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어붙은 여자
아니 에르노 지음, 김계영 외 옮김 / 레모 / 202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두 권을 묶어서 서평을 쓸까, 아니면 각각 써야 할까 고민을 참 많이 했는데, 두 권은 결국 '뗄 수 없는' 관계라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기 때문에(한 권을 읽으면 다른 책을 떠올렸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에르노의 <그들의 말 혹은 침묵>, 그리고 <얼어붙은 여자>를 한 글에서 동시에 다루게 되었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아니 에르노의 책은 상당히 많이 번역되어 있다. 그 중 (<레벤느망>이라는 영화로도 접했으며) 이미 읽어 본 <사건>을 제외하고, 나는 '내가 가장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일 것'이라는 기준을 정해 책을 고르고 구입했다. 아니 에르노의 저서 중 <그들의 말 혹은 침묵>은 "빅토르 위고와 알베르 카뮈의 소설에 열광하며 동경하던 소녀. 그 소설들과 소녀가 매일 마주하는 끔찍한 일상의 접점은 영영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하나의 세계가 무너지기 시작한다. " 와 "빈 종이 앞에서 떠오르는 것이라고는 자신의 출신과 고등교육 사이의 거대한 간극, 자신의 성을 이유로 한 차별과 모순과 한계 뿐이라는 것을 인식했을 때 소녀가 느낀 부조리의 감각. "이라는 알라딘 소설MD 권벼리 님의 소개글을 보고 고르게 되었다. <얼어붙은 여자>는 "실제로 그는 『얼어붙은 여자』 이후 출간된 『남자의 자리』에서 아버지를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을 쓰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고백과 함께, 소설적 장치들을 포기하고 오로지 경험한 것만을 글로 쓴다는 자신만의 독특한 문학 세계를 구축해나간다." 라는 책소개를 보고 구매했다. 이때 아니 에르노가 작품에서 주로 다루는 '지극히 개인적인 사건과 감정'이 여성 서사가 아니라는 비판을 받았다는 말을 듣고 조금도 이해를 하지 못했다. 여성이 썼으며, 여성이 주체가 되어 진행되는 이야기가 여성 서사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에게는 보다 다양한 유형의 여성 캐릭터와 여성 저자가 필요하다. 나는 반드시 작품 속에서 성장을 이뤄내고 성공을 쟁취하는 여성 캐릭터뿐만 아니라 좌절과 실패를 겪는 여성 캐릭터 또한 우리에게는 지극히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2022년 가을, 아직도 우리에게는 많고 다양한 여성의 목소리가 필요하고, 더욱 여성에게 귀를 기울일 의무가 있다.

-

첫 번째로 민음사에서 펴낸 <그들의 말 혹은 침묵>을 보면, 작품 속의 '나'는 <호밀밭의 파수꾼>의 홀든처럼 사춘기 청소년 특유의 불평을 끊임없이 늘어놓고 있다는 유사점이 있으나, 그 기저에 깔린 원인은 전혀 다르다. 홀든은 낙제와 퇴학이 가져오는 권태와 좌절 속에서 고민한다면, 이 소설의 '나'는 자신이 사회와 부모님으로부터 기대받는, 그리고 자신이 성취해 낸 '고등학생'이라는 사회적 지위와 정작 자신에게서 영영 떼어놓을 수 없는 '노동자 계층' 사이의 간극 때문에 괴로워한다. <그들의 말 혹은 침묵> 속의 '나', 즉 안은 부모님이 원하던 지위를 쟁취해도, 아무리 카뮈를 많이 읽어도, 부조리함을 느끼더라도 구조적안 문제 속에서, 그 견고함에서 헤어나오는 데 실패하고 만다(결국 '나'는 에세이를 단 한 줄도 쓰지 못한 채 소설은 끝이 난다).

그들의 말 그리고 침묵에 나오는 '나' 의 말은 소설의 정돈된 문체와는 다른 양상을 띈다. 청소년 특유의 신랄하고 '날것'에 가까운 말투. 그 덕분에 우리는 '나'가 헤어나오지 못하는 간극과 자괴감을 여실히 느낄 수 있지 않은가. '나'는 수많은 압박감에 시달린다. 사춘기 소녀로서 남자친구를 만들고 성경험을 해야 한다는 나이와 또래 집단이 주는 압박, 더 많은 성취를 원하고, 재정적인 부담을 여실히 드러내고, 남자를 만날까봐 전전긍긍하여 옷차림을 하나하나 신경쓰는 부모님의 압박, 그리고 자신이 태생적으로 처해 있는 환경에서 필사적으로 탈피하고자 하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오는 압박. '나'가 겪는 압박감과 답답함, 조급함은 청소년기를 겪고 있고, 이를 지나온 여성이라면 모두가 겪었을 그것과 매우 유사하다. 나 역시 여기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으로 필사적으로 대학 입시를 준비했다.

