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 사후 소련 공산당의 서기장이 된 이오시프 스탈린은 집단화 정책을 펼쳤는데 이때 산업화를 추진하기 위한 자금의 상당수를 농민들에게서 거뒀다. 또한 어떤 형태의 독립적인 농업 공동체도 허용하지 않으며 대신에 모든 농민들을 당에서 지도하는 집단 농장에서 일하게 했다. 이로써 공산당이 그토록 외치던 토지개혁은 결코 농민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전국의 토지를 국유화 시키기 위해 써먹은 기만술이었다는게 드러났다.
이러한 조치는 갑작스럽게 자신의 땅이 빼앗김에 분노한 농민들의 저항을 낳았는데 소련 공산당은 이들을 전부 부농 계급으로 몰아세워서 말살시키기로 작정했다. 그리하여 당은 부농으로 분류된 자들의 재산을 전부 몰수한 후에 그들은 시베리아의 강제노동수용소(굴라크)에 보내졌다. 공식 기록에는 1930~1931년 사이에 180만 3천 322명이 이러한 이유로 처벌을 받았으며 이들중 처형을 면한 자들 중 30%가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어갔다.
농민들에 대한 당의 착취가 점점 심해지면서 특히나 기준 생산고를 다 채우지 못한 농부들은 굶주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식량에 대한 절도가 늘어났는데 1932년 8월에는 당의 재산에 대해 어떠한 형태의 절도나 훼손을 입히면 사형 또는 10년 이상의 강제노동형에 처한다는 법령까지 나왔다. 법이 시행된 지 16개월 만에 12만명이 유죄 선고를 받았고 그 중에서 5천 4백명이 사형을 선고받았다.
상황이 이러해지자 스탈린 통치 시절 소련에서는 농민들의 지위가 과거 러시아 제국의 농노제보다 못해졌다. 최소한 농노제 시절에는 개인의 곡물과 가축을 제한이 있기는 해도 어쨌든 소유는 할 수 있었지만 이 시기에는 딱 최소한의 생필품만 배급받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실제로 1935년 정말 열심히 일한 농민 집안이 집단 농장과 당으로부터 받은 임금은 연간 247루블이었는데 이 정도는 고작 구두 한 컬레 밖에 살 수가 없었다.
스탈린은 예전부터 농민들을 소부르주아로 취급하면서 싫어했었다고 하는데 그 때문인지 극단적인 폭력도 거리낌 없이 사용했다. 그의 그런 폭력적인 정책으로 가장 극심한 피해를 입은 곳은 바로 우크라이나 지역이었는데 여기는 곡창지대이기도 하고 지역 농민들(특히 자작농)도 소련 공산당의 농업 집단화 정책에 대해 반대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는 농산물 수출로 급속한 산업화에 필요한 재정을 확보하려던 소련 공산당에게는 방해물이었다.
그러던 중 우크라이나에서 농업 생산량이 떨어지자 당은 그 원인을 부농 계급 탓이라고 책임 전가하며 이들이 생산한 곡물을 내놓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 후에 부농들의 농장들을 급습해서 식용 또는 종자용을 포함해서 보관된 모든 곡물들을 모조리 가져갔다. 그러자 농민들은 집단농장에 농사일에 필요한 소들을 내놓기 보단 차라리 도살하는 것을 선택했는데 이 때문에 일할 소들의 부족으로 농사 지을 수 있는 면적은 급격히 줄어들었다.
그 결과 엄청난 곡창지대 였었던 우크라이나에 대기근(홀로도모르, 인위적 대기근)이 몰아닥치게 된다. 이 대기근은 농촌 지역을 집중 강타했고 소련 정부는 이 사실이 외부로 알려지지 못하게 통제했다. 또한 이 시기에도 우크라이나 지역의 농산물 수탈은 지속되었으며 기차를 통해 탈출하려던 사람들은 전부 다시 농촌으로 돌려보내졌다. 이러한 홀로도모르로 죽은 숫자는 정확한 자료는 없지만 희생자가 1000만명 단위를 넘어선다는 얘기도 있다.
