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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쓸모
로랑스 드빌레르 지음, 박효은 옮김 / FIKA(피카) / 2024년 8월
평점 :
...수전 손택은 암에 대해 “질병은 은유가 아니며, 질병에 대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가장 정직한 태도이자 환자가 되는 가장 건강한 방법은 질병에 따라붙는 잘못된 은유에 저항하고 거기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말했다...질병은 다만 또 다른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런데 “그 다른 삶에 속하려면 많은 비용이 든다. 우리는 건강의 세계와 질병의 세계라는 두 세계의 이중 국적을 가지고 태어난다. 우리는 언제나 건강의 세계에서 쓸 여권을 갖고 싶어 하지만, 잠시라도 질병의 세계에 다녀올 수밖에 없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닥치게 마련이다”.
....산다는 것은 우리가 결정하지 않은 현실의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의 의지에 따라 자유로워질 수 있고, 가능성을 시도해볼 수 있는 삶 속에서 “우연에 의해 존재하는 우리 자신에게서 벗어나 능동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우리는 혁명이나 영웅주의에 기대지 않고, 우리 내면의 힘을 기르면서 새로운 것을 시작할 수 있는 능력, 곧 탄생성(natality)을 발휘할 수 있다.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탄생성이란 늙음이나 젊음에 좌우되는 생물학적 현상이 아니라 비루하고 보잘것없더라도 무언가를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이다.우리는 새롭게 시작하면서 자기 주도권을 가질 수 있다.
...철학을 마음에 위안을 주는 메시지나 요가 명상으로 소비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해도, 철학은 본래 극도로 고통스럽고 괴로운 학문이다. 철학은 토론의 기술도, 감정의 공유도 아닌 이성으로 개념을 생산하는 일종의 ‘개념 제작소’다. 개념은 모든 일에 본능적이고 즉흥적인 의견을 내려는 본성을 거스르는 고행의 결과로 얻어진다. 우리가 개념을 통해 무언가를 이해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항상 생각하고 믿어왔던 모든 것, 즉 이미 널리 알려진 것을 거부하는 조건하에서만 가능하다.
...삶은 그저 버티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것을 쌓아가는 일이다. 그러니 하루의 어떤 순간도 의미 없이 허투루 보내서는 안 된다. 의미 없는 일들을 이것저것 다양하게 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벽돌을 하나하나 쌓듯, 주의를 기울이고 집중력을 발휘해 조금씩 차근차근 자기만의 삶을 쌓아가야 한다. 라이프니츠는 “우리가 보내는 시간들의 가장 소소한 부분까지 경험하고 느낄 수 있다면, 우리는 그런 능력 덕분에 오래도록 살 수 있다”고 말했다. 우리가 하는 행동을 통해 삶을 확장하고 무력감과 타성에서 벗어날 수 있을 때에야 우리는 비로소 온전히 자신만의 삶을 영위할 수 있다.
...전문가들은 스트레스란 할 수 없어서 하지 못한 일이 아니라 할 수 있었으나 하지 않은 일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끊임없이 다시 자라는 잡초처럼 우리의 삶을 잠식하고, 음악 소리에 묻어 있는 잡음처럼 우리 내면의 삶을 어지럽히는 아크라시아다. 해야만 하는 일을 하지 않은 나는 나 자신으로 존재하지 못한다. 다시 말해, 의지박약은 취약한 의지 때문에 목적한 바를 실행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죽지도 살지도 못한 채 나 자신으로 온전하게 존재하지 못하는 상태다.
...경험은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경험은 누적되지 않으며, 경험들이 쌓인다고 해서 절대적 진리가 되는 것도 아니다. 각각의 경험은 단 한 번만 할 수 있고 비교가 불가능하다. 즉 같은 경험을 두 번 할 수는 없기에 한 번의 경험으로 다른 경험을 대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경험은 부정적 확신만을 제공한다. 경험을 통해 우리는 진실 대신 우리가 오해하고 있었던 것들을 알게 된다(자신, 세상, 타인에 대해). 경험이 보여주는 것은 진리가 아닌 우리의 그릇된 생각이다. 경험은 우리의 예측과 반대되는 사실이나 상황을 보여준다. 경험의 힘은 가설이나 신념을 확신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오류가 있음을 드러내고 그것을 반박하는 데 있다.
...우리는 우리가 보고자 하는 것만 본다. 우리를 만드는 것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일어난 일에 대한 우리의 판단이다. 경험은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 우리가 취해야 한다고 판단한 것만 취한다. 칸트는 이렇게 말했다. “이성은 그가 스스로 생성한 것만을 식별한다.” 이성은 자신의 판단과 원칙으로 무장한 채 앞장서서 “목줄에 묶인 것처럼 현실에 끌려가는” 대신 현실이 자신의 질문에 답하도록 강요한다. “선생님이 말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듣고만 있는 학생의 태도가 아니라, 증인에게 자신의 질문에 대답할 것을 종용하는 재판관의 태도를 가져야 경험을 통해 무엇이든 배우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