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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에 지다 - 상
아사다 지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북하우스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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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볼품없이 초라한 말단 무사가 있다. 남자의 이름은 요시무라 간이치로. 주군을 버리고 영지를 탈번(脫藩)한 그는 떠돌이 사무라이 집단인 '신센구미'에 자신의 운명을 내맡긴다. 그가 고향을 등지고 칼을 잡은 것은 대의(大義)를 위해서도, 명예를 위해서도 아니다. 오직 사랑하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였다.

 

- 동료들은 나를 돈벌이 나온 낭사라고 숙덕였다. 수전노라 했다. 그래도 나는 내 행동이 무사도에 어긋나는 짓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왜냐, 무사의 의무란 민초의 삶을 편하게 해주는 것이야. 가장 먼저 돌봐야 할 민초는 내 아내와 내 자식이라고 생각한다. 공자님은 인을 말하고 의를 말하셨지만, 인간의 도리는 가장 먼저 처자식에 대한 인과 의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더냐. -

 

간이치로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무사와는 거리가 멀다. 모름지기 용맹한 무사라 함은, 대의를 위해 사랑하는 가족 정도는 능히 져버리는 인물이지 않던가. 신의(信義)이라는 두 글자을 가슴에 새기고 전장에서 용감하게 싸워 죽는 것, 그것은 무사에게 있어 최고의 영예이기도 했다. 하지만 간이치로에게 절실했던 것은 무엇보다 먹고 사는 문제였다. 악착같이 살아 남아서 사랑하는 가족을 부양하는 것, 그것이야 말로 무사로서의 진정한 도리라 여겼다. 이는 그 어떤 대의도 뛰어넘는 애틋한 아버지의 마음이며 보편적인 인간애이기도 하다. 아사다 지로는 영웅호걸들이 난무하는 무협의 세계에서 평범하기 그지 없는 누추한 하급 무사를 내세워 과연 무엇이 대의이고 영예로운 죽음인가를 되짚어 보게 한다. 비록 폼나는 무사들의 멋진 무용담은 아니지만 가족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남루한 하급무사의 이야기는 우리의 마음을 건드린다.

 

- 높은신 분들이 한결같이 말단 무사에게 죽어라 죽어라 다그치는 것은 스스로 죽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던가. 전장에서 죽는 것이랴말로 무사의 영예라니, 대체 어느 누가 그런 바보 같은 말을 시작했단 말인가. ... 살아남는 것이 무사라고, 살아서 있는 힘껏 충효를 다하고 다다미 위에서 곱게 죽는 것이 무사의 영예라고, 나는 그 아이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가르치고 싶었다. ... 공자님은 살라고 하셨다. 부처님은 살려고 태어나는 생명의 존귀함을 논하셨다. 그러한데 어찌하여 전장에서 죽는 것을 무사의 영예라고 할 수 있는가. -

죽음을 앞둔 간이치로의 담담한 독백과 그를 기억하는 인물들의 회상들로 이루어진 <칼에 지다>는 한 편의 감동적인 서사극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차곡차곡 쌓아올린 진솔한 감정의 결들은 마지막 대목에 이르러서 읽는 이의 마음을 울컥하게 만든다.

 

" 방바닥에 흩뿌려진 네 피는 아이들에게 준 유품이다. 참으로 장하게도 이만큼 너를 쥐어짰구나. 네 몸에는 이제 한 방울의 피도 남아 있지 않다. 알겠느냐, 간이치. 너는 부모가 준 신체발부를 헛되이 훼손한 것이 아니야. 한 줌의 머리털, 한 쪽의 살점, 한 방울의 피조차 헛되이 하지 않고 온전히 다 썼다. 너의 마지막 모습을 본 자라면 누구라도 잘못된 무사도를 깨달으리라. 무사도는 죽는 것이 아니고 사는 것이라는 진리를 알리라. 간이치, 그것이 바로 참된 무사도다. 난부 사무라이의 혼이다. "

