 모든 것. 우리가 사랑이라 알고 있는 모든 것. 그거면 충분해. 하지만 그 사랑을 우린 자기 그릇만큼 밖에는 담지 못하리. -에밀리 디킨슨


윤아!

사랑의 상처가 깊고도 컸었지만 이젠 그때의 열정도, 질투도, 애증도 남아있질 않아. 오로지 너, 임윤이라는 이름만 퇴적된 화석처럼 악연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지. 책을 읽으며 조금은 알게 되었어. 악법도 법이듯이 서로 나쁘게 끝난 사랑도 사랑은 사랑이라는. ..결국 사람은 자기의 그릇만큼 사랑을 담을 수 있다는 사랑의 기술 같은 것 말야. 너와 나의 그릇이 달랐기 때문이란 걸 몇 년이 흐른 지금에야 몇 구절의 시를 통해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어. 우린 서로 그릇의 크기가 다르고 모양이 달랐기에 서로 다른 사랑을 꿈꿀 수밖에 없었다고 애써 위로하련다. 한 때 나의 모든 것이라 생각했던 너였지만 언제든 변할 수 있는 게 사람의 마음이고 상황이더라. 그런 면에서 넌 나보다 인생을 좀 더 일찍 안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아주 쿨하게 모든 걸 정리했잖아? 하지만 그런 너를 이젠 원망하지도, 미워하지도 않아. 대신, 내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기에 널 만났고 사랑의 기쁨과 절망과 그 모든 희로애락을 가르쳐준 너에게 오히려 감사한다. 네게 있어 나라는 존재도 그러길 바란다면 너무 지나친 욕심인 걸까? 청춘의 한 시기를 같이 지나온 것만으로도 그럴 순 없는 걸까?


윤아!

우리 언젠가, 언젠가는 말이야.... 우연이라도 어디선가 마주친다면 그땐 살며시 웃어주자. 어떻게 살았냐고 묻지도 말고, 못 볼 걸 본 것처럼 모른 척 지나치지도 말고, 서로의 얼굴에 깊게 패인 세월의 흔적을 마주보고 웃어주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자. 응? 임윤! 인마...! 잘 살아. 어디서 무엇을 하고 누구를 만나든 행복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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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수컷은 필요 없어 지식여행자 5
요네하라 마리 지음, 김윤수 옮김 / 마음산책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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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인상.
  아…. 정말 예쁘고 사랑스러운 책이다. 우리나라에 출간된 해가 2008년인데 이제야 내 눈에 띄었다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매력적인 제목과 내용을 담은 책. 어쩐지 제목이 도발적이지만 낯설지 않다고 느낀 건 다 이유가 있었다. 독신인 친구들이 늘 입에 달고 사는 말이 아닌가. 그 오지랖 넓은 독신의 징글징글한 무리 속에 내가 포함된 건 당연지사일 테고. 아무튼 지난 주말 내내 노란 바탕에 앙증맞은 고양이가 그려진 이 책을 독파하는 데 시간을 보내느라 정신이 혼미했다. 마리여사네 포유류 아홉 가족의 얽히고설킨 이야기 속에 빠져있다 보면 어느새 자신이 고양이 인간, 강아지 인간이 된 듯 한 착각에 공중부양을 시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개에 관한 오래된 기억 하나.
  중학교 몇 학년 때인지 기억이 가물거린다. 하여튼 그 즈음에 우리 집에는 쭈쭈라는 잡종(아니, 비순종)수캐한마리가 자라고 있었다. 쭈쭈라는 이름은 아버지가 지어주셨는데 입으로 ‘쭈쭈’거리며 부르기 쉬우라고 지어주신 이름이다. 아버지는 특별히 그 개를 아주 사랑하셨는데 약주를 드신 밤이면 대문을 열고 들어오시며 "쭈쭈야, 아빠 왔다!“라고 외치곤 하셨다. 쭈쭈는 멀리서도 아버지의 발자국 소리를 귀신 같이 알아채고 컹컹거렸다. 저절로 엄마미소가 지어질 정도로 살가운 풍경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개가 보이지 않았다. 엄마에게 여쭸더니 아무렇지도 않은 듯 개를 잡아 개소주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유난히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던 쭈쭈는 그렇게 아버지와 큰 형부의 몸보신을 위해 장렬히 전사했다. 나는 아침저녁으로 개소주를 한 방울도 남김없이 시원하게 들이키는 아버지를 보며 혐오감을 느꼈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우리 집에서 길렀던 개들은 대개 쭈쭈와 같은 운명의 길을 걸었다. 우리 집 남자들의 몸에는 틀림없이 개의 피가 흐르고 있을 것이다.

