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과 생각
정용준 지음 / 작가정신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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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준.
2009년부터 활동한 소설가다.
반갑게도 나와 같은 00학번이다.
젊은작가상, 황순원문학상, 문지문학상, 한무숙문학상, 소나기마을문학상, 오영수문학상, 젊은예술가상 등 화려한 수상경력에 '우와'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현재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인정받은 소설가가 쓴 산문이라니 무척이나 기대됐다. 그래서 외려 읽기에 방해가 되지 않을까 염려했지만, 작가의 말을 읽자마자 우려는 설렘으로 돌아섰다. '이 작가님, 완전 내 스타일이잖아!'

단문의 매력이 넘치는 문체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짧고 간결한 문장은 생각을 압축해서 전달했다. 속도감과 생동감이 따라왔다. 작가들만의 고유하고 독특한 감각이 신선한 비유와 은유로 빛났다. 일상적인 소재나 경험을 낯설게 비틀어 예상치 못한 연결로 전개되는 즐거움이 굉장했다.

《밑줄과 생각》은 여러 지면을 통해 "읽기와 쓰기가 우리에게 주는 모든 것"에 관한 기록 37편을 모은 책이다. 제목처럼 인상 깊었던 소설과 글 중 저자가 밑줄 그은 문장에서 시작된 생각들을 풀어냈다. 자유롭게 유영하는 소설가의 사유를 따라다니며 같이 여행하는 기분이었다. '행간은 이렇게 읽는 거야, 여기서 이런 감정과 통찰을 끌어낼 수 있어.' 독서법과 작법을 가르치는 선생님 같기도 했다. 내가 쓰는 어설픈 서평과 비교됐지만 편안하게 읽히면서도 개성이 뚜렷한 서평은 이런 글이구나, 이상향에 가까운 글을 만난 것 같다.

"문학이 아니었다면,
타인의 마음에
숲과 바다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을 것이고
인간의 감정과 감각에
바람과 별자리가 있다는 것도 몰랐을 것이다."

문학을 향한 찬가로도 읽히는 《밑줄과 생각》. 밑줄 친 언어들이 흔적과 흉터로 남아 정용준의 일부가 된 이야기였다. 개인적인 경험과 성찰에 그치지 않고, 사회의 부조리와 인간관계의 모순까지 포착하며 냉소적이고 비판적인 시선까지 담았다. 문학을 대할 때는 한없이 감성적이고 따뜻한 글이 예리하게 빛나는 매혹적인 책이다.

특히 글에 대한 작가의 시선을 엿볼 수 있어 좋았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 들려주는 책 이야기만큼 재미난 게 또 없다. 언어의 힘과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여러 작품을 소개받고, 언어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작가의 아름다운 글로 들을 수 있다니 신나지 않을 수 없다. 글의 아름다움과 가능성을 확인하고, 벼리고 벼려진 정영준만의 문체에 감탄하는 순간마다 행복했다.

"좋았다. 작가의 뉘앙스가 문장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이런 걸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 그는 기린처럼 길게 나타나 고요하게 머물다가 기린처럼 길게 사라졌다. 아, 기린은 평생 그 어떤 소리도 내지 않는다고 한다.(모든 개체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167면

글쓰기에 대한 용기도 얻었다. 공개하는 글이라면 일기 수준은 넘어서야 한다고 흔히들 말한다. 그래서 감히 일기 같은 글을 내보일 수 없어 오히려 글을 쓸 때마다 나는 용기를 내야했다. 하지만 정영준은 말한다.


"문학은 어떤 의미에서 철저히 작가만의 사적인 일기 비슷한 것이 되어야 한다. 김수용은 작가가 지닌 사적인 감각과 인식을 일기처럼 적나라하게 쓰기만 해도 그 자체로 훌륭한 문학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114면)

"작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어쨌거나 쓰는 것이다. 잘 쓰는 것은 그다음이다. 그러기 위해선 모든 마음을 글쓰기를 위한 재료로 사용할 필요가 있다. 모든 마음을 글로 쓰지 못하는 이유로 사용하는 것보다 윤리적이고 정당하다. 작가는 비윤리적인 것을 써내는 것이 차라리 윤리적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없다. 하지 않음으로서의 정의는 없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땅에 묻어두고 손해를 예방하는 것은 이미 어떤 것도 창조하지 않았으므로 가치가 없다."(119면)

작가는 아니지만, 쓰고 싶은 사람으로서 나에게도 적용하고 싶은 문장들이다. 아무것도 쓰지 않음으로서 손해를 예방하는 것은 가치가 없다는 말에 기대어 다짐한다. '엉망인 글이지만 계속 써보자, 그래도 된다잖아.' 나를 녹인 글을 뭐라도 어쨌거나 내놓는 것이 움츠리고 숨어들어 아무것도 쓰지 않는 편보다 훨씬 훌륭한 선택임을 배웠다.


