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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지된 일기장
알바 데 세스페데스 지음, 김지우 옮김 / 한길사 / 2025년 1월
평점 :
누군가의 일기장을 엿본다는 호기심도 컸지만, 일기 형식으로만 쓴 글이 소설이 되면 어떤 분위기를 풍길지가 참 궁금했다. 읽어본 적은 없지만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아니 에르노와 퓰리처상 수상 작가 줌파 라히리가 추천했다니 후회할 일은 없겠다는 예감도 들었다.
《금지된 일기장》은 몰입력이 엄청난 소설이었다!
일기라서 가볍게 술술 넘어가는 페이지 터너이자 여자라면, 엄마라면, 딸이라면 200% 공감할 명문장들이 곳곳에 넘쳐난다.
"1950년 11월 26일 ~ 1951년 5월 27일"
1950년 11월 26일
애초에 일기장을 산 것 자체가 실수였다.
그것도 아주 큰 실수.
《금지된 일기장》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이탈리아 로마에 사는 43세 워킹맘 발레리아와 가족의 이야기다. 그녀는 남편과 대학생 아들, 19살 딸과 평범하게 살고 있다. 일기를 쓴다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들켜서는 안 된다는 압박과 초조함 속에서도 끝까지 써가는 주인공이다.
6개월 정도 일기를 쓰는 동안 발레리아의 삶은 크게 변한다. 인생을 바꿀 만한 굉장한 사건이 터져서가 아니다. 감정과 생각을 기록하는 동안 자신을 선명하게 알아차리고, 복잡하게 얽힌 관계를 파악하는 안목이 길러져서다. 430쪽의 책이 될 만큼 내밀한 속내를 활자로 속속들이 표현하며, 발레리아라는 사람 자체를 인식하는 자아감이 바뀐다. 시대가 씌운 고정관념과 의무감에 묻혔던 개인이 글쓰기로 여실히 드러났다. 하나의 우주가 폭발하고 소멸해 다시 탄생하는 것 같았다. 발레리아는 자신을 자꾸 일깨우고 도발하는 일기를 위험한 수단으로 여겨 자꾸 숨기고, 불태우려 하지만 그럴수록 쓰기의 위대함은 강조된다.
소시민의 일기가 이토록이나 매력적이고 흥미진진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소설이다. 내가 쓰는 사소하고 자질구레한 글들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항상 의문이었는데 《금지된 일기장》이 확실한 답을 주었다. 바닥까지 내려가 투명하게 진심을 터놓는 글은 아름답고자 하는 장식 하나 없이도, 흉내 낼 수 없는 아름다움과 힘을 가진다는 것을. 그러고 보니 별것 없이 평범해 보이는 나도 이미 뚜렷한 개성을 가지고 있었다.
"제 삶은 이상하고 별나지만
가치있고 아름답습니다."
-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우린 모두 이상해 조금씩은 yeah
사람을 가장한 낯선 존재들처럼"
- 오마이걸 노래 <Dun Dun Dance>
우리는 모두 조금씩은 이상하고 별나다. 그런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고 꺼내는 순간, 누구나 특별하고 의미 있는 이야기로 다시 피어날 수 있다. 그러니 하찮다 숨기고 덮어둘 이유가 없었다. 스스로의 이야기를 귀한 가치로 볼 줄 아는 시선이 필요할 뿐이었다.
누구나 본능적으로 짐작할 수 있지만 어디서도 분명하게 들어본 적 없는 마음들을 일기로 훔쳐보는 독서는 묘한 쾌감이 있다. 동시에 타인의 일기가 나를 비추며 지난 삶을 돌아보도록 성찰을 유도한다. 화자에 깊이 공감하게 하는 일기의 특징 덕분에 주인공과 나를 비교하며, 새로운 세상에 나를 데려다 놓고 사유를 확장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일기의 그 강력한 힘이 소설 속 인물이 처한 상황에 빠지게 하면서도 이따금씩 현실의 나로 돌아와 나의 일기를 쓰고 싶게 만들었다.
"이제는 무슨 일을 하든, 무슨 말을 하든 일기장의 존재가 느껴진다. 하루 동안 일어나는 모든 일에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믿게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항상 나의 삶을 하찮게 생각했다. 결혼과 출산 빼고는 특별할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우연히 일기를 쓰기 시작한 후로, 사소한 말투나 단어 선택이 지금까지 중요하게 여겼던 일들만큼, 아니 때로는 그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매일 같이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을 이해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야말로 가장 은밀한 삶의 의미를 이해하는 길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좋은 일인지는 모르겠다. 왠지 그렇지 않은 것 같아 두렵다."
- 51, 52면
글과 삶이 하나로 상호작용하며, 시너지를 일으키고 메타인지를 높여, 사고가 확장되는 발레리아가 나는 참 부러웠다. 그녀에게는 그 힘이 안정된 삶을 흔드는 위험요소였을지 모르지만, 무섭게 변하는 시대를 사는 현대인에게는 무척이나 절실한 능력이기 때문이다. 어떤 자기계발서보다 글쓰기의 동기 부여를 부어주는 책이었다.
"일기장에 쓴 글을 보면 나는 겁이 난다. 적나라하게 표현된 나의 모든 감정이 썩어 문드러져 독이 될 것만 같다. 판사가 되고 싶었는데 죄인이 된 것 같다.
...... 나는 아무도 자신의 본모습을 드러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 수치심 때문이든 악의적인 감정 때문이든 우리는 본모습을 숨기고 변장한다.
결국 모든 여성은 자신만의 까만 공책, 금지된 일기장을 숨기고 있으니까."
- 428, 429면
자신의 본모습을 드러내고, 마주하고, 인정해야 진짜 자신으로 살 수 있다. 1950년, 시대가 금지한 일기장을 충동적으로 산 발레리아처럼 2025년, 온갖 미디어와 SNS가 금지시킨 것만 같은 일기를 우리도 다시 쓸 수 있다. 《금지된 일기장》 리뷰를 읽은 당신만은 기꺼운 마음으로 자신만의 취향이 깃든 멋진 일기장을 두둑이 준비할 수 있기를. 그렇게 가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를 흔들리듯 달려가며 넓어지기를.
추천합니다.
*** 출판사 한길사의 도서지원을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했습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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