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를 거치며 소련은 몰락해가기 시작했다. 특히 냉전의 절정에 따른 과도한 군비 유지, 아프가니스탄 군사 개입으로 인한 비용 지출, 경제 정책 실패, 체르노빌 사고까지 겹치며 한계에 다다르게 되었다. 이 와중에 공산당 서기장으로 취임한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 정책을 통한 개혁을 실시했지만 이미 망해가는 체제를 살려내기엔 역부족이었다.


결국 소련의 몰락으로 소련 내 구성국들의 분리독립 움직임이 생겨났는데 공산당 보수파들은 고르바초프가 분열을 조장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보리스 푸고와 겐나디 야나예프, 올레그 바클라노프를 비롯한 보수파들은 쿠데타를 일으켰는데 보리스 옐친이 이끄는 시민들의 저지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고르바초프는 실각했으며 주도권은 보리스 옐친에게 넘어갔고 얼마 후 소련은 해체되고 러시아 연방이 수립된다.


한편 비슷한 시기에 체첸에서는 소련 공산당 체첸-잉구슈 자치주 서기에 체첸인 출신 도쿠 자브가예프가 선출되었다. 자브가예프 서기는 자유주의적 성향을 갖고 있던 자들 뿐만 아니라 심지어 반정부운동으로 탄압받았었던 셰파 가타예프까지도 기용하고 자치공화국을 수립하며 당시 시대의 흐름을 따르는 모습을 보였지만 동시에 연방 중앙정부의 방침에는 충실한 모습을 볼 때 그는 개혁가이면서 한계도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어쨌든 변화해가는 체첸의 흐름 속에서 급진적인 민족주의자들을 중심으로 바이나흐 민주당이 창당된다. 이들은 단순히 자치권 확대를 넘어 소련(이후 러시아 연방) 벗어나 주권을 가진 독립국가가 되는 것을 원했는데 아직 이때까지만 해도 체첸 독립세력 내에서 이슬람 원리주의적 성향은 크게 드러나지 않았었다고 한다. 얼마 후 바이나흐 민주당은 제1차 체첸 민족대회를 열며 대놓고 독립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고 대회의 집행위원장으로 소련 공군 소장 출신인 조하르 두다예프를 내세웠다.


이에 당황한 자브가예프 정권은 국가 주권에 관한 선언을 발표하며 수습에 나섰지만 내용상 소련으로부터의 완전 독립에는 그닥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래서 두다예프를 중심으로 한 집행위원회는 자브가예프를 압박해갔고 곧 이어 집행위원회는 체첸 민족회의로 바뀌게 된다. 민족회의의 지도부는 상당수가 강경파 였었고 당연히 내부적으로는 온건파와의 충돌도 꽤나 있었다. 그런 와중에 공산당 보수파의 쿠데타가 벌어졌는데 자브가예프는 쿠데타를 지지하며 민족회의의 간부들을 체포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러자 두다예프는 8월 23일부터 지역 방송국을 점령하며 전면 투쟁에 나섰는데 이틀 후에는 체첸 민족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창설된 국가방위대가 국가보안위원회(KGB)와 내무부 건물을 포위해버렸다. 그것도 모자랐는지 9월 1일부터 2일 동안 체첸 민족회의가 전권을 위임한다는 발표가 있을 때에 이날 체첸 민족주의자들은 정부청사와 방송국을 점거하고 혁명을 선언하며 그로즈니 시 소비에트 의장인 빅토르 쿠첸코를 살해해버렸다. 자브가예프는 중앙에 도움 요청을 시도했지만 실패한 채 9월 15일 대통령직을 사임했고 10월 5일에는 그로즈니에서 체첸 민족주의자들이 KGB을 습격해 무기까지 탈취했다.


사기가 오른 두다예프는 체첸 민족회의를 유일한 권력기구라고 선언했는데 옐친 정권은 대통령령을 통해 중단을 요구했지만 이들은 끝내 무시하고 단독으로 총선을 밀어붙였다. 그리하여 1991년 11월 1일, 조하르 두다예프 대통령의 취임과 함께 이치케리야 체첸공화국이 수립되었고 다음날 러시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한다. 이에 분노한 옐친 정권은 비상사태를 선포, 군부대를 투입해 두다예프 세력과 충돌을 벌였지만 옐친과 사이가 좋지 않던 러시아 의회가 비상사태 선포를 부결시키면서 일단 사태는 종결되었고 잉구슈 지역은 러시아에 남기로 하며 체첸과는 분리했다.