《밑줄과 생각》은 행복하게 나를 깨뜨리고 일깨운다. 기꺼이 깨지고 그래서 더 커지고 싶은 모든 독자에게 《밑줄과 생각》을 강하게 추천한다.

#도서지원 #밑줄과생각 #정용준 #작정단13기 #산문집 #산문집추천 #작가정신 #소설가의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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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키 두 개 소설의 첫 만남 33
이희영 지음, 양양 그림 / 창비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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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첫사랑을 꿈꿨지만, 아쉽게도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 절호의 기회를 이야기 속에서 다시 찾으려 합니다."
- ⁠작가 소개에서


<페인트> 이희영의 신작 소설 《쿠키 두 개》는 꿈과 현실의 경계를 허물며 몽환적인 세계로 초대한다. 87페이지의 짧은 소설을 앉은 자리에서 한번에 읽었다. 수채화풍의 삽화처럼 물빛으로 젖어든 서정적인 이야기다.


매일 아침, 똑같은 시간에 두 개의 쿠키를 사 가는 소년. 투명한 손이 나타나 그 소년을 소개하고 사라지는 기이한 꿈. 방학을 맞아 엄마의 쿠키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 '나'는 낯설고 신비로운 소년에게 점점 마음을 빼앗긴다.


⁠"그 아이가 가게에 발길을 끊자 투명한 손도 모습을 감췄다. 덕분에 그토록 기묘하고 생생한 꿈을 더는 꿀 수 없게 되었다. 그즈음 나는 한 가지 습관이 생겨버렸는데, 테이블을 닦으면서도, 쿠키를 정리하면서도, 유리 진열장에 턱을 괸 채 커피우유를 마실 때조차 괜스레 이차선 도로를 살핀다는 것이다."
-⁠ 31면


꿈과 현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펼쳐지는 《쿠키 두 개》는 한 편의 꿈 같다. 매일 아침 쿠키 가게를 찾아오는 소년은 꿈속에서 걸어 나온 듯 신비롭다. 소년의 비밀은 무엇일까? 왜 매일 아침 두 개의 쿠키를 사 가는 걸까?


이희영 작가는 섬세한 문체와 감각적인 묘사를 통해 독자를 이야기 속으로 깊숙이 끌어들인다. 한 편의 동화처럼, 하이틴 영화처럼 말간 분위기는 묘하게 매력적이다. 비밀스러운 전개는 궁금증을 자아내 긴장감을 만들고, 소년의 비밀이 밝혀지는 후반부는 반전과 함께 깊은 여운을 남긴다.


⁠"왜인지는 묻지 말아요. 그냥 주는 거니까. 진짜 그냥......."
반 아이들에게 쿠키를 나눠 준 것도, 꼬마에게 쿠키를 선물한 것도 모두 그냥이었다. 그러고 싶었고 그게 전부였다. 어떤 목적이나 이유 따위 없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이 단순한 마음을 믿지 않는 걸까? 의심하고 질타를 보낼까?
⁠- 47면


《쿠키 두 개》는 상실과 그리움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따뜻한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인물들은 각자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지만, 서로를 통해 위안을 얻고 성장한다. 삶의 소중한 의미를 곱씹게하는 특별한 이야기를 찾고 있다면, 짧은 소설이 선사하는 기나긴 감동에 꿈결같이 빠질 수 있을 것이다.


