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틀 라이프 1
한야 야나기하라 지음, 권진아 옮김 / 시공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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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시절에는 모든 게 훨씬 더 분명했을 것이다. 마흔이 됐을 때, 혹은 결혼했을 때, 혹은 애들이 생겼을 때, 혹은 5년, 10년, 15년 동안 노력해보고 나면 그만두겠지. 그러고 나면 진짜 일자리를 구할 테고, 그러면 연기와 그 에 대한 꿈은 저녁노을 속으로 희미하게, 따뜻한 욕조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얼음 조각처럼 역사 속으로 고요히 녹아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자기실현의 시대다. 인생에서 가장 하고 싶은 것이 아닌 일에 눌러앉는다는 것은 의지박약에, 고결하지 않은 선택이다. 언제부터인가 운명 같은 것에 굴복한다는 것이 고상한 게 아니라 비겁함의 징표가 됐다. 행복이란 게 모두가 달성해야만 하고 달성할 수 있는 것이고, 그걸 추구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타협은 무엇이든 본인의 잘못인 것만 같은 지금, 행복을 쟁취해야 한다는 압력에 가끔 거의 숨이 턱턱 막히는 것 같다. 




...우정의 증표는 적정 거리를 지키는 데, 들은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 눈앞에서 문이 닫히면 강제로 열고 들어가는 대신 돌아서서 가버리는 데 있다는 걸 이해한다 -




...아니면 이렇게 부엌에 혼자 있는 순간들이 명상과도 같은 순간이라는 걸, 그와 세상, 그와 세상 사람들과의 모든 상호작용을 촉발하는 사실과 진실의 수천 개의 조그만 굴절과 오염들을 미리 계획하며 허우적허우적 전진하길 멈추고 정말로 편안히 휴식할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라는 걸 누구에게 설명할 수 있겠나? 아무에게도, 심지어 윌럼에게도 말할 수 없다. 하지만 그는 몇 년에 걸쳐 자기 생각을 남에게 말하지 않는 법을 배웠다. 친구들과 달리 그는 자신과 타인을 구분하기 위해 자신의 기벽의 증거들을 공유하지 않는 법을 배웠다. 비록 친구들의 기벽을 공유하는 건 행복하고 뿌듯한 일이었지만.




...그는 누군가를 알게 되는 그런 과정은 자기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더 힘들다는 걸 떠올렸다. 그는 늘 잊어버렸다. 그리고 늘 다시 기억해야 했다. 그는 종종 내밀한 것들을 드러내고 과거를 탐색하는 그 모든 과정을 빨리 넘겨버릴 수만 있다면, 그래서 다음 단계, 뭔가 부드럽고 유연하고 편안한, 양자의 경계를 다 이해하고 존중하게 되는 그런 관계로 그냥 순간 이동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바랐다.




...그의 정신이 있는 그대로 유연하게, 지루한 사고방식으로 스스로를 동여맬 필요가 없는 방향으로 밀어줬더라면 좋았을걸. 한때 개를 그릴 줄 알았던 사람을 형태만 그릴 줄 아는 사람으로 바꿔놓은 기분이야. 그에 관해서라면 난 많은 죄를 저질렀어. 하지만 때로 비논리적이게도 그중 가장 죄책감이 드는 일은 이거야. 내가 밴 문을 열고, 그를 안으로 들어오게 했어. 난 길에서 벗어나지는 않았지만, 대신 그를 태우고 어딘가 황량하고 추운 무채색의 장소로 데려가서 거기다 두고 온 거야. 예전에 내가 그를 태웠을 때는 풍경이 온통 색으로 아른아른 반짝이고 하늘에선 불꽃이 쉬잇 하고 터졌고, 그는 경이로운 눈으로 입을 벌린 채 서 있었던 바로 그 똑같은 장소에다가.




