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 - 카를로 로벨리의 기묘하고 아름다운 양자 물리학
카를로 로벨리 지음, 김정훈 옮김, 이중원 감수 / 쌤앤파커스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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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비즘은 양자론이 무르익던 시기에 유럽에서 형성된 브라크와 피카소의 입체파 ‘큐비즘Cubism’과 통하는 울림이 있습니다. 양자론과 입체파 모두 세계를 회화적인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납니다. 입체파 그림은 다른 시점에서 포착된 사물이나 사람의 상충하는 이미지들이 자주 중첩하죠. 마찬가지로 양자론은 동일한 물리적 대상의 서로 다른 속성들의 측정이 상충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입니다.



...한 대상이 다른 대상에게 나타나는 방식을 고려할 때, 그 어떤 대상이든 ‘관찰자’로 간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다른 대상의 속성들이 그 대상에게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고려할 때 말입니다. 양자론은 사물들이 서로에게 나타나는 방식을 기술하는 것이죠.
즉, 양자론의 발견이란, ‘사물의 속성은 그 사물이 다른 사물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의 발견’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물의 속성은 다른 사물과의 상호작용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죠. 양자론은 사물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방식에 대한 이론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가진, 자연에 대한 최선의 설명입니다.



...이렇게 세계는 다양한 관점의 게임 속에서 산산조각 나며, 단일한 포괄적 시각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다양한 관점의 세계, 다양한 표현의 세계이지, 확정된 속성이나 단일한 사실을 가진 실체들의 세계가 아닙니다. 속성은 대상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대상과 대상 사이에 놓인 다리인 것입니다. 대상은 맥락 속에서만, 즉 다른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하며 다리와 다리가 만나는 지점입니다. 이 세계는 거울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비쳐야만 존재하는 관점들의 게임인 것입니다.
사물의 미세한 입자는, 변수들이 상대적이고 미래가 현재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 이토록 기묘하고 작은 세계입니다. 이 환상적인 양자 세계가 바로 우리의 세계인 것입니다.



...양자론은 고전역학도 포괄하고, 우리의 일상적 세계상도 근사치로 포괄합니다. 근시라서 냄비 속의 끓는 물이 안 보이는 사람의 경험을 눈이 좋은 사람이 이해할 수 있듯이, 양자론도 그렇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죠. 그러나 분자 규모에서 보면, 강철 검의 날카로운 칼날도 폭풍우 치는 바다의 가장자리처럼 거칠고 비뚤배뚤한 것이 됩니다.
고전 물리학적 세계상은 그저 우리가 근시안적이기 때문에 견고한 모습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고전 물리학의 확실성은 단지 확률일 뿐입니다. 옛 물리학이 제공해온 선명하고 견고한 세계의 이미지는 사실 환상이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야말로, 안다고 교만하지 않고 이성과 배움의 능력을 신뢰하는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과학은 진리의 담지자가 아니라, 진리의 담지자 같은 것은 없다는 자각 위에 놓여 있습니다. 배움의 가장 좋은 길은, 세계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자신이 발견한 것에 맞춰 자신의 정신적 틀을 재조정하면서 세계와 상호작용하는 것입니다.



....‘맥락성contextuality’은 양자 물리학의 이러한 중심적인 측면을 나타내는 기술적 명칭입니다. 즉, 사물은 맥락 속에 존재합니다.
모든 상호작용에서 벗어나 고립된 대상은 그 어떤 특정 상태도 갖지 않습니다. 기껏해야 우리는 이렇게 저렇게 발현될 수 있는 일종의 확률적 성향이 그 대상에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미래 현상에 대한 예상이나 과거 현상에 대한 반영일 뿐이며, 어떤 경우에도 항상 다른 대상에 상대적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과격한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이 세계가 속성을 지닌 실체로 이루어져 있다는 생각을 뛰어넘어, 모든 것을 관계의 관점에서 생각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양자론을 통해 우리가 세계에 관해 발견하게 된 사실이라고 믿습니다.