*** 출판사 창비의 도서지원을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했습니다. 감사합니다. ***

#쿠키두개 #이희영 #소설의첫만남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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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에 빚을 져서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54
예소연 지음 / 현대문학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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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궤적이 온전히 그 사람의 몫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한 사람의 궤적은 온 사람의 궤적이 되고 그 궤적은 종내 알 수 없는 문양을 한 채로 우리 모두를 잡아끈다."
-123면


9년 전, 캄보디아로 해외 봉사활동을 갔던 동이, 혜란, 석이.
그들은 한 학교의 선생님이 되어, 캄보디아 아이들과 4개월의 시간을 보낸다. 개교기념일이라 숙소에서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던 날, 핸드폰으로 중계되는 침몰하는 배를 보게 되고 세 친구들은 미묘한 변화를 겪게 된다. 한극으로 돌아온 후 졸업과 취업 등 각자의 삶을 사느라 서로에게 소홀하게 된 어느 날, 석이가 실종되었다는 이야기에 동이와 혜란은 다시 캄보디아로 떠나게 되는데....
- 출판사 책 소개


"《영원에 빚을 져서》는 실종된 친구를 찾아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사라진 사람의 흔적을 떠나 비로소 서로가 서로에게 연루된 존재임을 알게 되는 이야기이죠. 연루되는 일은 불가항력이지만 연루된 모든 존재를 놓치지 않고 톺아보는 일은 우리에게 주어진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작가의 말


《영원에 빚을 져서》는 세월호 참사, 어머니의 죽음, 캄보디아 압사 사고 등 우리 사회의 깊은 슬픔과 상처를 배경으로, 세 여성의 여정을 따라가며 삶의 의미를 되묻는다.


세 명의 인물들 속에서 나의 조각들을 찾을 수 있었다. 세월호나 이태원 참사 앞에서 슬픔에 쉽게 매몰되어 도리어 눈을 감아버리는 나, 타인이 쏟았던 마음의 크기를 이해하려 애쓰기보다 가늠하려던 나, 딴 세상에 있는 것처럼 불행을 혼자 짊어졌던 나. 뜨끔했고 아차 싶어 혼이 나는 기분이었다.


서로에게 의존하며 영향을 주고받고, 시간 속에서 서로의 일부가 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숙명을 생각하면 "빚을 짐으로써만 우리는 살아가게 된다."(-작품 해설, 140면)는 의미를 영원으로 확장시킨 소설의 제목을 이해하게 된다.


"너 요즘 힘들어?"
"어, 힘들어. 세상이 말도 안 되는 일투성이라서."
"그럼 도대체 어떡하자는 건데. 일어난 일을."
-60면

인간은 취약하기에 의존하며 빚을 진다. 세상의 상실과 상처에 노출되어 있지만 한편으로 일상을 유지하고 돌봐야 하기에, 세상의 아픔들을 잊거나 외면한다. 그런 핑계를 대며 상실과 애도를 제대로 겪어내지 못하는 것이, 슬픔은 극복되어 그것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강박이 실은 우리를 더 괴롭힌다는 사실을 《영원에 빚을 져서》는 낮게 들려준다.


"나와 나 아닌 이들의 삶은 아주 복잡하고 교묘하게 얽혀 있고 그 얽힌 모양을 면밀히 바라볼 수 있으려면 우리는 다름 아닌 서로의 슬픔에 의연해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틈틈이 슬퍼하고 슬픔을 평생 간직하겠다는 태도야말로 나 그리고 우리를 더 단단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곰곰 생각해보면 슬픔은 정말 제 동반자 같기도 합니다. 제 일상에 집요하게 스며들어 삶의 의지를 미약하게나마 북돋아주기도 하고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거하게 저를 한번 울려버린 뒤 다시 일상을 시작할 수 있는 단초를 마련해주기도 하니까요. 그것이 삶이라고 한다면 사는 동안 저는 정말 빚진 것이 많습니다. 저를 가끔 기쁘게 하고 많이 울게 한 모든 것에 말입니다."
- 작가의 말




"너 지금은 어떤 손바닥이야?"
"손바닥?"
"움직이지 않고 불행한 손바닥 그대로야?"
그러자 혜란이 곰곰 생각해보더니 대답했다.
"아니, 조금 다른 것 같아."
"뒤집힐락 말락?"
혜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래. 왜 그럴까?"
"내가 조금씩 움직이는 것 같아서."
- 84면


누군가가 떠나고 나면 무엇이 남을까?
빈자리. 비어있는 그 자리를 남은 마음들이 채운다. 떠난 사람들이 남긴 기억을 추적한다. 그 과정은 고통 그 자체이지만, 그 고통 너머에 존재하는 희미한 마음이 있다. 건너보는 마음, 살펴보는 마음, 그 기억을 안고 내일을 살기 위해 다짐하는 마음들(69면) 말이다.


