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의 자서전 - 시로 쓴 소설
앤 카슨 지음, 민승남 옮김 / 한겨레출판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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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마흔이 넘었을 때 자신의 얼굴을 누르던 격자무늬 망사문의 먼지 낀 냄새
  그 케케묵은 냄새를 기억할 것이다.
  이제 어머니는 그의 뒤에 있었다. 네가 약한 아이라면
  힘든 일이겠지만  넌 약하지 않아. 어머니는 그렇게 말하고는 그의 작은 빨강 날개를 가다듬어준 후 그를 문 밖으로 떠밀었다.




...별들은 어떨까?
우리가 보는 별  실제로 거기 없다는 말을 하려는 거야? 글쎄, 실제로 있는 별도 있겠지  하지만 만 년 전에 타서 없어진 별도 있어.  난 그 말 안 믿어.
  어떻게 안 믿을 수 있어, 다 알려진 사실인데. 하지만 난 그 별을 보는데. 넌 추억을 보는 거야.





...그리고 난
  언덕 위에 선 듯한  기분을 느꼈어요. 반평생쯤 걸려서 힘들게 언덕 꼭대기에 오른 거고  반대쪽도 비탈을 이루고 있죠.  뒤를 돌아보면 딸아이가 아침 햇살 속에 작은 금빛 동물처럼 엉금엉금 기어서  언덕을 오르기 시작하는 모습이 보이겠죠. 그게 바로 우리예요. 언덕을 오르는 존재들.  서로 다른 거리에 있는. 게리온이 말했다.
  늘 변하는 거리에 있죠. 우리는 서로를 도와줄 수도 없고 소리쳐 부를 수도 없어요.




...밤의 돌풍 한 줄기가 문으로 밀고 들어왔고
  실내의 모든 사람들이 들판의 풀줄기처럼 한차례 흔들렸다가 대화를 이어갔다.
  게리온은 코트에 파묻혀  목욕물처럼 따스한 대화를 흘려보냈다. 그 순간 그는 구체적이고  분리 불가능한 존재가 된 기분이었다.




...“우울은 미지의 존재 방식 가운데 하나다.
  자아가 없는 세계, 개인을 초월한 명료함으로 보이는 세계를 표현하는 말은 없다.
  언어가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건  상상력이 자동적으로 풍경을 다시 칠하고 습관이 지각을 흐리고  언어가 틀에 박힌 윤색을 재개하는,  우리가 건강이라고 부르는 망각으로의 느린 귀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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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충 사육 준수 사항 ㅣ 안전가옥 오리지널 48
김혜영 지음 / 안전가옥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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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해빠져서 굶어 죽는 놈. 그게 대부분이지. 꾸역꾸역 살겠다고 가족이나 친구의 살에 이빨을 박아 넣고 살아남는 놈? 드물지. 그래서 이 자이언트 빵충이 비싼 거고. 생존이란 게 다 그렇지. 손톱이건 발톱이건 휘두르는 놈이 이기는 거. 안 그래요?




“사람이 대체 왜 저러구 살까. 그런 의심 안 해봤어요?”
“그건…. 개인적인 일이죠.”
“사람 사는 세상에 개인적인 건 없죠.”
그녀가 말했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고.




...죽을 때까지 트럼펫을 불겠다고 했던 말이 이런 식으로 진실이 될 줄은 몰랐지만, 적어도 거짓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해온 일들 가운데 가장 큰 성공이었다. 내 음악에 온 신경을 빼앗긴 채 절대 칼날을 휘두르지 않는, 표정을 알 수 없는 관객들까지도 마음에 들었다. 나는 계속해서 트럼펫을 불었다. 삶의 모든 회환을 털어내는 것 같기도 했다. 죄의 고백 같기도 했다. 영원 같기도 했다.




...무엇에 삼켜지는지도 모르면서 피와 살을 찌우던 삶. 잘 길러진다는 것은 잘 살아남는다는 것과 닮아 있어서 나는 오래도록 사육과 생존을 구분하지 못했다. 우리는 무엇의 사육종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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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플레이션은 누구를 부자로 만드는가 - AI·지정학·디지털화가 이끄는 부의 재분배
신환종 지음 / 포레스트북스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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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는 생산자는 줄고 소비자는 늘어나는 ‘고령화 경제’, 그리고 효율성보다 안보를 중시하는 ‘분절된 경제’라는 두 가지 거대한 구조적 인플레이션 엔진을 품고 살아가야 합니다. 따라서 기업과 정부, 가계는 과거의 저물가·저금리 시대로 다시 돌아갈 것이라는 기대를 버리고, 고비용 구조에 적응하기 위한 자동화(AI, 로봇) 투자와 생산성 향상에 사활을 걸어야 하는 새로운 현실에 직면했다고 주장합니다.




...인플레이션은 돈이 많고 고용이 넘치며 공급이 부족해서 시작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인플레이션을 장기적이고 구조적인 재앙으로 확정 짓는 ‘마지막 도장’은 바로 기대 인플레이션이 찍습니다.
현대의 중앙은행들이 정례 회의마다 점도표를 발표하고, 연준 의장이 기자회견에서 매파적(긴축적) 발언과 비둘기파적(완화적) 발언을 정교하게 섞어가며 시장과 소통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통화 정책의 본질은 돈의 양을 조절하는 수학이 아니라 대중의 기대와 공포를 통제하는 ‘고도의 심리전’이기 때문입니다.