고양이에 관한 오래된 기억하나.
  초등학교 저학년 때 쯤. 이모 댁에서 새끼고양이 한 마리를 얻어왔다. 이름을 지어야 하는데 엄마가 실찐이로 지으란다. 살찐이는 어미고양이의 이름인데 고양이는 다 살찐이라고 부르는가보다 했다. 여동생과 나는 살찐이라는 이름이 재미있어서 “살찐아~ 살 쪘나, 안 쪘나?”라며 놀리곤 했다. 갈수록 애교와 장난이 늘어가는 고양이를 보는 낙이 쏠쏠했다. 그러던 어느 날. 고양이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집을 나가 버렸다. 엄마가 원래 고양이는 한번 집을 나가면 안 들어온다고 무심히 말했다. 동생과 나는 도저히 엄마처럼 무심해 질 수가 없어서 온 동네를 뒤졌지만 살찐이는 보이지 않았다. 그때의 상실감이 너무 커, 꼬리달린 짐승에게는 절대로 정을 주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개에 관한 몇 년 전 기억 하나.
  몇 년 전 친하게 지내던 직장동료 언니의 집에 놀러갔다. 독신인 언니는 집에 다섯 마리의 개를 기르고 있었다. 회사에서 하도 언니가 자랑을 해서 개들의 미모가 뛰어날 것이라는 상상은 했지만 막상 거실에 들어가 보니 상상했던 것 보다 더 예쁜 푸들과 마르티즈 종이 경쟁하듯이 달려들었다. 다섯 마리가 모두 언니의 뒤꽁무니만 쫓아다니니 그 광경이 참으로 볼만했다. 하지만 왠지 결혼을 할 생각은 않고 개들에게만 둘러싸여 사는 언니의 모습이 그때는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자식처럼 개들을 뒤치다꺼리하는 언니의 모습이 왠지 외로움에 몸부림치는 것처럼 보였다. 저런 정성으로 제 아이를 낳으면 얼마나 지극정성일꼬... 그런 생각을 잠시 했었다. 어렸던 그때는.

고양이에 관한 가장 최근의 기억 하나.
  일 때문에 만나 언니, 동생, 하는 사이가 된 언니가 있다. 남편과 이혼하고 중학생 딸 하나를 키우고 있는데 어느 날 길고양이 하나를 데려다 키우더니 고양이 박사가 돼 버렸다. 수컷인 그 고양이를 중성화 수술시키고 딸내미보다 더 비싼 음식을 사 먹이며 디카로 찍은 사진을 자랑삼아 보여주기도 했다. 내 눈에는 길가다 발길에 차이는 흔하디흔한 고양이로 보였지만 언니에게는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둘째아들이었다. 어느 날 언니와 만나 저녁을 먹기로 한 날. 언니가 저녁을 먹기가 무섭게 부랴부랴 귀가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엥? 하며 바라보는 내게 양해를 구하더니 고양이 밥 때문에 일찍 집에 가야한다나 뭐라나. 에휴... 이러다 고양이 한 마리 때문에 인간관계 다 끊어지겠다. 어쩔 수 없이 밥만 먹고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그리 유쾌하진 않았다. 고양이 때문에 버림 받은 기분이었다.