 

남김없이 자신의 몫을 다한 말단 무사의 진실된 이야기는 우리의 아버지들을 떠올리게 한다. 만일 당신이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하루 하루 힘겹게 버텨내는 한 가족의 가장이라면, 그리고 그런 아버지를 둔 아들과 딸이라면, 이 책을 읽고 흐르는 눈물을 참지 못할 것이다. 보잘 것 없이 초라한 하급 무사의 처절한 죽음 앞에서 우리는 마땅히 뜨거운 눈물을 흘려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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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태엽 오렌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2
앤소니 버제스 지음, 박시영 옮김 / 민음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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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리 큐브릭의 동명의 영화로 유명한 앤서니 버제스의 <시계태엽 오렌지>는 지금 다시 읽어보아도 여전히 파격적이다. 한국에서 이런 소설을 출판한다면 십중팔구  'XX놈' 으로 손가락질 받는 동시에 해당 도서는 '불온도서'로 낙인찍힐 게 뻔하다. 이와 같은 문제작을 한국어로 된 글로 접하려면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까?   

3부로 구성되어 있는 <시계태엽 오렌지>는 단락과 단락의 구분이 명확하고 말하고자 주제도 분명하다. 1부에서는 불량소년 알렉스가 얼마나 극악무도한 문제아인지 상세히 기술하고 있고, 2부는 감옥에 수감된 알렉스가 강제교화 프로그램인 '루도비코 요법'에 의해 교화되는 과정을 다룬다. 3부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나쁜 짓을 하지 못하도록 개조된 알렉스가 다시 본연(?)의 모습을 되찾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이 소설은 다소 불편한, 하지만 매우 중요한 질문을 독자들에게 던진다. 윤리적으로 그릇된 행동을 제어하기 위해 개인의 자유의지를 강제적으로 거세하는 것이 과연 정당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라는 매우 의미심장한 질문을...

"신은 선 그 자체와 선을 선택하는 것 중에서 어떤 것을 원하시는 걸까? 어떤 의미에서는 악을 선택하는 사람이 강요된 선을 받아들여야 하는 사람보다는 낫지 않을까?"  

인간 스스로가 항상 윤리적으로 옳고 바른 일만 행한다면은 얼마나 좋겠냐만은, 사람 사는 세상이 어디 그러기야 하겠는가. 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의 사고체계를 강압적으로 개조하여 선한 행동을 하게 만든다면, 그래서 결과적으로 나쁜 짓을 못하도록 한다면, 과연 그 사람의 행위가 온전히 선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러한 방식이 과연 옳고 좋은 방식일까? <시계태엽 오렌지>는 실험용 쥐가 되어버린 알렉스을 통해 강압적인 교화가 오히려 더 폭력적이고 비인간적일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나, 나, 나. 도대체 나는 어쩌라고요? 난 여기서 뭐란 말이야? 내가 무슨 짐승이나 개란 말이야? 내가 무슨 태엽 달린 오렌지란 말이야?" 

