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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3월 17일, 폴란드 제헌의회는 중대한 과업을 종결했다. 이로써 사회주의자들이 지향했던 이념보단 보수적이고 민족민주당과 우익 세력들이 지향했던 이념보다 민주적이고 다원적인 헌법이 탄생했다. 이 헌법에 따라 보통선거제도와 상하원 제도가 확립되었다.

이 시기 폴란드에서 상원은 법안을 발의할 수 없었지만 하원에서 통과된 법안을 거부할 권한이 있었고 하원의 55%가 다시 가결하면 상원의 거부권을 뒤집을 수 있는 등 체제는 나름 민주적으로 작동했다. 하원에서 최대 득표율을 거둔 정당은 총리를 디명하고 정부를 구성할 수 있었으나 과반을 차지한 정당이 없어서 한동안 연립정부가 불가피했다.

한편 새 헌법은 민족주의 견제 목적에서 '민족' 대신 '시민'의 개념이 자리잡았다. 여기에 개별적인 시민에 우선하는 민족의 이해관계와 요구를 강조하는 민족민주당은 헌법이 끈끈하고 동질적인 문화적 공동체로서 민족을 신성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점에 실망했다. 또한 가톨릭 교회들도 헌법이 가톨릭을 유대교나 비가톨릭 교파와 동등한 일개 교파로 추락시켰다고 비난했다.

좌파 역시 헌법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 그들은 1918년 독립 국가 건설 과정에서 이룬 성과가 헌법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보편적인 시민 권리, 무상교육, 국가 지원 등에는 만족하면서도 이 내용들이 자본주의 복지국가적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헌법 99조에서 사유재산을 "사회체제와 법질서의 가장 중요한 토대 가운데 하나"라고 선언해 보상 없는 몰수나 재분배를 금지한 것에 대해 반발했다.

1922년 사회당은 농민당과의 단일화로 가브리엘 나루토비치를 간신히 대통령에 선출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루토비치는 그리 유명한 인물은 아니었는데 1920년 공공행정 장관직을 맡으며 성과를 많이 내고 특정 정치 세력의 등을 업지 않았던 것이 지지 확보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그가 집권하자마자 민족민주당은 새 대통령을 인정하지 않으며 '폴란드의 다수파'를 대변하는 인물이 아니라 유대인과 다른 '외국인들'을 대변하는 정당의 득표로 선출되었다고 주장했다.

폭력이 계속 난무하는 가운데 1922년 12월 11일, 가브리엘 나루토비치 대통령은 취임식을 했다. 하지만 나루토비치는 닷새 뒤 바르샤바 미술관 전시회 개막식에 참여했다가 민족민주당을 지지하는 자에게 암살당했고 친민족민주당 성향의 언론들도 나루토비치 암살을 옹호했다. 암살 직후 의회는 다시 소집되어 3분의 2라는 다수의 득표로 스타니스와프 보이치에호프스키가 두번째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권력은 곧 민족민주당을 비롯한 우익 세력에게 넘어갔고 폴란드군 참모총장 자리를 유지하고 있던 유제프 피우수트스키는 1923년 5월 29일, 민족민주당을 비난하며 사퇴 후 두 번째 아내인 알렉산드라 슈체르빈스카와 함께 바르샤바 인근의 술레우베크으로 가며 은퇴했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폴란드 정국은 여전히 안정을 되찾지 못한 채 혼란에 빠졌고 그렇게 짧았던 민주주의는 종말을 향해 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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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시절 바르샤바 대공국이라는 이름으로 잠시 독립을 쟁취한 것을 빼면 근대 시대 동안 강대국에게 지배를 받아왔던 폴란드는 독립과 함께 억눌려있던 민족주의가 폭발하고 말았다. 그러면서 그들은 과거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시절의 전성기 영토를 되찾자고 부르짖으며 패권주의라는 침략의 길로 빠져들고 말았다.