  마리여사네 고양이 마리와 도리, 타냐와 소냐, 그리고 충견 겐과 노라, 모모의 좌충우돌 동거이야기를 읽다가 문득 내게도 고양이와 개에 관한 추억담이 새록새록 떠올라 기록해 본다. 어린 시절 대가족 속에서 자라다보니 자연 개나 고양이 같은 동물과도 친해질 기회가 많았지만 요즘처럼 애완용으로 키우진 않았다. 당시에는 동네마다 개 짖는 소리가 요란했고 지금처럼 길고양이가 득실대지도 않았다. 그냥 개와 고양이, 인간이 한데 어우러져 자연의 일부처럼 부대끼며 살았던 것 같다. 인간과 동물의 관계가 예전보다 좋아진 듯 보이지만 언제부터인가 버려진 개들이 늘어나고 길고양이가 늘어나면서 실제로는 더 강퍅해 진 느낌이다. 현대인들은 뭐든 필요에 따라 소유하려고만 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나는 첫 장을 읽자마자 마리여사의 팬이 되었다. 아니, 제목을 잃는 순간 이미 그녀와 나의 동질성을 발견하고 쾌재를 불렀다. 나도 어느새 예전에 그토록 불쌍히(?) 여겨 마지않았던 노처녀 언니와 비슷한 연배가 되었다. 결혼을 이야기하기엔 너무나 멀리 와 버린 나이가 되고 보니 오히려 결혼이라는 제도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된 것도 같다. 결론은 인생에 있어 결혼이 필요충분조건은 아니라는 것이다. 한 때 독신인 친구들끼리 모이면 매번 하는 소리가 있었다. 결혼은 싫지만 아이는 하나 낳아서 기르고 싶다고! (헉! 뱉고 보니 매우 위험한 발언이다. 미성년자 독서금지?) 우리나라 법률상 독신은 입양도 안 되니 어쩌면 반려동물을 키우는 독신가구들이 많은지도 모르겠다. 독신에게도 입양의 기회를 준다면 아이들을 해외로 보내는 일 따위는 줄일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요네하라 마리 씨처럼 요즘 유행하는 표현으로 골드미스는 아니지만 나는 나 나름 독신의 즐거움을 만끽하며 살고 있다. 문득 외로움에 봉착할 때도 있지만 고독을 즐기는 법도 어느 정도 터득한 것을 보면 독신이 체질인 모양이다. 하지만 아직 반려동물을 키우고 싶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어릴 때 묻지마 가출을 한 고양이가 준 상처도 분명 그 이유가 되겠지만 그들을 도저히 잘 돌 볼 자신이 없는 것이 가장 큰 이유다. 책 속의 마리 씨도 얼마나 많은 시간과 정성을 걔네들에게 투자하고 있는지... 내 몸 하나 건사하기에도 벅찬 나로서는 감히 엄두도 못 낼 일이다. 하지만 책을 읽는 내내 나도 애완견이나 고양이를 정말 키우고 싶다는 욕망이 불쑥불쑥 솟아올랐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인간에게 느끼는 소외감 때문에 동물을 기르지는 말자라는 결심을 한다. 그 빈자리가 채워지는 날 어쩌면 나도 모르게 기르던 개나 고양이를 버리게 될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개와 고양이 중 어느 쪽이냐 하면 개 쪽이다. 주인의 은혜를 배은망덕으로 갚는다는 고양이의 속성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인지 평생을 주인을 위해 희생하는 개에게 더욱 정이 간다. 우리 쭈쭈는 주인을 위해 정말 살신성인하지 않았던가. (미안하다, 쭈쭈야, 아버지와 형부, 오빠를 대신해 내개 사과할게.) 그런데 책을 읽으며 고양이에 대해 새롭게 알아가는 재미가 있었다. 가령 새로 고양이가 들어오면 이전에 있던 고양이는 주인의 사랑을 잃는 것이 두려워서 신입을 괴롭히거나 괜히 오해해 가출을 하는 경우가 있고(혹시 우리 살찐이도???) 혼자 키우는 고양이는 자신을 사람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으며, 완전히 잠에 곯아떨어진 고양이일지라도 콘크리트 벽이 가로막고 15미터 떨어져 있더라도 쥐가 갉아대는 소리를 놓치지 않는다거나, 고양이 언어는 만국공통어 라는 것 등등 말이다.

  책을 읽는 도중 문득 문득 잔뜩 취하신 채 집 안으로 들어오시며 “쭈쭈야, 아빠 왔다!”라고 호기롭게 외치시던 젊은 시절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라 눈시울이 불거졌다. 이제는 뵐 수 없는 아버지. 대가족 장손이라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셨던 아버지는 그렇게 자신의 힘듦과 외로움을 푸셨는지도 모른다. 가족들에게 할 수 없는 푸념도 쭈쭈 앞에선 장난스럽게 풀어놓으실 수 있었으리라. 다섯 마리의 개를 바라보던 동료 언니의 따뜻했던 눈길도 새롭게 각인된다. 고양이 밥을 주기 위해 자리를 뜨던 그 언니의 마음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다음번엔 내가 먼저 말을 꺼내야겠다. 책을 통해 배운 고양이의 특성을 자랑삼아 늘어놓으며.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마리여사네 아홉 가족이 언제나 행복하길 빌어본다. 그동안 가족에게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그 후의 이야기도 무척 궁금하다. 나도 언젠가는 마리여사처럼 포유류가족을 이루고 살게 될지 모르겠다. 어쩐지 그날이 점점 다가오고 있음을 느낀다. 동물에 대한 사랑은 박애정신의 궁극이라고 한 황인숙 시인의 말이 그런 나를 자꾸 채근하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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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하는 사람
텐도 아라타 지음, 권남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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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죽음에 경중을 따지는 행위는 나아가서는 지금 살아있는 사람들의 목숨에 대해서도 경중을 묻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누구의 죽음도 차별이나 구별 없이 그저 애도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떨까... 했고, 거기서 희망 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 텐도 아라타.

  나는 이 책을 두 번 읽었다. 첫 번째 읽었을 때 천안함 사건이 있었고 탤런트 최진영 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두 번째 읽었을 때 한류스타 박용하 씨가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희한하다면 희한했다. 약속이나 한 것처럼 이 책을 읽을 때마다 예기치 않은 죽음의 그림자에 압도당하는 느낌이었다. 더욱 더 당황스러웠던 것은 책의 번역자인 권남희 씨가 이 책을 한창 번역할 때 노무현 전 대통령이 ‘삶과 죽음은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라는 유서를 남기고 유명을 달리했다는 사실이었다. 생의 이편과 저편, 삶과 죽음, 나로서는 가늠하기조차 힘든 초자연의 경계위에 그, 사카스키 시즈토가 순례자처럼 서 있었다. 

