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에서 아동용 서적을 관심있게 본다.나는 이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가 반성도 해보고 어린이 청소년들이 이런 책을 읽고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궁금하기도 해서이다.특히 우리나라 전기물들은 위인들은 모두 아무 인간적인 약점이 없는 어마어마한 인물로만 그려져 있다.하지만 위대한 인물의 어두운 면이 드러나는 책을 발견할 때도 있다.
김종광<박지원>도면회 감수 (파랑새) 제 16장 '정조임금이 반성문을 쓰라고 강요하다'는 특이하다.문체반정에 대한 저자의 시각이 분명히 드러나는 제목이다.저자는 여기에서 정조를 분명하게 사상을 억압하는 주체로 묘사했다.정조를 개혁과 진보의 상징으로 보는 세간의 평가와는 딴판이다.저자는 문체반정을 '자유로운 비판정신이 두려운 기득권 세력들이 연암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할 정도로 젊은이들 사이에 연암의 인기가 많아지자 이를 탄압하려는 시도'라고 못박았다.더군다나 이 기득권 세력의 중심을 정조라고 분명히 썼다.연암이 즐겨 쓰는 솔직하고 구수한 문장을 속되고 저속하다고 여긴 이들의 뜻을 수용하여 정조는 오염되지 않는 순수문의 교본을 쓰라는 명령을 내린다.그 명령을 받아 이른바 순수한 문체의 교과서를 써서 올린 이들이 이서구와 정약용.이서구는 한때 박지원의 후배이기도 했는데...
이 책에는 정조의 압박에 반성문을 쓴 다음 박지원이 자신을 한심하게 여기는 대목이 나온다.특히 그의 동료인 이덕무는 반성문을 제출한지 며칠 안에 불귀의 객이 되고 만다.와병중이었던 이덕무에게 임금의 사상탄압은 엄청난 정신적 압박이었으리라.울화통이 터져 죽었다고 해도 좋다.정조를 효성이 지극하고 학문을 융성시킨 진보적 개혁군주로 알고 있는 성인들도 이 대목에선 정조가 이럴 수가...하고 놀랄 만한 장면이다.
이 책엔 이 당시 정약용이 무슨 역할을 했는지는 나와 있지 않다.단,연암식 문체에 맞서 정조의 뜻을 수용하는 전통적이고 '순수한'교본을 썼던 그가 어떠했으리라고 짐작은 할 수 있다.흥미로운 것은 같은 출판사에서 정약용 전기도 냈는데 거기엔 문체반정에 대한 내용은 전혀 없다.우리나라에는 정약용은 신성불가침의 위인이다.그런 그가 사상탄압에 앞장섰다는 사실은 굳이 언급해봐야 복잡한 문제만 일으킬 것이니 대충 넘어가자는 의도인지? 호기심이 있는 어린이나 청소년이 이 출판사의 박지원 전기를 읽고 정약용이 이 때 무슨 역할을 했는지 알아보려고 정약용 전기를 읽다가 어...왜 문체반정 이야기가 없는거야....하고 아쉬워하지 않을까?
고정관념은 굳은 껍질이다.우리가 공부하는 이유는 이런 껍질을 벗고 참모습을 바로 보기 위해서이다.역사적 인물을 보는 시각은 더욱 그렇다.우리는 실학자하면 제일 먼저 떠올리는 이가 정약용과 박지원이다.하지만 실학이란 범주로 묶기엔 이 두 사내는 너무 다르다.특히 정조를 막연히 개혁적인 군주라고 알고 있는 이들은 문체반정 당시 박지원을 압박하는 그의 모습을 알고 머리가 혼란스러워질지도 모르겠다.
요즘 노론 때리기가 유행이다.보수 수구이며 일제 때 친일파가 많았다고 비난하기도 하고 정조암살도 노론이 주도했다는 설도 있어서 드라마나 영화,소설로도 나온다.이인화<머나먼 제국>은 그 유명한 사례 중 하나이다.하지만 박지원은 서인 중 노론이었고,그보다 더 앞 선 세대인 박세당은 서인 중 소론이었다.이 둘은 파격적인 사상때문에 핍박을 받았다.박세당은 사문난적이란 욕까지 먹지 않았나.노론하면 송시열만 아는 이들은 박지원이 노론이라는 사실에 놀랄 것이다.노론은 수구보수이데...하면서.하지만 사람은 긍정적인 혼란을 겪으면서 성장한다. 그 혼란이 두려운 이는 고정관념이라는 안락한 둥지 속에서 안 나오면 된다.긍정적인 혼란을 주는 책이 어린이용이면 어떻고 청소년용이면 어떤가.애들 책 읽는 게 부끄럽다고? 새로운 것을 배우는 데 부끄러워야 할 이유가 있는가.한 번 크게 심호흡하고 이 어린이용 박지원 전기를 읽어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특히 요즘 신문 칼럼이나 시론 등에 진보인사고 보수인사고 간에 정조의 리더십을 배우자느니 정약용의 개혁사상을 배우자느니 하는 내용이 많은데 이런 글에 싫증을 느낀 이들은 어린이 책에서나마 신선한 자극을 맛본다고 손해보는 일은 없으리라.
****추신---정조의 문체반정을 비판적으로 보는 견해는 강명관<책벌레들 조선을 만들다> (푸른역사 2007) 중'책을 탄압하는 호학의 군주 정조'편을 참조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