폴란드는 우선 발트 해 연안과 체코슬로바키아 일부, 서부 우크라이나와 서부 벨라루스 지역을 자신의 영토로 주장해왔고 실질적으로 편입하기 위해 준비를 갖춰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차세계대전이 종결된 틈을 타 1919년에 11만명이었던 병력을 1920년에는 60만명까지 확대했으며 이 과정에서 폴란드계 미국인들과 연합국 포로들까지 끌어들였다.

유제프 피우수트스키는 우크라이나를 지금 러시아 혁명의 혼란으로 러시아의 힘이 빠져있을 때 분리해야 폴란드의 안전이 보장된다고 판단, 마침내 무력으로 우크라이나를 공격했다. 이때 붉은 소비에트의 등장을 방관할 수 없던 서구 열강들은 폴란드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해줬고 자신감을 얻은 피우수트스키는 "폴란드군은 우크라이나인들의 합법적인 정부가 자신의 영토를 통제할 능력을 되찾을 때까지 키예프에 가능한 한 장기간 주둔할 것"이라며 야심을 드러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인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과거 러시아와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았을 때부터 폴란드인들은 우크라이나 서부 지역에서 지주로 군림하며 우크라이나인 소작인들에게 가혹하게 대하기로 악명이 높았었기 때문. 따라서 우크라이나인들 입장에선 볼셰비키나 폴란드나 둘 다 침략자로 인식되었기에 폴란드의 지배를 거부하며 적극적으로 저항했다.

그 틈을 타서 소련군은 폴란드군을 밀어냈는데 결국 그 해 6월 폴란드군은 키예프에서 철군하고 말았다. 이러면서 장기간 주둔 계획은 실패로 끝났고 7월 14일에는 소련군에게 빌뉴스까지 내줬자. 8월 2일에 와서는 바르샤바 60마일 지점까지 소련군이 진격하면서 폴란드는 독립이 다시 물거품이 될 국가 최악의 위기 상태에 빠지게 된다.

이때 폴란드 총리 그라프스키는 영국과 프랑스에게 지원을 호소했다. 두 나라는 1919년 12월 8일 당시 경계선을 기준으로 휴전을 제안했는데 이는 남쪽으로는 카르파티아 산맥까지 프셰미실은 폴란드가 차지하되 동부 갈라치아는 포기하라는 것이었다. 다음날엔 영국 외무장관 커즌 경이 이와 비슷한 제안을 소련에게도 했는데 정작 폴란드와 소련 모두 휴전 제의를 거부했다.

그러던 와중 8월 15일, 피우수트스키가 직접 지휘하는 2만명의 돌격대가 방심하고 있던 소련군을 기습하여 커다란 승리를 거뒀다. 이 날은 훗날 폴란드의 국군의 날로 지정되었으며 비스와 강의 기적이라고 부른다. 여세를 몰아 폴란드군은 10월 쯤에는 벨라루스의 수도인 민스크 부근까지 진격했으나 여기서 교착 상태에 빠졌고 오랜 전쟁으로 경제가 파탄나며 더 이상 이어갈 능력이 없어진 상태였다.

그런 와중에도 폴란드는 역사적으로 폴란드 영토라면서 전략적 요충지인 리투아니아의 빌뉴스를 점령하면서 리투아니아와도 갈등을 키웠다. 그 후 소련과는 10월 12일, 라트비아 리가에서 평화협정을 체결하며 전쟁을 끝냈고 폴란드는 우크라이나 서부와 벨라루스 서부의 약 13만 5,000 제곱 킬로미터의 영토를 추가로 차지하게 되었다.

전쟁 기간 동안 전투가 벌어지는 영토는 방대했고 군대는 기다란 대형으로 끝없이 펼쳐졌다. 이런 상황 덕분에 폴란드군과 소련군 양측은 서로 상대 진영에 어렵지 않게 침투할 수가 있었다. 또한 소련은 폴란드 내 노동자들과 농민들이 봉기를 일으켜 피우수트스키 정권을 무너뜨리고 혁명 정권을 수립할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실상은 오히려 폴란드 노동자들과 농민들은 소련을 침략자로 인식하고 피우수트스키에게 협력했다.

