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 시절 바르샤바 대공국이라는 이름으로 잠시 독립을 쟁취한 것을 빼면 근대 시대 동안 강대국에게 지배를 받아왔던 폴란드는 독립과 함께 억눌려있던 민족주의가 폭발하고 말았다. 그러면서 그들은 과거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시절의 전성기 영토를 되찾자고 부르짖으며 패권주의라는 침략의 길로 빠져들고 말았다.
폴란드는 우선 발트 해 연안과 체코슬로바키아 일부, 서부 우크라이나와 서부 벨라루스 지역을 자신의 영토로 주장해왔고 실질적으로 편입하기 위해 준비를 갖춰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차세계대전이 종결된 틈을 타 1919년에 11만명이었던 병력을 1920년에는 60만명까지 확대했으며 이 과정에서 폴란드계 미국인들과 연합국 포로들까지 끌어들였다.
유제프 피우수트스키는 우크라이나를 지금 러시아 혁명의 혼란으로 러시아의 힘이 빠져있을 때 분리해야 폴란드의 안전이 보장된다고 판단, 마침내 무력으로 우크라이나를 공격했다. 이때 붉은 소비에트의 등장을 방관할 수 없던 서구 열강들은 폴란드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해줬고 자신감을 얻은 피우수트스키는 "폴란드군은 우크라이나인들의 합법적인 정부가 자신의 영토를 통제할 능력을 되찾을 때까지 키예프에 가능한 한 장기간 주둔할 것"이라며 야심을 드러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인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과거 러시아와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았을 때부터 폴란드인들은 우크라이나 서부 지역에서 지주로 군림하며 우크라이나인 소작인들에게 가혹하게 대하기로 악명이 높았었기 때문. 따라서 우크라이나인들 입장에선 볼셰비키나 폴란드나 둘 다 침략자로 인식되었기에 폴란드의 지배를 거부하며 적극적으로 저항했다.
그 틈을 타서 소련군은 폴란드군을 밀어냈는데 결국 그 해 6월 폴란드군은 키예프에서 철군하고 말았다. 이러면서 장기간 주둔 계획은 실패로 끝났고 7월 14일에는 소련군에게 빌뉴스까지 내줬자. 8월 2일에 와서는 바르샤바 60마일 지점까지 소련군이 진격하면서 폴란드는 독립이 다시 물거품이 될 국가 최악의 위기 상태에 빠지게 된다.
이때 폴란드 총리 그라프스키는 영국과 프랑스에게 지원을 호소했다. 두 나라는 1919년 12월 8일 당시 경계선을 기준으로 휴전을 제안했는데 이는 남쪽으로는 카르파티아 산맥까지 프셰미실은 폴란드가 차지하되 동부 갈라치아는 포기하라는 것이었다. 다음날엔 영국 외무장관 커즌 경이 이와 비슷한 제안을 소련에게도 했는데 정작 폴란드와 소련 모두 휴전 제의를 거부했다.
그러던 와중 8월 15일, 피우수트스키가 직접 지휘하는 2만명의 돌격대가 방심하고 있던 소련군을 기습하여 커다란 승리를 거뒀다. 이 날은 훗날 폴란드의 국군의 날로 지정되었으며 비스와 강의 기적이라고 부른다. 여세를 몰아 폴란드군은 10월 쯤에는 벨라루스의 수도인 민스크 부근까지 진격했으나 여기서 교착 상태에 빠졌고 오랜 전쟁으로 경제가 파탄나며 더 이상 이어갈 능력이 없어진 상태였다.
그런 와중에도 폴란드는 역사적으로 폴란드 영토라면서 전략적 요충지인 리투아니아의 빌뉴스를 점령하면서 리투아니아와도 갈등을 키웠다. 그 후 소련과는 10월 12일, 라트비아 리가에서 평화협정을 체결하며 전쟁을 끝냈고 폴란드는 우크라이나 서부와 벨라루스 서부의 약 13만 5,000 제곱 킬로미터의 영토를 추가로 차지하게 되었다.
전쟁 기간 동안 전투가 벌어지는 영토는 방대했고 군대는 기다란 대형으로 끝없이 펼쳐졌다. 이런 상황 덕분에 폴란드군과 소련군 양측은 서로 상대 진영에 어렵지 않게 침투할 수가 있었다. 또한 소련은 폴란드 내 노동자들과 농민들이 봉기를 일으켜 피우수트스키 정권을 무너뜨리고 혁명 정권을 수립할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실상은 오히려 폴란드 노동자들과 농민들은 소련을 침략자로 인식하고 피우수트스키에게 협력했다.
이렇게 독립 직후에 전쟁은 끝났지만 여전히 폴란드는 상황이 좋지 못했다. 비스와 강 어귀에 위치한 단치히는 인구의 90% 이상이 독일인이었지만 연합국은 폴란드에게 항구를 준다는 명목으로 자유도시라는 이름으로 넘겨줬다. 또한 독일과 폴란드의 국경에서는 여러차례 무력충돌이 벌어졌는데 이때 폴란드 민병대는 바이마르 공화국군을 대신해서 나온 자유군단과 치열한 전투를 치렀지만 패하고 말았다.
한편 동프로이센과 본토가 분리되어 버린 독일은 폴란드에 대해 악감정을 가지기 시작했고 이는 1939년 폴란드 침공의 원인 중 하나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