  사카스키 시즈토, 그는 왜 스스로 애도하는 사람이 되어 일본열도를 떠도는 것일까? 어떤 운명이 그로 하여금 삶과 죽음의 경계인이 되게 만들었을까? 처음에 나는 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뭔가 현실적이지 못하고 공중에 홀로 떠 있는 듯한 시즈토의 형상은 신비한 안개에 둘러싸여 캐릭터의 윤곽이 뚜렷하지 않았다. 차라리 교활하고 속물적인 마키노 고타로 같은 부류의 인간에게 더 연민이 느껴질 정도였다. 작가는 시즈토를 광활한 순례의 길에 외롭게 던져 놓을 뿐, 제3자의 입을 통해서만 ‘인간 시즈토’의 발자취를 더듬어 간다. 우리는 시즈토의 어머니이자 말기 암으로 죽어가는 준코, 남편을 죽였으나 시즈토를 사랑하게 되는 유키요, 호기심이 발단이 되어 시즈토를 쫓는 저속한 황색저널리스트 마키노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해 시즈토라는 인격체의 성장배경과 가족관계을 알게 되고 급기야는 그의 선택과 고통까지도 이해하게 된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애도의 길이 영원할 것이라는 것도.   

  마지막 책장을 덮고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는데 문득 떠오르는 영화가 있었다. 도리스 되리 감독의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이라는 독일영화였다. 죽은 아내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일본을 찾은 노신사가 후지산의 절경 아래서 일본전통무용인 부토를 추면서 죽음을 맞는 영화다. [하나미]라는 부제가 달려 있었는데 ‘벚꽃구경’이라는 뜻이란다. 덧없음의 가장 아름다운 상징이라는 벚꽃, 죽은 자와 함께 추는 그림자의 춤이라는 부토, 부끄러움이 많아 자신의 모습을 쉽게 보여주지 않는다는 후지산, 실체는 있지만 보이지 않는 것들... 우리의 사랑도, 삶도, 죽음도 그런 것이 아닐까? 얼굴에 허연 회칠을 하고 무거운 동작으로 기괴하게 몸을 비트는 부토 춤은 마치 애도하는 시즈토의 모습을 연상케 했다. 예술(행위)이 주는 고통의 쾌락이 그토록 강렬하기는 처음이었다.

  작가인 텐도 아라타는 구상 및 스케치부터 7년이라는 시간을 들여 [애도하는 사람]을 완성했다고 한다. 그가 들인 노력만큼이나 책은 두꺼웠지만 행간에 흐르는 여백의 미는 순간순간 생에 대한 환희로 다가왔다. 살아서 이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는. 누군가를 애도하는 시즈토의 말과 행동을 통해 죽음에 대해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다고 생각했던 우리들도 무언가 소중하게 들려줄 이야기가 남아있음을 깨닫게 된다. 고인이 누구를 사랑했고 누구에게 사랑받았는지, 또한 누구에게 감사했고 누구로부터 감사를 받았는지... 아직도 가슴 한켠에 할말이 남아있음을 기꺼이 감사하게 된다. 그러기에 이 책은 죽음이라는 추상을 통해 역설적으로 삶(생명)의 소중함, 현재의 소중함, 시간의 소중함, 관계의 소중함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한다. 하늘거리며 멀어져가는 한 시절 벚꽃을 잡으려 애쓰느니 우리가 열렬히 부대끼며 투쟁하듯 살았던 이 시간, 이 장소를 기억하고 후회없이 사랑하라고 채근한다. 

  불현듯 눈물이 주루룩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그러다 곧 벚꽃 이파리가 손가락 사이로 한 잎 두 잎 사라져 가듯 아스라이 말라버린다. 그순간이 너무도 짧아 꿈처럼 아련할 정도였다. 삶도 이런 것일까. 인간이기에 늘 잃고 나서야 후회를 하고, 보내고 나서야 그리워하는 일상의 반복이지만 심장이 벌떡벌떡 살아 있는 나는, 가족이나 친구, 동료, 태어나고 자라면서 관계 지어 온 수많은 사람들에게 욕심 부리지 말자는 다짐을 한다. 그리곤 언젠가 일본의 후지산에 다녀와야겠다는 계획도 조심스럽게 세운다. 어쩌면 거기서 애도의 순례여행을 하는 시즈토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한다. 비록 상상만으로 그칠지라도 이 또한 <세계문학>을 읽는 즐거움이 아닐까 생각한다. 일본에 대한 원초적인 반감과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던 나의 근시안을 뜨게해준 나오키 문학상에 감사를 드린다. 문화는 세계의 공통어임을 다시 한번 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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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나는 바깥으로 들어갔다 - 스물여섯의 사람, 사물 그리고 풍경에 대한 인터뷰
최윤필 지음 / 글항아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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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날 새벽. 오랫만에 일찍 눈을 떴을 때의 세상은 왠지 낯설었다. 매일 전쟁하다시피 아침을 맞곤 했는데 흐릿한 미명이 커튼 사이로 비치는 이른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평소보다 몸도 가벼웠고 정신은 맑았다. 그런데 가슴을 채워오는 건 일찍 일어났다는 충만감이 아니라 무기력한 허무감이었다. 마치 딴 세상에 홀로 뚝 떨어진 것만 같은  으스스한 외로움이 엄습해 다시 이불로 어깨를 감싸야만 했다. 분명 익숙한 내 방, 내 침대였다. 어제도, 그제도, 한달 전에도 늘상 그 자리에 있던 가구들, 그 장소였다. 아무 것도 달라진 건 없었다. 그날 밤. 오랫만에 만난 친구는 마흔의 나이를 걱정하며 흑염소를 넣은 보약 한 재를 주문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중년의 여자에게는 흑염소가 좋다는 말을 침이 마르도록 해대는 친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헤어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4월인데 느닷없이 흩날리는 눈발을 맞았다. 문득 세상도 나도, 뭔가 고장난 게 틀림 없다는 생각에 갑자기 서러움이 복받쳐 올랐다. 일순간 모든 것이 방향성을 잃고 헤매기 시작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고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 것일까? 아니, 그전에... 정말 살아는 있는 것일까?  