...저는 인간이 무언가를 이해하려고 할 때 저지르는 가장 큰 실수 중 하나가, 확실성을 원한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식에 대한 탐구는 확실성을 먹고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확실성의 근본적인 부재를 먹고 성장합니다. 우리의 무지를 날카롭게 인식함으로써, 우리는 의심에 마음을 열고 더욱 더 잘 배울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과학적 사고와 호기심, 반항, 변화에서 비롯된 생각의 힘입니다. 앎의 모험이 닻을 내릴 수 있는 철학적, 방법론적 초석이나 최종 고정점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 얘야, 너 몹시 심란한 얼굴이구나,
당황했나보구나. 자, 기운 차려라.
여흥은 이제 끝났어. 여기 있는 배우들은
이미 말했듯, 모두 요정이었고
공기 속으로, 옅은 공기 속으로 녹아 사라지지.
그리고 주춧돌도 없이 지어진 환영처럼
구름 걸린 탑도, 화려한 궁전도
장엄한 사원도 거대한 지구 그 자체도
그래, 그 안의 모든 것도 녹아내려
이 실체 없는 광경이 사라지듯,
구름 한 조각 남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꿈을 만드는 재료, 우리 짧은 인생은
잠으로 끝맺는 것 /// 템페스트 4막1장, 프로스페로



...19세기 프랑스 철학자 이폴리트 텐Hippolyte Taine의 말을 빌리자면, “외부 지각이란 외부 사물과 조화를 이루는 내면의 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잘못된 지각을 ‘환각’이라 부르는 대신, 외부 지각을 ‘확인된 환각’이라고 불러야겠습니다.
과학은 기본적으로 우리가 보는 방식의 연장선일 따름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예상한 것과 세상에서 수집할 수 있는 것 사이의 불일치를 찾습니다. 우리는 세계에 대한 상을 가지고 있으며, 그 상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그것을 수정하려고 노력합니다. 인간의 모든 지식은 이러한 방식으로 만들어져 온 것이죠.



...우리가 발견한 바에 따르면, 실재는 상호작용의 그물망을 짜는 사건들로 가장 잘 묘사될 수 있습니다. ‘개체’는 이 그물망의 일시적인 매듭에 불과합니다. 개체의 속성은 이러한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순간에만 결정되며, 다른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결정됩니다. 사물은 다른 사물 속에 비친 것일 뿐입니다. 모든 시각은 부분적입니다. 관점에 의존하지 않고 현실을 보는 방법은 없습니다.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시점이란 존재하지 않죠. 그러나 시점들도 서로 소통가능하고, 지식은 다른 지식과 현실과 서로 대화할 수 있으며, 그렇게 대화를 통해 수정되고 풍부해지고 수렴되어, 현실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깊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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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에디터스 컬렉션 9
나쓰메 소세키 지음, 오유리 옮김 / 문예출판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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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의 계절
권여선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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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떻게 이렇게 됐을까?
우리는 어떻게든 이렇게 됐어.
우리는 언제부터 이렇게 됐을까?
우리는 언제부터든 이렇게 됐어.
이유가 뭐든 과정이 어떻든 시기가 언제든 우리는 이렇게 됐어. 삼십 년 동안 갖은 수를 써서 이렇게 되었어. 뭐 어쩔 건데? 이미 이렇게 되었는데.
  아……
  어디로 들어와, 물으면 어디로든 들어와, 대답하는 사슴벌레의 말 속에는, 들어오면 들어오는 거지, 어디로든 들어왔다, 어쩔래? 하는 식의 무서운 강요와 칼같은 차단이 숨어 있었다. 어떤 필연이든, 아무리 가슴 아픈 필연이라 할지라도 가차없이 직면하고 수용하게 만드는 잔인한 간명이 ‘든’이라는 한 글자 속에 쐐기처럼 박혀 있었다.



....아무리 차근차근 생각해보려 해도 추모 모임에서 들은 이야기 때문인지 취기 때문인지 내 정신은 급격히 혼탁해지고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가 없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하다가 문득 그럴 수도 있지, 한다. 인간의 자기 합리화는 타인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비합리적인 경로로 끝없이 뻗어나가기 마련이므로, 결국 자기 합리화는 모순이다. 자기 합리화는 자기가 도저히 합리화될 수 없는 경우에만 작동하는 기제이니까.



....사랑해서 얻는 게 악몽이라면, 차라리 악몽을 꾸자고 반희는 생각했다. 내 딸이 꾸는 악몽을 같이 꾸자. 우리 모녀 사이에 수천수만 가닥의 실이 이어져 있다면 그걸 밧줄로 꼬아 서로를 더 단단히 붙들어 매자. 함께 말라비틀어지고 질겨지고 섬뜩해지자. 뇌를 젤리화하고 마음에 전족을 하고 기형의 꿈을 꾸자.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생각들이 밑도 끝도 없이 샘솟았고 반희는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나기라도 한 듯 가슴이 뛰었다.