...우정은 상대방의 더딘 불행을, 길고 긴 지루함을, 간간이 찾아오는 승리를 목격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가장 비참한 순간들에 함께 있을 수 있는 특권을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그 대신 자기도 그 사람 옆에서 비참한 모습을 보여도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 공리가 얼마나 진실한지 확실히 이해한다. 그 자신, 그의 삶 자체가 그걸 증명했기 때문이다. 과거의 나는 늘 현재의 나다, 그는 깨닫는다. 문맥은 바뀔 수 있다. 이 아파트에서 살 수도 있고, 즐겁고 보수도 좋은 일을 할 수도 있고, 사랑하는 부모와 친구들도 있을 수 있다. 존경받을 수도 있다. 법정에서는 심지어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그는 똑같은 사람,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사람, 미움 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공중에 떠 있는 그 찰나의 순간, 높이 떠 있는 황홀함과 끔찍할 게 분명한 착륙 사이에서, 그는 x는 항상 x와 같을 거라는 걸 이해한다. 그가 뭘 하든, 수도원에서, 루크 수사로부터 아무리 많은 세월이 흘러도, 돈을 얼마나 많이 벌든 얼마나 잊으려고 노력하든, x는 항상 x와 같다.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그의 어깨는 우지직하며 콘크리트 바닥에 부딪치고, 순간 고맙게도 세상이 그의 아래에서 휙 멀어져간다. x=x, 그는 생각한다. x=x, x=x.


...제이컵이 태어나기 전 어느 날 밤, 아버지께 나한테 해주고 싶은 지혜의 말씀 같은 게 있냐고 물은 적 있어. 난 농담이었는데, 아버지는 내 모든 질문에 대해 늘 그랬듯이 진지하게 받아들이셨지. “음, 부모가 되는 일에서 가장 어려운 점은 재조정이야. 그걸 잘할수록, 더 좋은 부모가 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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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의 음악 - 날마다 춤추는 한반도 날씨 이야기
이우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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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과 화성의 대기는 대부분 이산화탄소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가 온난화의 주범으로 지목한 바로 그 온실 기체다. 대기층이 두터운 금성은 표면의 열을 가두어 뜨거운 행성이 되었다. 반면 대기층이 얇은 화성은 표면의 열이 쉽게 빠져나가면서 차가운 행성이 되었다.  두 행성의 사이에 있는 지구는 전혀 다른 길을 돌아왔다...대기 중의 이산화탄소는 공기주머니 1만 개 가운데 네 개에 불과한 미량인데도 그것이 유발하는 기후변화를 보면 자연의 균형이라는 것이 얼마나 위태롭고 불안정한지 깨닫게 된다. 그래서 산업 활동으로 이산화탄소가 배출되는 동안에도 공기 대부분을 차지하는 질소와 산소와 수증기가 지구 시스템 안에서 끊임없이 생성 소멸하며 일정한 농도를 유지해왔다는 것이 더욱 경이롭기만 하다.




...먼지가 없다면 구름이 끼기도 어렵고 비도 보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깨끗한 환경에서 수증기가 응결하려면 대기 중의 상대습도가 100퍼센트인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보다 훨씬 과밀하게 수증기가 대기 중에 포개져야 한다. 자연 상태에서 쉽게 도달하기 어려운 조건이다. 하지만 먼지에는 수증기가 쉽게 달라붙을 수 있고 이것이 씨앗이 되어 쉽게 구름방울로 성장할 수 있다. 물이 지나치게 깨끗하면 물고기가 없듯이 대기도 너무 깨끗하면 구름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파란 하늘에 조각구름이 뜨고, 때가 되면 비나 눈이 내려서 만물이 성장하고, 비구름이 물러가면 무지개를 볼 수 있는 것도 사실 먼지가 있어서 가능한 일이다. 갖기 싫은 먼지가 대기 중에 떠 있어서 세상이 멋지게 돌아간다는 게 사람 사는 이치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느낌이 든다.