  그랬다. 삶은 때로 매정하게 나를 구석으로 내몰다가 어르다가 했다. 밀고당기는 연인들처럼 티격대격하다가 어느날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땐 나이 마흔을 넘긴 중년의 여자가 거울 앞에 서 있었다. 남들 다 하는 결혼도 못한 여자. 현실과는 담을 쌓고 아직도 꿈이라는 추상을 찾아 헤매는 여자. 주류도 아닌, 비주류도 아닌, 삶의 태도마저 어정쩡해져 버린 여자. 이성이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끝없이 추락하는 좌절과 비탄을 맛보고 있을 그 즈음... 이 책, [어느날 나는 바깥으로 들어갔다]를 만났다. 이 책에 끌렸던 건 순전히 제목 때문이었다. 안으로 들어간 게 아니고 바깥으로 들어갔다니... 흔히 바깥으로 나갔다고 표현하지 않나... 어딘지 현재의 시름많은 내 처지와 맞닿은 지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이 몽글몽글 솟아올랐다. 각자 독특한 사연을 간직한 스물여섯명의 사람과 사물, 공간, 풍경들... 그들의 성긴 틈새에 동그마니 앉아있는 내가 보였다. 나는 저자인 최윤필 기자의 노련함에 압도당했다가 결국 조근조근하게 사연을 풀어내는 초보 인터뷰이가 되어 있었다. 첫느낌의 머쓱함과는 달리 시간이 갈수록 그와의 인터뷰는 한없이 따뜻하고 편안했다. 


  언제부터였을까. 삼성이라는 재벌기업이 '초일류기업'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대대적인 홍보를 하면서 우리의 의식 속엔 오로지 1등만이 기억되고 존재하기 시작했다. 이런 사회풍조를 어느 한 기업의 홍보때문이었다고 예단하기는 곤란하겠지만, 당시 '역사는 2등을 기억하지 않는다'던 삼성의 획기적인 광고문구는 성장지향적인 정부의 정책과 맞물려 큰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고 그 영향은 현재까지 유효하다. 광고의 힘이었을까? 삼성은 말 그대로 초일류기업으로 성장했고 세계적인 기업의 반열에 올랐다. 해마다 대학생들의 취업 1순위는 언제나 삼성의 차지였다. 하지만... 그 광고를 보고 자란 수많은 젊은이는 과연 일류국가의 일류국민이 되었을까? 거슬러 올라가보면 나도 그 광고카피에 매료된 청춘 중의 하나였다. 세계화를 부르짖는 열풍에 휩쓸려 새벽 댓바람부터 영어학원 문턱을 넘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저 지조없이 시류에 휠쓸렸던 청춘이었고 그 여파로 아직까지 자아실현에 목을 매는 신세가 돼 버렸다. 요즘 TV예능 프로그램에서 어떤 개그맨이 외치는 소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1등이 되기 위해, 주류의 품에서 기득권을 획득하기 위해 경주마처럼 달리고 달렸지만 결국 1등 언저리에도 가보지 못한 채 트랙에서 이탈한 자의 비애... 바로 나한테 대고 외치는 소리같아 무릎을 쳤다.
 