이렇게 독립 직후에 전쟁은 끝났지만 여전히 폴란드는 상황이 좋지 못했다. 비스와 강 어귀에 위치한 단치히는 인구의 90% 이상이 독일인이었지만 연합국은 폴란드에게 항구를 준다는 명목으로 자유도시라는 이름으로 넘겨줬다. 또한 독일과 폴란드의 국경에서는 여러차례 무력충돌이 벌어졌는데 이때 폴란드 민병대는 바이마르 공화국군을 대신해서 나온 자유군단과 치열한 전투를 치렀지만 패하고 말았다.

한편 동프로이센과 본토가 분리되어 버린 독일은 폴란드에 대해 악감정을 가지기 시작했고 이는 1939년 폴란드 침공의 원인 중 하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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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부터 이어진 쿠바의 바티스타 정권은 1950년대를 지나며 부패와 무능, 정책 실패로 인해 불만 여론이 꽤나 많은 상황이었다. 그 와중에 1958년 말, 카스트로 형제와 체 게바라가 이끄는 혁명군은 마에스트라 상륙 이후부터 치열한 전투 끝에 정부군을 격퇴하고 그들의 요충지인 산타클라라를 점령했다. 그리고는 얼마 뒤 아바나에 입성하고 바티스타가 쫓겨나며 피델 카스트로 정권이 세워졌다.


카스트로 정권은 집권 초기부터 개혁을 내세웠는데 실제로 1959년 5월부터 토지개혁을 위한 대량의 토지매입 및 빈농을 대상으로 한 분배가 시작된다. 이러한 급진적인 토지개혁 실시에는 체 게바라와 오스카르 피노스 같은 자들의 입김이 컸었다. 거기다가 토지개혁법은 외국인에 의한 토지 소유 및 소작을 금지하고 그들의 재산을 국유화 했었는데 당연히 쿠바 경제에 지분이 크던 미국 정부는 쿠바와의 거래 중단이라는 압박을 가했었다.


하지만 그럴 수록 쿠바는 미국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대신에 새로운 파트너이자 미국의 적국인 소련과 연간 100만톤 가량의 설탕 및 기타 농산물 매입 및 경제 개발 지원금을 받아내기로 하는 합의를 맺으며 더욱 강경하게 나왔다. 결국 1961년 4월, 미국 CIA의 지원 아래 미국 내 쿠바인 망명자들은 카스트로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피그스만 침공을 감행 했지만 오히려 전멸 당하고 말았으며 그 후 쿠바는 스스로 사회주의 국가임을 선언했다.


한편 피그스만 침공은 안 그래도 반미로 기울어가던 카스트로의 성향이 더 강경해지는 계기가 되었고 이러한 맥락에서 쿠바는 소련과 접촉하여 미사일 기지를 쿠바에 건설하게 된다. 그러나 얼마 못가 1961년 10월 14일 기지 건설은 발각되었고 당연히 여기에 분노한 미국 케네디 행정부는 NSC를 소집하고 해상봉쇄를 감행, 미군 합참의장의 주도로 군사경계태세를 데프콘3로 설정하는 한편 쿠바에 대한 무력침공 계획까지 수립되었다.


예상보다 단호한 케네디 행정부의 입장에 놀란 소련의 흐루시초프는 결국 한 발 물러섰고 이로써 소련은 10월 28일에 쿠바로부터 소련 미사일을 철수하기로 결정하며 쿠바 미사일 사태는 종식되었다. 그런데 협상이 마무리 되기 이틀전인 10월 26일, 아직 상황을 잘 파악 못하고 있던 카스트로는 소련 대사관에서 흐루시초프에게 줄 편지를 작성하고 소련 대사에게 전달했고 이를 읽은 소련 대사는 카스트로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

" 당신은 소련이 미국을 향해 핵무기를 발사하도록 흐루시초프 동지에게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러자 카스트로도 직설적으로 대답했다.

" 그렇습니다. 만약 그들이 쿠바를 공격한다면, 우리는 그들을 지구상에서 전멸시켜버려야 합니다! "


이를 들은 소련 대사는 상당히 충격 받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전달해줄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곧 편지는 러시아어로 번역되어 흐루시초프에게 전달되었고 흐루시초프는 대책회의 도중 이 편지를 받고 경악한 말투로 이렇게 외쳤다.