'나'가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단숨에 읽어내리고, 가치관과 세계관이 완전히 뒤바뀌는 멋진 경험을 하게 되어도 여전히 자신을 둘러싼 외부 세계는 그대로다. 우리는 이 구간에서 숨이 턱 막히는 간극과 절망을 느낀다. 나 역시 책을 읽고 세상이 뒤바뀌는 경험을 수도 없이 했고, 이후에는 인과관계가 뒤바뀌어 오히려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해 책을 읽게 되었다. 부모의 요동치는 기대치(돈을 벌기를 원하다가 갑자기 성적이 이게 뭐냐고 화를 낸다)와 집요한 감시('나'에게는 원피스를 마음대로 고르거나 입을 자유조차 없다 - '나'는 소년이 아닌 소녀이므로)에 '나'는 점차 지쳐 간다. 사춘기를 겪으면서, 자신이 속한 세계가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점차 확장되면서, 그리고 소설가라는 꿈을 본격적으로 간직하기 시작하면서 '나'의 마음은 끊임없이 요동치지만, 이를 안정시켜 줄 집이라는 안전한 환경은 없다.

'나'는 또한 소녀에서 '여자'가 되고자 한다. '나'는 원피스를 입고 여러 포즈를 취해 보거나, 어느 남자가 자신에게 말을 걸자 매우 뿌듯해한다. 그리고 '나'는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은 경험을 시도하고(자신은 그다지 예쁘지 않기 때문에 상대를 고를 자격이 없다고 말하거나, 미숙하기 때문에 싫다는 의사를 제대로 내비치지 못한다) 이 때문에 우정을 잃기도 한다. 자신의 미숙함과 어설픔을 그대로 드러낸 '나', 혹은 아니 에르노의 자전적인 소설은 그 누구의 것보다 대담하고 용기있다.

"작문 과제를 절대 마치지 못할 텐데, 교사는 내게 빵점을 주겠지. 바로 그 교사가 이런 말을 한다. 삶을 변화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삶을 변화시켜야 해요. 그런데 저 여자는 저기서 뭐하고 있는 거야?"

이 소설은 끝내 갈등을 해소하지 못하고 끝이 난다. 사실 수많은 소설은 문제 상황이 지속되고 있는 채로 결말이 나곤 한다. 이에서 탈피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결말이야말로 그 무엇보다 현실적이고, 절망적인 메세지를 닻처럼 날카롭고도 무겁게 던져주지 않던가? 부조리극처럼 현실 속에서는 수많은 모순이 존재하고, 이를 해결하기에는 소설 속의 등장인물보다 우리 개인은 압도적으로 무력하다. 그러나, 나는 어떠한 면에서 '문제를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았다'는 말과 같다고 여긴다. '나'는 분명 자신의 사회적 지위가 던져주는 무력감에서 탈피하는 과정으로부터 수많은 상처를 입고, 자괴감을 안고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가 주는 청소년 특유의 '날것'의 에너지와 말투는, 분명 이와 끝까지 싸워서 승리를 쟁취할 것이라는 점을 시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

두 번째로, 레모에서 펴낸 <얼어붙은 여자>는 아니 에르노에 의해 소설로 분류되었지만, 많은 독자들은 이를 논픽션, 자전적 이야기로 분류한다. 이는 "오직 자신이 경험한 것만을 쓴다"는 아니 에르노의 문학 세계가 뚜렷하게 드러나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 특권들을 문제 삼고 후대에 넘겨주지 않는 일이야말로 우리, 소녀들, 여성들의 임무다."

저자가 느낀 성별 간의 간격과 페미니즘적 인식은 서문에서부터 뚜렷히 나타난다. 여성들도 남성과 '표면적으로는' 동등한 지위를 가진 것처럼 보인 2022년, 우리는 여전히 수많은 차별을 뼈저리게 느끼면서도 '남녀 차별은 사라졌다, 여성이 더 존중받는 시대다'라는 말을 들으면서 자괴감을 느낀다. 단적인 예시로 사범대학에서는 "임용고시에서 남자는 무조건 유리하다"는 발언이 강의 내내 전혀 부끄러움 없이 들려온다. 그 강의에서 우리는 남학생이 성적 측면에서 더 뛰어나다는 통계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물론 피임은 수많은 여성을 해방시켰지만, 여전히 임신에 대해 걱정해야 하는 것은 여성이다. 더 많은 가사노동을 하는 것도 여성이다. 작가의 말처럼, 우리는 "결코 평등하게 출발하지 않는다."