  이 책의 최고 미덕이라면 피사체를 바라보는 최윤필 기자의 삐딱한 시선과 그런 삐딱함 뒤에 포도송이처럼  알알이 맺혀있는 인간미와 참신함을 발견하는 재미일 것이다. 처음엔 세속적인 기준으로 분명 문의 안쪽에 있는 기자가 풀어내는 문 바깥의 세계가 미심쩍었다. 이해하는 척하면서 젠체하거나 기자의 공명심으로 잣대를 갖다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있었다. 하지만, 제목에서 느껴지듯이 '바깥으로 들어갔다'라는 문장을 조어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분명 보통사람이 찾아내지 못하는 진정성을 끄집어내 줄 것 같은 기대감도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줄곧 놀랐다. 한권의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절친한 대화를 나눈다는 느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삶과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사이 그들의 언어는 나의 언어가 되었다. 때로는 먹먹함으로, 때로는 절박함으로, 때로는 후련함으로 다가온 유쾌한 수다였다. 세상일에 정신을 빼앗겨 갈팡지팡하는 일이 없다는 불혹의 나이에 비로소 나는 내가 '안'이 아닌 '바깥'에 존재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것은 급작스런 혼돈이 아니었다. 국가와 자본이라는 거대한 시스템 안에서 허덕이다가 스스로 찾아낸 구명의 방식이었음을 깨닫는 순간, 나는 비로소 온전히 바깥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효용이나 가치의 세계로 병합되려는 시대에, 세월의 속도를 감내하지 못해 바깥으로 밀려난 이도 있고 안쪽에 포섭되지 않으려고 맞버티다 변방의 우짖는 새가 된 이도 있다. 하지만 거기에는 안의 논리로부터 극복된 바깥의 존재들이 있다. 이 책은 바로 이 같은 바깥으로 들어가려는 시도이다.」

  누군가 나에게 안의 논리를 극복했느냐고 묻는다면 '아니오'라고 말할 수 밖에 없겠다. 만약 안의 논리를 완전히 극복했다면 자기연민에 빠져 허우적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모든 절망은 바깥의 허허로움이 주는 두려움과 외로움 탓이었지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아쉬움 때문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국가가 지원하는 사회안전망이 턱없이 낮고 소수자(아웃사이더)를 바라보는 사회적 인식수준이 제대로 정립되지 못해 위축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나도 몰랐다. 마흔이 넘어서도 결혼을 못할 줄은. 그래도 30대엔 결혼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하는 것이라고 우길 힘은 있었다. 서른 세살. 어떤 이는 부러움의 눈길로 바라봤을 탄탄한 공기업을 내 발로 걷어차고 나왔을 때는 꿈이 있었고 패기와 열정도 있었다. 좀 더 빨리 내게 있는 상상력을 발견했더라면 더욱 좋았지도 모른다. 잃을 것이 없는 20대였더라면 좀 더 많은 시도를 해 보고 절벽의 끝에서 목숨을 건 일생일대의 자충수를 둘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30대 초반에 새로운 인생을 시험해 보기엔 다소 무모함이 있었다. 이것이 세월이 지나 스스로 내린 현실적인 진단이다. 꿈이고 뭐고 어쩌면 다 허세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누군가 예전의 삶으로 돌아가고 싶냐고 묻는다면 나는 단호히 '아니오'라고 말할 것이 분명하다. 끊임없이 내 안의 나와 내 밖의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불현듯 불끈불끈 삶에 대한 애정이 용솟음침을 느낀다. 무겁게 축 늘어져 있던 마음에 누군가 신선한 공기라도 불어 넣어준 것처럼 마음이 가벼워졌다. 
 

  최윤필 기자가 미려한 언어로 풀어낸 책 속의 사람들도 아름다웠지만 퇴역마 다이와 이라지, 40원의 폐지로 절판되는 책들, 민초의 삶을 품는 풀피리, 전흔과 망각이 공존하는 DMZ, 작은 네모 속 세상 우표 등의 이야기가 참 매혹적이었다. 스스로 바깥의 세계를 선택할 수 있는 인간과는 달리 그저 밀려나고 버림받을 수 밖에 없는 그들의 처지에 묘한 공감이 갔다. 하지만  흘러가는 대로 삶에 순응하며 자연의 순리에 몸을 맡기는 것 또한 타고난 운명이라는 듯 초연한 모습에서 순한 위로를 받는다.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있든, 무모한 욕심을 부리지 않는 것이 당당해 보였다. 아하, 그렇구나. 이 책은 안과 바깥의 삶을 구분짓기 위해 씌어진 책은 아니겠구나.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돌아볼 여유도 없이 우물 안 개구리처럼 앞만 보며 달리지 말고 잠시 멈춰 서서 하늘도 올려다보고 바람도 느껴보고 사람들의 몸짓도 구경해 보라는 뜻일 것이다. 하지만, 자기가 선 곳이 어디이든 치열하게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당부도 잊지 않는다. "제 자리를 바깥에 둔다고 적당히 그 선에서 안주 한다는 건 아닙니다. 안이든 바깥이든 팽팽히 긴장하지 않으면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다들 치열한 마당들이니..."(P. 338) 이 두 줄의 문장이 마중물이 되어 가슴이 쿵덕쿵덕 뛰기 시작했다.  

