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 방송 드라마에서 남자끼리 언니라는 호칭을 쓰는 대사때문에 연기자들이 어색해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드라마 관계자는 조선시대 어법이라고 해명했다는데요...하지만 굳이 조선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필요없습니다.우리들이 졸업식 때 늘 부르는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라는 가사를 생각해 보세요.왜 언니 라고 가사를 지었을까 의아해 하는 이들이 많은데 원래 이 언니라는 호칭은 동성의 윗사람을 부르는 단어예요.남자든 여자든 무관하지요.실제로 제가 아주 어렸을 때 좀 오래된 만화에 '콩돌이'라는 게 있었는데 거기서 남동생이 형을 언니라고 부릅니다.
호칭이라는 게 의외로 시대에 따라 잘 바뀝니다.예를 들어 인터넷을 뒤지다 보면 70년대 코미디가 나오는데 거기 보면 길거리에서 처음 만난 성인남자들끼리 노형! 또는 형씨! 라는 호칭을 씁니다.요즘은 이런 말을 안쓰지요.그리고 예전엔 '노인장'이라는 호칭을 나이 지긋한 남자에게 썼습니다.황순원의 60년대 초반 소설인 <일월>을 보면 주인공인 40대의 남자 교수가 시골노인에게 길을 물어보면서 "노인장! 이 길이 00리 가는 길인가요? "하고 말하는 장면이 있습니다.요즘은 노인들에게 쓰는 호칭이 좀 애매해요.할머니 할아버지라는 호칭을 싫어하는 노인들이 많지요.손자손녀들에게나 듣는 말이지,왜 남들에게까지 그런 말을 들으면서 "나는 늙었구나..."하고 늘 의식해야 된단 말이냐 하는 항변입니다.그렇다고 다른 호칭이 있는 것도 아니구요. 어르신이라는 말이 있긴 합니다만 '어르신 일자리 박람회' 이런 식은 좀 지나치다는 생각도 듭니다.
예전엔 신문기사나 방송에서 고위직을 가리킬 때도 이름 다음에 직책을 쓰지 않고 그냥 이름 뒤에 바로 '씨"를 붙였습니다.예를 들어 1963년 대통령 선거 때 윤보선 후보 박정희 후보가 맞붙었는데 이 당시 신문기사를 보면 그냥 윤보선 씨...박정희 씨...이렇게 나와 있습니다.요즘 같으면 꼬박꼬박 누구누구 후보라고 하겠지요.그만큼 그 당시만 해도 호칭 인플레가 심하지 않았다는 얘기도 되지요.
처음 본 사람에게 호칭을 뭘로 해야 되느냐 하는 게 갈수록 어렵습니다.요즘은 아저씨 아줌마 아가씨라는 말도 왠지 낮추어 보인다는 느낌을 받으니까요.그러면 도대체 뭐라고 불러야 할지...이게 다 2인칭 대명사가 문법책에만 있고 실생활에서는 없는 나라의 불편함이기도 합니다.그래서 호칭 가지고 싸우는 일이 많지요.그러다가 나이 가지고 따지고...
일본 영화 자세히 본 분은 자막 번역에서 느끼셨을텐데 예를 들어 다나카 상을 다나카 씨로 번역할 때 굉장히 이상하다는 거죠.일본에서는 아는 사람에게 이름 뒤에 상이라고 붙이면 끝납니다.그래서 아주 어린 소년이 나이 많은 동네 아줌마에게 예를 들어 하루코 상...이라고 하면서 이야기를 주고 받지요.그런데 우리말에서 이것을 하루코 씨라고 번역하면 이상합니다.우리나라에서는 어머니 뻘 되는 여자에게 누구누구 씨라고 붙이면 안 되니까요.하지만 이런 일본 호칭 관행이 굉장히 편하기는 합니다.우리나라는 그게 안되니 복잡하지요.
한글 운동하는 남영신 씨는 우리나라는 2인칭 대명사가 없기 때문에 피곤한 다툼이 너무 많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사회생활하면서 호칭 때문에 불편했던 사람들은 이 주장이 실감날 겁니다.그래서 저는 저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특히 여자와 대화할 경우 그냥 서로 존대어로 00씨라고 부릅니다. 알고 지내는 동네 여고생들이 저에게 00씨라고 합니다.그게 편하고 좋아요.좀 파격적이라는 말도 듣습니다만 일단 익숙해지면 서로 편합니다.제게 00씨라고 했던 여고생들이 몇년이 지나 이젠 대학생이 되고 그렇습니다.
이곳에서 제가 가끔 '알라딘의 동무들'이라고 할 때가 있는데 동무라는 말이 굉장히 편합니다.이 호칭도 80년대 들어와서는 없어진 것 같습니다.저야 학교의 선후배 따지는 관행도 다 없애고 학생끼리는 동무삼아 지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니 '찬물도 위아래가 있다'고 정색하는 사람에게는 이해가 안 가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