'나'는 어머니가 가게 운영을 담당하고 아버지가 가사일을 담당하면, 어쩌면 '독특한' 환경에서 자라난다. '나'는 오히려 남들과는 다른 자신의 어머니를 사랑하고 자랑스럽게 여긴다. 어머니는 아름답고, 활기차고, 두려움이 없으며 많은 독서를 하고 상상력의 중요성을 얘기하는, '나'와 꼭 맞는 존재가 된다. 하지만 '나'는 자라나면서 다른 집의 완벽한 어머니들과 자신의 어머니 사이의 간극을 느낀다, 아니 느껴야만 했다. 어머니는 친구의 시선에서 '정상적인 어머니'가 아니었던 것이다. 단적인 예로 친구 브리지트의 경우, '나'의 집에 쌓인 먼지를 보고 경악한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여성지에 실린 살림의 비결을 '여성을 속박하는 굴레'로 칭한다.

"중요한 것은 바로 내가 여자아이라는 이유로 그 성공이 나에게 금지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내 부모님에게는 어떤 인물이 된다는 것에 성별이 문제되지 않았다."

'나'의 이러한 성장 환경은 '남녀는 평등하다', '남녀가 해야 할 일은 구별될 필요가 없다'는 자연스러운 인식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외부 세계는 이를 가만히 두지 않는다. 가만히 둘 리가 없는 것이다. 교회에서는 '어머니의 일', 즉 가사 활동을 '희생'으로 규정하고, 소녀들 또한 그러한 능력을 습득할 것을 권한다. 브리지트는 퓌레를 만드는 아버지에게 "그걸 아버지가 만드세요?"라는 가시 돋친 질문을 하여 '나'로 하여금 경악감을 불러일으킨다. '나'와 대비되는 브리지트는 그 시대에 걸맞는 '모범적인 어머니'와 함께 사는 소녀로, 자신 또한 어머니를 도와 가사에 매우 익숙한 소녀로 등장한다. 사람들은 아직 어린 소녀에게도 브리지트처럼, 어쩌면 브리지트의 어머니처럼 완벽한 가사 수행 능력을 바라고 요구한다.

"우리 집이나 학교에서는, 여자아이들이 열심히 공부하도록 격려하지만, 그들과 함께 있으면 그런 성공은 오히려 결점이 되어버린다. 그들은 성가신 애가 하나 또 있다면서 경계하고, 책벌레를 끔찍이 싫어하며, 주눅이 들어, 완벽한 여자아이 만세! 거리낌 없이 외친다."

<그들의 말 혹은 침묵>에서와 같이 '나' 역시 어린 소녀에서 여자로 탈피하고자 안간힘을 쓴다. 친구들끼리 성적인 얘기를 하고 키득거리거나, 몰래 친구로부터 받은 브래지어를 착용하는 식이다. 하지만 '나'는 남자와 여자의 관계는 결코 평등하지 않음을 직감하고, 남자로부터 선택받은 것을 기뻐하기도 한다. 하지만 남자아이들은 여자아이들에게도 '자신들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자기 직관이 있는 여자아이들에게는 발언권이 없다. 용기 내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고 하더라도, 남자아이들에 의해 말은 싹둑 잘려나가기 마련이다. 또한 '똑똑한 여자'는 오히려 남녀관계에서 '결점'이 된다(오늘날에서도 이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내가 대학생이었을 때에도 연애 관계와 하등 상관이 없더라도 어떻게든 똑똑한 여자를 깎아내리려 애쓰고 맨스플레인을 하던 수많은 학우들이 있었다.(물론 그 설명의 내용은 전부 틀렸다). "어쪄면 똑똑하다는 것은, 그들에게 진짜 여자로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다." 다르게 생각해보면, 이는 얼마나 멋진 일인가!

"너무나 많은 가능성이 주는 불확실성 앞에서 눈물이 날 지경이다."