착한 일만 하도록 개조된 꼭두각시 인형 알렉스. 본인 스스로 판단할 수 없는 기계장치가 되어버린 알렉스는 정말 제대로 교화된 것일까? 차라리 '시계장치 달린 오렌지' 보다는 '나사 풀린 알렉스'가 더 낫지 않을까? 전자는 윤리적인가, 도덕적인가 하는 물음을 제기하는 반면, 후자는 과연 이것을 인간이라 말할 수 있을까 하는 훨씬 더 심오하고도 근원적인 문제를 야기한다. 굳이 선택을 해야 한다면 '불량스러운 상태 그대로의 알렉스'여야 하지 않을까. 그게 그나마 '인간적'일 테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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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덴바덴에서의 여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3
레오니드 치프킨 지음, 이장욱 옮김 / 민음사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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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다소 생소한 러시아 작가 '레오니드 치프킨'은 <바덴바덴에서의 여름>이라는 책 한 권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이 책은 작가가 죽은 지 20년이 지나서야 겨우 출판이 되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무명작가가 남긴 단 한 권의 책. 만일 당신이 이 세상에 단 한 권의 책을 남겨야 한다면 무슨 이야기를 택할 것인가? 치프킨은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를 텍스트로 삼아 위대한 예술가가 아닌 인간적인 모습에서의 도스토예프스키를 그려낸다. 픽션과 다큐를 넘나드는 메타 픽션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이 소설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삶을 단순히 연대기적으로 나열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대담함을 선보인다. 극중 화자인 현재의 '나'와 과거의 '도스토예프스키'를 오고 가는 내면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위대한 예술가가 아닌 인간 도스토예프스키를 접할 수 있다. 그리하여 책장을 넘기는 내내 한 인간의 남루한 삶 속에서 그가 남긴 위대한 작품들이 시종일관 환기되는 매우 특별한 정서적 경험을 공유하게 된다.

이 소설은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애정 없이는 온전히 교감할 수 없는 단점을 지니고 있다. (이 책과 정서적 교감을 하기 위해서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저서를 탐독해야 하는 수고가 필요하다.) 그런 이유로 이 책을 접한 독자는 극단적인 반응을 보일지도 모른다. 도스토예프스키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단숨에 이 책에 빠져들겠지만, 이야기체 소설로 접근하는 일반 독자에게는 매우 힘든 책읽기가 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단언하건데, 한 인물의 내면을 훌륭하게 펼쳐 보이는 이 책은 다른 어떤 소설과도 비교하기 힘든 특별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이 아름다운 여정에 잠시 몸과 마음을 맡기다 보면 형언할 수 없는 내밀한 풍경들이 아름답게 펼쳐지는 매우 진귀하고도 소중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바덴바덴에서의 여름>은 러시아 문학의 저 모든 뛰어난 주제들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이 주제들은 독창적이면서도 속도감 있는 언어에 의해 통합된다. 그것은 일인칭과 삼인칭 사이를 대담하면서도 매혹적으로 왕복한다. 행동과 기억과 회상들은 일인칭 화자의 현재와 삼인칭으로 묘사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과거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이것은 도스토예프스키를 순례하는 화자 치프킨의 단일한 현재로 환원되는 것도 아니고, 1867년에서 1881년의 죽음에 이르는 도스토예프스키의 과거로 통합되는 것도 아니다. 저 과거의 도스토예프스키는 끊임없이 밀려드는 더 오랜 과거의 기억과 열정에 시달린다. 현재의 화자는 바로 이 기억과 열정을 호출하는 것이다. … 기나긴 문장과 단락들을 통과하면서 느낌들은 강물처럼 하나로 모이고, 도스토예프스키의 삶과 치프킨의 삶이라는 두 편의 서사는 겹쳐진다.

만일 당신이 러시아 문학의 깊이와 매혹을 경험하기 위해 한 권의 책을 택하려 한다면, 바로 이 책을 읽기를 권한다. 만일 당신이 영혼을 단련하고 당신의 감각과 호흡에 더 넓은 지평을 제공하고 싶다면, 바로 이 책을 읽어야 한다. 나는 이 책을 지난 한 세기의 소설과 범소설(para-fiction)들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뛰어나며 창조적인 성취를 이룬 작품에 포함시키고 싶다. 