....세월이 많이 흘렀고, 현수와 연락할 방법을 찾자면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현수가 그 땅의 현재 가치에 대해 알 필요가 있을까. 안다면 자기의 혜안이 맞았다고 기뻐하기만 하고 끝낼까. 사람은 절대 그렇게 무구하지 않다.



....오래전 젊은 날에, 걸리는 족족 희망을 절망으로, 삶을 죽음으로 바꾸며 살아가던 잿빛 거미 같은 나를 읽고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아니, 그런 사람을, 나를 알아본 그 사람을, 내 등을 두드리며 그러지 마, 그러지 마, 달래던 그 사람을 내가 마주 알아보고 인사하고 빙글 돌 수 있었다면. 그랬다면 그 사람은 나와 춤추면서 넌 거미가 아니라고, 너는 지금 스스로에게 덫을 치고 있는 거라고, 그렇게 작고 딱딱한 결정체로 만족하지 않아도 된다고, 너는 더 풍성하고 생동적인 삶을 욕망할 수 있다고, 이 그물에서 도망치라고 말해주었을까. 나는 그 말에 귀를 기울였을까. 그 뜻을 알아채고 울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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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 - 나는 무엇이고 왜 존재하며 어디로 가는가?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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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황석희 - 번역가의 영화적 일상 에세이
황석희 지음 / 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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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민성 이죽거림과 비아냥을 습관처럼 손가락과 입에 달고 살고, 남을 모욕하거나 상처를 주려 할 때 언어를 실체가 있는 무기처럼 점점 구체화하여 사용한다. 우린 갈수록 잔인해지고 과격해진다. 아니다, 그것만도 못하게 갈수록 비열하고 저열해진다. 우린 어쩌다 이렇게 후진 사람이 되어가는 걸까.



....모든 사람에게 살갑게 대하기는 불가능하지만 일부러 상대를 아프게 할 필요는 없더라. 살면서 만나는 모든 사람은 저마다 당신과의 마지막날이 있다. 다만 그게 언제일지는 모른다. 그래서라도 소중한 사람에겐 물론이고 아무리 싫은 사람이라도 마지막 인사는 무던히 하는 게 좋다. 억지로 상냥하게 대할 필요는 없지만 일부러 상처를 줄 필요도 없다. 그저 덤덤하게 후회가 남지 않을 만큼은 인사하자.

마지막일지도 모르니까.



...˝때로 문학적인 담론의 지점을 넘어 이 책의 ‘영광’이 과연 누구의 것인가를 질문하며 어느 한쪽을 선택해 공격하거나 배제하는 양상이 나타나기도 했는데요. 실은 모두가 알다시피 문학은 성공과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문학은 사업이 아니고, 문학 작품은 사업적 결과물이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덧없는 것이고, 그 덧없음의 힘으로 진실과 직면하는 것이고, 세계와 싸우며 동시에 말을 거는 것입니다.˝




....아직도 시간을 낭비할 용기가 없는 나는, 이렇게 못 이긴 척 상상의 손을 잡고서라도 낭비할 시간이 있다고 믿고 싶다. 가끔은 누군가 아직 낭비할 시간이 있다고 말해주면 참 좋겠다.



...˝네 말이 맞는다. 인제 꼭 맞춤법에 맞게 쓰길 바라.”
정말로 이런 자막이 나와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걸까? 자막은 글이 아니라 말인데 늘 글의 규칙을 강요받는다. 하지만 클라이언트에게도 소비자에게도 그 점을 납득시키기가 쉽지 않다. 이미 언중에 의해 널리 쓰이는 말들을 캠페인을 통해, 개개인의 지적을 통해 바로잡아 돌이키는 게 가능한 일인가? 언제가 되건 언중이 입말에서 ‘바라’ ‘인제’ ‘맞는다’ 같은 것들을 사용하게 될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 이럴 때면 언어는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영역에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거대하고 철학적이고 유기적인 존재라는 거다. 인간의 힘으로 어찌 할 수 있는 게 아닐지 모른다. 어쩌면 언어의 복원력과 창조력, 생명력, 적응력 등을 가장 무시하는 건 오히려 언어를 약하디약한 아기처럼 귀히 떠받드는 사람들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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