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두는 여자
샨 사 지음, 이상해 옮김 / 현대문학 / 2004년 10월
평점 :
절판


바둑 두는 여자

 무료한 7월 말을 보내고 있던 나는 한달 여 전에 KBS1의 'TV 책을 말한다'라는 책 소개 프로그램을 시청했다. 그 프로그램은 늦은 시간에 방영을 해서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본 적이 드물었다. 하지만  그날 따라 이 프로그램에 눈을 고정하게 되었다. 한 여성 패널이 가슴이 굴곡이 보이는 검은 망사 못을 입고 빛나는 눈동자로 당당하게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우선 그녀의 인터뷰를 계속 지켜보게 된 것은  화면에는 그녀의 약간 부담스러운 노출에 대한 반감에서 였다. 나는 '교양 프로그램에 나온 저자가 저런 옷을 입다니'하는 시비조로 화면 속 그녀를 째려보았다. 하지만 그녀노출도 시간이 지날수록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녀의 명쾌한 대답과 자신감 넘치는 자태는 실로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바로 [바둑 두는 저자]와 [측천 무후]의 저자 샨사였다.

 그녀의 성장배경은 평범하지 않았다. 중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10대 중반에는 프랑스로 유학을 가서 지금까지 프랑스에 머물고 있다. 중국에서는 9세이 시집을 출간을 할 정도로 시작에 능했다고 한다. 프랑스에 와서는 7년만에 프랑스어로  처녀작 [천안문]을 지필한다. 그 이후로 평단의 호평을 받는 작품들을 써왔다. 그녀는 중국인이지만 프랑스 소설가로 유명하다. 그녀의 지필 공간이 프랑스이고 작품은 전부 프랑스어로 쓰였기 때문이다.  

 '책을 말한다.'에서 그녀는 불어로 말을 했고 그녀의 말을 따라 흐르는 여자 성우의 더빙은 어색했지만, 그녀의 당당한 모습과는 사뭇 어울리기도 했다. 저자의 이미지가 계속 내 뇌리에 박혀 있었다. 그녀의 작품을 읽어봐야 겠다는 결심을 했다. <콩쿠르 데 리쎄앙>상을 수상한 그녀의 작품 [바둑 두는 여자]를 서점에서 샀다. <콩쿠르 데 리›恃?gt;은 프랑스 고교생이 가장 읽고 싶은 책에게 주어지는 상이다.  예민한 감성과 아직 뿌리를 미처 내리지 못한 어린 나무 같은 이성을 지닌 청소년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요소가 이 책에는 충만한다. 우선 간간이 등장하는 중국 소녀와 대학생 민이 사랑을 나누는 장면 묘사는 한 편의 움직이는 그림을 보는 듯하다. 도화지에 그들의 흔들림이 보인 듯 하다. 이런 점에서 청소년들의 호기심을 일부 채워주지 않았나 싶다. 물론 나만의 추측이지만... 그 밖에는 사랑이 정신적 사랑과 물리적 사랑을 이분법적으로 생각하거나 혹은 사랑의 단계의 기존 관념을 쫓지 않는다. 플라토닉 러브이다. 단순히 언어로 표현된 플라토닉 러브가 아닌, 그것의 진가가 어렴풋이 전해져 온다.  

 [바둑 두는 여자] 소설의 배경은 1930년대 중국의 만주 일대로 일본군은 중국 테러리스트를 처단하기 위해 잠시 주둔해 있는다. 만주에 살고 있는 학자 집안 출신의 중국 소녀와 만주로 중국 테러리스트를 처단하기 위해 파견된 일본 군대의 한 장교의 이야기이다. 중국 소녀의 시점과 일본군 장교의 시점이 한 장씩 번갈아가며 전개된다. 같은 사건에 대해서 생각하고 느끼는 것들이 중국소녀와 일본 장교의 시점은 너무나 다르다. 오히려 그들은 적과 아군의 관계같다. 하지만 그들은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다만 국가와 국가 간의 벽이 있고, 민간인과 군인이라는 그 누구도 그어놓은 구분에 갇혀 있을 뿐이다.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이 둘은 만주 쳰훵 광장에서 바둑 맞수로 만난다. 맞수라 하지만 치열한 경쟁과 막대한 상금이 걸린 현대의 바둑이 아니다. 그들의 대결은 서로의 영혼을 확인하는 깊은 대화이다. 아무 말 없이 그들은 바둑을 둔다. 소녀의 이른 사랑으로 바둑판은 도중에 말 없이 끝나기도 한다. 각자 자신의 영역에서 살아가고 있는 중국 소녀와 일본국 장교의 스토리는 바둑과는 별개로 보인다. 하지만 대국이 지속되면서 이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무언의 사랑에 빠진다. 저자 샨사의 비유와 문체는 실로 중국의 수묵화를 보는 듯하다. 그것도 빨갛게 활짝 피는 장미의 화려한 향이 독자를 끌어 당긴다. 이백의 시처럼 풍유가 돌기도 하고 두보의 시처럼 세상사의 깊은 고욕이 속을 애린다.  

 마지막 포로와 일본군 장교로 다시 재회하는 이 둘의 끝을 따라가니 책장에 어느새 눈물이 떨어져 내린다. 그녀의 향으로 가득 채워진 이 책에서 나는 평정심을 잃지 않으려 한다. 마지막 장 전까지는 유지가 되었지만 마지막 문장에 나는 결국 무너진다.

-내 사랑하는 이이 모습을 바라보기 위해 나는 눌을 계속 뜨고 있으려고 애쓴다.-

  쓰라린 사랑의 맛을 알아버린 중국 소녀는 사랑에 대해 믿지 않는다. 일본군 장교는 매춘부에게서 일시적인 관계로 죽음에 대한 공포를 잊으려고 한다. 이 두 사람의 과거는 사랑을 할 자세나 마음가짐을 갖추지 못했다. 하지만 사랑은 과거나 마음가짐이 필요 없다. 사랑은 언제나 새로 시작할 수 있다. 사랑은 고귀한 자, 정결한 자만의 것이 아니다. 사랑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다만 깨닫는 것이 힘들 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