- 수잔 손택의 서문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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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먼 스테인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
필립 로스 지음, 박범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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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수이자 이십년 넘게 학장을 지내온 콜먼은 수업시간에 출석하지 않는 학생을 가리켜 'spook'(유령, 비속어로 검둥이) 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는 이유로 억울하게 해임을 당한다. 공교롭게도 결석한 학생이 흑인이었기 때문이다. 나름 성공한 인생이었던 콜먼의 삶은 일순간 나락으로 떨어지고, 엎친 데 덥친 격으로 인생의 반려자인 아내마저 세상을 떠난다. 그런 콜먼에게 대학 청소부 서른네살의 포니아 팔리가 희망처럼 등장한다. 콜먼은 자신과 너무나 대조적인 포니아에게 매력을 느끼고 사랑에 빠지지만, 둘의 진지한 관계도 이상한 소문으로 퍼져 나간다. 어느날, 콜먼에게 '모두가 알고 있다' 라는 문구가 적힌 편지가 도착하는데...

흑인비화 발언으로 파면을 당한 콜먼은 아이러니하게도, 백인행세를 하며 살아온 흑인이다. 흑인혈통을 감추기 위해 자신의 가족까지도 철저하게 외면했던 콜먼에게 어느 날 인종차별주의라는 황당한 꼬리표가 붙은 셈이다. 반면 포니아는 자식 둘을 잃은 이혼녀에,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문맹에다, 경제적으로도 궁핍한 말그대로 밑바닥 인생에 가까운 인물이다. 하지만 포니아는 콜먼과 달리 오점투성이의 자신의 과거에 전혀 거리낌이 없이 당당하다. 그런 포니아에게 일흔한 살의 콜먼은 사랑(섹스로 점철된 육체적인 사랑일지라도)을 느끼고 인생의 새로운 행복을 만끽한다. 하지만 그들을 둘러싼 주위의 시선은 따갑기만 하다. 필립 로스는 콜먼과 포니아를 둘러싼 주변 인물들이 얼마나 그릇된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는지, 얼마나 그들에게 무지했는지를 한 편의 블랙코미디 드라마로 보여준다.

   
  모두가 알고 있다...... 어떤 일이 일어날 때는 어떻게 해서 그 일이 그렇게 일어나는 걸까? 인간사를 규정하는 사건들, 불확실성들, 재난들, 부조화, 충격적인 불규직성의 연속이 보여주는 난맥상 아래에는 어떤 것이 존재하는 걸까? 그건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 "모두가 알고 있다"는 말은 상투어를 인용한 정당화이자 경험을 진부한 것으로 만들어버리기의 시작이며, 그토록 견디기 어려운 상투어를 말로 표현하는 것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것은 진중한 척하기와 권위의식이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상투적이지 않은 방식으로는, 무엇에 대해서도 전혀 알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지. 당신은 아무것도 알 수 없어. 당신이 아는 것은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이지. 의도? 동기? 결과? 의미? 우리가 모르는 것들 모두가 놀라운 것이지.  
   

흔히 우리가 누군가에 대해서 '알고 있다'라고 말할 때, 매우 의미심장한 질문이 스스로에게 되돌아 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한다. 무엇을, 얼마나,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한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한 개인의 역사를 이해한다는 것과 같다. 그 사람의 인생이 아무리 보잘 것 없이 초라할지라도 누구도 쉽게 이해할 수도, 판단할 수도 없다. 하지만 우리는 표피적인 단면들을 통해 타인을 이해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기를 원한다. 그 앎에 대한 성급한 욕망이 잘못된 편견과 오해를 낳는다. 그리고 편견과 오해들은 어김없이 사회적인 통념으로 굳어진다. 필립 로스는 콜먼의 아이러니한 삶을 통해 위선과 편견으로 가득찬 미국사회를 신랄하게 조롱한다.  