1991년 12월, 소련의 완전 해체로 보리스 옐친이 러시아 연방의 주도권을 잡자 러시아의 침공에 대비해 두다예프 정권도 국가방위대를 9만명 수준으로 증강시켰다. 특히 1992년 5월, 파벨 그라초프 장관과의 협의를 통해 체첸 영내의 러시아군이 철수할 때 남기고 간 무기들은 체첸 무장세력에게 있어서 커다란 자산이 되었다. 하지만 이 무기들은 혼란 속에서 민간에도 흘러가게 되었고 두다예프 정권도 총기소지를 허용해줬는데 이러면서 체첸 내 범죄 발생이 급격히 늘어가며 치안은 엉망이 되어버리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경제 역시 문제가 많았다. 두다예프 대통령은 취임 하면서 "석유는 우리를 제2의 쿠웨이트로 만들어줄 것"이라며 당당하고 자신있게 선언했지만 정작 체첸 경제의 중요한 기반인 석유 생산량은 오히려 격감했다. 또한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의 충격으로 인해 실업률은 40% 수준이었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중동 국가들과 소규모 월경무역을 했지만 오히려 러시아 연방으로부터 밀수지역이라는 비난의 명분만 갖다주는 꼴이었다. 무엇보다 체첸 경제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던 러시아인들이 '토박이 민족'이 아닌 지역 거주민을 추방하는 법이 제정되면서 빠져나간게 굉장히 치명적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안좋다 보니 두다예프 정권은 태도를 조금 완화하며 러시아 연방과 협상에 나섰다. 당시 체첸은 독립국가연합(CIS)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독자생존 하는게 불가능 했었는지라 러시아가 석유 수출을 허가해준다면 체첸 측은 송유관의 사용료를 지불할 의지가 있다고 했다. 그러나 당연히 두다예프를 어떻게 조질지 고민하고 있던 옐친 정권은 제안을 거부했고 이 와중에 두다예프 정권은 러시아의 선거에 참여하지 않으며 독립의지를 계속 표명하고 있었다.


출처:

- 현승수, <체첸 독립운동의 형성과 전개>,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연구센터, 국제지역연구 제13권 제2호, 2009, p482~490

- 손영훈, <체첸-러시아 전쟁의 전개 과정과 국가테러>, 한국중동학회, 2011, p34~p35

- 전갑기, <제1차 체첸전쟁에서 작전술 요소가 국면별 승패에 미친 영향 연구>, 건양대학교 일반대학원 군사학과 박사학위 논문, p127~133

- 김태연, <체첸에서의 폭력의 전개와 그 관계적 요인>, 서울대학교 러시아 연구소, 러시아연구 제28권 제2호, p53~54

- 박정호, <북 카프카스(North Caucasus) 지역분쟁의 정치•경제적 요인 분석>, 한국외국대학교 러시아연구소, 슬라브연구 제21권 2호, p5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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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전쟁으로 인해 극심한 식량난에 시달리던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났다. 이러한 혁명은 노동자와 농민들을 중심으로 러시아 전국으로 점점 퍼져나가게 되었는데 버티다 못한 차르 니콜라이 2세는 결국 퇴위, 케렌스키 임시정부와 소비에트가 세워진다. 하지만 처음에는 혁명이 정부와 사회를 단합시켜 군사력을 향상시킬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소비에트에 의해 군대가 단합은 커녕 와해되고 있는 것과 임시정부가 소비에트와 충돌을 피하기 위해 타협하고 있는 것에 실망한 코르닐로프 전 총사령관이 쿠데타를 일으키는 등 여전히 혼란에서 못벗어났다.


