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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먼 스테인 1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
필립 로스 지음, 박범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평점 :
대학교수이자 이십년 넘게 학장을 지내온 콜먼은 수업시간에 출석하지 않는 학생을 가리켜 'spook'(유령, 비속어로 검둥이) 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는 이유로 억울하게 해임을 당한다. 공교롭게도 결석한 학생이 흑인이었기 때문이다. 나름 성공한 인생이었던 콜먼의 삶은 일순간 나락으로 떨어지고, 엎친 데 덥친 격으로 인생의 반려자인 아내마저 세상을 떠난다. 그런 콜먼에게 대학 청소부 서른네살의 포니아 팔리가 희망처럼 등장한다. 콜먼은 자신과 너무나 대조적인 포니아에게 매력을 느끼고 사랑에 빠지지만, 둘의 진지한 관계도 이상한 소문으로 퍼져 나간다. 어느날, 콜먼에게 '모두가 알고 있다' 라는 문구가 적힌 편지가 도착하는데...
흑인비화 발언으로 파면을 당한 콜먼은 아이러니하게도, 백인행세를 하며 살아온 흑인이다. 흑인혈통을 감추기 위해 자신의 가족까지도 철저하게 외면했던 콜먼에게 어느 날 인종차별주의라는 황당한 꼬리표가 붙은 셈이다. 반면 포니아는 자식 둘을 잃은 이혼녀에,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문맹에다, 경제적으로도 궁핍한 말그대로 밑바닥 인생에 가까운 인물이다. 하지만 포니아는 콜먼과 달리 오점투성이의 자신의 과거에 전혀 거리낌이 없이 당당하다. 그런 포니아에게 일흔한 살의 콜먼은 사랑(섹스로 점철된 육체적인 사랑일지라도)을 느끼고 인생의 새로운 행복을 만끽한다. 하지만 그들을 둘러싼 주위의 시선은 따갑기만 하다. 필립 로스는 콜먼과 포니아를 둘러싼 주변 인물들이 얼마나 그릇된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는지, 얼마나 그들에게 무지했는지를 한 편의 블랙코미디 드라마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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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알고 있다...... 어떤 일이 일어날 때는 어떻게 해서 그 일이 그렇게 일어나는 걸까? 인간사를 규정하는 사건들, 불확실성들, 재난들, 부조화, 충격적인 불규직성의 연속이 보여주는 난맥상 아래에는 어떤 것이 존재하는 걸까? 그건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 "모두가 알고 있다"는 말은 상투어를 인용한 정당화이자 경험을 진부한 것으로 만들어버리기의 시작이며, 그토록 견디기 어려운 상투어를 말로 표현하는 것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것은 진중한 척하기와 권위의식이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상투적이지 않은 방식으로는, 무엇에 대해서도 전혀 알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지. 당신은 아무것도 알 수 없어. 당신이 아는 것은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이지. 의도? 동기? 결과? 의미? 우리가 모르는 것들 모두가 놀라운 것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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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우리가 누군가에 대해서 '알고 있다'라고 말할 때, 매우 의미심장한 질문이 스스로에게 되돌아 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한다. 무엇을, 얼마나,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한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한 개인의 역사를 이해한다는 것과 같다. 그 사람의 인생이 아무리 보잘 것 없이 초라할지라도 누구도 쉽게 이해할 수도, 판단할 수도 없다. 하지만 우리는 표피적인 단면들을 통해 타인을 이해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기를 원한다. 그 앎에 대한 성급한 욕망이 잘못된 편견과 오해를 낳는다. 그리고 편견과 오해들은 어김없이 사회적인 통념으로 굳어진다. 필립 로스는 콜먼의 아이러니한 삶을 통해 위선과 편견으로 가득찬 미국사회를 신랄하게 조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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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진실이 있으면 또다른 진실이 있게 마련이다. 이 세상은 사람들이 자신을 이해한다고 혹은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이 알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로 가득하긴 해도, 사실, 우리에게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은 바닥을 알 수 없는 심연과도 같다. 우리에 대한 진실에는 끝이 없다. 그 점은 우리에 대한 거짓에서도 마찬가지다. (중략)
이제 나는 모든 것을 알게 되었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고, 어니스틴으로부터 들어 알게 된 것들이 콜먼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을 하나로 통합해주는 대신 그를 그저 미지의, 그리고 일관성이라고는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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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먼과 포니아를 중심으로 여러 인물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휴먼 스테인>은 이 인물에서 저 인물로 옮겨갈 때마다 묘사가 장황하게 이어지고 대사는 속사포처럼 쉴새 없이 쏟아진다. 문장과 문장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면서도 유기적으로 엮어지고 이야기는 산발적으로 퍼졌다가 응집되기를 반복한다. 체스판에 놓인 기물들을 움직이듯 등장인물을 맘껏 주무르며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솜씨와 미국사회를 냉철하게 바라보고 정확하게 진단해내는 작가의 예리한 통찰력에서 엄청난 필력과 내공이 느껴진다. 가히 '미국 현대작가의 거장'이라는 수식어가 과장이 아닌 듯. 국내에 잘 알려진 <에브리맨> 보다는 필립 로스의 진가를 확인하기에는 이 소설이 제격이지 않을까 싶다. 아울러 그의 대표작 <미국의 목가>도 번역되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