...평탄한 날씨가 없다면 험궂은 날씨도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폭풍우에 모진 바람과 세찬 비가 몰려와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바람이 잦아들고 햇살이 비치면서 삶은 그럭저럭 이어진다. 내리막과 오르막이 번갈아 이어지는 둘레길을 그저 뚜벅뚜벅 걸어 나가듯이 어느 구간이 더 편한지, 또는 더 불편한지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평이한 날씨는 교향곡이나 협주곡의 2악장 같은 것이다. 느린 안단테 박자에 맞추어 고요하고 정적인 선율이 흐른다. 그 평온함이 다른 악장의 빠른 템포와 격렬하고 거친 선율에 균형추가 되어 준다. 언제라도 마음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충만함이 회복력을 준다.





...한때 빗방울들은 구름 안에서 자유분방하고 무질서하게 서로 부딪히고 쪼개지고 합쳐지면서 세찬 물줄기를 뿜어내고 거친 돌풍을 일으켰다. 이제 그 빗방울들은 질서 정연하게 비슷한 크기로 정숙하게 떠 있다가 햇빛을 굴절하고 반사시켜서 환상의 반지를 보여준다. 그것이 바로 무지개다. 폭풍우에 휘말려도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걸음을 멈추지 않은 자에게 보내는 위로와 축하의 선물이랄까.  그런데 우리는 같은 시간에 함께 있더라도 각자 다른 무지개를 본다. 서 있는 위치에 따라 등진 해의 각도가 다른 데다가 햇빛을 받은 물방울은 다른 각도로 반사하고 굴절하여 관찰자의 시야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각자 다른 물방울이 각자 다른 각도로 보내온 빛을 보는 것이다. 다만 그 차이가 미세하여 우리는 같은 무지개라고 생각할 뿐이다.




...모나리자를 그릴 무렵에도 종종 대륙고기압이 유럽을 감싸면서 기류가 정체하여 끄물거리는 날씨가 이어졌을 것이다. 대기가 안정한 가운데 먼지가 달라붙은 수증기가 차곡차곡 내려앉아 시야는 흐려지고, 대기 중에서 산란한 햇빛이 전경에 끼어들어 산야에는 어스름한 푸른빛이 감돌았을 것이다. 거장은 인물 뒤쪽의 계곡과 폭포와 들판을 연무가 낀 듯 희미하게 처리했다. 배경이 더욱 멀리 있는 것처럼 그려냄으로써 중앙의 인물이 더욱 도드라져 보이게 했다. 사람의 표정은 눈매와 입가 근육의 미세한 움직임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거장은 스푸마토(sfumato) 기법으로 얼굴에서 특히 표정을 좌우하는 두 부분의 색감과 질감을 은은하면서도 어둡게 처리해 그림을 보는 사람이 여인의 표정을 쉽게 예단할 수 없게 만들었다...스푸마토는 이탈리아어로 “연기처럼 사라지다” 또는 “안개 낀”이라는 의미로서 안개나 연무를 통해서나 느낄 법한 전경을 물감으로 구현해낸 것이다.  안개 속에서는 세상이 부옇게 보인다. 흑백의 경계가 모호하다. 곧장 앞으로 나아가고 싶어도 예측이 되지 않아 망설이게 된다. 인생길도 안개가 낀 것처럼 어떤 모습일지 알 수 없을 때가 많다. 때로는 부드럽고 포근하게 느껴지고, 때로는 냉랭하고 어둡고 두렵게 느껴진다....미래학자 폴 사포는 불확실한 상황에서 벗어나려 하기보다는 껴안으라고 조언한다. 예측대로 굴러가는 시장은 투자할 매력이 없다는 것이다. 불확실성은 위기인 동시에 기회임을 상기하면서도 나에게만큼은 안개가 걷히기를 바라는 건 풀리지 않는 딜레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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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오디세이 - 한 권으로 끝내는 반도체의 역사와 세계 반도체 전쟁의 모든 것
이승우 지음 / 위너스북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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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공정은 대략적으로 다음과 같은 단계를 거친다. 먼저 포토마스크에 새겨진 패턴을 웨이퍼 위에 잘 전사하는 단계이다. 이어서 식각과 증착 작업을 반복하며 웨이퍼의 아래쪽부터 시작하여 한 층 한 층 회로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이 이어진다. 이에 더하여 전기적 특성을 부여하기 위한 이온 주입과 소자 간 연결을 위한 배선 작업, 그리고 중간중간의 세정 단계도 진행된다. 이러한 단계의 반복을 통해 반도체 내부의 구조가 형성된다. 이 과정은 한 번 또는 두 번의 단순한 과정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첨단 반도체 회로의 경우 수십 장의 포토마스크가 사용되며, 평균적으로 3개월 이상의 긴 시간을 필요로 한다.