거기다가 쿠데타 진압 과정에서 케렌스키의 지원 요청으로 협력한 볼셰비키와 소비에트는 노동자들을 동원해 쿠데타군의 진격을 저지하고 쿠데타군 병사들을 대상으로 반혁명 음모에 가담하지 말라는 선동을 하는 큰 역할을 하며 영향력이 커져나갔다. 그리고 결국 볼셰비키는 그 해 10월에 아예 무장 반란을 일으켜 케렌스키 임시정부를 축출하고 레닌을 중심으로 러시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SFSR)이 수립되며 이들과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세력의 연합체적 성격의 백군(왕당파+자유주의자+온건 사회주의자 등)에다가 흑군(우크라이나 아나키스트)까지 뭉침과 동시에 러시아 내전이 본격화 된다.


한편 러시아 제국의 압제에 시달리던 캅카스 지역민, 특히 체첸인들에게 이는 독립의 기회였다. 이들은 곧 바로 산악 공화국을 수립했고 이슬람주의자들은 샤리아 법 제정과 러시아인 추방을 내세웠지만 세속주의자들의 반대로 시도되진 못했다. 어쨌거나 이렇게 수립된 공화국은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튀르크 제국에게 인정을 받으며 겉으로 보기에는 순조롭게 시작한 듯 해보였었지만 정작 중앙 정부의 영토들에 대한 통제력은 그다지 강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1918년 데니킨 장군이 이끄는 남러시아의 백군 병력들이 적군 11군단을 격파하고 남부로 진출하면서 점점 상황이 안좋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래도 처음에 데니킨은 어디까지나 다시 북진하는게 목표였기에 지역민들에게 별 다른 간섭을 하지 않았었는데 문제는 모스크바 공격이 격렬한 저항으로 대규모 사상자만 낸 채 실패한 뒤였다. 당연히 급해진 백군들은 지역민들을 징집해대기 시작했는데 이 과정에서 충돌이 발생했었다. 그러자 백군은 아예 산악공화국의 중심지였던 다케스탄을 점령하고 저항자들을 강경하게 진압했는데 이로인해 캅카스인들은 다시 좌절을 겪게 되었다.


데니킨은 이어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의 체결 이후로 독립은 했지만 여전히 혼란에 빠져있던 옛 러시아 제국의 영토인 우크라이나로 진출해 흑군과 민족주의자 군대를 상대로 승리를 거뒀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계속 진격해나가기 시작한 끝에 마침내 모스크바 부근까지 다다르게 되었다. 그러나 소비에트 정부는 트로츠키의 주도로 대규모 징집을 통해 군 병력을 증강했고 승리를 위해 옛 러시아 제국군 장교들까지도 수용하기로 방침을 변경했다. 거기다가 이 와중에도 주요 도시들은 여전히 소비에트 정부의 영향권 안에 있었으며 철도 덕분에 병력 이동에도 백군보다 유리했다.


전열을 정비한 적군은 다시 대대적인 반격을 펼쳤는데 통일된 체계가 빈약하던 백군은 이에 밀렸났다. 이는 시베리아 지역의 콜차크 백군 세력 뿐만 아니라 남러시아의 백군도 마찬가지 였었고 결국 패배하자 데니킨은 미국으로 망명간다. 이로써 체첸 지역에는 1921년에 완전히 적군의 영향권 안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이때 레닌은 '러시아 내 이슬람교도'에 대한 성명서를 통해 모든 이슬람교도의 권리를 보장해준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당연히 무신론을 신봉하는 공산주의자들이 종교의 자유를 보장해줄리는 없었다.


그래서 실제로 몇년이 지나자 샤리아 법정은 인민 법정으로 바뀌었고 1929년에는 스탈린의 농업 집단화 정책이 체첸 지역에도 적용되기 시작했다. 물론 체첸인들은 여기에 맞서 저항했지만 소련 정부의 집요한 탄압으로 전부 실패했다. 1934년에는 체첸과 잉구세티아 자치구를 통합시키며 저항 기질이 강한 체첸인들을 어떻게든 약화시킬려고 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소련 공무원 중 지역민의 비율을 계속 늘려주는 약간의 당근책(?)도 던져줬었다.


