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지컬 AI 패권 전쟁 - 미국과 중국이 촉발한 제2의 냉전
박종성 지음 / 지니의서재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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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 수렴이나 사회적 합의 형성이라는 복잡한 과정을 건너뛰고, 엘리트 집단 내부에 절박한 공감대를 형성함으로써 국가적 총력전을 위한 정치적 의지를 사실상 ‘제조’해 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외부적인 체면 손상을 최소화하면서, 내부적으로는 AI 기술 확보라는 국가적 과제에 대한 위기감을 최고조로 끌어올리는 것. 이것이 바로 중국식 스푸트니크 모멘트의 핵심이었다.




...전 세계 물리적 데이터 수집 인프라의 70% 이상을 단 하나의 중국 기업이 장악하고 있다는 ‘구조적 현실’ 그 자체에 있다. 설령 DJI가 완벽하게 선량한 민간 기업이라 할지라도, 중국의 법률 체계 아래에서는 국가가 요구할 경우 데이터를 제공해야 할 의무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이 문제의 본질이다. 결국 DJI의 사례는 피지컬 AI 시대의 패권 경쟁이 기술의 우위를 넘어, 데이터를 생성하는 ‘인프라’의 통제권을 둘러싼 싸움임을 명확하게 보여 준다.




...중국 정부는 자국 기업에게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인 ‘살아 있는 실험실’에 대한 독점적 접근권을 부여함으로써, 이 경쟁의 규칙 자체를 바꾸고 있다. 자율주행 경쟁은 이제 순수한 기술 경쟁이 아니라, 데이터 주권을 둘러싼 지정학적 대리전의 양상을 띠고 있다.




...유비테크의 등장은 지난 수십 년간 세계 제조업의 패러다임이었던 ‘노동비용 차익거래Labor Arbitrage’ 시대의 종말을 예고한다...이제 경쟁의 규칙은 ‘누가 더 저렴한 노동력을 가졌는가’에서 ‘누가 더 효율적인 로봇을 가졌는가’로 바뀌고 있다. 유비테크가 이끄는 휴머노이드 혁명은 바로 그 새로운 게임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이는 상대의 강점(반도체 설계)을 힘으로 맞받아치는 대신, 경쟁의 무대를 자신들에게 가장 유리한 곳으로 옮겨오는 일종의 지정학적 주짓수다. 중국의 거대한 내수 시장, 중앙 통제적 국가 시스템, 그리고 14억 인구 전체를 실시간 연구개발을 위한 ‘살아 있는 실험실Living Laboratory ’로 활용하는 전략이 바로 그것이다.




...결과적으로, 하나의 기술이 상하이에서 산업화되거나 선전에서 하드웨어로 양산될 준비가 되었을 때쯤이면, 가장 근본적인 시장 위험과 기술 위험은 이미 베이징에서 국가가 떠안은 뒤다. 이는 조립 라인의 나머지 공정을 믿을 수 없을 만큼 효율적으로 만든다. 민간 자본과 기업들은 이미 검증된 길 위에서 속도와 규모의 경쟁에만 집중하면 된다. 이것이 바로 베이징이 수행하는 전략적 위험 제거의 핵심이다.





...국가의 전략적 목표를 위해 금융 시스템 전체가 동원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상업 금융과 산업 정책의 경계를 의도적으로 허물어, 시장경제에서는 불가능한 수준의 재정적 화력을 확보하는 것이다.
이는 서구 자본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매우 이질적인 현상이다. 리스크는 개별 금융기관이 아닌 국가 전체가 흡수한다. 이러한 구조는 7년에서 10년 안에 투자금을 회수해 수익을 내야 한다는 통상적인 압박에서 빅펀드를 해방시킨다.




...이러한 실패를 통해 중국 정부와 기업들은 단지 칩의 연산 속도를 끌어올린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엔비디아의 진정한 힘은 칩 자체의 성능뿐만 아니라, 거의 20년간 축적된 CUDA라는 소프트웨어 생태계의 깊이와 안정성에서 나온다. 딥시크는 이미 엔비디아가 제공하는 개발 환경에 맞춰 모든 훈련을 진행해 왔기에, 소프트웨어 스택 전체를 들어내야 하는 ‘대수술’을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시장경제에서는 과잉 생산이 가격 하락과 기업 파산이라는 자정 작용을 통해 해소되지만, 중국 모델은 국가 지원을 통해 이 메커니즘을 무력화시킨다. 그들의 진짜 목표는 압도적인 물량 공세로 전 세계 공급망을 중국에 종속시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과잉 생산은 실패의 증거가 아니라, 세계 시장 정복을 목표로 설계된 시스템의 의도된 결과물인 셈이다.