   
 

하나의 진실이 있으면 또다른 진실이 있게 마련이다. 이 세상은 사람들이 자신을 이해한다고 혹은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이 알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로 가득하긴 해도, 사실, 우리에게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은 바닥을 알 수 없는 심연과도 같다. 우리에 대한 진실에는 끝이 없다. 그 점은 우리에 대한 거짓에서도 마찬가지다. (중략) 

이제 나는 모든 것을 알게 되었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고, 어니스틴으로부터 들어 알게 된 것들이 콜먼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을 하나로 통합해주는 대신 그를 그저 미지의, 그리고 일관성이라고는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콜먼과 포니아를 중심으로 여러 인물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휴먼 스테인>은 이 인물에서 저 인물로 옮겨갈 때마다 묘사가 장황하게 이어지고 대사는 속사포처럼 쉴새 없이 쏟아진다. 문장과 문장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면서도 유기적으로 엮어지고 이야기는 산발적으로 퍼졌다가 응집되기를 반복한다. 체스판에 놓인 기물들을 움직이듯 등장인물을 맘껏 주무르며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솜씨와 미국사회를 냉철하게 바라보고 정확하게 진단해내는 작가의 예리한 통찰력에서 엄청난 필력과 내공이 느껴진다. 가히 '미국 현대작가의 거장'이라는 수식어가 과장이 아닌 듯. 국내에 잘 알려진 <에브리맨> 보다는 필립 로스의 진가를 확인하기에는 이 소설이 제격이지 않을까 싶다. 아울러 그의 대표작 <미국의 목가>도 번역되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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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뚜기의 하루
너새네이얼 웨스트 지음, 이종인 옮김 / 마음산책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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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줄의 이야기로 요약할 수 없는 소설을 만날 때가 있다. 짧은 이야기로 축약하기에는 작가의 세계관이 방대하거나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이 독특해서 쉽게 줄거리를 옮길 수 없는 소설이 있다. 이를테면 이야기로 환원되기를 거부하는 소설이 있는 것이다. 그런 소설은 어김없이, 우리에게 새로운 독서를 요구한다.  

너새네이얼 웨스트의 [메뚜기의 하루]는 어떤 책인가? 이 책은 방대한 이야기를 담은 소설도, 복잡한 구조로 이루어진 소설도 아니며 그렇다고 형식적으로 난해한 소설도 아니다. 등장인물은 많지 않으며 이야기는 의외로 단순하고 분량도 많지 않아 (300페이지가 채 안된다) 쉽게 술술 읽힌다. 하지만 마지막 책장을 넘기고 나서도 소설의 전체윤곽이 쉽게 그려지지 않는다.  


화가인 토머는 헐리우드의 영화사에 무대와 의상을 담당하는 디자이너로 고용되어 일을 하고 있다. 그는 같은 주택에 살고 있는 페이 그리너를 좋아한다. 그녀는 열일곱살에 매력적인 여성으로 헐리우드에서 배우가 되기를 꿈꾼다. 페리에겐 토머 말고도 자신을 좋아하는 남자가 더 있다. 그 중 한 명인 호머는 아버지가 남긴 유산으로 금전적인 여유가 있는 중년남성이다. 하지만 그는 삶에 대한 뚜렷한 목표도, 원하는 것도 없이 사는 무기력한 인물이다. 그와 대조적으로 얼은 카우보이 출신에 혈기 왕성한 잘 생긴 청년이다. 하지만 그는 땡전 한푼 없는 무일푼이다. 페리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호머와 동거하면서 젊고 잘 생긴 얼과 놀아다니고 토머와는 편한 친구로 지내는, 매우 이상한 관계를 유지한다. 어느 날, 호머의 집에서 파티가 벌이지고 파티는 난장판이 되고 만다. 다음날, 그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진다.   


이렇게 정리해도 이게 무슨 이야긴가 싶다. 당혹스러운 것은 소설의 마지막 대목이다. 이야기 진행과 전혀 상관없을 법한 영화 시사회 장면으로 소설은 끝을 맺는데, 배우을 보기 위해 벌떼처럼 몰려든 군중들에 대한 장황한 묘사는 이상하다 못해 기괴하게 느껴진다. 도대체 작가는 무슨 얘기를 하려는 것일까? 곰곰이 생각하다 덮어둔 책장을 다시 찬찬히 들춰보면, 이 소설은 '이야기'가 아니라 '이미지'를 쫓아 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말하자면 이 한 권의 책은 한 폭의 그림에 대한 비유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주인공 토머가 구상하고 있는 '불타는 로스엔젤레스'의 그림인 것이다. 너새네이얼 웨스트는 '이야기'를 들려 주는 방식이 아니라 '이미지'를 보여주는 방식을 통해 극중 인물들이 처한 상황을 한 폭의 기괴한 풍경화로 묘사하고 있다.  