1937년 소련 전체를 휩쓴 대숙청의 피바람은 체첸에게도 들이닥쳤다. 숙청 명령이 내려진지 몇일 만에 내무인민위원회(NKVD)는 체첸에서 14,000명을 체포해 매일마다 집단 처형을 실시했고 2년 동안 3만 5천명이 체포되었다. 그래서 인구조사 자료를 보면 러시아 내 체첸 인구는 1937년에 비해 1940년에는 상당히 많은 수가 감소했음을 알 수가 있다. 당연히 상황이 이러다보니 체첸 지역에선 우크라이나 못지 않게 반 소련 정서가 매우 강해져가기 시작했으며 독소전쟁 시기에는 캅카스 지역에 진출한 독일군에게 협력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대가는 참혹했다. 약 4년간 이어진 독소전쟁으로 거의 2천만명 수준의 인명피해를 입은 소련은 독일에 부역한 체첸인들이 곱게 보일리가 없었고 아직 전쟁 중이던 1943년부터 강제 이주가 시작되었다. 1944년 2월 29일, 내무인민위원회의 수장 라브렌티 베리야가 스탈린에게 보고한 내용에 따르면 고산지대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에 걸쳐서 강제 이주 정책이 시행되어 약 50만명이 달하는 인구가 화물열차에 실려 쫓겨났다고 한다.


1953년 이오시프 스탈린이 사망하고 그 뒤를 이어 니키타 흐루시초프가 집권했다. 그는 집권을 하면서 소수민족 학살의 주도자였던 베리야는 총살, 스탈린은 격하시켰는데 이러면서 체첸인들의 귀환과 자치를 허용해준다. 이렇듯 체첸인들은 겨우 돌아올 수 있었지만 스탈린의 잔혹한 통치의 경험 때문인지 이후로도 소련 시절 동안에는 반러시아 감정을 억누른채 있었다.


출처

- 박상철, <코르닐로프의 좌절된 쿠데타>, 한국서양사연구회, 2011, p103~106

- 장병옥, <체첸-러시아 분쟁의 원인과 전개과정>, 한국외국어대학교 중동연구소, 2010, p38~39

- 이종원, <탈러 분리독립의 선봉 체첸 공화국>, 국제지역대학원 러시아 CIS 학과, 2016, p13~14

- 전갑기, <제1차 체첸전쟁에서 작전술 요소가 국면별 승패에 미친 영향 연구>, 건양대학교 일반대학원 군사학과 박사학위 논문, 2019, p118~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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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첸인들은 캅카스 지역의 민족인 나흐족의 일파 중 하나인 부족이다. 이들은 예전에 노흐치라고 불렸는데 13세기에 캅카스 지역에 침입해온 몽골계 킵차크 한국에 저항을 했지만 결국에는 많은 피해를 입고 지배를 받았다. 하지만 이 시기에 노흐치들의 저항은 훗날 체첸인들의 저항적인 민족성이 형성되는 것의 기원이 될 만큼 중요한 것이다.


한편 16~17세기 이후 오스만 튀르크 제국이 이슬람권의 맹주로서 영토를 넓히면서 캅카스 지역도 오스만의 영향권 안에 들어왔는데 이때부터 노흐치들도 이슬람교를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한편 러시아는 예카테리나 2세 집권기 동안인 1772년에 오스만과의 전쟁을 통해 캅카스 지역으로 본격적으로 남하하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캅카스 지역에 요새를 짓고 병참선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 전에도 러시아와 노흐치의 접촉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아직 모스크바 공국 시절이던 이반 4세 시기에도 러시아는 그로즈니에 요새를 건설하고 코사크인 부대를 배치시켰지만 코사크인들은 러시아 남부 주민들인지라 노흐치와 크게 이질적이진 않았다. 하지만 병참선 구축은 노흐치들에게 충분히 러시아가 침략적인 의도라고 생각하게 만들었으며 바로 그때 셰이흐 만수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아울 지역의 지도자였던 셰이흐 만수르는 이슬람교 신자로서 "침입자들을 몰아내기 위한 지하드를 수행하기 전에 이슬람 율법을 준수하자"는 메세지를 전파하며 마을 주민들의 존경을 받았다. 이걸 몰랐는지 1785년 러시아군은 피에리 대령이 이끄는 부대를 마을로 진입시켰는데 만수르는 대충 예상을 하고 이미 주민들을 마을 밖으로 대피시킨 후였다.


