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챗GPT - 폭주하는 AI가 뒤흔든 인간의 자리
박상현 외 지음 / 한빛비즈 / 202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람은 성장기 때 교육과 학습을 통해 형성한 인지 방식과 사고 구조를 변화한 환경에 맞게 업그레이드하기를 꺼리는 ‘인지적 구두쇠’ 속성을 지니고 있다. 심리학자 애덤 그랜트는 《싱크 어게인》에서 “대상이 물건일 때 사람들은 열정을 다해 업데이트하지만 대상이 지식이나 견해일 때는 기존의 것을 고집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인간이 개발한 도구는 인간의 지능 수준을 넘어설 정도로 똑똑하고 강력해졌지만 그를 사용하는 인간은 똑똑한 도구에 압도당할 우려가 제기되는 상황이다. 호모 파베르의 역설이다.




...대규모언어모델에서 만들어내는 문장은 통계에 기반하여 거대한 양의 텍스트에서 패턴을 찾아 그다음 단어를 추측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런 언어 모델은 모방에 능하고 사실에 약하다. 왜냐하면 대규모언어모델은 문제를 일으키는 문어와 마찬가지로 실제 세계의 대상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언어 모델을 철학자 해리 프랭크퍼트는 책 《개소리에 대하여》에서 듣는 이를 현혹시키는, 도덕적으로 상관하지 않는, 속임수 전문가가 하는 개소리의 정석이라고 한다. 프랭크퍼트는 이런 ‘개소리’들이 거짓말보다 나쁘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개소리’들은 거짓이든 진실이든 상관하지 않고 독자를 설득하는 것만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결국은 기술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기술에 반응하는 사람의 문제인 것이다. 에밀리 벤더는 단어의 형태와 의미를 혼동하지 말라고 이렇게 역설한다. 기계는 마음이 없이도 텍스트를 생성해낸다. 문제는 우리가 그 텍스트 뒤에 마음이 있다고 상상하는 것을 멈추지 못한다는 것이다.




...삶의 모든 영역에 침입하는 것은 억압적인 빅브라더가 아니라, 우리가 누구인지 알기 때문에 사적인 근거 하에 각자와 관계를 맺게 되는 수많은 호의적 ‘리틀 시스터스’이다.

쉽게 말해 정보 사회의 통제란, 높은 데서 내려다보는 차갑고 거대한 감시탑이라기보다 우리 곁을 맴도는 따스하고 친밀한 반려동물처럼 작용한다.




...‘그럴듯한 이야기’가 곧 진리는 아니다. 서사는 인과 관계로 빽빽하게 채워지곤 하지만, 실재에는 우연적 요소들도 많다. 이야기는 연속적이고 자극적이다. 진리는 대체로 비연속적이며 권태롭다. 음모론이 과학적 설명보다 훨씬 각광받으며 빠르게 확산되는 이유는 인지적 소모를 줄이면서 사태를 흥미롭게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서사 중독은 기본적으로 개인의 증상을 가리키는 개념이며, 이 증상이 사회적으로 확산되면 ‘서사 과잉narrative excess’이 된다.




...인지 빈곤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간단히 정리하면, 압도적인 정보량과 인간의 인지적 한계 때문에 타당한 지식을 습득하는 것은 물론이고 터무니없는 허위정보를 감지하는 일도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라리의 표현을 빌리자면 확실히 “우리의 뇌는 점점 더 해킹당하기 쉬워지고 있다.” 하지만 이는 챗GPT의 등장이나 ‘자유 의지’라는 신화 때문만이 아니다. 가상 공간에서 정보의 폭발적 유통이라는, 꽤 오랫동안 지속된 과정을 통해 우리의 내면에서 일어난 사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녀를 지키다
장바티스트 앙드레아 지음, 정혜용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부모를 원망한 적이 없었다. 돌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해도 흑마술이 작용했다 해도, 돌은 내게서 앗아 간 그만큼 나를 채워 줬다. 돌은 늘 내게 말을 걸었는데, 석회암이든 변성암이든 땅속에 누운 자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내가 곧 몸을 뉘일 묘석이든 간에, 모든 돌이 그러했다.



