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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퍼시벌 에버렛 지음, 송혜리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9월
평점 :
...세상은 얼마나 이상한가, 존재란 얼마나 이상한가, 본래 평등한 사람이 자신을 위해 스스로 그 평등을 입증해야 하고, 평등을 주장할 수 있는 위치에 올라가야만 자신의 의견을 펼칠 수 있다니, 그렇지 않으면 사람이 자신의 권리를 스스로 주장할 수 없다니, 또한 그런 주장에 대한 전제가 평등을 부정하는 이들의 검토를 거쳐야만 한다니.
...내가 글을 볼 수만 있다면, 그 누구도 글 자체나 내가 글을 통해 배우는 내용을 통제할 수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내가 글자를 단순히 보고만 있는 건지, 읽고 있는 건지, 소리만 내고 있는 건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건지도 알 수 없을 것이다. 글을 읽는 건 완전히 은밀한 일이었고, 완전히 자유로운 일이었으며, 따라서 완전히 체제 전복적인 일이었다.
...도망칠 때면 지형도 자연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나는 생각했다. 과연 얼마나 많은 뱀이 우리의 급한 발걸음에 놀랐으며, 너무 놀란 나머지 공격도 못했을까? 우리는 얼마나 여러 번 발을 헛디뎌 추락할 뻔했으며, 다음 걸음이 매우 재빨라 간신히 위기를 모면했던 걸까? 하지만 그렇게 오래도록 뛰었는데도 그 어디도 새로운 곳처럼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이 도망의 본질인지도 모른다.
...나와 함께 있어줄 백인이 없으면, 백인처럼 보이는 얼굴이 없으면, 세상의 빛 속에서 안전하게 이동하지 못하고 울창한 숲속으로 내쫓겨야 한다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나를 자신의 소유라고 주장해줄 백인이 없으면 내 존재를, 나의 실존을 정당화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