...애플의 반도체 독립 전략에서 중요한 이정표 중 하나는 아이폰과 아이패드의 프로세서 공급 업체였던 삼성을 버리기로 했던 결정이다. 삼성은 애플의 가장 중요한 반도체 협력 업체였지만, 동시에 아이폰의 최대 경쟁자이기도 했다. 결국 애플은 삼성과의 오랜 관계를 버리고 2014년 새로운 파트너로 TSMC를 낙점한 것이다. 애플이 반도체 설계 역량을 갖추게 된 이상 파운드리 생산을 최대 경쟁사이기도 한 삼성전자에 맡길 이유도 필요도 없어진 것이다.



...TSMC는 자체 브랜드의 제품은 전혀 만들지 않는다. TSMC는 애플, 퀄컴, 엔비디아, AMD 등의 제품을 대신 만들어주는 제조 서비스를 제공하는 업체이기 때문이다. 대만은 미국의 반도체 업체들과 경쟁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강조한다. 대신 이들의 부족한 부분을 메워주고 공생하는 것이 대만이 추구해야 할 방향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TSMC는 칩을 대신 만들어주고, ASE는 이를 대신 패키징해주며, 폭스콘은 아이폰을 대신 제조한다. 이러한 공생 관계가 언제까지 계속될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지금까지는, 특히 팬데믹 이후로는 상당히 성공적인 성과를 내고 있다. ...TSMC는 최종 제품을 만드는 회사가 아니다. 따라서 일반적인 반도체 최종 제품 매출 집계에서는 제외된다. 하지만 2022년 TSMC의 실적은 매출 759억 달러, 영업이익 376억 달러로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부와 인텔을 넘어섰다. 따라서 실질적인 의미에서 TSMC는 세계최대의 반도체 기업으로 인정된다. 그리고 이 같은 추세가 이어진다면 2025년 즈음이면 2000년 이후 총 누적 영업이익에서도 TSMC가 삼성전자와 인텔을 제치고 1위에 등극하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설립 30주년인 2023년 상반기 엔비디아는 반도체 업체로는 최초로 시가총액 1조 달러를 돌파하는 이정표를 세웠다... 엔비디아를 ‘GPU의 최강자’ 정도로만 이해하고 있다면 이는 오산이다. 엔비디아를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엔비디아가 AI 컴퓨팅을 위한 칩과 소프트웨어, 그리고 네트워크 등 풀스택 경쟁력을 갖춘 업체라는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풀스택이란 CPU, GPU, 소프트웨어, 서비스 등 컴퓨팅 기술의 전 영역을 모두 갖춘 것을 의미한다. 엔비디아의 CUDA(Compute Unified Device Architecture)를 일종의 프로그래밍 랭귀지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사실은 그보다는 좀 더 큰 일종의 프레임워크 개념으로 보는 것이 좋다...CUDA로 프로그래밍을 할 경우에는 엔비디아 GPU에 직접 엑세스해 세부 기능을 하나하나 컨트롤할 수 있었기 때문에 훨씬 더 우수한 성능을 낼 수 있다. 결국, GPU 생태계를 선점했다는 점과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의 통합이 가능하다는 점이 엔비디아-CUDA 중심의 AI 생태계를 강화시킨 핵심 요인이라 볼 수 있다.