... 그 애는 내 가슴 위에 자신의 손을 갖다 댔다.
  「미모 비탈리아니,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신 앞에서, 비올라 오르시니가 날도록 도울 것이며, 결코 추락하게 놔두지 않겠노라고 맹세합니까?」
  「맹세합니다.」
  「그리고 나, 비올라 오르시니, 나는 미모 비탈리아니가 그와 같은 이름을 지닌 미켈란젤로에 필적할 만큼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조각가가 되도록 도울 것이며, 그가 결코 추락하게 놔두지 않겠노라고 맹세합니다.」




...묘지의 밤, 대낮의 열기에 그을린 색채로 가득한 밤에, 이러한 만남, 예기치 못한 동등함에 거의 놀라다시피 하며. 찰나 동안, 나는 어느 결엔가 그 무엇도 변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하지만 벌써 그 애를 쑥쑥 크게 하는 힘들이, 그러니까 쌓여 가는 세포들과 늘어나는 뼈들이 작동하고 있고, 분자가 하나씩 하나씩 늘어날수록 비올라는 나로부터 멀어진다.




「중요한 건 네가 무엇을 조각하는가가 아니야. 왜 그것을 하는가이지. 그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봤니? 그게 뭘까, 조각한다는 게? 〈형체를 부여하기 위해 돌을 쫀다〉라는 답은 하지 마라.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잖니.
  스스로에게 단 한 번도 물어본 적 없던 질문에 대한 답은 알 수 없었고, 나는 아는 척하지도 않았다. 메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다. 조각을 한다는 게 뭔지 깨닫는 날, 넌 단순한 분수대만으로도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게 할 거다. 그동안, 미모, 충고 하나 하지. 인내해라. 이 강, 변함없이 고요한 이 강처럼 말이야. 이 강, 아르노강이 화를 낸다고 생각하니?」
  1966년 11월 4일, 둑을 터뜨려 버린 아르노강은 강변으로 흘러넘치며 도시를 작살내게 되리라.



「태어난 뒤로 우리가 하는 단 하나의 일이 바로 죽는 거란다. 아니면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해 그 피할 수 없는 순간을 늦추려고 하거나. 나의 고객들은 모두 같은 이유로 온단다, 미모. 표현 방식이야 제각각일지라도, 그들 모두 겁에 질렸기 때문이지. 나는 카드를 뽑고 위로할 말들을 지어내. 그들 모두 올 때보다는 조금 더 고개를 쳐들고 돌아가고, 아주 짧은 순간이나마 조금은 덜 두려워해. 그들은 그걸 믿으니까. 그게 중요한 거야.」
  「그것만 보더라도 분명히…….」
  「맞아, 그것만 봐도.」
  「그럼 당신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어떻게 다스리죠?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할 수는 없잖아요.」
  「나는 대추야자를 먹지.」



...어머니가 천천히 눈을 들어 올렸고, 아직도 바래지 않고 활활 타오르는 보랏빛 불길로 내 눈을 삼켜 버렸다.
  「삶은 선택의 연속이고, 만약 전부 다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우리는 다르게 선택할 수도 있겠지, 미모. 네가 단 한 번도 틀리는 법 없이 처음부터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다면 넌 신인 거야. 네게 품은 그 모든 사랑에도 불구하고, 네가 내 아들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나조차 신을 낳았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나는 메티와 시선을 교환했다. 그러고는 내 끌을 소년의 손에 쥐여 줬다.
  「잘 들어라. 조각한다는 건 아주 간단한 거야. 우리 모두, 너와 나 그리고 이 도시 그리고 나라 전체와 관련된 이야기, 훼손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 축소할 수 없는 그 이야기에 가닿을 때까지 켜켜이 덮인 사소한 이야기나 일화들을, 불필요한 것들을 걷어 내는 거란다. 그 이야기에 가닿은 바로 그 순간 돌을 쪼는 일을 멈춰야만 해. 이해하겠니?」




...트라몬타나, 시로코, 리베치오, 포넨테, 미스트랄. 나는 이 모든 바람의 이름으로 너를 부른다.
  나는 나의 삶을, 겁쟁이와 배신자와 예술가의 삶을 사랑했고, 비올라가 내게 가르쳐 줬듯이 우리는 사랑하는 어떤 것을 돌아보지 않고서는 그것과 이별하지 않는 법이다. 누군가가 나의 손을 쥐는 게 느껴진다. 어떤 수도사, 어쩌면 그 선량한 빈첸초 본인일 수도.트라몬타나, 시로코, 리베치오, 포넨테, 미스트랄 나는이 모든 바람의 이름으로 너를 부른다. 아, 코르누토, 코르누토! 우리에게 출발에 대해 말해 줘. 다 같이 노래 한 곡 뽑자고! 번개가 칠 때 그 빛에 드러나는 프라 안젤리코의 그림들을 꼭 보기를…