" 이건 미친 짓이다. 카스트로는 죽기로 작정하고, 쿠바인들과 우리를 함께 무덤으로 끌고 가기를 원한다! "


10월 28일, 흐루시초프는 카스트로에게 답장을 보냈다. 그는 이 답장에서 이미 미국으로부터 쿠바 불침공을 약속받았기 때문에 제발 감정적으로 행동하지 말라고 당부했으며 흐루시초프는 구세주의 심경으로 혁명을 순교로 승화시켜려는 카스트로를 제정신이 아닌 놈으로 판단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왜 카스트로는 진지하게 저런 망상을 했는가 하면 그건 소련이 제공한 핵무기의 목적인 침략의 발생시 미국을 파괴하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쿠바가 과거 스페인 식민지 시절부터 겪어온 굴욕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고 서구의 제국주의자들을 물리쳐야 한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쿠바는 현실적으로 미국의 공격에서 살아남을 가능성이 없었다.


그래서 카스트로는 쿠바인들과 소련인들이 함께 '마지막 날까지 최후의 일인까지 무기를 들고' 미국에 저항해야 한다는 1억 총옥쇄론과 유사한 주장을 펼쳤다. 실제로 카스트로는 소련 대사를 불러다가 쿠바 상공을 비행하는 미 정찰기를 사격하자고 주장하거나 모스크바 측에 더 강한 군사적인 대응을 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흐루시초프가 쿠바에 미사일을 배치한 것은 미국과의 체제 경쟁을 위한 수단 중 하나였으며 먼저 발사할 의도도 없었다고 하는데 이는 즉 방어적 무기로서 배치했다는 의미다. 그러니 흐루시초프가 카스트로의 말 같지도 않는 망상을 바로 일축시켜버린 것이라고 봐고 봐도 무방하다.


출처:

- 최정순, <쿠바혁명과 그 변천에 관한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석사논문, 1990, p8~12, p30~31, p37~39

- 이창위, <북핵 앞에 선 우리의 선택>, 궁리, 2019, p192~201

- 리처드 파이프스, <공산주의의 역사>, 을유문화사, 2001, p203~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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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초반 기습 남침으로 한국 측은 계속 남쪽으로 밀려나면서 상당수의 남한 지역은 북괴군의 영향력 아래에 들어왔다. 이때 북괴는 겉으로는 인민위윈회를 내세웠지만 실질적으로는 조선 로동당과 내무서(경찰), 검찰 등의 강제력이 구동되었는데 그 덕분인지 점령 후 2주만에 주민에 대한 인구조사와 신상파악을 끝낼 정도로 리 단위 이하의 주민에 대한 통제력을 만들었다.

그러나 예상 외로 전쟁은 빨리 끝나지 않았다. 낙동강 방어선은 북괴군의 생각보다 견고했고 1950년 7월에는 인민군의 손실 규모가 6만명에 가까울 정도였다. 이러면서 겉으로 여유를 가지려던 북괴 정부의 태도는 긴박한 상황에 맞춰서 아예 완전히 전시 총동원 체제로 전환했으며 이는 전쟁 발발 이후에 이제 막 점령했던 남한 지역도 마찬가지였었다.

그리하여 1950년 7월 14일 북괴는 군사위원회의 결정에 따라서 '군사동원에 대한 규정'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인적 자원 동원에 나섰다. 여기에 따라서 18세 이상, 37세 이하의 남자들을 끌어가기 시작했는데 겉으로는 자원이라고 포장했지만 시,군,면 단위로 내려갈 수록 행정기관들에 의한 강제징집이 심각해졌다.

시흥군의 경우에는 8월 이후부터 각 면별로 의용군 조직위원회를 만들어서 면마다 각자 몇백명씩 할당량을 줬다. 그래서 민청과 여맹, 인민위원회 같은 어용조직들까지 나선 결과 불과 며칠 만에 3,000명이 넘는 인원이 의용군이라는 명목 아래 강제로 북괴군에게 입대하게 되어버렸다.