...과거 다운턴은 삼성 입장에서는 오히려 경쟁 업체들과의 격차를 더욱 벌릴 수 있는 기회의 시간이었다. 그러나 이번 다운턴에서는 그와 같은 공식이 작동하지 않고 있다. 경쟁사를 압도했던 기술력도, 변화에 대응하는 속도도 과거 우리가 알고 있던 삼성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중국의 반도체 굴기, 미국과 일본의 반도체 부활 프로젝트, 인텔의 파운드리 진출 선언, DDR5와 HBM3에서의 초기 주도권 상실 등 삼성전자가 직면하고 있는 과제는 절대 가벼워 보이지 않는다. 삼성전자가 과연 지금의 위기를 돌파해 반전의 계기를 만들고 더욱 발전된 초신성으로 진화할 것인지, 아니면 결국 임계점을 넘지 못하고 활력을 잃어가는 백색왜성에 만족할 것인지 귀추가 주목되는 시점이다.



...반도체 전체 매출에서 팹리스가 차지하는 비중은 2000년 약 8% 수준이었으나, 2022년에는 32% 수준까지 높아졌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점은 팹리스 역할을 하는 기업들의 범위가 확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파운드리의 절대 지존인 TSMC의 최대 고객이라 한다면 그 업체는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팹리스 업체일 것이다. 그런데 TSMC의 넘버원 고객은 다름 아닌 애플이다. 전통적 팹리스 기업으로는 퀄컴이나 브로드컴, 엔비디아, AMD, 마벨 등이 거론된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본업이 반도체가 아닌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알파벳, 아마존, 테슬라 등이 파운드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그런데 이들 업체들이 파운드리에 주문해서 만든 반도체는 외부 판매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WSTS(세계반도체시장통계기구) 등의 통상적인 반도체 매출 통계에 집계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즉, 반도체 통계 자료를 볼 때 이 같은 점들을 고려한 보다 섬세한 해석이 중요해진다는 얘기다.



...스크류의 공기방울에서 시작된 도시바-콩스베르그 스캔들과 플라자 합의, 그리고 미일 반도체 협정으로 결국 일본의 전자제품과 반도체의 몰락, 그리고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이라는 헬게이트가 열린 셈이다.




...2022년 3월 미국 바이든 행정부는 한국·대만·일본 등에 ‘칩4 동맹’을 요청했다. 반도체 빅 플레이어와 핵심 기술을 보유한 국가들끼리의 동맹을 맺어 중국의 반도체 굴기 야심을 완전히 꺾어 놓겠다는 목적이 다분하다. ... 미국은 이와 함께 또 하나의 카드를 꺼냈다. 반도체 제조의 주도권을 아예 본토로 이전하겠다는 계획이다. 이를 위해 미국은 자국내 반도체 생산 라인을 지으면 25%의 세액을 감면해 주는 칩스법을 통과시켰다... 유럽 주요국도 마찬가지다. 반도체 독자 생산을 위한 대규모 투자 계획을 잇달아 발표했다. 결국 각자도생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이렇게 되면 그동안 세계 경제와 기술 시스템을 유지해왔던 글로벌밸류체인의 근간이 흔들리게 될 것이다. 문제는 우리나라가 세계 자유무역 시스템의 최대 수혜를 본 국가였다는 점이다. 따라서, 국제 분업화의 핵심인 GVC(글로벌밸류체인)가 더 이상 예전처럼 작동하지 않을 경우 한국 경제는 상당한 리스크에 직면하게 될 가능성이 커진다. 반도체 패권전쟁은 세계화의 균열과 맞물려 더 치열해지고 있다. 또 다른 50년 전쟁이 시작됐다.




