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1년 3월 17일, 폴란드 제헌의회는 중대한 과업을 종결했다. 이로써 사회주의자들이 지향했던 이념보단 보수적이고 민족민주당과 우익 세력들이 지향했던 이념보다 민주적이고 다원적인 헌법이 탄생했다. 이 헌법에 따라 보통선거제도와 상하원 제도가 확립되었다.
이 시기 폴란드에서 상원은 법안을 발의할 수 없었지만 하원에서 통과된 법안을 거부할 권한이 있었고 하원의 55%가 다시 가결하면 상원의 거부권을 뒤집을 수 있는 등 체제는 나름 민주적으로 작동했다. 하원에서 최대 득표율을 거둔 정당은 총리를 디명하고 정부를 구성할 수 있었으나 과반을 차지한 정당이 없어서 한동안 연립정부가 불가피했다.
한편 새 헌법은 민족주의 견제 목적에서 '민족' 대신 '시민'의 개념이 자리잡았다. 여기에 개별적인 시민에 우선하는 민족의 이해관계와 요구를 강조하는 민족민주당은 헌법이 끈끈하고 동질적인 문화적 공동체로서 민족을 신성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점에 실망했다. 또한 가톨릭 교회들도 헌법이 가톨릭을 유대교나 비가톨릭 교파와 동등한 일개 교파로 추락시켰다고 비난했다.
좌파 역시 헌법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 그들은 1918년 독립 국가 건설 과정에서 이룬 성과가 헌법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보편적인 시민 권리, 무상교육, 국가 지원 등에는 만족하면서도 이 내용들이 자본주의 복지국가적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헌법 99조에서 사유재산을 "사회체제와 법질서의 가장 중요한 토대 가운데 하나"라고 선언해 보상 없는 몰수나 재분배를 금지한 것에 대해 반발했다.
1922년 사회당은 농민당과의 단일화로 가브리엘 나루토비치를 간신히 대통령에 선출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루토비치는 그리 유명한 인물은 아니었는데 1920년 공공행정 장관직을 맡으며 성과를 많이 내고 특정 정치 세력의 등을 업지 않았던 것이 지지 확보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그가 집권하자마자 민족민주당은 새 대통령을 인정하지 않으며 '폴란드의 다수파'를 대변하는 인물이 아니라 유대인과 다른 '외국인들'을 대변하는 정당의 득표로 선출되었다고 주장했다.
폭력이 계속 난무하는 가운데 1922년 12월 11일, 가브리엘 나루토비치 대통령은 취임식을 했다. 하지만 나루토비치는 닷새 뒤 바르샤바 미술관 전시회 개막식에 참여했다가 민족민주당을 지지하는 자에게 암살당했고 친민족민주당 성향의 언론들도 나루토비치 암살을 옹호했다. 암살 직후 의회는 다시 소집되어 3분의 2라는 다수의 득표로 스타니스와프 보이치에호프스키가 두번째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권력은 곧 민족민주당을 비롯한 우익 세력에게 넘어갔고 폴란드군 참모총장 자리를 유지하고 있던 유제프 피우수트스키는 1923년 5월 29일, 민족민주당을 비난하며 사퇴 후 두 번째 아내인 알렉산드라 슈체르빈스카와 함께 바르샤바 인근의 술레우베크으로 가며 은퇴했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폴란드 정국은 여전히 안정을 되찾지 못한 채 혼란에 빠졌고 그렇게 짧았던 민주주의는 종말을 향해 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