재미있는 것은 의용군으로 징집된 인원 중에서는 전쟁 전에 대한청년단이라는 반공 단체에서 활동했었던 자도 있다는 것이다. 시흥군 동면 출신 의용군 참가자 210명 중 신원이 확인된 186명 중에 무려 절반 이상인 99명이 대한청년단 출신이다. 또한 보도연맹원 출신도 의외로 꽤 있었는데 이는 아마 일종의 전향자 단체인 보도연맹에 가입했었던 경력을 씻고 북괴에게 충성심을 과시하기 위함일 가능성이 높다.

어쨌든 남한 점령지 내 적극적인 의용군 강제 동원 결과인지 안동 부근에 배치된 13사단 병력의 80%는 남한 출신 징집병들이었고 4사단도 약간 더 적은 70% 수준의 비율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강제 징집으로 끌려온 자들인 만큼 공산주의 이념과 당에 대한 충성심은 당연히 많이 떨어졌고 그래서 훗날 북괴군 중 반공포로들의 구성을 보면 이때 징집된 의용군 출신들이 많았다.

의용군 징집 외에도 노동 동원도 많았다. 내무성은 각 지역인민위원회에게 지시를 내려서 미군의 공습으로 파괴된 교량이나 도로를 복구하는 공사에 지역주민들을 강제로 끌어다가 쓰게 했는데 정비에 필요한 망치나 삽 등의 장비는 대원들이 의무적으로 챙기게 했다. 한편으로는 미군의 폭격에 대비해 방공호 건설에도 동원된 점령지 주민들의 노동력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동시에 북괴 측은 이승만 정부와 지주 계급이 농민들을 세금으로 괴롭혀왔다고 외치며 이제부터는 각종 세금 징수로부터 해방 시켜주겠다고 외쳤지만 당연히 입만 열면 구라인 북괴답게 지킬리는 없었다. 당장 토지소유권을 증명하려면 160원이나 되는 돈을 납부해야 했고 밀이나 보리, 조 같은 곡식에도 현물세라는 이름으로 세금이 붙어버렸었다.

거기다가 수확고 판정을 받으려면 파종면적에 대한 판정과 예상수확고 판정이 필요했었는데 문제는 북괴 관료들이 아예 한 이삭 당 평균 알수를 세거나 중량을 재가지고 평당 수확고, 총수확고를 정하는 방식이 점령지 주민들에게는 딱히 익숙하지가 않았다. 무엇보다도 기존 이승만 정부의 유상매수 유상분배식 농지개혁에 농민들은 크게 불만이 없었기에 북괴의 사회주의식 토지제도에는 호응이 많을 수가 없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양곡수매라는 이름으로 행 해지는 쌀 수탈도 심각해져갔다. 각 도,군별로 할당량이 정해지자 행정기관들의 주도로 조직적인 동원 활동이 전개되었고 아직 가을 추수 전이라서 농민들은 식량과 자가축적분까지 넘겨줘야 했다. 그것도 모자랐는지 주민들은 미군의 폭격 위험을 무릅쓰고 식량 운반까지 해야 했었고 북괴군을 위한 성금이랍시고 할당량을 정해서 강제 모금을 하기도 했다. 또 석유와 의약품도 중요 물자랍시고 마을 주민들이 소지하고 있던 것들을 작은 병 단위까지도 전부 압수하기도 했다.

이러한 북괴의 억압통치가 지속되자 주민들 사이에선 불만이 조성되었고 북괴 측은 이에 맞서서 치안 유지를 위해 자위대(자경단)을 조직했다. 이들은 반대파들에 대한 감시명단을 작성하고 인민재판 등의 학살짓을 저지르던 내무서의 협력 아래 칼, 몽둥이, 낫 등으로 무장하고 다니면서 '반동분자'로 분류되는 자들을 숙청하는 것에 앞장서고 다니며 주민들의 원한을 샀다.

요약하자면 6.25 전쟁 초반기 북괴의 남한 지역 통치 방식 매우 가혹한 수준이었으며 전쟁 전까지만 해도 사회주의에 대한 동조 여론이 있던 한국인들의 정서가 반공으로 확실히 기울어가는 것에 커다란 영향을 줬다고 볼 수가 있다.