...중국이 지난 10년간 일관성 있게 추진해 온 국가 전략은 세계 경제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제2의 차이나 쇼크’라 불리는 과잉 생산과 ‘자동화 강요’라는 숙제를 안겼으며, ‘기술 분절화’를 통해 세계를 두 개의 블록으로 갈라놓았다. 설상가상으로 ‘군민융합’ 전략은 경제 효율을 명분으로 축적해 온 모든 기술과 데이터, 그리고 여러 산업에 대한 전문성이 언제든 군사적 목적을 위해 동원될 수 있는 근복적 문제를 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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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온 미래 - AI 이후의 세계를 경험한 사람들
장강명 지음 / 동아시아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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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고실험에는 괴이하고 거의 부적절하게 다가오는 대목이 있다. 단순히 ‘위대한 작품을 쓴 주체가 인간이 아니다’라는 점이 문제가 아니다. 그보다는 ‘위대한 작품이 24시간 동안 288편 나왔다’라는 상황이 문제다. 자동차나 휴대전화는 24시간 동안 288대가 생산되어도 괜찮지만, 위대한 작품은 그렇게 나오면 안 될 것 같다.





...“사람은 어떤 일을 할 때 대상을 분류해요. 그렇게 범주화하면서 약간 오류가 있어도 무시하고 데이터를 카테고리로 관리하죠. 그렇게 관리를 하니까 고정관념이 생겨요. 그런 고정관념들이 일을 빨리 처리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어떤 요소들은 배제하게 돼요. 어쩔 수 없죠. 머리가 쓸 수 있는 에너지는 유한하니까. 그런데 인공지능은 그렇지 않죠. 모든 요소를 다 고려합니다. 인공지능이 그렇게 해서 둔 수를 보고 ‘진짜 좋은 수인데’ 하고 감탄하면서 분석해 보면 그게 가장 기본에 충실한 수인 거예요. 바둑뿐 아니라 우리가 쓰는 언어 자체가 그래요.”






...결국 바둑계에서 사용해 온 ‘기풍’이라는 단어는 현실 세계의 특정한 현상에 대한 모호한 비유였다. 따지고 보면 ‘성격’이나 ‘철학’이라는 단어 역시 그렇다. 인간은 그런 개념어와 비유에 기대어 세계를 파악한다. 언어는 도구다. 그 도구에 기대지 않는 인공지능이 언어라는 도구에 기대야만 하는 인간들보다 더 훌륭하게 과제들을 수행할 때, 언어에는 균열이 생긴다. 우리는 ‘그 말이 무슨 뜻이냐’를 비로소 제대로 묻게 된다.





...알파고를 설명해야 하는데, 그들이 가진 설명 도구라고는 인간의 언어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창의적이라든가 수비적이라든가 배짱이 대단하다든가 뒷맛을 고려하지 않는다든가 하는 식으로 알파고의 바둑을 평했다. 인격이 없는 대상에 인격을 부여하는, 전형적인 인간의 언어였다. 인간은 이런 식으로 수많은 사물을 의인화하고, 상상의 감정이나 성격을 만들어 거기에 자신의 마음을 이입한다.




...만약 바둑이 예술이며 돌이 놓인 형태가 바로 예술작품이라면 바둑 AI 프로그램은 대단히 뛰어난 예술가라는 뜻이다. 범용 인공지능은 모든 인간 예술가를 압도하는 뛰어난 예술가가 될 수 있으며, 그때 인간 예술가는 인공지능에게 예술을 배워야 한다.
바둑이 예술이지만 돌이 놓인 형태 그 자체는 작품이 아니라면 바둑 AI 프로그램은 예술가가 아니다. 그렇다면 예술의 영토가 아직 기계에 침범당하지 않았다는 위안을 얻을 수는 있겠지만 ‘무엇이 예술인가, 바둑의 어느 부분이 예술인가’ 하는 질문은 여전히 남는다. 거기에 어떻게 답하느냐에 따라서 예술가가 되고자, 혹은 예술가로 남고자 하는 사람들이 중시하는 가치가 달라질 수도 있다.




...이제 우리는 가치가 없다고 느끼는 일을 하면서도 적당한 급여를 받을 때, 그 일에 왜 가치가 없다고 느끼는지 잘 설명하지 못한다.
우리가 새로운 가치의 원천을 찾아내지 못하면 인공지능에 기반한 사회는 거대한 ‘죽음의 집’이 될지도 모른다. 그것은 급여와는 상관없다.