텅 마을에 진입한 러시아군은 마을을 약탈한 후 후퇴했는데 이로써 만수르는 러시아 제국의 의도를 확실하게 파악했다. 그래서 곧 바로 지하드를 선언하고 퇴각 중인 러시아군을 순자강 인근에서 기습하여 몇백명이 넘는 병사들을 사살했는데 이 전투는 체첸과 러시아의 대립이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으며 이때부터 체첸이라는 말이 러시아에서 쓰이기 시작한다.


1813년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직후부터 러시아는 다시 캅카스 지역에서 더 남진해 아제르바이잔까지 장악했다. 그리고는 1816년에 예르몰로프 장군을 캅카스 지역에 파견해 안정화 시킬려고 했다. 그는 블라디카프카즈를 거점으로 순자강을 따라서 새로운 요새선을 구축하여 그로즈니 지역의 방어태세를 보강하였는데 그 과정에 체첸 주민들을 쫓아내는 행태를 벌였다.


당연히 체첸인들은 1820년대부터 다시 러시아에 맞서 무장투쟁을 벌이게 되었는데 예르몰로프 장군은 강압적인 진압 조치로 맞대응했다. 결국 체첸 저항세력은 산악지대로 밀려나게 되었고 러시아군은 공포감을 조성하려고 했다. 하지만 저런 대응은 너무 당연하게도 오히려 억압받는 체첸인을 비롯한 캅카스 주민들의 단결력만 키워줬고 니콜라이 1세의 캅카스 지역에 대한 통치방식은 더욱 더 강경해졌다.


이때 러시아군은 기습과 매복을 사전에 방지한답시고 마을들을 초토화 시키며 토벌전에 나서게 되었지만 주민들은 여기에 굴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맘 샤밀이라는 새로운 지도자를 중심으로 뭉치면서 예전 셰이흐 만수르의 저항이 실패했던 것을 반면교사 삼아 전면적인 전투보단 소모전과 게릴라전 위주로 러시아군을 지치게 하는 전략으로 맞섰는데 이는 무려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이어진다. 하지만 그럼에도 결국 1859년 샤밀은 러시아군에게 붙잡히고 유배 당하면서 이 저항도 실패했다.


1850년에는 쿤타 하지라는 인물이 수피즘을 전파하고 다녔는데 여기에 많은 주민들이 동조했다. 그러자 러시아 제국 정부는 이들이 셰이흐 만수르나 이맘 샤밀처럼 무장투쟁을 조장할 것을 우려했는지 곧 바로 그를 구금시켜버렸다. 이에 하지의 추종자 약 3천명은 항의하는 집회를 가졌는데 그 과정에 러시아군은 그들이 단도를 착용한 것을 공격으로 간주해 총기를 발포했다. 이로인해 쿤타 하지의 추종자 그룹은 사실상 와해 되었고 그들의 토지는 러시아 제국 정부에 의해 몰수 당했다.


그 후로도 체첸인들은 비록 독립이라는 꿈이 좌절되었지만 여전히 전통적인 생활 방식을 이어가면서 산악지대에서 반(反) 러시아 무장투쟁을 지속해갔다. 이에 러시아 제국 정부는 가장 저항이 끈질기던 소수민족인인 체첸을 제대로 손 봐주기 위해 강제 이주를 비롯한 민족말살 정책을 펼쳤다.

출처:

- 이종원, <탈러 분리 독립의 선봉 체첸공화국>, 2016, p11~13

- 잔갑기, <제1차 체첸전쟁에서 작전술 요소가 국면별 승패에 미친 영향 연구>, 건양대 일반대학원 군사학과 박사학위 논문, p11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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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 사후 소련 공산당의 서기장이 된 이오시프 스탈린은 집단화 정책을 펼쳤는데 이때 산업화를 추진하기 위한 자금의 상당수를 농민들에게서 거뒀다. 또한 어떤 형태의 독립적인 농업 공동체도 허용하지 않으며 대신에 모든 농민들을 당에서 지도하는 집단 농장에서 일하게 했다. 이로써 공산당이 그토록 외치던 토지개혁은 결코 농민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전국의 토지를 국유화 시키기 위해 써먹은 기만술이었다는게 드러났다.