  책의 감흥이 조금씩 잦아들 즈음... 다시금 가슴을 팔딱거리게 만든 문장을 만났다. 경향신문에 실린 고려대 자퇴생 김예슬 씨의 인터뷰 기사였다. 학내 대자보를 통해 '저항하지 않으면 젊음이 아니다'라고 당당히 외쳤던 김예슬 씨의 용기에 한껏 고무받았던 터라 그 일부를 옮긴다. 삶의 궤적을 바꾸기가 점점 힘들어지는 세상에 살고 있지만, 역사는 그런 사람들의 도전에 의해 진화하고 발전해 왔다는 걸 믿는다. 그들의 대부분은 집단가치의 울타리를 넘어선 사람들이다. 예컨대, '바깥'에 뿌리를 둔 사람들이다. 이쪽이든 저쪽이든 어느 하나를 극단적으로 선택해야만 하는 사회가 아니라, 변방과 중앙의 중간에 서서 다양한 생각과 선택이 유연한 경계인이 많아지는 사회를 꿈꾸며 글을 마친다. 이 또한 이상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을찌라도.

정해진 몇 개의 직업이 꿈이 되어버린 것들에 대해 분노하면서 다른 길을 찾을 수 있다는 상상력을 너무 쉽게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김예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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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화 가족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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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부터가 하 수상하다. 고령화가족이라니. 고령자들이 만나서 이룬 새로운 '가족의 탄생'인가? 그런데 그게 아니다. 가족의 탄생이 아니라 '가족의 재구성'이다. 제각각 흩어졌던 가족들이 젖먹이가 어미의 품을 찾듯 늙은 엄마의 그늘로 모여드는 이야기다. 이쯤되면 뭔가 따뜻하고 감동적인 홈드라마를 기대하게 된다. 하지만 작가가 천명관이다. 시대의 대표적 이야기꾼이라는 천명관 작가가 호락호락하게 독자들의 기대에 응할 리 없지 않은가. 소설의 제목이 주는 미시감과 작가의 이름이 주는 기시감 사이에 흐르는 묘하게 조화롭지 못한 긴장과 기대가 얼른 책장을 펼쳐들게 만든다. 표지를 장식한 다섯명의 남녀노소가 지금부터 내가 만나려는 가족 구성원일테다. 뭔가 범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다가 왼쪽 상단에 발그레하게 숨어있는 무지개를 발견하곤 얼굴 가득 미소가 번진다. 무지개를 그렸다는 건 분명 결말에 대한 어떤 암시일거야. 작가의 은밀한 의도를 훔쳐봤다는 생각에 책장을 펼치는 두 손이 벌써부터 유쾌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이야기는 나이 마흔여덟에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된 '10년 째 백수 전직영화감독'인 나, 오인모가 궁여지책으로 칠순 노모의 집으로 들어가면서 시작된다. 노모의 집에는 교도소를 제집 드나들 듯 드나들며 파란만장한 청춘을 보낸 쉰 두 살의 형 오한모가 3년째 눌어붙어 있다. 공사판에서 바위를 깰 때 쓰는 커다란 망치를 가리키는 '오함마'로 불리는 형은 별명에서 풍기듯이 알아주는 싸움꾼에다 전과 5범의 변태성욕자, 정신불구의 인간망종이다. 형제는 동거 첫날부터 폭력으로 기선제압에 들어간다. 한달 후 바람을 피워 두번째 결혼에 종지부를 찍은 여동생 미연이 싸가지가 바가지인 고삐리 조카 민경을 데리고 '엄마의 집'으로 들어온다. 이렇게 해서 삼남매는 이혼과 파산, 전과와 무능의 불명예를 안고 엄마의 스물네평짜리 연립주택에 슬며시 기어들어와 기생하게 된다. 그 집은 10년 전 오토바이 사고로 죽은 아버지의 목숨과 맞바꾼 집이었다. 그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그렇게 어쩔 수 없이 살을 부대끼게 된 '평균나이 사십구 세' 고령화가족은 무사히 행복했을까? 누군가 그랬다. 한번 샌 바가지는 또 샌다고. 또 이런 말도 했다. 밖에서 샌 바가지는 집에서도 샌다고. 조카의 이름도 모르고 게다가 약점을 이용해 삥까지 뜯는 삼촌, 싸가지는 애저녁에 국 말아드시고 분홍팬티 사건이후 가출해버린 조카, 이혼한지 얼마나 됐다고 남자를 집으로 끌어들인 여동생, 먹는 것에 환장하는 백이십킬로그램의 거대한 괴물 오함마.... 쓰다보니 과연 이 철없고 개념없는 막장가족의 끝은 어디일까 심란하다. 게다가 형과는 알고보면 이복형제에 여동생과는 이부남매라니, 그나마 멀쩡해 보였던 엄마의 비밀까지 밝혀지면서 남아있던 동정의 싹마저 잔인하게 잘라버린다. 나는 어느새 빌라앞 버려진 소파에 앉아 미주알고주알 거리던 동네 사랑방 노파 중 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저놈의 집구석, 오늘은 또 무슨 뜨악한 사건으로 근질거리는 내 입을 긁어주려나...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웃음으로 시작한 엿보기는 점점 슬프고 애잔해지다가 마침내 쓸쓸해진다. 작가의 유쾌한 언어유희는 어느새 '인생이 다 그런거지 뭐'라는 철학적인 자조로 바뀌어 있었다. 책을 읽는 도중 천명관 작가가 극본을 쓴 영화 [이웃집 남자]를 보았다. 영화의 시작은 누군가의 칼에 맞은 주인공 상수가 쓰러져 죽어가는 장면이었다. 상수의 독백이 잊혀지지 않는다. '세상으로부터 무언가를 얻기 위해선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것이 인생의 법칙이다.' 당연한 말씀. 하지만 비로소 개과천선해 소박한 행복을 꿈꾸는 주인공을 꼭 죽였어야 했나? 잔인한 결말에 이런 것이 인생의 아이러니인가? 싶었다. 늘 한발짝씩 늦어 타이밍을 놓치는 것. 똑같은 질문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작가님, 왜 어머니를 죽이셨나요? 이제 좀 살만해졌는데 꼭 그렇게까지 하셔야했나요? 표지에 그려넣은 무지개는 정녕 반전(?)을 위한 눈속임이었나요? 작가님, 저 완전히 낚인 건가요?" 나는 그만 좌절했다. 
 