그렇게 남은 사람들이 자라는 것 같다. 소설에서 주인공들은 되고 싶은 자신을 말하며 "사람이 되는 게임"을 하다가, 문득 다른 사람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한다. 문제를 풀다 보면 나름의 방식을 알게 되는 것처럼, 떠난 이들을 함부로 잊지 않기 위해 가슴에 매서운 바람이 불어 쪼개질 것을 알아도 그 길을 살아 보는 마음들을 품는다. 그렇게 떠난 이들을 건너보고 살펴보며 자신의 마음들로 빈자리를 채운다.


"잘 살기 위해 운다" (115면)
《영원에 빚을 져서》가 하고 싶은 단 한 마디가 있다면 이 문장이 아닐까 싶다. 상실과 슬픔을 회피하기보다 울면서도 슬픔을 믿고 감싸안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슬퍼해도 괜찮다고, 오히려 더 괜찮아질 거라고, 자기의 삶을 제대로 깨닫기를 바라는 희망을 듣는다.


우리는 모두 행복하고 멋진 삶을 누릴 자격이 있다. 하지만 인생에서 중요하고 가치있는 일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인생의 선물을 받을 만큼 성숙한 큰 그릇이 되기 위해서는 숙성되는 기다림의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 기간 동안 우리는 서로에게 빚을 지고 함께 살며, 부딪히고 긁히면서도 서로를 이해하고 연대하게 된다. 타인의 모습과 관계 속에서 자신의 정체를 선명히 파악하는 고된 과정들이 그래도 결국은 빚을 지고 갚아가는 시간 속에서 위로와 힘을 준다는 믿음을 한 겹 더 채워준 이야기였다.


섬세하고 문학적인 문체로 인물들의 내면을 깊이 있게 묘사한 아름다운 문장들이 많았다. '소설가들이 뽑은 올해의 소설' 작가 예소연. 소설 「그 개와 혁명」으로 등단 4년 만에 2025년 제48회 이상문학상 대상을 받은 작가답게 인물과 사건들이 촘촘하게 얽혀 문학적 서사의 힘과 서정성을 강하게 전달하는 작품이었다. 다양한 비극적 사건들에 대한 성찰보다는 감정적인 측면에 치중한 점이 개인적으로는 조금 아쉬웠지만, 그만큼 인간의 심리를 심도 있게 드러내며 깊은 울림을 주었다.


《영원에 빚을 져서》는 영원에 빚을 지고 사는 삶의 새로운 측면을 보여주었다.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사람들과 세상에 큰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진심으로, 온 마음을 쏟으며 짐 지우고, 빚지고, 눈치 보고, 책임지며 계속 내 삶을 움직이고 싶다. 내 삶의 지분을 차지한 가족과 사람들과 사회의 수많은 조각들을 기쁨과 아픔으로 분류하기보다 다 같이 소중한 나의 일부로 끌어안는 용기를 내고 싶다. 개인주의가 만연한 현대 사회에서 공동체적 가치를 되새기게 하는 귀한 이야기로 오래 기억될 것 같다.




*** 출판사 현대문학의 도서지원을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했습니다. 감사합니다. ***


#예소연 #영원에빚을져서 #현대문학 #현대문학핀시리즈 #소설추천 #상실 #애도 #공감 #그개와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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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계곡
스콧 알렉산더 하워드 지음, 김보람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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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즈오 이시구로,
테드 창,
무라카미 하루키를 잇는
놀라운 데뷔작!"
- 조 하킨 (작가)


이 문구에 혹해 읽게 된 《시간의 계곡》
철학 박사인 스콧 알렉산더 하워드가 쓴 첫 소설이다.
데뷔작으로 억대 선인세 계약을 하고, 전 세계로 수출되며, 10개 사가 경쟁한 끝에 유니버설 스튜디오에서 영상화가 확정되었다. 워싱턴포스트 2024 뛰어난 소설 50선, 캐나다 공영방송 CBC 선정 2024년 최고의 책, 굿리즈 2024 초이스어워즈 후보작 등 화려하게 신고식을 치렀다.


저자는 어린 시절 절친하던 친구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겪었다. 살아갈 시간이 무한히 펼쳐져 있고 많은 일을 할 수 있다고 믿었던 저자는 이 일로 충격에 빠진다. 철학자의 길에 의문이 들면서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먼저 세상을 떠난,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 질문에서 《시간의 계곡》이 탄생했다.