...기계적으로 빈첸초는 목에 두른 열쇠를 쓰다듬는다. 나중에 그는 피에타를 보러 다시 돌아갈 거다. 그러고 나서도 이해할 때까지 보고 또 보리라. 아마도 조각가가 떠나기 전에 그에게 하려던 말이 그것일지도 모른다. 보고 또 봐라. 어쩌면 사소한 것을, 정말로 별것 아니지만 모이면 혁명을 만들어 내는 그런 작은 뭔가를 놓쳤을지도 몰랐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화이트홀
카를로 로벨리 지음, 김정훈 옮김, 이중원 감수 / 쌤앤파커스 / 2024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음의 힘이 필요할 때 나는 달린다 - 정신과 의사가 말하는 달리기를 통해 얻는 것들
김세희 지음 / 빌리버튼 / 202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는 ‘현재의 상태나 감정을 말하는 나’를 바라보는 ‘또 다른 나’가 있음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다...달리기를 할 때 ‘바라보는 나’가 ‘힘들다고 말하고 있는 나’를 관찰하고 있으면 ‘에잇 힘들어, 그만해야지’ 하고 쉽게 멈추지 않게 된다. 달리기를 하면서 마음에 일어나는 생각과 느낌을 주시한다. ‘힘들다’가 아니라 힘들다고 하는 ‘마음’을 주시하고 있으면 힘은 들지만 그만두거나 멈추지 않고 그 상태 그대로 달리기를 계속할 수 있다. 그것을 인내심이라고도 할 수 있다.




...무기력감도 삶의 자연스러운 한 부분이다. 우리는 태어나서 살다가 결국에는 죽음을 맞이한다. 사는 동안 기쁨과 슬픔을 느끼고 희열과 성취 뒤에 허탈과 상실을 경험하기도 한다. 젊고 건강하던 몸이 늙어가고 여기저기 탈이 나는 것은 자연의 이치다. 미리 알고 있으면 당황하지 않는다... 이미 올 거란 걸 준비했기 때문에 ‘괜찮다’, ‘지나갈 것이다’ 다독이며 무기력한 시기를 견뎌낸다. 어둠 속에 머무르더라도 희미한 빛의 방향을 느끼고 찾을 수 있다. 머지않아 어디로 나가야 하는지 출구도 결정할 수 있다.




...달리면서 숨이 차고 힘이 들 때 고비를 넘기는 방법은 불신과 불안을 멈추는 것이다. 불안을 멈추는 방법은 신체에 느껴지는 감각을 주시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호흡이나 왼발과 오른발을 차례로 공중에 띄웠다가 땅에 닿았다가 반복되는 느낌에 집중한다. 왼팔과 오른팔이 앞뒤로 움직이는 자세도 들여다본다. 그렇게 오롯이 신체 느낌을 관찰하고 있으면 다른 생각이 쉽게 끼어들지 않는다. 호흡을 다듬고 발이 땅에 디뎌질 때 리듬에 집중하면 마음이 고요해지는 걸 느낄 수 있다.



...가만히 앉아서 호흡을 알아채고 마음을 읽는 좌선 명상이 정적인 것에 비해 달리기는 몸의 움직임을 통해 마음의 생각을 읽는 동적 명상이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렌지와 빵칼
청예 지음 / 허블 / 2024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랑하는 사람을 실망시킬 때는 주저하지 말고 숨을 쉬자. 타인을 실망시켰다는 절망이 목을 조여 오지 못하도록, 들이쉬고 내쉬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했다. 내가 또 네 마음의 허리를 꺾었구나. 이 세상이 오와 열에 맞추어 잘 굴러갈 수 있게끔 헌신하는 사람을 내가 불편하게 만들었다.




“혼자서 입안에 저질 재료를 넣는 희생은 감수해도, 남들에게 도둑질로 비난받는 일은 절대로 감수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산다는 거예요. 똑똑한 사람들은 겁이 많거든요.”
“그건 그냥 도덕적이라는 뜻 아닌가요?”
“겁이 있어야 도덕을 지키죠.”




...선하고자 하는 도덕적 욕망을 추구하는 일은, 가끔 패배가 정해진 게임에 참여하는 일처럼 불합리했다.






...우리는 결여된 존재로 남고 싶어 하지 않는다. 또한 우리는 결여를 채우는 게 가끔은 버겁다. 있는 그대로 수용되길 원한다. 비록 내 도덕성이 상대의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해도, 내가 이 사회의 정의를 실현하지 못해도, 심지어 그 정의에 균열을 만드는 존재라 할지라도. 그냥 살아 있고 싶다. 있는 그대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