....힌튼은 ... 인공지능의 위험으로 ‘퓨 샷 러닝(Few-shot learning)*’, ‘작화증(confabulations)**, ‘하위목표(subgoal) 설정***’ 등의 문제를 제기했다.
* 학습된 대형 언어 모델은 몇 가지 사례만으로도 새로운 것을 굉장히 빨리 배울 수 있고, 학습한 것들을 조합해 전혀 배운 적 없는 주장을 내세우게 된다는 개념.
** 공상을 실제 일처럼 말하면서 자신은 그것이 허위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증상. 인간에게 작화증은 자주 나타나는 현상으로 AI가 이미 인간처럼 사고하고 있다는 증거로 해석가능하다.
*** 여러 발생 상황이나 변수를 고려해 AI가 하위 목표를 자체적으로 설정하는 행위. 이게 가능해지면 SF물에서 봤던 것과 같이 AI가 인간의 통제 영역 바깥으로 나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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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감 중독 사회 - 분노는 어떻게 정의감을 내세운 마녀사냥이 되었나?
안도 슌스케 지음, 송지현 옮김 / 또다른우주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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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직접 관련되지 않은 일에, 또는 남들은 별로 개의치 않는 일에 정의가 배신당한 것 같아 강한 분노를 느꼈다면, 그 분노 속에 해결해야 할 다른 문제가 숨어 있는 것은 아닌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봐야 한다. 내면의 진실을 깨닫지 못하면, 과잉면역반응으로 면역체계가 외부의 침입자가 아닌 자기 자신을 공격하는 ‘자가면역질환’처럼,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생겨난 분노가 방향을 바꾸어 자신의 몸과 마음을 공격할 수 있다.




...이해득실을 생각할 때는 빅 퀘스천을 떠올리면 도움이 된다. 빅 퀘스천을 충족하면 득이 되고, 그렇지 못하면 손해가 된다. 그 일에 관여해서 긴 안목으로 보았을 때 나 자신이나 주변 사람들의 몸과 정신에 건전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면 이익이고, 그렇지 않으면 손실이다. 관여해 보았지만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면 처음부터 관여할 필요가 없던 일인지도 모른다.




...공정한 세상 가설을 믿는 사람들이 많으면 선행과 노력을 많이 하게 될 테니 바람직하지 않을까? 하지만 뒤집어서 살펴보면 이는 운 나쁜 사람들을 도덕적으로도 공격하는 상당히 무서운 사고방식이 될 수 있다.
정의로운 사람이 잘 풀릴 것이라는 믿음을 뒤집으면 잘 풀리지 않는 사람은 올바르지 못한 셈이 된다. 노력한 사람이 보답받는다면, 아무런 보답도 받지 못한 사람은 노력이 부족하다는 의미이다. 성실한 사람이 행복해진다면 행복하지 못한 사람은 불성실했다는 뜻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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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생각들은 나의 세계가 된다 - 작은 삶에서 큰 의미를 찾는 인생 철학법
이충녕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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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자신이 온갖 부정성을 품은 존재임을 인정하고 이 사실을 부담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 아무리 긍정적인 방향의 에너지라고 해도, 한 방향으로만 향하는 에너지는 모든 것을 휩쓸어갈 뿐이다. 그것에 반하는 방향의 에너지는 아무리 그것이 사소해 보일지라도, 심지어 아무리 그것이 사악해 보일지라도 평형이라는 행복의 또 다른 이름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다. 행복을 흘러넘치는 긍정성으로 이해하는 것은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시각이다. 정신의 행복은 긍정성이라는 물을 안정적으로 담고 있는 부정성의 견고한 그릇을 전제로 한다.