- 출처: 장병준 <한국전쟁기 북한의 점령지역 동원정책과 '공화국 공민' 만들기>, 2012, KCI 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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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 사후 소련 공산당의 서기장이 된 이오시프 스탈린은 집단화 정책을 펼쳤는데 이때 산업화를 추진하기 위한 자금의 상당수를 농민들에게서 거뒀다. 또한 어떤 형태의 독립적인 농업 공동체도 허용하지 않으며 대신에 모든 농민들을 당에서 지도하는 집단 농장에서 일하게 했다. 이로써 공산당이 그토록 외치던 토지개혁은 결코 농민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전국의 토지를 국유화 시키기 위해 써먹은 기만술이었다는게 드러났다.

이러한 조치는 갑작스럽게 자신의 땅이 빼앗김에 분노한 농민들의 저항을 낳았는데 소련 공산당은 이들을 전부 부농 계급으로 몰아세워서 말살시키기로 작정했다. 그리하여 당은 부농으로 분류된 자들의 재산을 전부 몰수한 후에 그들은 시베리아의 강제노동수용소(굴라크)에 보내졌다. 공식 기록에는 1930~1931년 사이에 180만 3천 322명이 이러한 이유로 처벌을 받았으며 이들중 처형을 면한 자들 중 30%가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어갔다.

농민들에 대한 당의 착취가 점점 심해지면서 특히나 기준 생산고를 다 채우지 못한 농부들은 굶주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식량에 대한 절도가 늘어났는데 1932년 8월에는 당의 재산에 대해 어떠한 형태의 절도나 훼손을 입히면 사형 또는 10년 이상의 강제노동형에 처한다는 법령까지 나왔다. 법이 시행된 지 16개월 만에 12만명이 유죄 선고를 받았고 그 중에서 5천 4백명이 사형을 선고받았다.

상황이 이러해지자 스탈린 통치 시절 소련에서는 농민들의 지위가 과거 러시아 제국의 농노제보다 못해졌다. 최소한 농노제 시절에는 개인의 곡물과 가축을 제한이 있기는 해도 어쨌든 소유는 할 수 있었지만 이 시기에는 딱 최소한의 생필품만 배급받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실제로 1935년 정말 열심히 일한 농민 집안이 집단 농장과 당으로부터 받은 임금은 연간 247루블이었는데 이 정도는 고작 구두 한 컬레 밖에 살 수가 없었다.

스탈린은 예전부터 농민들을 소부르주아로 취급하면서 싫어했었다고 하는데 그 때문인지 극단적인 폭력도 거리낌 없이 사용했다. 그의 그런 폭력적인 정책으로 가장 극심한 피해를 입은 곳은 바로 우크라이나 지역이었는데 여기는 곡창지대이기도 하고 지역 농민들(특히 자작농)도 소련 공산당의 농업 집단화 정책에 대해 반대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는 농산물 수출로 급속한 산업화에 필요한 재정을 확보하려던 소련 공산당에게는 방해물이었다.

그러던 중 우크라이나에서 농업 생산량이 떨어지자 당은 그 원인을 부농 계급 탓이라고 책임 전가하며 이들이 생산한 곡물을 내놓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 후에 부농들의 농장들을 급습해서 식용 또는 종자용을 포함해서 보관된 모든 곡물들을 모조리 가져갔다. 그러자 농민들은 집단농장에 농사일에 필요한 소들을 내놓기 보단 차라리 도살하는 것을 선택했는데 이 때문에 일할 소들의 부족으로 농사 지을 수 있는 면적은 급격히 줄어들었다.

그 결과 엄청난 곡창지대 였었던 우크라이나에 대기근(홀로도모르, 인위적 대기근)이 몰아닥치게 된다. 이 대기근은 농촌 지역을 집중 강타했고 소련 정부는 이 사실이 외부로 알려지지 못하게 통제했다. 또한 이 시기에도 우크라이나 지역의 농산물 수탈은 지속되었으며 기차를 통해 탈출하려던 사람들은 전부 다시 농촌으로 돌려보내졌다. 이러한 홀로도모르로 죽은 숫자는 정확한 자료는 없지만 희생자가 1000만명 단위를 넘어선다는 얘기도 있다.