...1960년대의 미국 주식 시장은 혁신(트로닉스)으로 시작해, 건전한 경제 성장(위대한 사회)을 거쳐, 금융공학적 사기(복합기업)와 맹목적인 성과주의(고고 펀드)로 끝을 맺은 한 편의 완벽한 드라마였습니다. 이 시기는 풍부한 유동성(돈)과 과도한 낙관론이 결합될 때 시장이 얼마나 비이성적으로 변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사례로, 이후 닷컴 버블이나 최근의 밈 주식(meme stock) 등 시장에 열풍이 불 때마다 다시금 회자되곤 합니다.




...향후 미국과 글로벌 경제는 2010년대에 경험했던 ‘연 1%대 물가와 제로 금리’로 다시 돌아가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탈세계화, 기후변화 대응 비용, 노동 시장의 구조적 부족이라는 강력한 거시적 파도가 겹치면서 과거보다 기초적인 물가 상승률 자체가 높아지는 ‘구조적 중물가(연 2.5~3% 이상)와 중금리’의 뉴노멀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2026년 현재, 미국 경제는 과거로의 완벽한 회귀(2.0% 물가와 제로 금리)를 포기하는 대신, ‘2%대 후반의 물가와 4% 안팎의 금리’라는 새로운 지형과 타협했습니다. 이런 ‘구조적 중물가’ 체제는 미국 경제의 내부적 강건함(AI 혁명, 리쇼어링)과 구조적 취약함(막대한 재정 적자, 인구 고령화)이 팽팽하게 맞선 결과물입니다.




...우리는 AI가 생산성을 향상시켜 물가를 낮출 것이라고 기대하지만, ‘탐욕’의 관점에서 기업들이 보유한 AI는 철저히 소비자의 주머니를 터는 가장 정교한 무기입니다. 2020년대 후반 아마존, 우버, 항공사뿐만 아니라 일반 소비재 기업들까지 AI 기반의 동적 가격 책정 모델을 전면 도입합니다. AI는 실시간 수급, 개인의 검색 기록, 구매력, 심지어 날씨와 시간대까지 분석하여 개별 소비자가 지불할 수 있는 ‘최대치의 가격(최대 지불 용의)’을 산출해냅니다. 이는 경제학에서 말하는 ‘1급 가격 차별(완전 가격 차별)’의 현실화이며, 소비자가 누려야 할 잉여 가치가 남김없이 기업의 이윤으로 흡수되는 근원적 인플레이션을 유발합니다.




...2026년부터 2030년까지의 그린플레이션은 단순히 환경을 지키기 위한 착한 세금이 아닙니다. 이는 ‘AI라는 거대한 에너지 포식자를 키우기 위해(기술), 쪼개진 세계에서 비싸게 자원을 조달하며(지정학), 디지털 유동성이 그 비용을 뻥튀기하는(토큰화)’ 거시경제의 가장 폭력적인 비용 인상 메커니즘입니다.
기존의 화석 연료 생산능력은 파괴됐으나 신재생 에너지는 AI의 수요를 감당하지 못하는 ‘에너지 갭’ 구간이 2030년대 중반까지 이어집니다. 이 기간에 에너지와 원자재 가격은 떨어지지 않는 하방 경직성을 확보하며, 경제 전반의 기본 물가 상승률을 3~4%대로 끌어올립니다.




...결론적으로, 2020년대 후반의 인플레이션은 단순한 수치의 싸움이 아닙니다. 지정학적 불안, AI의 자원 포식, 그리고 디지털 토큰이라는 도피처가 결합하면서 ‘종이돈의 가치는 계속 하락할 것이다’라는 대중의 거대한 심리적 합의가 이루어졌습니다. 기대 인플레이션의 닻이 풀려버린다면 이를 제압하기 위해서는 과거처럼 고통스러운 긴축을 실행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닻 풀린 기대 인플레이션하에서 명목 금리는 쉽게 떨어지지 않습니다. 듀레이션(만기)이 긴 국채는 인플레이션 방어력이 전혀 없으며, 실질 구매력을 급격히 갉아먹는 ‘수익률의 무덤’이 될 위험이 큽니다. 전통적 의미의 채권의 역할은 과감히 변경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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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 타이완 여행기 - 2026 부커상 인터내셔널 수상작, 2024 전미도서상 번역부문 수상, 2024 일본번역대상 수상, 2021 타이완 금정상 수상
양솽쯔 지음, 김이삭 옮김 / 마티스블루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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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이 말씀하시는 본섬의 맛이라는 건 사실 진짜 맛있는 맛을 의미하지는 않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것보다는 희귀하고 기이한 짐승을 구경하는 듯한 느낌이지요. 아오야마 선생님이 자기가 흥미를 느끼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개인적 취향에 맞추기 위해 강제로 해석을 덧붙이는 건요, 제 솔직함을 용서해주세요, 그건 지식인 계급의 오만입니다.”



“미시마 선생님이 보시기에…… 선의에서 나온 도움이라고 할지라도 기본적으로 그건 오만일 뿐이라는 거죠. 맞나요?”  미시마는 담배 연기 사이에서 잠시 침묵했다.
  “세상에는요. 스스로를 옳다고 생각하는 선의처럼 거절하기 힘든 뜨거운 감자도 없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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