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사람 대부분은 자신의 ‘컴포트존’을 벗어나는 일이 거의 없다. 우리는 나날이 편안해지는 거처와 냉난방이 조절되는 멸균의 장소에서 도전이라고는 일절 없는 안전한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고 과식하며 살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사람들은 시인 메리 올리버가 말한 “야성적이고 소중한 삶”의 경험을 스스로 제한하고 있다. ...인간의 마음은 프레젠테이션을 망치는 것 같은 결과를 과대평가하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다...과거에 사회적 실패란 부족으로부터 추방당해 자연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것을 의미할 때가 많았다. “그러니까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이 진화적 메커니즘은 이제 도움이 안 된다는 겁니다. 삶에서 정말로 위대한 것은 결코 완전한 성공이 보장되어 있을 때 오지 않습니다. 단언할 수 있습니다. 완벽하게 실행하더라도 실패 확률이 높은 도전에 참여하는 것, 그런 상황에 과감히 뛰어드는 행동은 엄청난 파급 효과를 가져다줍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도 없애주고, 내 안의 잠재력을 알게 해주죠.” ...인생의 진짜 도전은 내면을 향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모토는 내가 정말로 불편한 뭔가를 해내겠다는 겁니다. 틀림없이 도중에 포기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 겁니다.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더 쉽게 포기할 수 있죠. 하지만 ‘내가’ 보고 있기 때문에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도전을 마치고 나면 내가 나를 지켜보는 유일한 사람이었다는 사실, 힘들었던 상황에 당당하게 대처했던 자신을 돌아볼 수 있습니다. 그때 말로 다할 수 없는 깊은 만족감이 찾아옵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지켜보는 사람이 나밖에 없을 때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제대로 해본 적이 몇 번이나 있을까요? ...“그런데 언젠가부터 따분함이 우리를 더 창의적으로 ‘만든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다 헛소리예요. 따분함은 우리를 더 창의적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한테 ‘뭔가를 해!’ 하고 말하죠.” 그 ‘뭔가’가 우리 마음을 비집중 모드로 이끌어준다면, (예를 들어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자리에 앉는 것과 같은 일) 다른 사람들처럼 미디어로 머릿속을 덮어버리는 대신 우리는 말 그대로 다른 파장으로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게 사실 창의성이 살아나는 방식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배고픔에서 오는 불편함을 끌어안을 수 있어야 한다. 때때로 24시간씩 굶는 것이 인간에게 정상적이고 유익한 상태임을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느끼는 허기의 대부분이 실제로는 생리적인 배고픔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은 단지 현대 생활의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한 일종의 값싼 대처 메커니즘일 때가 많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소걀 린포체는 1992년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티베트의 지혜》에서 체크리스트 현상에 대해 “서구식 게으름”이라고 표현했다. “우리는 삶을 강박적인 활동으로 가득 채운다. 그래서 정작 중요한 문제를 직면할 시간이 없다. 스스로 삶을 들여다보면 얼마나 많은 불필요한 일들과 소위 ‘책임’이라는 것들이 우리 삶을 채우고 있는지 명확하게 보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계속해서 집착적으로 삶의 조건을 개선하려고만 한다. 이것이 곧 목적이 되고 결국 제자리를 맴도는 헛된 방황으로 끝날 수 있다.” ...“일부러 육체적인 불편함으로 뛰어든 뒤에 고통을 견디면서도 그 일이 왜 필요한지를 깨달으면 정신적 굳은살이 붙습니다. 우리는 이를 ‘인내의 우물Well of Fortitude’이라고 부릅니다. ...더 나은 삶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편안함에 익숙해져 우리의 자연스러운 동작들과 신체 능력을 점점 잃어버리고 있다. 의식적으로 불편함을 감수하고 목적 있는 운동을 하지 않는다면, 즉 편안함이 점점 우리의 삶에 침투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밀어내지 않는다면, 우리는 갈수록 더 약하고 병든 존재가 될 것이다.
...필요했던 것 체념뿐이었다. 결국은 행복해질 수 없음을, 그때 알고 체념했어야 했다.그럼에도 우환은 좀더 기다렸다. 종인처럼 솥 앞에 앉아 국이 끓기를, 곰탕이 완성되기를. 종인처럼 식당에 앉아 순희가 돌아오기를. 하지만, 기다림만으로 타인의 인생을 살 수는 없었다. 누구나 자신의 현재가 있었다. ‘왜 이렇게까지 애를 썼을까.’ 우환은 거울을 보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인생 하나가, 지 혼자 망쳐지나.” 일흔아홉이 된 이순희는, 쉰아홉이 된 이우환에게 이어서 말한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하는 말이다. “니는 어떤지 모르겠다만, 나는 모든 게 달라졌다. 니가 태어난 후로.”
...그래서 종인은 이 식당을 운영할 수 있었다. 흔한 바지사장이 아니라 주방의 주인이었다. 종인에게 비법이 있다면 기다리는 동안 다른 걸 하지 않는 거였다. 종인은 기다려야 할 때 기다리는 것에만 집중했다. 지루한 시간이 정직하게 흐르고 있었다. 종인은 기다림에 정직한 사람이었다. 분과 초 사이에서 게으른 사람이었다. ...어쩌면 애초에 이런 지겨운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남들보다 몇 겹은 더 되는 삶을 산 것처럼 보였던 아버지였다. 어쩌면, 이런 긴 하루들이 거듭되어 그 겹을 만들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순희는 처음으로 그 겹이 불행으로만 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왜 자신이 행복해지면 안 되는지, 의심했다. 남자는 왜 여기서 흐르는 시간이 자신의 현재가 되면 안 되는지, 의심했다.가져가는 기억들은 하찮은 것이었다. 기억은 사라지는 것이다.하지만 여기 현재가 있었다. 함께 누리며 호흡할 수 있는 시간이 저 위에 아직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