《시간의 계곡》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배경이다. '동쪽으로 가면 20년 후의 미래, 서쪽으로 가면 20년 전의 과거'인 마을이 있다. 마을 사이는 철책으로 단절되어 이동할 수 없다. 하지만 사별을 당해 그 대상을 보지 않고서는 삶을 이어갈 수 없는 경우처럼 애도가 필요한 경우에만, 고위 공무원인 자문관의 허가를 받아 비밀리에 다른 마을을 방문할 수 있다.


"우리 밸리가 한가운데에 있다는 건 상대적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그들의 밸리가 중심에 있고 내가 사는 밸리가 옆으로 떨어져 있을 것이다. 내가 사는 이곳이 누군가에게는 미래이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과거인 것이다. "
- 66면


과거, 현재, 미래. 《시간의 계곡》은 시간의 상대성을 말하고 있었다. SF적인 설정이지만, 우리가 사는 현실과 그다지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높은 산으로 올라가면 다른 시간의 마을(밸리)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우리 역시 인식의 시선을 높이 올려 시간을 바라보면 과거와 현재, 미래를 한눈에 둘러볼 수 있다.


우리의 몸은 각각의 시간에서 동시에 존재할 수 없지만, 기억과 감정은 과거와 미래를 쉽게 오간다. 과거의 상처나 영광에 갇혀 현재를 살지 못하는 사람들, 미래의 불안에 잡혀 현재를 놓친 사람들처럼 말이다. 기억과 상실,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내면의 공간이 소설의 밸리처럼 우리 안에 존재하는 것이다.


《시간의 계곡》의 마을처럼 우리 안에 있는 시간의 계곡도 단절되어 현재밖에 모를 수 있다면 어떨까. 다들 현재를 살라고 조언하듯이 과거에 대한 후회도, 미래를 향한 두려움도 없다면 더 행복할까?


다른 밸리의 사람들과는 단절돼있지만, 애도를 위한 방문자에게는 시간 여행을 허용한다. 그들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다. 많은 위험을 초래할 수 있지만 그마저도 무릅쓰고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보여준 설정이 인상 깊었다. "산과 호수, 또 마을 하나. 하나의 밸리가 끝나는 곳에서 또 다른 밸리가 이어졌다." ( 15면) 밸리는 결국 서로 연결되어 있다. 현재만을 살면 단순하고 명쾌하게 행복할 것 같지만 인간은 인간 사이에서 기대 살듯, 시간의 관계에서도 현재는 과거와 미래에게 의지하며 살아야 하는 존재임을 말하는 것 같다.


주인공 16살 오딜은 엄마와 단둘이 산다. 엄마는 자문관이 되길 꿈꿨지만 기록보관실에서 일하며 진로를 정해야 하는 딸이 자문관이 되기를 고집한다. 똑똑하고 관찰력도 좋지만 말수가 적은 오딜은 반에서 괴롭힘을 당한다. 학교도 집도 안식처가 되지 못한 채, 수동적으로 엄마의 뜻대로 살아가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딜은 우연히 미래인 동쪽 마을에서 오딜의 마을로 망자를 보러 온 방문객을 목격한다. 그들은 친구 에드메의 부모님이었다. 미묘한 감정을 키워가며 사랑하게 된 에드메가 미래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나에게 상냥하게 대해준 친구는 에드메가 처음이었다. 그런데 에드메에게 조만간 무슨 일이 일어날 예정이고,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나밖에 없었다니. 앞으로 에드메의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할지 암울했다."
- 45면


결국 에드메는 갑작스럽게 목숨을 잃고 오딜은 깊은 슬픔에 빠진다. 하지만 오딜의 삶은 계속된다. 자문관이 아닌 헌병이 된 오딜은 미래의 자신을 보게 된다. 그리고 과거와 미래를 오갈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오딜은 에드메를 구할 수 있을까? 불행해보이던 자신의 미래를 바꿀 수 있을까?