스탈린의 폭력성은 1930년대 전반기에 절정에 달하게 되었다. 1934년에는 레닌그라드 지역당의 서기장이자 스탈린의 추종자였던 키로프는 갑자기 암살당했는데 상황 증거로 보아 살해를 부추킨 인물은 스탈린일 것이라는 가능성이 높다. 죽인 이유로는 그가 당원들의 인기를 많이 얻었다는 것. 어쨌거나 스탈린은 그를 암살함으로써 잠재적 경쟁자를 제거하고 다음으로는 반소비에트 음모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투쟁을 벌일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마련했다.

대숙청은 일반 시민은 물론 당원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절정기였던 1937~1938년에는 최소 150만명이 지방당 서기와 소송 대리인, 지방 비밀경찰 책임자 등 3인으로 구성된 법정으로 끌려왔다. 그들 중 대다수는 공산당 평가 기준대로 봐도 아무 죄도 없었지만 이들에게는 항소도 허용되지 않은 채 바로 사형이나 강제 노동 등의 유죄 선고를 받게 되었다. 이러한 일이 벌어진 이유는 바로 당 정치국에서 경찰에게 '숙청 할당량'을 주고 해당 지방에 거주하는 주민들 중 몇 퍼센트를 총살하고 몇 퍼센트를 수용소에 보낼지를 지시하는게 그 시절의 방침이었기 때문이었다.

1937년 6월 2일, 당 정치국은 모스크바 시 측에 숙청 할당량으로 3만 5천명을 제시했고 이 중에서 5천명은 총살 대상이었다. 한달 뒤에는 전국에 각 지역마다 숙청할 사람들의 수를 할당했고 역시나 이 중에서도 7만명은 재판 없이 처형을 받기로 정해져 있었다. 대숙청에 희생된 자들 중에는 고등 교육을 받은 엘리트 계층도 꽤 있었는데 이들을 없앤 이유는 당에서 통제하기가 어렵다는 것 때문이었다.

대숙청 과정에서 스탈린의 공포정치를 적극적으로 보좌해준 인물으로는 니콜라이 예조프가 있었다. 그는 1936~1938년 사이에 NKVD(내무인민위원회)의 수장으로서 학살을 주도했지만 결국 그 역시 스탈린과의 충돌로 인해 숙청되었다. 그 뒤로 라브렌티 베리야가 스탈린의 충견 노릇을 하게 되었다. 베리야는 비밀경찰을 총괄하며 반소비에트 인사들을 고문 및 숙청하는 것을 넘어서 아예 우편물 감시까지 하거나 2차대전 기간 도중에는 발트 3국과 폴란드에서 학살을 주도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1930년대 소련에서는 일반 시민들이 우연히 내뱉은 말이나 개인적인 감정이 안좋은 자들의 모함 고발 때문에 투옥되기 했으며 사회 전반에는 병적인 공포와 의심이 강해져갔다. 스탈린 시기에 소련 공산당의 고위 간부였던 니콜라이 불가닌은 "스탈린의 친구로서 초대받던 자가 막상 스탈린과 함께 앉으면 그는 다음에 집으로 갈지 아니면 감옥으로 갈지 알지 못한다"고 했으며 소련 외무장관을 지낸 안드레이 그로미코는 스탈린 시대에는 둘 이상의 정치국 직원들은 음모를 꾸민다는 의심을 받기 두려워해서 절대로 같이 차를 타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소련이 붕괴된 뒤에 기밀 문서 보관서에서 나온 내용에 따르면 1937~1938년 사이에 비밀경찰들은 반소비에트 혐의로 154만 8천 366명을 구금했으며 이 중에서 68만 1천 692명을 총살했다. 이 수치는 거의 하루에 1천명을 처형한 것이며 살아남은 자들도 대다수는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일하다가 사망했다.

- 출처: 리처드 파이프스 <공산주의의 역사>, 을유문화사,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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