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사물들 - 시인의 마음에 비친 내밀한 이야기들
강정 외 지음, 허정 사진 / 한겨레출판 / 2014년 6월
평점 :
절판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가기 위해서는 남들이 보지 못한 것을 보고, 남들이 하지 못한 생각을 해야 한다. 시인들은 남과 다른 시인만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세상 모든 것에 말을 걸고, 생명 없는 것을 살아 움직이게 하며, 일상적인 언어도 그들만의 특별한 언어로 재탄생시킨다. 시인들은 사물을 통해 영감을 얻고 자신을 표현하기도 한다. 사물은 내면세계를 드러내는 창이자, 타자를 받아들이는 매개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한겨레출판의 문학웹진 한판에서 지난해 3월부터 1년간 연재한 쉰두 명의 시인이 사물 하나씩을 골라 쓴 에세이 모음집이다.

 

나는 평소 시를 잘 읽지 않는 편이라 52명의 작가 중에 아는 작가는 없다. 시인의 산문은 평소에 쉽게 보기 어렵기 때문에 호기심을 가지고 읽게 되었다. 에세이지만 시인들이 써서 그런지 마치 산문시 같은 느낌이 들었고, 각각의 느낌이 다르고, 굉장히 짧기 때문에 생활 속에서 누구나 쉽게 짬을 내 읽기에 안성맞춤이다.

 

충남 청양 출생 전영관 시인은 냉장고는 문을 열 때마다 한 번도 어김없이 불을 켜준다. 이제는 드나들 일 많지 않지만 내가 오랜 가난의 문을 열 때마다 환했던 건 아버지 덕분이다. 냉장고 안의 존재들은 냉기에 붙들려 억지로 싱싱한 척 안간힘이다. 유예 중인 소멸들이다. 조금 더 머문다고 해서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저것들도 나도 안다. 기다림을 오래 겪어본 사람이 냉장고 내부에 자동으로 켜지는 등을 달았을 것이다.”

 

전북 정읍 출생 박형준 시인은 매일 저녁이면 운동 겸 나서는 산책에서 만나는 가로등을 평화롭게 바라본다. 어찌 보면 특별할 것도 없는 풍경이지만, 말없이 쏟아지는 불빛을 보며 시인은 도시라는 무표정한 삼인칭을 묵묵하게 너라는 이인칭으로 비춰주는 가로등이라고 말한다.

 

경남 남해 출신 정영효 시인에게 성냥은 마음을 주었던 애인처럼 다가왔다. “모든 성냥은 그 한 번을 위해 태어난다. 짧은 길이로 온몸을 태우다가 사라진다. 머리부터 끝까지, 몇 초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어딘가에 불을 옮겨 놓고 최후를 맞이한다. 하나만 남은 성냥이 사람에게는 아쉬울 수 있겠지만 낱낱의 성냥들에겐 목숨이 언제나 마지막 하나이다. 성냥갑에서 빼곡하게 서로를 껴안고 있는 성냥개비들은 먼저 뽑히든 나중에 뽑히든, 어쨌든 불이 붙게 되면 끝장을 봐야 한다. 게다가 큰 불꽃에 자신의 불을 양보하니 말이다. 참 억울한 것들이다.” 마지막 하나를 품고 싶은 시간이여, 찾아봐도 없는 성냥이여.

 

경북 김천 출신 문태준 시인에게 지게는 평생 그것을 지셨던 아버지의 삶으로 다가왔다. “아버지에게 지게는 등짝 같은 것이었다. 아버지는 지게를 업고 다니셨다. 논과 밭과 산과 하늘을 업고 다니셨다. 빈 지게를 지고 나가셨다 땔나무를 지고 돌아오셨다. 빈 지게를 지고 나가셨다 풀짐을 지고 돌아오셨다. (풀짐을 지고 돌아와 풀더미를 부려놓으면 저무는 내내 울안에는 동실한 풀냄새가 흘러넘쳐났다!) 빈 지게를 지고 나가셨다 봄과 가을과 겨울을 지고 돌아오셨다. 골짜기 깊은 곳에 들어가셨다 소낙비와 검은 구름과 눈보라를 지고 오셨다. 지게에는 늘 뭔가가 실려 있었으므로 지게는 포만했다. 흘러넘치도록 가득가득 차 있었으며 묵중했다.” 시인의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이 글을 통해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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