  극중 인물은 어느 한사람 상투적인 전형성을 띄지 않는다. 굴러들어온 자식들에게 군소리 하나없이 끼니를 챙겨주고 응석을 받아주던 엄마마저 '대한민국의 전형적인 어머니상'에서 벗어난다. 이런 캐릭터의 전복과 문장의 익살이 천명관 작가 특유의 걸쭉한 입담과 어우러져 한편의 영화를 보는 듯한 착각을 준다. 무기여 잘있거라, 스팅, 저수지의 개들, 쥘과 짐 등, 영화제목에서 차용한 목차가 더욱 소설을 영화적 구성으로 돋보이게 한다. 하지만, 엄마의 죽음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문이 든다. 아무런 설명 없이 엄마가 죽었고 자식들은 잠깐 눈물을 보였을 뿐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간다. 이런 결말이 긴 여운을 주는 건 사실이지만 엄마의 입장에 적잖이 감정이입해 온 나로선 엄마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들다. 이런 감정은 얼마 전 끝난 시트콤 [지붕뚫고 하이킥]에서도 겪은 바 있다. 두 주인공이 죽어 영원히 가슴에 이름을 새겼듯이 나도 엄마의 이름을 가슴에 새기리라. 내 심장을 엄마의 마지막 휴양지로 기꺼이 바칩니다... 그런데... 엄마의 이름이 없네... 엄마는 그냥 처음부터 엄마였다! 그 사실이 처음으로 심장을 서늘하게 베고 지나갔다.

  특별해 보이지만 평범하고 평범해 보이지만 특별한 너무나 이율배반적인 가족과의 만남은 이렇게 끝이 났다. 쳔명관 작가의 개인적 체험들이 많이 담겨있어서인지 포르노영화, 조직폭력배집단 등의 묘사가 참 재미있고 흥미로웠다. 전작인 [유쾌한 하녀와 마리사]에서는 '취재를 안하는 걸로 유명한' 작가가 등장하고 작가 스스로 상상력의 여지를 위해 취재를 즐기지 않는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취재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건 그리 귀한 게 아니다'라던 천명관 작가의 말이 취재를 우상시하는 타 작가들과 비교돼 무척 신선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고래]에서부터 시작해 [유쾌한 하녀 마리사], [고령화 가족]에 이르기까지, 또한 영화 [이웃집 남자]만 보더라도 작가의 내면에는 이미 오래되고 두꺼운 취재수첩이 몇 권은 들어가 있는 것 같다. 거침없이 쏟아지는 현장감 넘치는 대사들, 구체적이고 인상적인 상황묘사 등은 그가 살아온 이력이 결코 순탄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오랜시간 축적되고 숙성된 천명관 작가 특유의 문체가 매력적으로 어필하는 이유는 치열하게 살아온 삶의 결과물이 문장 속에 녹아있기 때문이라고 나름 생각해 본다.  

 [ 씨네21 744호]에 실린 천명관 작가의 인터뷰에는 소설을 쓰는 시나리오 작가로서, 혹은시나리오를 쓰는 소설가로서 그가 느꼈을 정체성의 혼란이 솔직하게 드러나 있었다. 소설을 쓰면 영화적이라고 하고 시나리오를 쓰면 문학적이라고 한다는. 하지만 작가에겐 첫사랑 양아치 같은 영화를 잠시 내려놓고 지금은 소설가라는 정체성을 갖고 살려고 한다며 애써 방점을 찍는 것이 어딘지 미련이 남아있는 듯 보이기도 했다. 인터뷰를 한 날은 천명관 작가가 새 장편소설을 쓰기 위해 백담사 밑자락으로 들어가는 날이었다고 한다. 어떤 소설을 들고 나올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또한 영화를 좋아하는 한 사람으로서 그가 반드시 자신의 시나리오로 감독입봉하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게도 된다. 소설을 쓰든 영화를 만들든, 어쨌든 천명관 작가는 이 시대의 능란한 이야기꾼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나는 이미 상상의 허를 찌르는 천명관식 유머에 사로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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