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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네트 ㅣ 민음사 세계시인선 33
윌리엄 세익스피어 지음, 정종화 옮김 / 민음사 / 2000년 2월
평점 :
품절
서정시, 그 중에서도 특히, 사랑을 노래하는 연애시는 아무리 잘 씌여진다 해도 시간이 흐르면 퇴색되기 마련이어서 오랜 생명력을 지니기가 힘들다. 사랑의 아름다움이야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겠지만 그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시어들은 냉혹한 시간의 흐름을 견디지 못하고 낡은 책장 속으로 흔적없이 사라질 뿐이다. 진실한 사랑의 고백도, 숭고한 사랑의 세레나데도 파멸의 시간과 쇠퇴를 겨루지 못하고 그 아름다움을 잃거나 유치한 유행가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미학(美學)의 역사는 늘 언제나 변함없이, 새로운 것이 낡은 것을 구닥다리도 밀어내는 투쟁의 역사이며 그런 의미에서 시작(詩作)은 옛 시인의 언어를 동시대의 언어로 덧씌우는 작업인 동시에 사멸의 시간을 버티기 위한 시인의 힘겨운 싸움이기도 하다.
유명한 극작가 셰익스피어가 남긴 유일한 시집 <소네트>. 하지만 제 아무리 셰익스피어라 할지라도 냉혹한 세월의 흐름을 피해 갈 수는 없다. 사랑의 아름다움과 영원불멸함을 노래한 시들이라지만, 오늘날 독자에게는 다소 진부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셰익스피어여, 용서하시길...)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셰익스피어는 자신의 시가 후손들의 눈 속에 살아 남아서 영원불멸할 수 있기를 갈망한다. "그대가 영원한 시 속에 뿌리박는 날, 사림이 숨을 쉬고 눈으로 보고 이 글이 살아서 그대에게 생명을 주기를", 그리하여 "시간의 잔인한 손에도 불구하고 그대의 가치를 칭찬하는 내 시는 미래의 시간에도 남을 것이니" 하지만 무자비한 시간의 낫에 견딜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누구보다 시인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때론 절규하곤 한다. "너 늙은 시간아! 너의 최악을 다하라. 너의 몹쓸 짓에도 불구하고 내 사랑은 나의 시 속에서 영원히 젊어 있으리니."
<19>
게걸스런 시간아, 사자의 발톱을 무디게 갈고
대지가 그 귀여운 후손을 삼키게 하고
사나운 호랑이의 턱에서 날카로운 이빨을 뽑아라.
오래 산 피닉스를 불태우고
급히 가면서 기쁘고 슬픈 계절도 만들라.
넓은 세상과, 퇴색하는 모든 감미로운 것에
걸음이 쨉싼 시간은 무엇이든지 다하라.
그러나 꼭 하나 흉악무도한 범죄를 금하노니
아, 내 사랑의 아름다운 이마에 너의 시간을 새기지 말며,
너의 기괴한 펜으로 줄을 긋지 마라.
후세에 미의 전형을 보이기 위해
너의 길에서 벗어나게 하라.
하지만 너 늙은 시간아, 너의 최악을 다하라.
너의 몸쓸 짓에도 불구하고
내 사랑은 나의 시 속에서 영원히 젋어 있으리니.
<소네트>가 오늘날에도 널리 읽히는 이유는 아마도 자신의 시가 영원불멸하기를 바라는 시인의 염원이 너무나 절실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무심한 세월 앞에서 쇠퇴하고 사라질테지만, 오직 그대를 노래한 이 시들만이 "그 훗날 그대의 후손이 살아남아서 그 자손과 내 시 속에서 그대는 이중으로 영생하기를" 시인은 바라고 또 바란다. 그 절절한 기도가 후손들에게 전해져 내려온 것일까. 비록 그의 시는 새로운 기교나 형식을 찾아볼 수 없어 때론 진부하게 여겨지기도 하지만, 시인의 진실한 마음은 시간을 뛰어넘어 우리들 마음을 건들린다.
<76>
내 시엔 어째서 새로운 장식이 부족한지요?
어째서 변형이나 변화와 거리가 먼 것인가요?
새로운 방법이나 이상한 복합어에
유행을 따라 곁눈을 팔지 않는가요?
어째서 항상 같은 식으로만 써서
창조력을 잘 알려진 한 가지 장식 속에만 간직해서
한 자 한 자가 내 이름을 말하고
단어의 출전과 출처를 노출하는지요?
오, 감미로운 사랑이여, 나는 항상 그대에 관해 쓰고
그대와 사랑만이 내 주제임을 잊지 마세요.
때문에 내 최대 걸작은 낡은 단어를 새로 옷 입히고
이미 소모된 것을 다시 소모하는 것이지요.
태양이 매일 새롭고 낡아지듯
내 사랑은 이미 쓴 것을 다시 쓰는 것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