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오에서 가장 먼 시간 창비시선 501
도종환 지음 / 창비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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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과 실랑이를 벌이는 잎들은 소란하지만
언젠가는 내려놓아야 한다는 걸
나무는 안다
바닥으로 떨어진 잎들은 어찌해야 할까
그런 불안은 시간에게 주면 된다
나무는 지금부터 마지막까지를
가만히 받아들인다
나무가 지닌 미덕은
자신에게 오는 모든 순간순간을
받아들일 줄 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이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생각하는 동안 눈발은 쏟아지고
발등에 떨어지는 겨울비 피할 길 없고
빗속에서 너는 네 사랑으로 뼈저리게 아플 것이다

거기까지가 사랑이다
봄에서 겨울까지
사랑은 너를 데리고
그 계절들을 다 지나가게 될 것이다.




...새해에도 어려운 순간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눈보라 몰아치는 자드락길을 걸어야 하는 날 있으리라
꽃 피었다 순식간에 낙화로 흩어지는 날 있으리라
오해의 화살이 맨살에 날아와 꽂히거나
비난의 칼날에 베여 비통해하는 저녁도 있으리라
길이 시작되는 곳에 서서 흙먼지 먼저 덮어쓰기도 하리라
그때마다 부디 나무들처럼 잘 견디기를
그때마다 내일 아침이면 괜찮아질 거라고 위로하기를
두려운 밤이 고요한 새벽으로 이어지기를 기원하자.




...가지에 쌓인 눈을 털어내며 나무가 일러주었다
황홀하게 물든 잎들 허공에 날려 보낼 때나
폭설이 몰아쳐 온몸 오그라드는 날에도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줄 아는 게 실력이라고
폭우 쏟아질 때부터 눈발 날릴 때까지
하루하루를 견딜 줄 아는 힘이 실력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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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체국 아가씨 페이지터너스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남기철 옮김 / 빛소굴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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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여덟 살의 여자는 행복이란 게 어떤 상태를 뜻하는지를 기억해 내려고 애썼다. 그런데 놀랍게도 자신은 행복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어린 시절에 배운 적이 있지만 지금은 다 잊어버린, 한때 알았다는 사실만 기억나는 외국어와 같았다.





..정상에 선 사람은 세상을 제대로 내려다보지 못하고, 행복에 겨운 사람은 남의 마음을 제대로 읽지 못하는 법이다. 실제로 고생해본 사람만이 어떤 일에나 방심하지 않고, 늘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그렇게, 직감적으로 위협을 감지하는 능력이 생기고 남보다 더 영리한 인간이 되어가는 것이다. 




...어떤 물질이든 외부에서 가해지는 열에 의해 온도가 올라갈 때 그 물질 고유의 임계점이 있다. 그 지점을 지나면 아무리 열을 가해도 온도가 올라가지 않는다. 물이 끓는 비등점이 있고 쇠가 녹는 용해점이 있듯이, 정신도 똑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 행복감 역시 절정에 이르면 더는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 고통, 절망, 굴욕, 혐오, 두려움도 마찬가지다. 그릇에 물을 부을 때 가득 차면 더는 부을 수 없는 것과 같다.




...두 사람은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돈의 위력을 실감했다. 돈은 있을 때 강력한 힘을 발휘하지만, 없을 때에는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법이다. 따라서 돈은 ‘자유’라는 거룩한 선물을 주기도 하지만, 돈이 없어 어쩔 수 없이 단념해야 할 일이 생기면 분노가 솟구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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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저넌에게 꽃을
대니얼 키스 지음, 구자언 옮김 / 황금부엉이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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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이런 것들을 전혀 몰랐다. 내가 똑똑해진다면, 내 마음속의 말들을 모두 이해할 수 있고, 복도에 서있는 저 소년들과 허먼 삼촌과 부모님도 모두 알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그때 스트라우스 박사님이 말한 뜻은 내가 그 모든 일들 때문에 감정이 상해서 마음에 병이 들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 운명이 예전에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거인들이 아니라, 아는 것에 한계가 있어서 모든 것에 대답할 수 없는 사람들의 손에 달려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무섭다.



...외로움은 내게 글을 읽고 생각할 기회를 준다. 이제는 기억들도 되살아나서 과거를 재발견하고, 내가 정말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는 기회를 준다. 혹시 일이 잘못되더라도 그 정도의 결과는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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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읽기
이승우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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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가 작품이란 “그 책이 없다면 스스로 보지 못했을 것을 볼 수 있도록 작가가 독자에게 제공하는 일종의 광학기구”라고 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이 유명한 문장을 인용하면서 밀란 쿤데라는 친절하게도 “독자는 독서하는 순간 자기 자신에 대한 고유한 독자가 된다”라고 덧붙였습니다. 책을 읽을 때 독자가 실제로 읽는 것은 책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는 뜻입니다. 책(속 문장)은 ‘나’를 잘 읽도록 돕는 광학기구일 뿐이고, 그 광학기구가 있어서 나는 ‘나’를 읽을 수 있게 됩니다.