...과학 연구와 기술 개발이 도덕적으로 옳은 일, 좋은 일이라는 주장 아래에는 공리주의가 깔려 있다. 공리주의는 매우 설득력 있는 논리이고 현대 경제학의 밑바닥에 깔린 사고방식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다른 윤리 이론과는 잘 연결되지 않으며, 많은 경우 우리의 도덕적 직관과 충돌한다. 공리주의를 개인적 도덕 원칙으로 삼는 사람은 종종 소시오패스처럼 보인다. 공리주의자들도 어떤 고통은 삶에서 제거해야 하는 얼룩이 아니며, 그 고통은 삶의 일부라는 사실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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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이 왜 중요한가 - 그간 외면해온 외로운 나에게 인생을 묻다
페터 베르 지음, 장혜경 옮김 / 갈매나무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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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무의식 상태로 사느니 단 하루를 살아도 경험하는 것과 더불어 살고 싶다.” 무의식으로 가득한 일생을 깨인 정신으로 경험하는 단 하루와 흔쾌히 바꾸겠다는 말씀이었다. 명상으로 경험하는 지혜는 그 정도로 심오하다.




...자기 생각을 평화롭게 알아차리는 것만으로 충분하다...알아차리기만 해도 어마어마한 해방감이 밀려온다. 당신은 지금까지 쌓아온 무의식적 패턴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분별에 더는 반응하지 않거나 그 분별이 옳다 그르다, 평가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이 그저 수천 가지 생각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저절로 떠날 때까지 그대로 둔다. 이런 종류의 의식화는 비동일시deidentification의 한 형태이다. 비동일시란 생각이 곧 ‘나’가 아니며, 자신의 생각을 관찰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과정이다.




...생각은 살아오는 동안 당신의 마음에 장착된 수천 가지 프로그램의 결과물이다. 진짜 당신 생각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당신의 생각은 당신과 대부분 시간을 함께 보내는 사람들의 메아리이다. 그리고 당신이 성장한 사회의 메아리이다. 당신을 따라다니는 온갖 소음의 메아리이다.. 과거의 생각을 믿고 그것과 자신을 동일시할 때마다 메아리는 더욱 커진다.




...저장 기능과 해묵은 생각의 지속적인 반향은 정신의 한 가지 측면에 불과하다. 뇌의 두 번째 기능은 장腸의 그것과 비슷하다. 장은 흡수한 양분을 분해하여 몸에 영양을 공급한다. 당신이 먹는 모든 음식은 위장으로 흡수되어 대장 시스템으로 이동하며, 대장은 음식에서 생명 유지에 필요한 양분을 뽑아낸다. 따라서 대장은 양분이 들어올 때마다 일해야 한다. 당신의 두뇌도 마찬가지이다. 두뇌는 온종일 밀려온 온갖 인상과 문제와 경험과 도전을 소화해야 한다.







...자신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계속 변하고, 그 이야기는 다시금 경험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역사가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자신에게 들려주는 역사가 있을 뿐이다. 역사가 그저 수많은 이야기 중 하나의 가능성일 뿐이라는 사실을 진심으로 깨달을 때, 당신은 자신만의 역사를 쓰거나 아예 역사를 접고 매 순간을 주의 깊게 관찰할 수 있다.
내려놓기는 이해에서 시작하여 순간의 관찰로 끝난다. 온 감각, 온 집중, 온 알아차림을 동원하여 현재의 순간에 닻을 내릴 때, 과거도 미래도 사라지고 오직 현재만 남는다.





... 모든 것이 다 떨어져 나가면 무엇이 남을까?
모든 것을 다 제거하면 무엇이 남을까?
...지금까지 읽은 내용을 잘 새겨보자. 당신이 관찰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당신이 아니다! 당신은 당신의 생각이 아니다. 다시 말해 당신이 지금껏 자신에 대해 했던 모든 생각은 치워버릴 수 있다. 이 얼마나 엄청난 자유인가? 우리는 수백만 가지 자괴감과 불안, 걱정 근심과 생각, 문제를 안고 살아간다. 하지만 당신은 지금 그 모든 생각을 한꺼번에 내려놓을 수 있다. 생각이 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당신은 당신의 몸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몸도 인지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잘 생각해보자. 당신의 몸은 인식의 대상이지 인식하는 당사자가 아니다. 이런 깨달음 역시 엄청난 해방감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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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의 피아노 - 철학자 김진영의 애도 일기
김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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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은 비의적인 것이다. 살아 있고 살려고 하기 때문이다. 살려고 하는 것은 주어진 메커니즘을 지키지 않는다. 그것은 늘 예기찮은 방식으로 일탈한다. 생 안에는 자기를 초과하는 힘이 있다. 이 힘에 대한 믿음.



  물가에 앉으면 말이 없어진다. 그렇다고 말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현자가 현자를 만나면 왜 말없이 차만 마시는 줄 이제 알겠다. 존재의 바닥에 이르면 거기는 고요이지 침묵이 아니다. ‘고요의 말’이 있다. 누가 어찌 살았던 그 평생은 이 말 한마디를 찾아 헤매는 길인지 모른다. 사실 누구나 구도자다.



