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초반 기습 남침으로 한국 측은 계속 남쪽으로 밀려나면서 상당수의 남한 지역은 북괴군의 영향력 아래에 들어왔다. 이때 북괴는 겉으로는 인민위윈회를 내세웠지만 실질적으로는 조선 로동당과 내무서(경찰), 검찰 등의 강제력이 구동되었는데 그 덕분인지 점령 후 2주만에 주민에 대한 인구조사와 신상파악을 끝낼 정도로 리 단위 이하의 주민에 대한 통제력을 만들었다.
그러나 예상 외로 전쟁은 빨리 끝나지 않았다. 낙동강 방어선은 북괴군의 생각보다 견고했고 1950년 7월에는 인민군의 손실 규모가 6만명에 가까울 정도였다. 이러면서 겉으로 여유를 가지려던 북괴 정부의 태도는 긴박한 상황에 맞춰서 아예 완전히 전시 총동원 체제로 전환했으며 이는 전쟁 발발 이후에 이제 막 점령했던 남한 지역도 마찬가지였었다.
그리하여 1950년 7월 14일 북괴는 군사위원회의 결정에 따라서 '군사동원에 대한 규정'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인적 자원 동원에 나섰다. 여기에 따라서 18세 이상, 37세 이하의 남자들을 끌어가기 시작했는데 겉으로는 자원이라고 포장했지만 시,군,면 단위로 내려갈 수록 행정기관들에 의한 강제징집이 심각해졌다.
시흥군의 경우에는 8월 이후부터 각 면별로 의용군 조직위원회를 만들어서 면마다 각자 몇백명씩 할당량을 줬다. 그래서 민청과 여맹, 인민위원회 같은 어용조직들까지 나선 결과 불과 며칠 만에 3,000명이 넘는 인원이 의용군이라는 명목 아래 강제로 북괴군에게 입대하게 되어버렸다.
재미있는 것은 의용군으로 징집된 인원 중에서는 전쟁 전에 대한청년단이라는 반공 단체에서 활동했었던 자도 있다는 것이다. 시흥군 동면 출신 의용군 참가자 210명 중 신원이 확인된 186명 중에 무려 절반 이상인 99명이 대한청년단 출신이다. 또한 보도연맹원 출신도 의외로 꽤 있었는데 이는 아마 일종의 전향자 단체인 보도연맹에 가입했었던 경력을 씻고 북괴에게 충성심을 과시하기 위함일 가능성이 높다.
어쨌든 남한 점령지 내 적극적인 의용군 강제 동원 결과인지 안동 부근에 배치된 13사단 병력의 80%는 남한 출신 징집병들이었고 4사단도 약간 더 적은 70% 수준의 비율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강제 징집으로 끌려온 자들인 만큼 공산주의 이념과 당에 대한 충성심은 당연히 많이 떨어졌고 그래서 훗날 북괴군 중 반공포로들의 구성을 보면 이때 징집된 의용군 출신들이 많았다.
의용군 징집 외에도 노동 동원도 많았다. 내무성은 각 지역인민위원회에게 지시를 내려서 미군의 공습으로 파괴된 교량이나 도로를 복구하는 공사에 지역주민들을 강제로 끌어다가 쓰게 했는데 정비에 필요한 망치나 삽 등의 장비는 대원들이 의무적으로 챙기게 했다. 한편으로는 미군의 폭격에 대비해 방공호 건설에도 동원된 점령지 주민들의 노동력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동시에 북괴 측은 이승만 정부와 지주 계급이 농민들을 세금으로 괴롭혀왔다고 외치며 이제부터는 각종 세금 징수로부터 해방 시켜주겠다고 외쳤지만 당연히 입만 열면 구라인 북괴답게 지킬리는 없었다. 당장 토지소유권을 증명하려면 160원이나 되는 돈을 납부해야 했고 밀이나 보리, 조 같은 곡식에도 현물세라는 이름으로 세금이 붙어버렸었다.
거기다가 수확고 판정을 받으려면 파종면적에 대한 판정과 예상수확고 판정이 필요했었는데 문제는 북괴 관료들이 아예 한 이삭 당 평균 알수를 세거나 중량을 재가지고 평당 수확고, 총수확고를 정하는 방식이 점령지 주민들에게는 딱히 익숙하지가 않았다. 무엇보다도 기존 이승만 정부의 유상매수 유상분배식 농지개혁에 농민들은 크게 불만이 없었기에 북괴의 사회주의식 토지제도에는 호응이 많을 수가 없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양곡수매라는 이름으로 행 해지는 쌀 수탈도 심각해져갔다. 각 도,군별로 할당량이 정해지자 행정기관들의 주도로 조직적인 동원 활동이 전개되었고 아직 가을 추수 전이라서 농민들은 식량과 자가축적분까지 넘겨줘야 했다. 그것도 모자랐는지 주민들은 미군의 폭격 위험을 무릅쓰고 식량 운반까지 해야 했었고 북괴군을 위한 성금이랍시고 할당량을 정해서 강제 모금을 하기도 했다. 또 석유와 의약품도 중요 물자랍시고 마을 주민들이 소지하고 있던 것들을 작은 병 단위까지도 전부 압수하기도 했다.
이러한 북괴의 억압통치가 지속되자 주민들 사이에선 불만이 조성되었고 북괴 측은 이에 맞서서 치안 유지를 위해 자위대(자경단)을 조직했다. 이들은 반대파들에 대한 감시명단을 작성하고 인민재판 등의 학살짓을 저지르던 내무서의 협력 아래 칼, 몽둥이, 낫 등으로 무장하고 다니면서 '반동분자'로 분류되는 자들을 숙청하는 것에 앞장서고 다니며 주민들의 원한을 샀다.
요약하자면 6.25 전쟁 초반기 북괴의 남한 지역 통치 방식 매우 가혹한 수준이었으며 전쟁 전까지만 해도 사회주의에 대한 동조 여론이 있던 한국인들의 정서가 반공으로 확실히 기울어가는 것에 커다란 영향을 줬다고 볼 수가 있다.
- 출처: 장병준 <한국전쟁기 북한의 점령지역 동원정책과 '공화국 공민' 만들기>, 2012, KCI 등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