...분류하고 범주화하는 것이 보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내가 나의 외부만을 발견하는 것이 그 때문이다. 나는 나의 내부가 발견되고 규정되는 걸 견디지 못한다. 발견이 곧 발각이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내부, 즉 ‘나’만 빼고 다 발견한다. 나는 ‘나’만 빼고 다 규정한다. ‘나’를 보는, 볼 수 있는 눈이 나에게 없기 때문이다. ‘나’는 시간/신의 눈에 의해서(만) 발견된다. 그것은 세상의 끝에서만 가능하다. 세상의 끝에 이르기 전에 ‘나’는 결코 발견/발각되지 않는다. 그 전에는 ‘나’가 결코 시간/신의 눈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원한 사랑은 없다. 영원한 것은 이미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잃어버릴 두려움 없이’ 사랑할 수 없다. 잃어버릴 두려움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말이 곧 하나의 국어다. 한 사람의 말은 다른 사람에게는 하나의 외국어이다. 세상에는 말을 하는 사람 수만큼의, 어쩌면 말해지는 상황만큼의 국어/외국어가 존재한다.




“차(찻잎)가 많으면 향기가 써서 맛이 떨어지며, 물이 많으면 색이 나지 않고 맛이 떨어진다.” 너무 빨리 마시면 맛이 나타나지 않고, 너무 늦으면 향을 잃는다.
  말에는 정신(생각)이 담겨 있다. 그러나 정신(생각)이 지나치면 찻잎이 너무 많은 차가 쓴맛을 내는 것처럼 부담스러워진다. 반대로 충분하지 못하면 색이 나지 않고 향도 나지 않는 차처럼 무미건조해진다. 내용과 형식이 잘 어울려야 한다는 뜻이겠다. 말 속에 생각이 잘 풀어져야 하지만 아예 생각이 담겨 있지 않아도 곤란하다. 균형 있게 잘 어울리지 않으면 문장은 알아듣기 어렵거나 하나 마나 한 것이 된다.





“신앙은 의심을 제거함으로써가 아니라 그것을 자기 안에 있는 하나의 요소로 받아들임으로써 그것을 정복하는 용기다.”(폴 틸리히) 이념은 반대다. 이념은 의심하지 않는, 의심을 용납하지 않는, 의심이 끼어들 틈이 없는, 끼어들어서는 안 되는 투철한, 무분별한 믿음의 체계이다. 이념은 투철한 확신을 가진 광신자들을 만들어내고, 그런 광신자들에 의해 막강해진다.




...우리 안의 존재가 우리에게 그처럼 낯선 것은 우리가 그만큼 많기 때문이고, 확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고, 우리가 우리를 모르기 때문이다. 이 말을 헤르만 헤세는 『데미안』에서 수없이 자주, 이렇게 저렇게 표현을 바꿔가며, 거의 필사적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끈질기게 한다....나는 나의 내면으로부터 뿜어져나오려고 하는 것, 바로 그것을 실현하며 살고 싶었을 뿐이다. ...모든 인간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향하는 길이다.



...시인 최승자는, 썩지 않으려면 다르게 기도하는 법, 다르게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충고한다. “절대로 달관하지 말 것/ 절대로 도통하지 말 것”. 앙드레 지드는 익숙한 세계에 안주하지 말라고 권유한다. “그대를 닮은 것 옆에 머물지 말라. 결코 ‘머물지 말라’, 나타나엘. 주위가 그대와 흡사하게 되면, 또는 그대가 주위를 닮게 되면 거기에는 이미 그대에게 이로울 만한 것이 없다. 그곳을 떠나야만 한다˝




...걸으면 다리에 근육이 만들어지고, 근육이 만들어지면 걷는 데 유리하다. 다리를 움직여 걷는 것이 근육을 만드는 방법이 되는 셈이다. 걷기와 근육 생성은 서로에게 원인이고 결과다. 그러나 근육을 만들기 위해 걷는 것은 아니다. 결과적 현상을 목적과 혼동할 필요가 없다.
  언제까지 걸을 거라고 미리 계획을 세울 필요가 있을까. 걸을 수 없는 순간이 올 것이다. 걸을 수 없는 순간이 올 때까지 걸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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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역사 - 죽음은 어떻게 우리의 세상을 변화시켰는가?
앤드루 도이그 지음, 석혜미 옮김 / 브론스테인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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