...“인간은 가을의 무화과다. 인간은 무르익어 죽는다. 온 세상이 가을이고 하늘은 맑으며 오후의 시간이다.” 무르익은 것은 소멸하고 소멸하는 것은 모두가 무르익었다. 니체는 그 순간을 ‘조용한 시간‘이라고 불렀다. 조용한 시간―그건 또한 거대한 고독의 순간이다. 사람은 이 난숙한 무화과의 순간에 도착하기 위해서 평생을 사는가.




...길을 가다 보면 다른 길이 기다리고 또 만들어진다. 그것이 생 스스로 가는 길이다. 생은 과정이지 미리 결정된 시스템이 아니다. 결정주의라는 선취된 오류의 습관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 필요하다. 이 오류의 자리에 희망을 앉혀야 한다. 희망은 어디에나 있고 발생한다. 이 희망의 진실에 대한 확신이 지금 내게 절실한 미덕이다. 그러니 희망을 노래하자. 비타 노바.



...내가 끝까지 살아남아야 하는 이유는 그것만이 내가 끝까지 사랑했음에 대한 알리바이이기 때문이다.




...불확실성과의 대결이 프루스트의 말년이었다. 그가 침대 방에서 살아간 말년의 삶은 고적하고 조용한 삶이 아니었다. 그건 그 어느 때보다 바쁜 삶이었다. 침대 방에서 프루스트는 편안하게 누워 있지 않았다. 그는 매초가 아까워서 사방으로 뛰어다녔을 것이다. 그가 종일 침대 방에서 무엇을 했는지 셀레스트조차 모르지만 독자는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의 마지막 책은 100미터 달리기경주를 하는 육상선수의 필치와 문장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생은 불 꺼진 적 없는 아궁이. 나는 그 위에 걸린 무쇠솥이다. 그 솥 안에서는 무엇이 그토록 끓고 있었을까. 또 지금은 무엇이 끓고 있을까.





...아침. 다시 다가온 하루. 또 힘든 일들도 많으리라. 그러나 다시 도래한 하루는 얼마나 숭고한가. 오늘 하루를 정중하게 환대하기.




...함께 슬퍼한다는 것, 그것은 반드시 함께 메마르는 것만은 아니다. 그건 그 슬픔의 크기만큼이나 풍성하게 열매를 맺는 일이기도 하다. 오얏나무의 풍성한 열매는 왕상을 가엾이 여기는 오얏나무의 슬픔이었다. 왕상은 그걸 알았고 오얏나무를 사랑했고 그래서 오얏나무를 껴안고 목 놓아 울었던 것이다.
내가 때로 이 빛나는 세상을 껴안고 울고 싶은 것도 같은 까닭에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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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치의 죽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8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김연경 옮김 / 민음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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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치가 지나온 인생사는 가장 단순하고 평범하면서도 가장 끔찍한 것이었다.




...키제베터 논리학에서 배운 삼단 논법의 예를 따르자면 카이사르는 인간이다, 인간은 죽는다, 고로 카이사르도 죽는다, 라고 했다. 그는 평생 이것이 카이사르에게만 해당하는 말이지 절대 자기에게는 적용되지 않으리라고 여겨 왔다. 카이사르는 보편적 인간이므로 이것은 완벽히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는 카이사르 같은 보편적 인간이 아니라, 항상 모든 사람들과 다른, 완전히 특별한 존재였다.




...그를 괴롭힌 것은 거짓이었다. 즉 모두가 그들 자신도 알고, 그도 아는 사실을 부인해 가며 오히려 그의 끔찍한 처지를 두고 거짓말을 하려 들 뿐 아니라, 그에게마저 거짓에 동참하도록 강요하고 있었다. 거짓, 그의 죽음을 코앞에 두고 일어나는 저 거짓, 저 무섭고 장엄한 죽음이라는 사건을 병문안과 커튼과 만찬의 철갑상어 수준으로 격하해 버리는 저 거짓이야말로……




‘저항할 수 없다.’ 그가 자신에게 말했다. ‘단지 대체 왜 이런지 이해할 수만 있다면. 그런데 그것마저 불가능하다. 만약 내가 잘못 살았다면 그나마 설명이 될 법하다. 하지만 그건 벌써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자기 삶이 얼마나 정당하고 올바르고 점잖았는지를 회상하면서 스스로에게 말했다. ‘그건 용납할 수 없지.’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입술을 씰룩거렸다. 아마 누가 보았다면 그가 정말로 미소 짓는 줄 알았으리라. ‘설명이 되지 않는군! 고통, 죽음…… 대체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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