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태엽 오렌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2
앤소니 버제스 지음, 박시영 옮김 / 민음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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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리 큐브릭의 동명의 영화로 유명한 앤서니 버제스의 <시계태엽 오렌지>는 지금 다시 읽어보아도 여전히 파격적이다. 한국에서 이런 소설을 출판한다면 십중팔구  'XX놈' 으로 손가락질 받는 동시에 해당 도서는 '불온도서'로 낙인찍힐 게 뻔하다. 이와 같은 문제작을 한국어로 된 글로 접하려면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까?   

3부로 구성되어 있는 <시계태엽 오렌지>는 단락과 단락의 구분이 명확하고 말하고자 주제도 분명하다. 1부에서는 불량소년 알렉스가 얼마나 극악무도한 문제아인지 상세히 기술하고 있고, 2부는 감옥에 수감된 알렉스가 강제교화 프로그램인 '루도비코 요법'에 의해 교화되는 과정을 다룬다. 3부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나쁜 짓을 하지 못하도록 개조된 알렉스가 다시 본연(?)의 모습을 되찾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이 소설은 다소 불편한, 하지만 매우 중요한 질문을 독자들에게 던진다. 윤리적으로 그릇된 행동을 제어하기 위해 개인의 자유의지를 강제적으로 거세하는 것이 과연 정당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라는 매우 의미심장한 질문을...

"신은 선 그 자체와 선을 선택하는 것 중에서 어떤 것을 원하시는 걸까? 어떤 의미에서는 악을 선택하는 사람이 강요된 선을 받아들여야 하는 사람보다는 낫지 않을까?"  

인간 스스로가 항상 윤리적으로 옳고 바른 일만 행한다면은 얼마나 좋겠냐만은, 사람 사는 세상이 어디 그러기야 하겠는가. 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의 사고체계를 강압적으로 개조하여 선한 행동을 하게 만든다면, 그래서 결과적으로 나쁜 짓을 못하도록 한다면, 과연 그 사람의 행위가 온전히 선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러한 방식이 과연 옳고 좋은 방식일까? <시계태엽 오렌지>는 실험용 쥐가 되어버린 알렉스을 통해 강압적인 교화가 오히려 더 폭력적이고 비인간적일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나, 나, 나. 도대체 나는 어쩌라고요? 난 여기서 뭐란 말이야? 내가 무슨 짐승이나 개란 말이야? 내가 무슨 태엽 달린 오렌지란 말이야?" 

착한 일만 하도록 개조된 꼭두각시 인형 알렉스. 본인 스스로 판단할 수 없는 기계장치가 되어버린 알렉스는 정말 제대로 교화된 것일까? 차라리 '시계장치 달린 오렌지' 보다는 '나사 풀린 알렉스'가 더 낫지 않을까? 전자는 윤리적인가, 도덕적인가 하는 물음을 제기하는 반면, 후자는 과연 이것을 인간이라 말할 수 있을까 하는 훨씬 더 심오하고도 근원적인 문제를 야기한다. 굳이 선택을 해야 한다면 '불량스러운 상태 그대로의 알렉스'여야 하지 않을까. 그게 그나마 '인간적'일 테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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