이러한 조치는 갑작스럽게 자신의 땅이 빼앗김에 분노한 농민들의 저항을 낳았는데 소련 공산당은 이들을 전부 부농 계급으로 몰아세워서 말살시키기로 작정했다. 그리하여 당은 부농으로 분류된 자들의 재산을 전부 몰수한 후에 그들은 시베리아의 강제노동수용소(굴라크)에 보내졌다. 공식 기록에는 1930~1931년 사이에 180만 3천 322명이 이러한 이유로 처벌을 받았으며 이들중 처형을 면한 자들 중 30%가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어갔다.

농민들에 대한 당의 착취가 점점 심해지면서 특히나 기준 생산고를 다 채우지 못한 농부들은 굶주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식량에 대한 절도가 늘어났는데 1932년 8월에는 당의 재산에 대해 어떠한 형태의 절도나 훼손을 입히면 사형 또는 10년 이상의 강제노동형에 처한다는 법령까지 나왔다. 법이 시행된 지 16개월 만에 12만명이 유죄 선고를 받았고 그 중에서 5천 4백명이 사형을 선고받았다.

상황이 이러해지자 스탈린 통치 시절 소련에서는 농민들의 지위가 과거 러시아 제국의 농노제보다 못해졌다. 최소한 농노제 시절에는 개인의 곡물과 가축을 제한이 있기는 해도 어쨌든 소유는 할 수 있었지만 이 시기에는 딱 최소한의 생필품만 배급받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실제로 1935년 정말 열심히 일한 농민 집안이 집단 농장과 당으로부터 받은 임금은 연간 247루블이었는데 이 정도는 고작 구두 한 컬레 밖에 살 수가 없었다.

스탈린은 예전부터 농민들을 소부르주아로 취급하면서 싫어했었다고 하는데 그 때문인지 극단적인 폭력도 거리낌 없이 사용했다. 그의 그런 폭력적인 정책으로 가장 극심한 피해를 입은 곳은 바로 우크라이나 지역이었는데 여기는 곡창지대이기도 하고 지역 농민들(특히 자작농)도 소련 공산당의 농업 집단화 정책에 대해 반대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는 농산물 수출로 급속한 산업화에 필요한 재정을 확보하려던 소련 공산당에게는 방해물이었다.

그러던 중 우크라이나에서 농업 생산량이 떨어지자 당은 그 원인을 부농 계급 탓이라고 책임 전가하며 이들이 생산한 곡물을 내놓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 후에 부농들의 농장들을 급습해서 식용 또는 종자용을 포함해서 보관된 모든 곡물들을 모조리 가져갔다. 그러자 농민들은 집단농장에 농사일에 필요한 소들을 내놓기 보단 차라리 도살하는 것을 선택했는데 이 때문에 일할 소들의 부족으로 농사 지을 수 있는 면적은 급격히 줄어들었다.

그 결과 엄청난 곡창지대 였었던 우크라이나에 대기근(홀로도모르, 인위적 대기근)이 몰아닥치게 된다. 이 대기근은 농촌 지역을 집중 강타했고 소련 정부는 이 사실이 외부로 알려지지 못하게 통제했다. 또한 이 시기에도 우크라이나 지역의 농산물 수탈은 지속되었으며 기차를 통해 탈출하려던 사람들은 전부 다시 농촌으로 돌려보내졌다. 이러한 홀로도모르로 죽은 숫자는 정확한 자료는 없지만 희생자가 1000만명 단위를 넘어선다는 얘기도 있다.

스탈린의 폭력성은 1930년대 전반기에 절정에 달하게 되었다. 1934년에는 레닌그라드 지역당의 서기장이자 스탈린의 추종자였던 키로프는 갑자기 암살당했는데 상황 증거로 보아 살해를 부추킨 인물은 스탈린일 것이라는 가능성이 높다. 죽인 이유로는 그가 당원들의 인기를 많이 얻었다는 것. 어쨌거나 스탈린은 그를 암살함으로써 잠재적 경쟁자를 제거하고 다음으로는 반소비에트 음모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투쟁을 벌일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마련했다.