'나'가 고등학생이 되어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사회적 배경이 '나'를 옭아매기 시작한다. 주변에는 무슨 직업을 골라야 하는지, 어떻게 돈을 벌어야 하는지보다 어떠한 학업 과정을 태할 것인지를 태평하게 고르는 학생들이 가득하다. 나 역시 단순히 '"주변 학교 교복이 못생겨서" 공부를 시작해 외고에 갔고 대학에 왔다'는 어느 선배의 얘기를 듣고 큰 충격을 받은 경험이 있다. 그 학비를 생각하지 않고 교복 때문에(다른 이유도 분명 있었을 것이지만...) 특목고를 간다고? 나는 특목고를 갈 형편이 되지 못한다는 말을 듣고 중학생 때 공부를 놓아버린 경험이 있다(나는 고등학생 때 공부를 시작했고 어쩌면 그 때문에 배로 고생했다). 대학에서도 응급실에 간 날 내일 아르바이트를 가기 위해 입원해서 검사하자는 권유를 거절해 본 경험이 있고(강박적으로 책임감이 강해서이기도 했다), 압박감 때문에 보통 정량의 4-6배 정도의 편두통약을 매일 먹었다(다행히도 지금은 완쾌했다. 얼마나 기적과 같은 일인지!). 나 역시 '나'처럼 대학을 두려워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여성을 위한 공부와 남성을 위한 공부가 따로 있음을 알게 된다."

"선생은 '여자에게' 정말 멋진 직업이다, 열여덟 시간의 수업을 하고, 나머지 시간은 집에 있고, 자신의 아이들을 돌보기 좋은 많은 방학, 꿈, 요컨대 주변 사람들에게 전혀 고통을 주지 않는 직업, 자아를 '실현'하는 여성, 돈을 번다, 훌륭한 아내이자 훌륭한 엄마로 남는다, 그러니 누가 이 직업에 대해 불평하겠는가. "

여전히 대학에서도 남녀차별은 만연하다. 학부생 때 미투 운동으로 학교 전체가 매우 큰 충격을 받기도 했고,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사범대생이라면 당연히 남자가 유리하다는 말은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듣는다(정작 여학생들은 임금차별을 받지 않기 위해 임용고시를 본다). 심지어 여성 교수님에게도. 나는 키가 작아서 굽이 높은 힐을 신을 것을 제안받은 적이 있다. 또한, 취업사진을 찍을 때면(나는 그 당시 단발이었다) 머리를 어떻게든 올백으로 넘기고, 풀메이크업을 하고 속눈썹을 붙인 채로(전부 처음 해 봤다) 공장에서 찍어낸 듯한 블라우스와 자켓을 입고 포토샵으로 나를 전혀 다른 사람으로 만든 사진을 받기 위해 우리는 7만 원이 넘는 비용을 지불한다(다들 그렇게 하니까). 이때, 면접이 있으면 새벽에 나와서 이와 똑같은 헤어와 메이크업, 의상 대여를 받을 것을 업체에서 종용했던 기억이 난다. 그 비용을 대체 어떻게 지불하란 말인가? 지금은 조금씩 변화하는 추세지만, 여성에게는 안경을 끼는 것도 '단정하지 못하고 예쁘지 않다'는 이유로 지양하라는 사회적 압박이 있다. 그럴수록 나는 꿋꿋하게 내 안경을 쓰고 다녔다. 교대의 경우도 그렇다. 학생들을 상담하거나 동료 선생님들을 만나뵐 때면, 충분히 서울대를 갈 수 있는 성적임에도 불구하고 보수적인 집안 때문에 선택권이 없어서 별 수 없이 교대에 진학해야 하는 경우를 수도없이 본다. 드라마 <이번 생은 처음이라>에서 지호는 집 근처 교대에 등록하는 대신 아버지 몰래 서울대에 등록하고 야반도주를 하는 것을 선택한다.

"책을 다 읽은 독자들은 눈치챌 것이다. '얼어붙은 여자'의 이름은 끝까지 알 수 없다는 것을. 누구나 얼어붙은 여자가 될 수 있고, 얼어붙은 여자의 이야기는 모든 여자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아니 에르노는 1960-70년대에 청춘을 보냈다. 나는 2010년대 중반에 대학교에 입학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수많은 변화가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은 크게 다르지 않다. 많은 이들이 가부장적이고 여성혐오적인 기존의 제도에 반기를 들 수 있는 시기가 되었으나, 그 누구도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사회가 요구하는 틀"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지 못했다. 우리는 여전히 끊임없이 분노하고, 끊임없이 위험에 시달리며 살아간다. 아니 에르노의 말처럼, "그 특권들을 문제 삼고 후대에 넘겨주지 않는 일"을 하기 위해 분투할 의무가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존재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