스탈린의 폭력성은 1930년대 전반기에 절정에 달하게 되었다. 1934년에는 레닌그라드 지역당의 서기장이자 스탈린의 추종자였던 키로프는 갑자기 암살당했는데 상황 증거로 보아 살해를 부추킨 인물은 스탈린일 것이라는 가능성이 높다. 죽인 이유로는 그가 당원들의 인기를 많이 얻었다는 것. 어쨌거나 스탈린은 그를 암살함으로써 잠재적 경쟁자를 제거하고 다음으로는 반소비에트 음모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투쟁을 벌일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마련했다.
대숙청은 일반 시민은 물론 당원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절정기였던 1937~1938년에는 최소 150만명이 지방당 서기와 소송 대리인, 지방 비밀경찰 책임자 등 3인으로 구성된 법정으로 끌려왔다. 그들 중 대다수는 공산당 평가 기준대로 봐도 아무 죄도 없었지만 이들에게는 항소도 허용되지 않은 채 바로 사형이나 강제 노동 등의 유죄 선고를 받게 되었다. 이러한 일이 벌어진 이유는 바로 당 정치국에서 경찰에게 '숙청 할당량'을 주고 해당 지방에 거주하는 주민들 중 몇 퍼센트를 총살하고 몇 퍼센트를 수용소에 보낼지를 지시하는게 그 시절의 방침이었기 때문이었다.
1937년 6월 2일, 당 정치국은 모스크바 시 측에 숙청 할당량으로 3만 5천명을 제시했고 이 중에서 5천명은 총살 대상이었다. 한달 뒤에는 전국에 각 지역마다 숙청할 사람들의 수를 할당했고 역시나 이 중에서도 7만명은 재판 없이 처형을 받기로 정해져 있었다. 대숙청에 희생된 자들 중에는 고등 교육을 받은 엘리트 계층도 꽤 있었는데 이들을 없앤 이유는 당에서 통제하기가 어렵다는 것 때문이었다.
대숙청 과정에서 스탈린의 공포정치를 적극적으로 보좌해준 인물으로는 니콜라이 예조프가 있었다. 그는 1936~1938년 사이에 NKVD(내무인민위원회)의 수장으로서 학살을 주도했지만 결국 그 역시 스탈린과의 충돌로 인해 숙청되었다. 그 뒤로 라브렌티 베리야가 스탈린의 충견 노릇을 하게 되었다. 베리야는 비밀경찰을 총괄하며 반소비에트 인사들을 고문 및 숙청하는 것을 넘어서 아예 우편물 감시까지 하거나 2차대전 기간 도중에는 발트 3국과 폴란드에서 학살을 주도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1930년대 소련에서는 일반 시민들이 우연히 내뱉은 말이나 개인적인 감정이 안좋은 자들의 모함 고발 때문에 투옥되기 했으며 사회 전반에는 병적인 공포와 의심이 강해져갔다. 스탈린 시기에 소련 공산당의 고위 간부였던 니콜라이 불가닌은 "스탈린의 친구로서 초대받던 자가 막상 스탈린과 함께 앉으면 그는 다음에 집으로 갈지 아니면 감옥으로 갈지 알지 못한다"고 했으며 소련 외무장관을 지낸 안드레이 그로미코는 스탈린 시대에는 둘 이상의 정치국 직원들은 음모를 꾸민다는 의심을 받기 두려워해서 절대로 같이 차를 타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소련이 붕괴된 뒤에 기밀 문서 보관서에서 나온 내용에 따르면 1937~1938년 사이에 비밀경찰들은 반소비에트 혐의로 154만 8천 366명을 구금했으며 이 중에서 68만 1천 692명을 총살했다. 이 수치는 거의 하루에 1천명을 처형한 것이며 살아남은 자들도 대다수는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일하다가 사망했다.
- 출처: 리처드 파이프스 <공산주의의 역사>, 을유문화사,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