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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었습니다 - 27개의 단서로 복원한 27권의 책 이야기
요시타케 신스케.마타요시 나오키 지음, 양지연 옮김 / 김영사 / 2026년 9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요시타케 신스케의 유쾌한 그림과 마타요시 나오키의 기발한 상상력이 만난 그림책 <책이었습니다>를 덮으며, 절로 가벼운 미소가 흘러나왔다. ‘책이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다소 거창하고 철학적인 질문을 이토록 엉뚱하고도 사랑스러운 방식으로 풀어낼 수 있다니, 참으로 놀라운 경험이다. 책이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종이 뭉치가 아니라, 한 사람의 삶과 시간에 깊이 개입하는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칠십 평생을 살아오며 참 수많은 책을 만났다. 젊은 시절에는 출세나 지식을 위해 책을 펼쳤고, 중년에는 삶의 무게와 책임감 속에서 해답을 찾고자 안간힘을 쓰며 페이지를 넘겼다. 그 시절 책은 나에게 일종의 정답지이자 넘어야 할 산이었다. 하지만 인생의 후반부에 들어서서 책을 대하는 눈빛은 현저히 달라졌다. 이제는 무언가를 배우거나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조용히 내면을 들여다보고 삶의 조각들을 되짚어보기 위해 책을 집어 든다. 그런 나에게 이 작은 그림책은 “책에 너무 무게를 둘 필요 없다”며 가볍게 어깨를 두드려주는 듯했다.

작가들은 이 책에서 책의 과거와 미래, 그리고 책에 대한 온갖 괴짜 같은 상상들을 거침없이 펼쳐놓는다. 책이 누군가의 베개가 되어주기도 하고, 비밀을 숨기는 상자가 되기도 하며, 때로는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세계가 되어 사람들을 끌어당긴다. 이 황당무계하면서도 정감 어린 상상들을 따라가다 보면, 문득 내가 지나온 삶 속의 수많은 ‘책의 순간들’이 스쳐 지나간다.

돌아보면 내 삶에도 ‘책이였던 것’들이 참 많았다. 서재 한구석에서 오랫동안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두꺼운 사전은 누군가의 손때 묻은 추억이었고, 가끔 꺼내보는 빛바랜 수필집은 나를 수십 년 전 청춘의 시간으로 돌려보내는 타임머신이었다. 책은 단순히 글자를 읽는 도구가 아니라, 그것을 읽던 당시의 공기와 냄새, 그리고 내 마음의 결을 그대로 흡수하고 저장하는 일종의 기억 저장소였던 셈이다. 세월이 흘러 눈이 침침해지고 글자를 읽는 속도가 예전 같지 않아진 지금, 책을 꼭 정독해야만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이 책의 메시지는 더없이 따뜻하게 다가온다. 책을 곁에 두고, 손으로 만지고, 때로는 멍하니 표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근사한 대화가 성립하기 때문이다.

인생을 칠십 년쯤 살아내다 보면 세상 모든 일이 그리 명확하거나 단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정답이라 믿었던 것이 오답이 되기도 하고, 아무런 의미 없다고 여겼던 순간이 삶의 가장 눈부신 장면으로 남기도 한다. <책이었습니다>가 보여주는 자유분방함 역시 이와 닮아 있다. 책을 규정짓지 않고 그저 존재 자체로 바라보는 시선, 어떤 모습으로든 인간의 삶 곁에 남아 온기를 더해주는 책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통찰이 빛난다.

이 책은 단순히 어린이나 젊은이들만을 위한 가벼운 그림책이 아니다. 오히려 나처럼 인생의 긴 여행을 거쳐온 이들에게, 지나온 삶의 도서관을 조용히 둘러보게 만드는 깊은 여운을 선사한다. 책장이 거대한 서재이든, 작은 찻상 위이든, 혹은 누군가의 기억 속이든 간에, 우리가 책과 함께했던 모든 순간은 결국 각자의 인생이라는 위대한 책을 채워가는 과정이었음을 새삼 느끼게 된다.
오늘 밤, 서재에 앉아 오랜 세월을 함께해 온 책들을 천천히 쓸어내려 본다. 내 손끝에 닿는 모든 책들이 저마다의 목소리로 속삭이는 듯하다. “나도 한때는 당신의 뜨거운 열정이었습니다”, “나도 한때는 당신의 외로운 밤을 지켜준 위로였습니다” 하고 말이다. 책이란 결국 우리의 삶이 지나간 자리, 그 자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