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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평점 :
- 기억이란 제 스스로 기억하고 싶은 대로 기억하는 속성까지 있다. p.20
윤아!
처음 정윤이라는 이름을 활자로 만났을 때, 이름 위에 살며시 검지를 대 보았어. 마치 수 억만 개의 모래알 속에서 모난 자갈처럼 존재증명이라도 하듯이 삽시간에 내 눈길을 잡아끈 그 이름을 끝이 동그란 검지 안에 언제까지고 가둬두고 싶었어. 속박해서 마구마구 학대하고 못살게 굴고 싶었어. 나는 어느새 정윤이라는 이름을 네 이름인 임윤으로 읽고 있었던 거야. 나는 정윤이 나오는 부분에서 나도 모르게 몇 번이나 네 이름을 되뇌고 있었단다. 임윤이... 임윤은... 임윤을... 이렇게 말이야. 그러면서 이런 생각도 했던 것 같아. 왜 윤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외자가 많을까? 최윤, 정윤, 임윤.... 우습지도 않은 말장난에 잠시 도취된 사이, 문득 너의 이름을 기억해 낼 때마다 바늘처럼 뾰족한 것이 명치끝을 찌르는 것 같던 아픔이, 너의 이름 뒤에 자동으로 두근방 세근방 뜀박질하며 어쩔 줄 몰라하던 분노가, 어느새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린 걸 깨달았어. 너와 나 사이에 켜켜이 쌓인 세월의 더께 덕분일까? 아니면 너를 뺀 내 인생이 더 이상 초라해지지 않기를 바랐던 마음의 암시가 너와 관련된 모든 기억을 왜곡해 버렸기 때문일까? 어느 쪽이든 나는 안심했어. 이제야 말로 봉인된 기억의 실타래를 풀어야 할 때가 되었음을 깨달았거든.
- 인생이란 각기 독자적이고 한번 뿐이다. p.23
윤아!
만약 네가 내 앞에 있었다면 넌 분명 호기심천국이라는 별명답게 이렇게 물었을 거야. 정윤이 누구냐고. 글쎄... 누구일 거 같니? 내 인생에 윤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을 두 번 만날 확률은 그리 많지 않을 거야. 일단 흔한 이름이 아니니까. 어물쩍 넘어가려는 나를 향해 넌 또 이렇게 묻겠지. 남자니? 여자니? 이 질문에도 난 묘한 여운을 남기며 얼렁뚱땅 넘어갈 거야. 넌 언제나 나에 대해선 모르는 게 없었고 난 언제나 너에 대해선 조금만 알고 있었지. 돌아보니까 연인사이에도 묘한 힘의 역학관계가 존재한다는 걸 알았어. 난 너보다 널 조금 더 사랑했을 뿐이었지만 누군가를 사랑함에 있어 언제나 더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라는 걸 그땐 몰랐지.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으니까. 손을 잡고 체온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었으니까. 이젠 알아. 누군가를 사랑하더라도 아주 조금씩만 나를 보여줘야 한다는 걸. 감질나도록 소위 ‘밀땅’을 잘해야 한다는 걸 이젠 나도 분명히 알아. 하지만 너와 헤어진 후 아직 그런 사람을 못 만났으니 실행에 옮겨볼 기회는 없었어. 만약 타임머신이 있어, 너와 함께 있는 것이 한없이 설레기만 했던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간다면 나, 실수 없이 잘 할 수 있을까? 그럴까? 하지만 인생에 만약은 없구나. 인생의 각별한 어느 순간은 안타깝게도 딱 한번 뿐이로구나.
- 우리 엄마는 나에게 누군가 미워지면 그 사람이 자는 모습을 보라고 했어. 하루를 보내고 자는 모습이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이라고. 자는 모습을 보면 누구도 미워할 수 없게 된다고. p.195
윤아!
