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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에 지다 - 상
아사다 지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북하우스 / 2004년 12월
평점 :
여기, 볼품없이 초라한 말단 무사가 있다. 남자의 이름은 요시무라 간이치로. 주군을 버리고 영지를 탈번(脫藩)한 그는 떠돌이 사무라이 집단인 '신센구미'에 자신의 운명을 내맡긴다. 그가 고향을 등지고 칼을 잡은 것은 대의(大義)를 위해서도, 명예를 위해서도 아니다. 오직 사랑하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였다.
- 동료들은 나를 돈벌이 나온 낭사라고 숙덕였다. 수전노라 했다. 그래도 나는 내 행동이 무사도에 어긋나는 짓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왜냐, 무사의 의무란 민초의 삶을 편하게 해주는 것이야. 가장 먼저 돌봐야 할 민초는 내 아내와 내 자식이라고 생각한다. 공자님은 인을 말하고 의를 말하셨지만, 인간의 도리는 가장 먼저 처자식에 대한 인과 의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더냐. -
간이치로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무사와는 거리가 멀다. 모름지기 용맹한 무사라 함은, 대의를 위해 사랑하는 가족 정도는 능히 져버리는 인물이지 않던가. 신의(信義)이라는 두 글자을 가슴에 새기고 전장에서 용감하게 싸워 죽는 것, 그것은 무사에게 있어 최고의 영예이기도 했다. 하지만 간이치로에게 절실했던 것은 무엇보다 먹고 사는 문제였다. 악착같이 살아 남아서 사랑하는 가족을 부양하는 것, 그것이야 말로 무사로서의 진정한 도리라 여겼다. 이는 그 어떤 대의도 뛰어넘는 애틋한 아버지의 마음이며 보편적인 인간애이기도 하다. 아사다 지로는 영웅호걸들이 난무하는 무협의 세계에서 평범하기 그지 없는 누추한 하급 무사를 내세워 과연 무엇이 대의이고 영예로운 죽음인가를 되짚어 보게 한다. 비록 폼나는 무사들의 멋진 무용담은 아니지만 가족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남루한 하급무사의 이야기는 우리의 마음을 건드린다.
- 높은신 분들이 한결같이 말단 무사에게 죽어라 죽어라 다그치는 것은 스스로 죽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던가. 전장에서 죽는 것이랴말로 무사의 영예라니, 대체 어느 누가 그런 바보 같은 말을 시작했단 말인가. ... 살아남는 것이 무사라고, 살아서 있는 힘껏 충효를 다하고 다다미 위에서 곱게 죽는 것이 무사의 영예라고, 나는 그 아이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가르치고 싶었다. ... 공자님은 살라고 하셨다. 부처님은 살려고 태어나는 생명의 존귀함을 논하셨다. 그러한데 어찌하여 전장에서 죽는 것을 무사의 영예라고 할 수 있는가. -
죽음을 앞둔 간이치로의 담담한 독백과 그를 기억하는 인물들의 회상들로 이루어진 <칼에 지다>는 한 편의 감동적인 서사극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차곡차곡 쌓아올린 진솔한 감정의 결들은 마지막 대목에 이르러서 읽는 이의 마음을 울컥하게 만든다.
" 방바닥에 흩뿌려진 네 피는 아이들에게 준 유품이다. 참으로 장하게도 이만큼 너를 쥐어짰구나. 네 몸에는 이제 한 방울의 피도 남아 있지 않다. 알겠느냐, 간이치. 너는 부모가 준 신체발부를 헛되이 훼손한 것이 아니야. 한 줌의 머리털, 한 쪽의 살점, 한 방울의 피조차 헛되이 하지 않고 온전히 다 썼다. 너의 마지막 모습을 본 자라면 누구라도 잘못된 무사도를 깨달으리라. 무사도는 죽는 것이 아니고 사는 것이라는 진리를 알리라. 간이치, 그것이 바로 참된 무사도다. 난부 사무라이의 혼이다. "
남김없이 자신의 몫을 다한 말단 무사의 진실된 이야기는 우리의 아버지들을 떠올리게 한다. 만일 당신이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하루 하루 힘겹게 버텨내는 한 가족의 가장이라면, 그리고 그런 아버지를 둔 아들과 딸이라면, 이 책을 읽고 흐르는 눈물을 참지 못할 것이다. 보잘 것 없이 초라한 하급 무사의 처절한 죽음 앞에서 우리는 마땅히 뜨거운 눈물을 흘려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