대숙청은 일반 시민은 물론 당원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절정기였던 1937~1938년에는 최소 150만명이 지방당 서기와 소송 대리인, 지방 비밀경찰 책임자 등 3인으로 구성된 법정으로 끌려왔다. 그들 중 대다수는 공산당 평가 기준대로 봐도 아무 죄도 없었지만 이들에게는 항소도 허용되지 않은 채 바로 사형이나 강제 노동 등의 유죄 선고를 받게 되었다. 이러한 일이 벌어진 이유는 바로 당 정치국에서 경찰에게 '숙청 할당량'을 주고 해당 지방에 거주하는 주민들 중 몇 퍼센트를 총살하고 몇 퍼센트를 수용소에 보낼지를 지시하는게 그 시절의 방침이었기 때문이었다.

1937년 6월 2일, 당 정치국은 모스크바 시 측에 숙청 할당량으로 3만 5천명을 제시했고 이 중에서 5천명은 총살 대상이었다. 한달 뒤에는 전국에 각 지역마다 숙청할 사람들의 수를 할당했고 역시나 이 중에서도 7만명은 재판 없이 처형을 받기로 정해져 있었다. 대숙청에 희생된 자들 중에는 고등 교육을 받은 엘리트 계층도 꽤 있었는데 이들을 없앤 이유는 당에서 통제하기가 어렵다는 것 때문이었다.

대숙청 과정에서 스탈린의 공포정치를 적극적으로 보좌해준 인물으로는 니콜라이 예조프가 있었다. 그는 1936~1938년 사이에 NKVD(내무인민위원회)의 수장으로서 학살을 주도했지만 결국 그 역시 스탈린과의 충돌로 인해 숙청되었다. 그 뒤로 라브렌티 베리야가 스탈린의 충견 노릇을 하게 되었다. 베리야는 비밀경찰을 총괄하며 반소비에트 인사들을 고문 및 숙청하는 것을 넘어서 아예 우편물 감시까지 하거나 2차대전 기간 도중에는 발트 3국과 폴란드에서 학살을 주도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1930년대 소련에서는 일반 시민들이 우연히 내뱉은 말이나 개인적인 감정이 안좋은 자들의 모함 고발 때문에 투옥되기 했으며 사회 전반에는 병적인 공포와 의심이 강해져갔다. 스탈린 시기에 소련 공산당의 고위 간부였던 니콜라이 불가닌은 "스탈린의 친구로서 초대받던 자가 막상 스탈린과 함께 앉으면 그는 다음에 집으로 갈지 아니면 감옥으로 갈지 알지 못한다"고 했으며 소련 외무장관을 지낸 안드레이 그로미코는 스탈린 시대에는 둘 이상의 정치국 직원들은 음모를 꾸민다는 의심을 받기 두려워해서 절대로 같이 차를 타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소련이 붕괴된 뒤에 기밀 문서 보관서에서 나온 내용에 따르면 1937~1938년 사이에 비밀경찰들은 반소비에트 혐의로 154만 8천 366명을 구금했으며 이 중에서 68만 1천 692명을 총살했다. 이 수치는 거의 하루에 1천명을 처형한 것이며 살아남은 자들도 대다수는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일하다가 사망했다.

- 출처: 리처드 파이프스 <공산주의의 역사>, 을유문화사,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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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겨울은 폭설과 영화 30도의 추위로 인해서 국민당은 공군을 운용하지 못했다. 이때 중국 공산당군은 40만명 가까이 되는 병력을 남하시켜서 국민당군의 여러 사단들을 궤멸시키고 철도 주변의 도시들을 포위해나갔다. 이때 창춘은 도시 포위로 인해서 무려 민간인 16만명이나 굶어죽는 일이 벌어졌었고 창춘 바로 밑의 선양도 린뱌오의 지휘 하에 중국 공산당군이 베이징과 선양 사이의 철도를 끊고 도시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당시 선양 안에는 피난민들까지 들어오면서 400만명이 넘는 민간인들이 10개월 동안 갇혀있었으며 국민당군은 20만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그 상황에서 일부 민간인들은 민간 항공기를 뇌물로 매수해서 도망치는 것에 성공했지만 이는 극소수 였고 나머지 사람들은 한 달에 10만명 이상씩 기차를 타고 도시를 떠나갔다. 그러나 빈민들이나 병약한 사람들은 떠나지 못했고 곧 굶주림에 시달리게 되었다. 비타민 부족으로 무려 수천명이 실명되는 사고에 이어서 괴저성 질환인 수암과 괴혈병, 영양실조로 인한 그 밖의 질병으로 수천명이 지나갔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외국인 기자는 그때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 나는 황폐해진 거리를 걸었고 비쩍 마른 시체들이 버려진 도랑을 지나쳤다. 도저히 눈 뜨고는 볼 수 없을 만큼 불쌍한 얼굴로 구걸하는 아이들과 도와달라고 애걸하는 여성들이 내 뒤를 따라왔다. "


