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년 전쟁으로 인해 극심한 식량난에 시달리던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났다. 이러한 혁명은 노동자와 농민들을 중심으로 러시아 전국으로 점점 퍼져나가게 되었는데 버티다 못한 차르 니콜라이 2세는 결국 퇴위, 케렌스키 임시정부와 소비에트가 세워진다. 하지만 처음에는 혁명이 정부와 사회를 단합시켜 군사력을 향상시킬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소비에트에 의해 군대가 단합은 커녕 와해되고 있는 것과 임시정부가 소비에트와 충돌을 피하기 위해 타협하고 있는 것에 실망한 코르닐로프 전 총사령관이 쿠데타를 일으키는 등 여전히 혼란에서 못벗어났다.
거기다가 쿠데타 진압 과정에서 케렌스키의 지원 요청으로 협력한 볼셰비키와 소비에트는 노동자들을 동원해 쿠데타군의 진격을 저지하고 쿠데타군 병사들을 대상으로 반혁명 음모에 가담하지 말라는 선동을 하는 큰 역할을 하며 영향력이 커져나갔다. 그리고 결국 볼셰비키는 그 해 10월에 아예 무장 반란을 일으켜 케렌스키 임시정부를 축출하고 레닌을 중심으로 러시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SFSR)이 수립되며 이들과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세력의 연합체적 성격의 백군(왕당파+자유주의자+온건 사회주의자 등)에다가 흑군(우크라이나 아나키스트)까지 뭉침과 동시에 러시아 내전이 본격화 된다.
한편 러시아 제국의 압제에 시달리던 캅카스 지역민, 특히 체첸인들에게 이는 독립의 기회였다. 이들은 곧 바로 산악 공화국을 수립했고 이슬람주의자들은 샤리아 법 제정과 러시아인 추방을 내세웠지만 세속주의자들의 반대로 시도되진 못했다. 어쨌거나 이렇게 수립된 공화국은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튀르크 제국에게 인정을 받으며 겉으로 보기에는 순조롭게 시작한 듯 해보였었지만 정작 중앙 정부의 영토들에 대한 통제력은 그다지 강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1918년 데니킨 장군이 이끄는 남러시아의 백군 병력들이 적군 11군단을 격파하고 남부로 진출하면서 점점 상황이 안좋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래도 처음에 데니킨은 어디까지나 다시 북진하는게 목표였기에 지역민들에게 별 다른 간섭을 하지 않았었는데 문제는 모스크바 공격이 격렬한 저항으로 대규모 사상자만 낸 채 실패한 뒤였다. 당연히 급해진 백군들은 지역민들을 징집해대기 시작했는데 이 과정에서 충돌이 발생했었다. 그러자 백군은 아예 산악공화국의 중심지였던 다케스탄을 점령하고 저항자들을 강경하게 진압했는데 이로인해 캅카스인들은 다시 좌절을 겪게 되었다.
데니킨은 이어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의 체결 이후로 독립은 했지만 여전히 혼란에 빠져있던 옛 러시아 제국의 영토인 우크라이나로 진출해 흑군과 민족주의자 군대를 상대로 승리를 거뒀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계속 진격해나가기 시작한 끝에 마침내 모스크바 부근까지 다다르게 되었다. 그러나 소비에트 정부는 트로츠키의 주도로 대규모 징집을 통해 군 병력을 증강했고 승리를 위해 옛 러시아 제국군 장교들까지도 수용하기로 방침을 변경했다. 거기다가 이 와중에도 주요 도시들은 여전히 소비에트 정부의 영향권 안에 있었으며 철도 덕분에 병력 이동에도 백군보다 유리했다.
전열을 정비한 적군은 다시 대대적인 반격을 펼쳤는데 통일된 체계가 빈약하던 백군은 이에 밀렸났다. 이는 시베리아 지역의 콜차크 백군 세력 뿐만 아니라 남러시아의 백군도 마찬가지 였었고 결국 패배하자 데니킨은 미국으로 망명간다. 이로써 체첸 지역에는 1921년에 완전히 적군의 영향권 안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이때 레닌은 '러시아 내 이슬람교도'에 대한 성명서를 통해 모든 이슬람교도의 권리를 보장해준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당연히 무신론을 신봉하는 공산주의자들이 종교의 자유를 보장해줄리는 없었다.
그래서 실제로 몇년이 지나자 샤리아 법정은 인민 법정으로 바뀌었고 1929년에는 스탈린의 농업 집단화 정책이 체첸 지역에도 적용되기 시작했다. 물론 체첸인들은 여기에 맞서 저항했지만 소련 정부의 집요한 탄압으로 전부 실패했다. 1934년에는 체첸과 잉구세티아 자치구를 통합시키며 저항 기질이 강한 체첸인들을 어떻게든 약화시킬려고 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소련 공무원 중 지역민의 비율을 계속 늘려주는 약간의 당근책(?)도 던져줬었다.
1937년 소련 전체를 휩쓴 대숙청의 피바람은 체첸에게도 들이닥쳤다. 숙청 명령이 내려진지 몇일 만에 내무인민위원회(NKVD)는 체첸에서 14,000명을 체포해 매일마다 집단 처형을 실시했고 2년 동안 3만 5천명이 체포되었다. 그래서 인구조사 자료를 보면 러시아 내 체첸 인구는 1937년에 비해 1940년에는 상당히 많은 수가 감소했음을 알 수가 있다. 당연히 상황이 이러다보니 체첸 지역에선 우크라이나 못지 않게 반 소련 정서가 매우 강해져가기 시작했으며 독소전쟁 시기에는 캅카스 지역에 진출한 독일군에게 협력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대가는 참혹했다. 약 4년간 이어진 독소전쟁으로 거의 2천만명 수준의 인명피해를 입은 소련은 독일에 부역한 체첸인들이 곱게 보일리가 없었고 아직 전쟁 중이던 1943년부터 강제 이주가 시작되었다. 1944년 2월 29일, 내무인민위원회의 수장 라브렌티 베리야가 스탈린에게 보고한 내용에 따르면 고산지대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에 걸쳐서 강제 이주 정책이 시행되어 약 50만명이 달하는 인구가 화물열차에 실려 쫓겨났다고 한다.
1953년 이오시프 스탈린이 사망하고 그 뒤를 이어 니키타 흐루시초프가 집권했다. 그는 집권을 하면서 소수민족 학살의 주도자였던 베리야는 총살, 스탈린은 격하시켰는데 이러면서 체첸인들의 귀환과 자치를 허용해준다. 이렇듯 체첸인들은 겨우 돌아올 수 있었지만 스탈린의 잔혹한 통치의 경험 때문인지 이후로도 소련 시절 동안에는 반러시아 감정을 억누른채 있었다.
출처
- 박상철, <코르닐로프의 좌절된 쿠데타>, 한국서양사연구회, 2011, p103~106
- 장병옥, <체첸-러시아 분쟁의 원인과 전개과정>, 한국외국어대학교 중동연구소, 2010, p38~39
- 이종원, <탈러 분리독립의 선봉 체첸 공화국>, 국제지역대학원 러시아 CIS 학과, 2016, p13~14
- 전갑기, <제1차 체첸전쟁에서 작전술 요소가 국면별 승패에 미친 영향 연구>, 건양대학교 일반대학원 군사학과 박사학위 논문, 2019, p118~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