   
  그들은 책상, 카운터, 들판, 따분한 기계 등에서 평생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을 해왔다. 그리하여 푼푼이 돈을 모아 충분히 저축했을 때 그들이 누릴 수 있는 여가를 꿈꾸어왔다. 마침내 그 날이 왔다. 그들은 10달러 혹은 15달러의 주급을 꺼내어 쓸 수 있다. 이럴 때 햇빛과 오렌지의 땅인 캘리포니아 말고 어디로 가겠는가? (중략) 캘리포니아의 태양은 농담에 지니지 않았다. 오렌지는 그들의 피곤한 혓바닥에 자극을 주지 못했다. 그들의 느슨한 몸과 마음을 팽팽하게 조여줄 수 있는 화끈한 것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들은 사기를 당했고 배신을 당했다. 그들은 말짱 헛것을 위해 노예처럼 일하고 뼈 빠지게 저축을 했던 것이다.  
 

페이와 그 주위를 맴도는 남자들, 새로운 삶을 꿈꾸며 캘리포니아로 떠나는 사람들. 스타를 보기 위해 극장 앞으로 몰려드는 군중들. 그들 모두는 황홀한 불빛에 현혹되어 자멸하는 불나방과 같은 존재들이다. 주인공 토머는 광기에 휩싸인 군중들 속에서 그들 속으로 빨려 들어가지 않으려 발버둥을 친다. 그 무자비한 광경 앞에서 토머는 자신이 구상한  '불타는 로스엔젤레스'의 그림을 머릿속으로 완성한다.

 
 

성한 다리로 서 있으면서 쇠난간에 꼭 매달려 있는 동안, 그는 그 거대한 캔버스를 채운 거친 목탄 스케치를 분명히 볼 수 있었다. 그림의 틀과 평행을 이루는 맨 위쪽에 그는 불타는 도시를 그렸다. 이집트에서 케이프 코드 식민지의 스티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건축적 스타일을 자랑하는 화염이었다. 그림 한가운데에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감겨드는 기다란 언덕의 거리가 있고 전격 중앙에는 야구 방망이와 햇불을 든 군중들이 몰려갔다. 그 군중들의 얼굴로는 그가 무수히 스케치한, 죽기 위해 캘리포니아에 온 사람들의 얼굴이 사용될 것이다.

 
 

잔인한 투계(鬪鷄) 장면, 페이와 그녀를 둘러싼 남자들의 광란의 파티, 유명배우를 보기 위해 몰려드는 광폭한 군중들, 그렇게 이미지들은 유기적으로 맞물리고 점층적으로 확대되어 마침내 하나의 그림을 이룬다. 이 기괴한 풍경화는 꿈의 공장-헐리우드에 대한 작가가 느낀 환멸인 동시에 무기력한 삶에 지쳐 뒤틀린 욕망에 사로잡힌 미국인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기도 하다.  

'20세기 위대한 영문 소설 100선'의 리스트를 훑어보다 다소 생소한 작가의 이름을 발견하여 무심코 구입한 책이었지만, 매우 강한 인상을 심어준 작품이었다. 얼핏 보면 매우 쉽게 쓰여진 소설처럼 보이지만, 간결한 문체와 이야기로 말하고자 하는 바를 비유적으로 그려내는 방식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무릇 좋은 책이란 재독(再讀)을 요구하기 마련인데, 너새네이얼 웨스트의 [메뚜기의 하루]는 여러 번 읽어야 그 진가를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소설임에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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