《시간의 계곡》은 놀라운 흡입력을 가진 소설이다. 책장이 절로 넘어가는 동안 이야기에 금세 빠져버린다. 독특한 배경 속에 삶과 죽음, 사랑과 상실이라는 보편적인 주제를 자연스럽게 녹였다. 시간과 삶의 가치, 기억과 애도 등 이야기와 인물이 던지는 철학적인 사유와 질문들도 아름다웠다. 그러나 《시간의 계곡》이 내게 매력적이었던 가장 큰 이유는 독창적이고 섬세한 표현이었다.

"판화 정중앙에는 우리 작은 마을이 호수의 품에 기대어 있었고, 호수는 주먹에서 펼친 집게손가락처럼 수직으로 길게 뻗어 있었다." (15면)
(수직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니! 읽는 순간 어리둥절했다.)

'오딜 오잔' 알파벳들이 서로 기대어 자기 존재를 숨기려는 듯 한데 옹송그려 있었다. 내 이름은 에드메의 입을 타고 나올 때 훨씬 듣기 좋았다. '오딜, 안녕.'
( 44면)
(이름을 통해 오딜의 낮은 자존감과 에드메와의 풋풋한 설렘을 기막히게 드러낸다.)

세월이 흘러도 그의 고통은 줄지 않았다. 그의 고통은 바스러지지도 암반처럼 굳어지지도 않았다. (73면)
(고통이 지속되고 있음을 생생하게 그렸다.)

그 순간 내 입가의 미소가 사라졌다. 마치 모래알 사이로 스며드는 파도처럼. (77면)
(스콧 알렉산더 하워드는 태생부터 소설가였던 사람 같다!)

호수 반대편에는 헌병대가 대충 줄을 맞춰 피워놓은 모닥불의 불씨가 어둠 속에서 마치 우물 아래로 떨어진 목걸이처럼 반짝거렸다. (116면)
(독자의 눈앞에 사진처럼 장면을 절로 떠오르게 한다. 아름답다.)


《시간의 계곡》은 문학적인 재미와 철학적인 깊이를 모두 잡은 이야기다. 매력적인 서사, 생생한 인물과 감정 묘사, 독특한 배경 설정, 아름다운 문체로 읽는 이를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인다. 동시에 시간, 기억, 상실, 선택 등 철학적인 주제로 깊은 성찰의 자리까지 제공한다. 문학과 철학의 조화로 묘한 감동과 여운을 남기는 작품, 《시간의 계곡》을 거닐며 방구석 시간 여행을 떠나는 건 어떠세요?


#도서지원 #시간의계곡 #다산책방 #스콧알렉산더하워드 #소설추천 #시간여행 #애도 #철학자의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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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지된 일기장
알바 데 세스페데스 지음, 김지우 옮김 / 한길사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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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일기장을 엿본다는 호기심도 컸지만, 일기 형식으로만 쓴 글이 소설이 되면 어떤 분위기를 풍길지가 참 궁금했다. 읽어본 적은 없지만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아니 에르노와 퓰리처상 수상 작가 줌파 라히리가 추천했다니 후회할 일은 없겠다는 예감도 들었다.



《금지된 일기장》은 몰입력이 엄청난 소설이었다!
일기라서 가볍게 술술 넘어가는 페이지 터너이자 여자라면, 엄마라면, 딸이라면 200% 공감할 명문장들이 곳곳에 넘쳐난다.



"1950년 11월 26일 ~ 1951년 5월 27일"


1950년 11월 26일
애초에 일기장을 산 것 자체가 실수였다.
그것도 아주 큰 실수.


《금지된 일기장》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이탈리아 로마에 사는 43세 워킹맘 발레리아와 가족의 이야기다. 그녀는 남편과 대학생 아들, 19살 딸과 평범하게 살고 있다. 일기를 쓴다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들켜서는 안 된다는 압박과 초조함 속에서도 끝까지 써가는 주인공이다.



6개월 정도 일기를 쓰는 동안 발레리아의 삶은 크게 변한다. 인생을 바꿀 만한 굉장한 사건이 터져서가 아니다. 감정과 생각을 기록하는 동안 자신을 선명하게 알아차리고, 복잡하게 얽힌 관계를 파악하는 안목이 길러져서다. 430쪽의 책이 될 만큼 내밀한 속내를 활자로 속속들이 표현하며, 발레리아라는 사람 자체를 인식하는 자아감이 바뀐다. 시대가 씌운 고정관념과 의무감에 묻혔던 개인이 글쓰기로 여실히 드러났다. 하나의 우주가 폭발하고 소멸해 다시 탄생하는 것 같았다. 발레리아는 자신을 자꾸 일깨우고 도발하는 일기를 위험한 수단으로 여겨 자꾸 숨기고, 불태우려 하지만 그럴수록 쓰기의 위대함은 강조된다.



