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다가, 뭉클 - 매일이 특별해지는 순간의 기록
이기주 지음 / 터닝페이지 / 202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근심은 생각을 먹고 자라는데 그림 그리기는 이런 근심이 자랄 수 없는 완벽한 환경을 제공한다고 믿는다. 생각이 멈추면 근심마저 어느새 사라져 있던 게 한두 번이 아니더라.영화 〈고흐, 영원의 문에서〉에서 고흐도 같은 말을 했다.“왜 그림을 그리나요?” 친구인 닥터 폴이 묻는다.고흐가 이렇게 말한다.“생각을 안 하려고요. 생각을 멈추면 그제서야 느껴져요. 내가 안과 밖 모든 것의 일부라는 걸요.”




...반복되고 겹쳐 있는 무한한 수의 선들은 생명의 순간을 표현한다. 수많은 선들이 뭉치고 흩어지기를 반복하면서 ‘밝음’과 ‘어두움’의 굴곡이 만들어지는데 이건 마치 우리의 인생을 닮아 있다. 특히 깊고 짙은 어둠을 거칠게 생채기처럼 표현했다. 누구나 가질 수밖에 없는 상처는 오히려 잘 살고 있다는 증명일 게다. 저 짧은 하나의 획이 사람의 희로애락 중 하나라면 결국 ‘생명’은 이런 희로애락의 얽힘으로 만들어지는 ‘나무’ 같은 것이 아닐까?




...익숙함이 무심함이 되지 않도록 살피는 자세가 필요하다. 으레 스쳐갔던 많은 것들에 진심이었는지 되돌아봐야 한다. 행여 익숙하다는 이유로 사람들에게 무례하지는 않았는지 매일 다니는 길에서 길을 묻듯 살펴야 한다고 생각했다.익숙함이 무례함이 되는 경우를 많이 봤으니까. 무례함이 익숙함이 되는 건 최악이니까.




...뜬금없이 ‘묵음’에 대해 생각했어. 묵음silent은 영어 단어 know와 knife에서 발음되지 않는 k 같은 걸 말해. 이렇게 써 있는데 읽힐 수 없는 묵음은 왜 있는 것일까? 많은 설들 중에 원어의 족보를 유지하기 위함이라는 게 제일 설득력 있다고 생각해. 단어의 가치를 이 묵음들이 지켜주고 있다는 거지. 적어도 본래의 뜻을 지키기 위해 자존심처럼 떡하니 자리잡고 있는 거라고. 이건 나같이 말수가 적어 묵음 같은 사람들에겐 ‘위로’ 같았어. 말이 없어 존재감도 없지만 없으면 본래의 뜻이 망가지거나 틀린 게 되는 아주 중요한 존재.
그게 나야. 그게 너이기도 해. 말이 없다고 생각이 없는 건 아니야. 그냥 그림처럼 아무 말 없이 말하고 있는 거라고





...아름다운 것만 보면서 살 수 없으니 아름답게 보는 재주가 있다면 좋겠다. 세어 보지는 않았지만 하루 종일 보는 장면이 수만 개쯤 되겠지? 아마도 대부분은 여행지도 아니고 일상이라 평범한 장면들이겠지만 이왕이면 이런 장면 중 몇 개 정도는 아름답게 볼 수 있다면 좋겠다. 이게 쌓여서 내 인생 좀 아름다웠다고 회고할 수 있는 거니까.




...‘사라지는 점’이라니. 허상 안에서 만나는 것일 뿐 실제론 만나지 않는다. 그래서 사라진다고 했을까? 이 단어를 만든 사람은 적어도 소설가나 작가라고 생각했다. 허상과 현실이 서로 대치되는 슬픈 사랑 이야기가 생각나는 것은 어디 나뿐일까? 가까이 오면 만날 수 없고 멀어질수록 가까워지는 애달픈 이야기. 가까워지려면 멀리 두고 봐야만 하는 서글픈 짝사랑 이야기. 끝끝내 이루어질 수 없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사랑 이야기.




...사람도 마찬가지. 대화를 하다 보면 겹겹이 생각이 다양하고 나의 말을 받아주는 그릇이 깊어서 어디까지 들어가는지 모르게 푹 빠지게 하는 사람이 있다. 나는 이런 사람을 소실점이 있는 사람이라고 부른다. 모든 생각과 행동이 한 개의 점으로 모여 분명하고 단호한 모습이지만 끝을 알 수 없는 깊이감이 충만해서 뭐든 담아낼 수 있는 사람. 아, 이런 사람이 너무 좋다.




...실수한 선이 다음 선을 그을 때 길잡이가 되어주면서 오히려 반듯해진다. 지우고 다시 선을 긋는다고 더 나은 선을 그을 확률은 그다지 크지 않다. 지우개 똥으로 지저분해지고 종이만 너덜너덜해질 뿐이다. 그러니 실수한 선을 그대로 놔두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림 속 수많은 선에서 실수한 선은 찾기도 힘들 테니까. 어쩌면 인생도 이런 선 수백 개가 엎치고 덮치면서 조화를 이루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내 인생이 결국 아름다운 거라고 그림 그리면서 배운다. 오늘의 실수한 선을 지우지 않는다. 내일 그어질 선은 좀 더 곧게 그어질 거니까. 인생 참 그림 같아서 재미있다.




...햇빛이 밝은 날을 그리려면 그림자를 진하게 그린다. 창문을 통해 빛이 드리워져 꽤 느낌 있는 카페를 그리고 싶을 때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머릿속에 그림자를 어떻게 그려야 할까 생각하는 거다. ‘밝음’을 그려야 할 때 ‘어둠’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역설이지만 써먹을 지혜다...그림이란 게 인생을 많이 닮았다. 지금 깊은 어둠 속에 있다면 어쩌면 밝게 빛나는 내가 그려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헤어나올 수 없는 어둠이 칠흑 같을지라도 결국은 더 밝은 나를 완성해 줄 거라는 것을 알게 되면 이쯤은 견딜 수 있을 것만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