너와 헤어진 후 내겐 습관 하나가 생겼어. 일요일이면 네가 사는 아파트 근처 공원을 배회하는 거야. 마치 몽유병 환자처럼 너와 내가 함께 앉았던 벤치를 서성거렸고 멀리 네 방이 깨알같이 보이는 15층 건물을 한없이 올려다보곤 했지. 밤이면 네가 손가락을 짚어가며 알려주었던 카시오페이아, 북극성 따위의 별자리를 찾아다녔어. 어린왕자가 산다는 B-612 소행성을 무턱대고 찾아보기도 했어. 일요일의 습관은 한동안 계속되었어. 네가, 나도 아는 여자후배를 데리고 너의 아파트로 들어가는 것을 보게 된 그날까지. 그날은 우리가 헤어진 지 2주일이 채 안된 날이었고 너도 어쩌면 나처럼 조금의 미련이 남아있으리라 착각했던 거야. 그렇게 나는 어리석었던 거야.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더 놀라운 이야기를 듣게 되었어. 네가 그 후배에게 나와의 사이는 실수였다고 해명했다는....... 실수.... 실수.... 네가 나한테 어떤 실수를 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정말 한 남자에게 헌신하다가 헌신짝 난 꼴이 되어 버렸지, 내가. 이별의 이유를 화려한 언변으로 아름답게 포장하기에 바빴던 네가 그 후배에게 또 어떤 립 서비스로 혼을 빼았았을지 그때의 내 아둔한 잔머리로도 상상이 가더구나. 한동안 잠을 이룰 수가 없었어. 내 생애 처음으로 지독한 배신감에 끙끙 앓았고 너를 파멸시키는 꿈까지 꾸었어. 어리석게도 말야. 만약... 또 만약에 말이야... 정윤의 충고처럼 피곤에 지쳐 자는 너의 모습을 볼 수 있었더라면 더 이상 널 미워하고 증오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럴 수 있었을까?
- 사랑은 이 세상의 모든 것. 우리가 사랑이라 알고 있는 모든 것. 그거면 충분해. 하지만 그 사랑을 우린 자기 그릇만큼 밖에는 담지 못하리. -에밀리 디킨슨
윤아!
사랑의 상처가 깊고도 컸었지만 이젠 그때의 열정도, 질투도, 애증도 남아있질 않아. 오로지 너, 임윤이라는 이름만 퇴적된 화석처럼 악연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지. 책을 읽으며 조금은 알게 되었어. 악법도 법이듯이 서로 나쁘게 끝난 사랑도 사랑은 사랑이라는. ..결국 사람은 자기의 그릇만큼 사랑을 담을 수 있다는 사랑의 기술 같은 것 말야. 너와 나의 그릇이 달랐기 때문이란 걸 몇 년이 흐른 지금에야 몇 구절의 시를 통해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어. 우린 서로 그릇의 크기가 다르고 모양이 달랐기에 서로 다른 사랑을 꿈꿀 수밖에 없었다고 애써 위로하련다. 한 때 나의 모든 것이라 생각했던 너였지만 언제든 변할 수 있는 게 사람의 마음이고 상황이더라. 그런 면에서 넌 나보다 인생을 좀 더 일찍 안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아주 쿨하게 모든 걸 정리했잖아? 하지만 그런 너를 이젠 원망하지도, 미워하지도 않아. 대신, 내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기에 널 만났고 사랑의 기쁨과 절망과 그 모든 희로애락을 가르쳐준 너에게 오히려 감사한다. 네게 있어 나라는 존재도 그러길 바란다면 너무 지나친 욕심인 걸까? 청춘의 한 시기를 같이 지나온 것만으로도 그럴 순 없는 걸까?
윤아!
우리 언젠가, 언젠가는 말이야.... 우연이라도 어디선가 마주친다면 그땐 살며시 웃어주자. 어떻게 살았냐고 묻지도 말고, 못 볼 걸 본 것처럼 모른 척 지나치지도 말고, 서로의 얼굴에 깊게 패인 세월의 흔적을 마주보고 웃어주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자. 응? 임윤! 인마...! 잘 살아. 어디서 무엇을 하고 누구를 만나든 행복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