소시민의 일기가 이토록이나 매력적이고 흥미진진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소설이다. 내가 쓰는 사소하고 자질구레한 글들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항상 의문이었는데 《금지된 일기장》이 확실한 답을 주었다. 바닥까지 내려가 투명하게 진심을 터놓는 글은 아름답고자 하는 장식 하나 없이도, 흉내 낼 수 없는 아름다움과 힘을 가진다는 것을. 그러고 보니 별것 없이 평범해 보이는 나도 이미 뚜렷한 개성을 가지고 있었다.




"제 삶은 이상하고 별나지만

가치있고 아름답습니다."
-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우린 모두 이상해 조금씩은 yeah
사람을 가장한 낯선 존재들처럼"
- 오마이걸 노래 <Dun Dun Dance>



우리는 모두 조금씩은 이상하고 별나다. 그런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고 꺼내는 순간, 누구나 특별하고 의미 있는 이야기로 다시 피어날 수 있다. 그러니 하찮다 숨기고 덮어둘 이유가 없었다. 스스로의 이야기를 귀한 가치로 볼 줄 아는 시선이 필요할 뿐이었다.




누구나 본능적으로 짐작할 수 있지만 어디서도 분명하게 들어본 적 없는 마음들을 일기로 훔쳐보는 독서는 묘한 쾌감이 있다. 동시에 타인의 일기가 나를 비추며 지난 삶을 돌아보도록 성찰을 유도한다. 화자에 깊이 공감하게 하는 일기의 특징 덕분에 주인공과 나를 비교하며, 새로운 세상에 나를 데려다 놓고 사유를 확장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일기의 그 강력한 힘이 소설 속 인물이 처한 상황에 빠지게 하면서도 이따금씩 현실의 나로 돌아와 나의 일기를 쓰고 싶게 만들었다.



"이제는 무슨 일을 하든, 무슨 말을 하든 일기장의 존재가 느껴진다. 하루 동안 일어나는 모든 일에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믿게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항상 나의 삶을 하찮게 생각했다. 결혼과 출산 빼고는 특별할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우연히 일기를 쓰기 시작한 후로, 사소한 말투나 단어 선택이 지금까지 중요하게 여겼던 일들만큼, 아니 때로는 그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매일 같이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을 이해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야말로 가장 은밀한 삶의 의미를 이해하는 길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좋은 일인지는 모르겠다. 왠지 그렇지 않은 것 같아 두렵다."
- 51, 52면



글과 삶이 하나로 상호작용하며, 시너지를 일으키고 메타인지를 높여, 사고가 확장되는 발레리아가 나는 참 부러웠다. 그녀에게는 그 힘이 안정된 삶을 흔드는 위험요소였을지 모르지만, 무섭게 변하는 시대를 사는 현대인에게는 무척이나 절실한 능력이기 때문이다. 어떤 자기계발서보다 글쓰기의 동기 부여를 부어주는 책이었다.




"일기장에 쓴 글을 보면 나는 겁이 난다. 적나라하게 표현된 나의 모든 감정이 썩어 문드러져 독이 될 것만 같다. 판사가 되고 싶었는데 죄인이 된 것 같다.
...... 나는 아무도 자신의 본모습을 드러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 수치심 때문이든 악의적인 감정 때문이든 우리는 본모습을 숨기고 변장한다.

결국 모든 여성은 자신만의 까만 공책, 금지된 일기장을 숨기고 있으니까."
- 428, 429면



자신의 본모습을 드러내고, 마주하고, 인정해야 진짜 자신으로 살 수 있다. 1950년, 시대가 금지한 일기장을 충동적으로 산 발레리아처럼 2025년, 온갖 미디어와 SNS가 금지시킨 것만 같은 일기를 우리도 다시 쓸 수 있다. 《금지된 일기장》 리뷰를 읽은 당신만은 기꺼운 마음으로 자신만의 취향이 깃든 멋진 일기장을 두둑이 준비할 수 있기를. 그렇게 가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를 흔들리듯 달려가며 넓어지기를.

추천합니다.




*** 출판사 한길사의 도서지원을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했습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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