...똑같은 행동에 대해서도 이유와 원인은 각각 다른 관점에서 설명을 제시한다. 이유는 내 욕망과 지식을 바탕으로 나의 입장에서 내려진 결정의 측면을 강조한다. 반면 원인은 내가 그런 행동을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조건을 강조한다. 김재권은 이 둘 중 삼인칭적인 원인이 아니라 일인칭적인 이유의 관점에서 자신의 행동을 설명할 수 있어야 자신을 한 명의 주체적인 행위자로서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일상을 소재로 쓰면 그 어떤 뜻깊은 이야기도 진행되지 않고 그 어떤 아름다운 문장도 생겨나지 않는다. 오직 특별한 소재만이 의미 있는 이야기가 피어날 만한 유일한 원천이 된다. 소소한 일상 전반에서 하나의 경험이 가로막혀 있기 때문에, 일상 바깥으로 나가서 그러한 경험을 찾을 수밖에 없다. 소소한 일상으로부터 통합적인 경험을 얻어낼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인간은 건강한 상태에 있다고 볼 수 없다. 인간은 대부분의 시간을 소소함 속에서 보낸다. 이 시간이 무력하고 무의미하다면 삶의 대부분을 상실하는 것이다.



...근시안적인 늪에 빠진 짧은 순간에 해석학적 순환을 작동시키기가 어렵다면, 순간적인 강렬한 감정이나 생각이 약간 누그러졌을 때 좀 더 폭넓은 해석을 시도해보는 것도 좋다. 하나의 해석을 종결된 것으로 취급해버리면 우리는 영원히 그 해석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사태에 대한 해석이 종결되면 의미는 고착화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의 고착화를 최대한 막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종결된 해석이란 없으며 의미는 순환적으로 이뤄지는 해석의 과정 속에서 끝없이 새롭게 생겨난다는 것을 기억하고 그러한 순환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죽음의 불확실성,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생겨나는 삶의 본질적인 불확실성을 어떤 자세로 받아들일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불확실성이 우리의 심리에 미치는 영향은 양면성을 가진다. 한편으로 불확실성은 걱정과 불안의 근원이다. 진로가 불확실할 때, 금전적 소득이 불확실할 때, 건강 상태가 불확실할 때 우리는 크게 걱정하며 불안에 떤다. 다른 한편, 아이러니하게도, 불확실성은 마음의 평정 상태로 향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어떤 결과가 나올지, 무엇이 진실인지 어차피 지금 정확히 알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마음이 편해지는 경우가 있다.



...반대로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 악한 면모를 보이면 나는 짜증과 기쁨을 동시에 느낀다. 사악함을 목격해서 짜증나지만, 상대가 사악한 존재라는 나의 생각이 다시 한번 입증되어서 기쁘기도 하다. 그 사람이 객관적으로 좋은 모습을 보이면 그게 더 신경에 거슬린다. 그 사람은 계속 악해야 한다. 마음 한 켠에서 나는 그 사람이 계속 악한 존재로 남아 있기를 바란다. 악당은 사라져선 안 된다. 내 증오의 화살을 받기 위해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어야 한다.




...들뢰즈가 말하는 통제는 사람들이 각자 원하는 바대로 변화할 수 있도록 자유를 준다. 그런데 그 자유의 방향성 자체를 미세하게 규제한다. 다시 말해, 겉으로 보기에는 사람들이 고정된 틀에서 자유롭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추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무엇을 원하는지 그 자체는 전체적인 방향성에 이끌린다...통제당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학교에 있든 군대에 있든 자신의 의지에 따라 살아간다고 느낀다. 그런데 그 의지의 방향성에는 특정한 색깔이 입혀져 있다. 들뢰즈는 훈육을 거푸집에 비유한 데 반해 통제를 모듈에 비유한다.




...우리에게 우선적으로 경험되는 시간은 양적으로 균일하게 펼쳐진 시간이 아니라 의미를 갖고 나타나는 시간이다. 온통 하얗게 눈이 쌓인 벌판을 오랫동안 걸어가다 보면 공간감각을 상실한다고 한다. 모든 지점이 구별 없이 다 똑같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온 시간이 다 균일하게 똑같이 펼쳐져 있다면 우리는 결코 시간이 무엇인지 알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시간을 시간으로서 이해할 수 있는 이유는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 유의미하게 돌출되는 지점들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돌출된 의미들을 기준으로 시간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다. 시간을 의미가 아니라 양으로서만 경험하는 사람은 시간에 대한 본래적인 이해를 잃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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