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를 거치며 소련은 몰락해가기 시작했다. 특히 냉전의 절정에 따른 과도한 군비 유지, 아프가니스탄 군사 개입으로 인한 비용 지출, 경제 정책 실패, 체르노빌 사고까지 겹치며 한계에 다다르게 되었다. 이 와중에 공산당 서기장으로 취임한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 정책을 통한 개혁을 실시했지만 이미 망해가는 체제를 살려내기엔 역부족이었다.


결국 소련의 몰락으로 소련 내 구성국들의 분리독립 움직임이 생겨났는데 공산당 보수파들은 고르바초프가 분열을 조장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보리스 푸고와 겐나디 야나예프, 올레그 바클라노프를 비롯한 보수파들은 쿠데타를 일으켰는데 보리스 옐친이 이끄는 시민들의 저지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고르바초프는 실각했으며 주도권은 보리스 옐친에게 넘어갔고 얼마 후 소련은 해체되고 러시아 연방이 수립된다.


한편 비슷한 시기에 체첸에서는 소련 공산당 체첸-잉구슈 자치주 서기에 체첸인 출신 도쿠 자브가예프가 선출되었다. 자브가예프 서기는 자유주의적 성향을 갖고 있던 자들 뿐만 아니라 심지어 반정부운동으로 탄압받았었던 셰파 가타예프까지도 기용하고 자치공화국을 수립하며 당시 시대의 흐름을 따르는 모습을 보였지만 동시에 연방 중앙정부의 방침에는 충실한 모습을 볼 때 그는 개혁가이면서 한계도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어쨌든 변화해가는 체첸의 흐름 속에서 급진적인 민족주의자들을 중심으로 바이나흐 민주당이 창당된다. 이들은 단순히 자치권 확대를 넘어 소련(이후 러시아 연방) 벗어나 주권을 가진 독립국가가 되는 것을 원했는데 아직 이때까지만 해도 체첸 독립세력 내에서 이슬람 원리주의적 성향은 크게 드러나지 않았었다고 한다. 얼마 후 바이나흐 민주당은 제1차 체첸 민족대회를 열며 대놓고 독립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고 대회의 집행위원장으로 소련 공군 소장 출신인 조하르 두다예프를 내세웠다.


이에 당황한 자브가예프 정권은 국가 주권에 관한 선언을 발표하며 수습에 나섰지만 내용상 소련으로부터의 완전 독립에는 그닥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래서 두다예프를 중심으로 한 집행위원회는 자브가예프를 압박해갔고 곧 이어 집행위원회는 체첸 민족회의로 바뀌게 된다. 민족회의의 지도부는 상당수가 강경파 였었고 당연히 내부적으로는 온건파와의 충돌도 꽤나 있었다. 그런 와중에 공산당 보수파의 쿠데타가 벌어졌는데 자브가예프는 쿠데타를 지지하며 민족회의의 간부들을 체포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러자 두다예프는 8월 23일부터 지역 방송국을 점령하며 전면 투쟁에 나섰는데 이틀 후에는 체첸 민족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창설된 국가방위대가 국가보안위원회(KGB)와 내무부 건물을 포위해버렸다. 그것도 모자랐는지 9월 1일부터 2일 동안 체첸 민족회의가 전권을 위임한다는 발표가 있을 때에 이날 체첸 민족주의자들은 정부청사와 방송국을 점거하고 혁명을 선언하며 그로즈니 시 소비에트 의장인 빅토르 쿠첸코를 살해해버렸다. 자브가예프는 중앙에 도움 요청을 시도했지만 실패한 채 9월 15일 대통령직을 사임했고 10월 5일에는 그로즈니에서 체첸 민족주의자들이 KGB을 습격해 무기까지 탈취했다.


사기가 오른 두다예프는 체첸 민족회의를 유일한 권력기구라고 선언했는데 옐친 정권은 대통령령을 통해 중단을 요구했지만 이들은 끝내 무시하고 단독으로 총선을 밀어붙였다. 그리하여 1991년 11월 1일, 조하르 두다예프 대통령의 취임과 함께 이치케리야 체첸공화국이 수립되었고 다음날 러시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한다. 이에 분노한 옐친 정권은 비상사태를 선포, 군부대를 투입해 두다예프 세력과 충돌을 벌였지만 옐친과 사이가 좋지 않던 러시아 의회가 비상사태 선포를 부결시키면서 일단 사태는 종결되었고 잉구슈 지역은 러시아에 남기로 하며 체첸과는 분리했다.


1991년 12월, 소련의 완전 해체로 보리스 옐친이 러시아 연방의 주도권을 잡자 러시아의 침공에 대비해 두다예프 정권도 국가방위대를 9만명 수준으로 증강시켰다. 특히 1992년 5월, 파벨 그라초프 장관과의 협의를 통해 체첸 영내의 러시아군이 철수할 때 남기고 간 무기들은 체첸 무장세력에게 있어서 커다란 자산이 되었다. 하지만 이 무기들은 혼란 속에서 민간에도 흘러가게 되었고 두다예프 정권도 총기소지를 허용해줬는데 이러면서 체첸 내 범죄 발생이 급격히 늘어가며 치안은 엉망이 되어버리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경제 역시 문제가 많았다. 두다예프 대통령은 취임 하면서 "석유는 우리를 제2의 쿠웨이트로 만들어줄 것"이라며 당당하고 자신있게 선언했지만 정작 체첸 경제의 중요한 기반인 석유 생산량은 오히려 격감했다. 또한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의 충격으로 인해 실업률은 40% 수준이었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중동 국가들과 소규모 월경무역을 했지만 오히려 러시아 연방으로부터 밀수지역이라는 비난의 명분만 갖다주는 꼴이었다. 무엇보다 체첸 경제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던 러시아인들이 '토박이 민족'이 아닌 지역 거주민을 추방하는 법이 제정되면서 빠져나간게 굉장히 치명적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안좋다 보니 두다예프 정권은 태도를 조금 완화하며 러시아 연방과 협상에 나섰다. 당시 체첸은 독립국가연합(CIS)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독자생존 하는게 불가능 했었는지라 러시아가 석유 수출을 허가해준다면 체첸 측은 송유관의 사용료를 지불할 의지가 있다고 했다. 그러나 당연히 두다예프를 어떻게 조질지 고민하고 있던 옐친 정권은 제안을 거부했고 이 와중에 두다예프 정권은 러시아의 선거에 참여하지 않으며 독립의지를 계속 표명하고 있었다.


출처:

- 현승수, <체첸 독립운동의 형성과 전개>,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연구센터, 국제지역연구 제13권 제2호, 2009, p482~490

- 손영훈, <체첸-러시아 전쟁의 전개 과정과 국가테러>, 한국중동학회, 2011, p34~p35

- 전갑기, <제1차 체첸전쟁에서 작전술 요소가 국면별 승패에 미친 영향 연구>, 건양대학교 일반대학원 군사학과 박사학위 논문, p127~133

- 김태연, <체첸에서의 폭력의 전개와 그 관계적 요인>, 서울대학교 러시아 연구소, 러시아연구 제28권 제2호, p53~54

- 박정호, <북 카프카스(North Caucasus) 지역분쟁의 정치•경제적 요인 분석>, 한국외국대학교 러시아연구소, 슬라브연구 제21권 2호, p5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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