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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
조앤 디디온 지음, 홍한별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23년 12월
평점 :
...첫 번째 날 밤 이후로는 몇 주 내내 하루도 혼자 있었던 적이 없지만, 첫 번째 날 밤에는 혼자 있어야 했다.
존이 돌아올 수 있으려면, 나 혼자 있어야 했다.
그렇게 나의 마술적 사고의 한 해가 시작되었다.
...존이 퉁퉁 부은 퀸타나의 얼굴에 입을 맞췄다. “하루 더 사는 것보다 더.” 존이 속삭였다. 이것도 우리 식구끼리만 통하는 말이었다. 이 말은 리처드 레스터의 영화 〈로빈과 마리안〉에 나오는 대사다.
...누군가를 잃은 사람은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무방비로 보인다. 나도 한동안 내가 보이지 않는다고, 형체가 없다고 느꼈다. 산 자와 죽은 자를 갈라놓는 전설 속의 강을 건너, 최근 상을 당한 사람만 나를 볼 수 있는 공간에 들어선 것 같았다. 처음으로 그 강, 스틱스강과 레테강과 장대를 쥐고 망토를 두른 뱃사공의 이미지가 강력하게 다가왔다. 처음으로 순장이라는 관습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과부들이 슬퍼서 불타는 뗏목에 몸을 던진 게 아니었다. 불타는 뗏목이란 그들이 느끼는 비애가(가족이나 사회나 관습이 아니라, 비애가) 그들을 데려간 장소를 가리키는 정확한 비유다.
...우리가 상상하는 비애는 ‘치유’가 기본형이다. 앞으로 나아가는 움직임이 지배적이리라고, 최악의 순간은 처음 며칠뿐이리라고 생각한다. 가장 힘든 순간은 장례식이고, 이후에는 치유 과정이 시작될 것으로 믿는다. 장례식을 앞두었을 때는 ‘버틸’ 수 있을지, 상황에 잘 대처할 수 있을지, 죽음을 대하는 올바른 자세라고 다들 말하는 ‘의연함’을 보여줄 수 있을지 걱정한다. 그 일에 대비해 마음을 굳게 다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장례식이 일종의 진통제가 되리란 것, 다른 사람들의 돌봄 속에서 행사의 엄숙함과 의미에 파묻혀 있을 수 있는 일종의 마약성 퇴행이 되리란 걸 모른다. 그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 끊임없이 찾아오는 한없는 결핍, 공허, 의미의 부정, 무의미를 경험할 수밖에 없는 순간의 연속(이게 상상한 비애와 실제 비애의 핵심적인 차이다)도 겪기 전에는 알 수 없다.
...인간은 시들기 위해 태어났다.
우리는 이상화된 자연이 아니다.
우리는 불완전하고 유한한 존재이고, 외면하려 해도 유한성을 의식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복잡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상실을 슬퍼하면서 좋든 싫든 우리 자신을 애도하게끔 되어있다. 우리의 이전 모습을.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자신을. 언젠가는 영원히 사라질 존재를.
엘레나의 꿈은 죽음에 관한 것이었다.엘레나의 꿈은 노화에 관한 것이었다. 여기 그 누구도 엘레나와 같은 꿈을 꾼 적은 없다(앞으로도 없을 것이다).시간은 우리가 배우는 학교다 / 시간은 우리가 불타는 불이다.
...나는 왜 우리가 죽은 사람을 살려두려고 하는지 안다. 그들을 우리 곁에 두려고 살리려 하는 것이다.
나는 또 우리가 살아가려면 죽은 사람을 포기해야만 하는 때가, 그들을 보내 줘야만 하는 때가, 그들을 죽은 채로 두어야만 하는 때가 온다는 것도 안다.
그들이 테이블 위의 사진이 되게 해야 한다.
신탁 계좌의 이름이 되게 해야 한다.
물 위에 띄워 보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