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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을 인간답게 읽는 시간
전대호 지음 / 해나무 / 2025년 12월
평점 :

과학의 시대, 특히 기술의 시대에서 인간의 자리는 ‘호모 파베르(도구적 인간)’로서 기술과 사회의 주체적 설계자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인간은 과학적 발견과 기술 개발을 통해 사회와 환경을 변화시키는 주체로 인식되며, 기술사회에서 인간의 위치를 ‘능동적 실천자’로 규정하며, 기술 발전의 방향과 의미를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최근에는 인간과 기술, 인공지능의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인간의 정체성과 사회적 역할에 대한 새로운 질문이 제기되고 있다. 결국, 과학의 시대에서 인간의 자리는 기술과 사회를 주도적으로 설계하고, 그 변화의 방향을 스스로 결정하는 주체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 책은 과학과 철학을 넘나드는 전문 번역가 전대호 저자가 역사 속에서 과학의 인간적인 면모를 발견하고 과학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풀어냈다. 흥미로운 사건들과 인물들을 불러와 과학의 다양한 면모를 발견해낸다.
20세기 빌 게이츠가 PC 혁명을, 21세기 스티브 잡스가 스마트폰 혁명을 일으켰다면, 13세기 피보나치는 산술 혁명을 일으켰다. 이 책에서는 피보나치의 ‘계산책’이 어떻게 역사를 뒤바꾸었는지를 알려준다. 피보나치의 '계산책'은 소수에게만 허용됐던 계산법을 일반 상인들까지 전파시켜 상업 혁명의 도화선이 됐다. 저자는 각종 사료와 연구 결과 등을 종합해 피보나치가 살았던 시대, 피보나치라는 수학자의 초상을 정직하게 그려냈다. 이를 통해 '계산책'이 얼마나 전면적이고 압도적이었는지를 알려준다. 피보나치는 청소년기에 당시 이슬람 세계의 일부였던 북아프리카에서 살면서 인도 아라비아숫자 시스템을 접했는데, 그 역사적 경험을 가능케 한 그의 아버지가 무역과 세무를 담당하는 공무원이었다는 사실도 짚어둘 만하다.
앎이란 무엇인가? 예를 들어 내가 ‘인천은 서울의 서쪽에 있다’는 점을 안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 서양에서는 이미 플라톤이 그의 대화록에서 앎 또는 지식(knowledge)의 속성을 논의했다. 현대인식론은 플라톤의 분석이 완전하지 못했다고 비판하지만, 전통적으로 지식은 그의 논의대로 ‘정당화된 참된 믿음(justified true belief)’으로 정의되어 왔다. 이 정의는 우리 상식에 맞는다.
플라톤은 앎을 ‘정당화된 참인 믿음’으로 정의하는데, 이 정의에 포함된 ‘참임’이라는 조건이 실재 세계와 관련이 있다면, ‘정당화됨’이라는 조건은 앎의 공유와 직결된다. 정 당화된 앎이란 타인들도 수긍하고 공유한 앎이다. 오직 혼자만 간직한 앎은 ‘참인 믿음’ 혹은 ‘유효한 믿음’일지언정 엄밀한 의미의 ‘앎’은 아니다. 우리는 먼저 믿고 받아들여야 알 수도 있다. 15세기까지 지구가 평평하다고 배우며 믿고 받아들였는데 “지구는 평평하다”는 참이 아니기 때문에 결코 지식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중세 서양 사람들이 ‘지구는 평평하다’는 점을 알았다고 할 수 없다. 어떤 믿음이 지식이 되려면 참이어야 한다.
현대사회에서 과학이 갖는 중요성은 누구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불야성을 이루는 빌딩숲, 손에서 내려놓지 못하는 휴대전화, 음식을 만들기 위해 날마다 사용하는 가스레인지와 전자레인지 등도 모두 과학의 결과물이며 우리는 거기에 기대어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렇지만 ‘과학이란 정말 무엇일까?’, ‘과학지식을 어떻게 믿을 수 있지?’,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사용하는 이 도구들의 원리는 무엇이지?’라는 의문에 맞닥뜨리면 제대로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과학에 의존하며 일상생활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에 대해 제대로 할 수 있는 말이 없고, 모두가 아는 ‘과학 상식’이라는 것도 사실은 암기해서 알고 있는 것일 뿐 그 지식이 정확히 어떠한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고 그 원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이 태반이다. 그러면서도 그 지식을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사용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