2월부터는 식량마저 바닥을 드러내면서 결국 사람들은 나무껍질과 나뭇잎, 또는 콩깻묵과 심지어는 쓰레기통까지 뒤져가면서 먹을 것을 찾아내려고 힘 썼다. 포위된 도시에서 탈출하려는 사람들은 대다수가 비틀비틀 거리며 나아갔고 일부는 목발이나 지팡이에 의지했닺 1948년 여름에는 매달 14만명이 선양 인근에서 대탈출에 합류했는데 그들은 무장 강도들이 득실득실한 들판을 가로질러가며 나아갔다. 겨우 탈출에 성공한 이들은 수도꼭지가 하나일 정도로 열악한 임시 피난민 수용소에 정착하였다가 곧바로 더 남쪽으로 내려갔다.


이런 식의 도시 포위 후 대규모 공세로 무너뜨리는 방식을 통해서 공산당군은 창춘, 진저우, 선양에 이어서 마침내 베이징(당시 지명은 베이핑)까지 점령했다. 그리고는 1948년 11월, 100만명의 병력들을 동원해 쉬저우 성을 급습했다. 이때 산둥 성 외곽은 공산당 유격대 부대가 장악하고 있었으며 국민당군은 이에 맞서 철도 교차료 주변 평야에 40만명을 배치시켰다. 또한 국민당군의 두위밍 장군은 질퍽한 도로와 파손된 철도를 활용해 필사적으로 병력을 이동시키며 동쪽에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했다.


쉬저우 전투는 국공내전에서 굉장히 중요한 사건인만큼 전투는 굉장히 치열했다. 양측 모두 전차와 중포까지 동원했으며 공중에서도 항공기가 날라다녔다. 이때 공산당군은 융단 폭격을 통해서 무수히 많은 폭탄으로 마을들을 차례대로 지워나갔으며 당시 참전한 한 조종사의 회고에 따르면 들판이 시체로 뒤덮여있었을 정도였다.


덩샤오핑의 경우에는 500만명의 남성과 여성, 아이들을 징용했으며 마을마다 할당량을 배정하고 자신의 명령을 지키지 않으면 처벌하겠다고 협박했다. 이렇게 끌려온 징용자들은 보통 물자들을 나르며 병참지원을 맡았는데 때에 따라서는 전선에서 공산당군 맨 앞에서 행군하며 총알받이 용도로도 쓰였다. 이때 비무장 상태의 민간인들이 몰려오자 국민당군은 크게 당황했다. 당시 국민당군으로 참전했었던 린징우는 이때 그 숫자가 너무 많아서 총을 쏘다가 손이 마비될 정도였으며 비무장한 일반인들을 죽인다는 사실에 괴로워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발포를 그만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한편 쉬저우도 선양처럼 식량이 금방 바닥나버렸는지라 일반인들은 나무껍질과 풀뿌리를 먹으며 겨우 생존해갔다. 성벽 바깥 작은 마을에서는 장작을 구하지 못해서 얼어죽은 민간인들도 늘어났으며 국민당군 소속 상하이행 비행기 안에서는 피 흘리며 죽어가는 군인들이 넘쳐났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고 있을 때, 공산당군은 확성기로 투항을 권고했고 궁지에 몰린 국민당군 부대들은 하나둘씩 항복하기 시작하면서 1949년 1월 10일에야 전투가 끝난다.

- 출처: 프랑크 디쾨터, <해방의 비극: 1945~1957> p27~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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