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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에 빚을 져서 ㅣ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54
예소연 지음 / 현대문학 / 2025년 1월
평점 :
"한 사람의 궤적이 온전히 그 사람의 몫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한 사람의 궤적은 온 사람의 궤적이 되고 그 궤적은 종내 알 수 없는 문양을 한 채로 우리 모두를 잡아끈다."
-123면
9년 전, 캄보디아로 해외 봉사활동을 갔던 동이, 혜란, 석이.
그들은 한 학교의 선생님이 되어, 캄보디아 아이들과 4개월의 시간을 보낸다. 개교기념일이라 숙소에서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던 날, 핸드폰으로 중계되는 침몰하는 배를 보게 되고 세 친구들은 미묘한 변화를 겪게 된다. 한극으로 돌아온 후 졸업과 취업 등 각자의 삶을 사느라 서로에게 소홀하게 된 어느 날, 석이가 실종되었다는 이야기에 동이와 혜란은 다시 캄보디아로 떠나게 되는데....
- 출판사 책 소개
"《영원에 빚을 져서》는 실종된 친구를 찾아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사라진 사람의 흔적을 떠나 비로소 서로가 서로에게 연루된 존재임을 알게 되는 이야기이죠. 연루되는 일은 불가항력이지만 연루된 모든 존재를 놓치지 않고 톺아보는 일은 우리에게 주어진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작가의 말
《영원에 빚을 져서》는 세월호 참사, 어머니의 죽음, 캄보디아 압사 사고 등 우리 사회의 깊은 슬픔과 상처를 배경으로, 세 여성의 여정을 따라가며 삶의 의미를 되묻는다.
세 명의 인물들 속에서 나의 조각들을 찾을 수 있었다. 세월호나 이태원 참사 앞에서 슬픔에 쉽게 매몰되어 도리어 눈을 감아버리는 나, 타인이 쏟았던 마음의 크기를 이해하려 애쓰기보다 가늠하려던 나, 딴 세상에 있는 것처럼 불행을 혼자 짊어졌던 나. 뜨끔했고 아차 싶어 혼이 나는 기분이었다.
서로에게 의존하며 영향을 주고받고, 시간 속에서 서로의 일부가 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숙명을 생각하면 "빚을 짐으로써만 우리는 살아가게 된다."(-작품 해설, 140면)는 의미를 영원으로 확장시킨 소설의 제목을 이해하게 된다.
"너 요즘 힘들어?"
"어, 힘들어. 세상이 말도 안 되는 일투성이라서."
"그럼 도대체 어떡하자는 건데. 일어난 일을."
-60면
인간은 취약하기에 의존하며 빚을 진다. 세상의 상실과 상처에 노출되어 있지만 한편으로 일상을 유지하고 돌봐야 하기에, 세상의 아픔들을 잊거나 외면한다. 그런 핑계를 대며 상실과 애도를 제대로 겪어내지 못하는 것이, 슬픔은 극복되어 그것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강박이 실은 우리를 더 괴롭힌다는 사실을 《영원에 빚을 져서》는 낮게 들려준다.
"나와 나 아닌 이들의 삶은 아주 복잡하고 교묘하게 얽혀 있고 그 얽힌 모양을 면밀히 바라볼 수 있으려면 우리는 다름 아닌 서로의 슬픔에 의연해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틈틈이 슬퍼하고 슬픔을 평생 간직하겠다는 태도야말로 나 그리고 우리를 더 단단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곰곰 생각해보면 슬픔은 정말 제 동반자 같기도 합니다. 제 일상에 집요하게 스며들어 삶의 의지를 미약하게나마 북돋아주기도 하고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거하게 저를 한번 울려버린 뒤 다시 일상을 시작할 수 있는 단초를 마련해주기도 하니까요. 그것이 삶이라고 한다면 사는 동안 저는 정말 빚진 것이 많습니다. 저를 가끔 기쁘게 하고 많이 울게 한 모든 것에 말입니다."
- 작가의 말
"너 지금은 어떤 손바닥이야?"
"손바닥?"
"움직이지 않고 불행한 손바닥 그대로야?"
그러자 혜란이 곰곰 생각해보더니 대답했다.
"아니, 조금 다른 것 같아."
"뒤집힐락 말락?"
혜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래. 왜 그럴까?"
"내가 조금씩 움직이는 것 같아서."
- 84면
누군가가 떠나고 나면 무엇이 남을까?
빈자리. 비어있는 그 자리를 남은 마음들이 채운다. 떠난 사람들이 남긴 기억을 추적한다. 그 과정은 고통 그 자체이지만, 그 고통 너머에 존재하는 희미한 마음이 있다. 건너보는 마음, 살펴보는 마음, 그 기억을 안고 내일을 살기 위해 다짐하는 마음들(69면) 말이다.
그렇게 남은 사람들이 자라는 것 같다. 소설에서 주인공들은 되고 싶은 자신을 말하며 "사람이 되는 게임"을 하다가, 문득 다른 사람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한다. 문제를 풀다 보면 나름의 방식을 알게 되는 것처럼, 떠난 이들을 함부로 잊지 않기 위해 가슴에 매서운 바람이 불어 쪼개질 것을 알아도 그 길을 살아 보는 마음들을 품는다. 그렇게 떠난 이들을 건너보고 살펴보며 자신의 마음들로 빈자리를 채운다.
"잘 살기 위해 운다" (115면)
《영원에 빚을 져서》가 하고 싶은 단 한 마디가 있다면 이 문장이 아닐까 싶다. 상실과 슬픔을 회피하기보다 울면서도 슬픔을 믿고 감싸안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슬퍼해도 괜찮다고, 오히려 더 괜찮아질 거라고, 자기의 삶을 제대로 깨닫기를 바라는 희망을 듣는다.
우리는 모두 행복하고 멋진 삶을 누릴 자격이 있다. 하지만 인생에서 중요하고 가치있는 일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인생의 선물을 받을 만큼 성숙한 큰 그릇이 되기 위해서는 숙성되는 기다림의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 기간 동안 우리는 서로에게 빚을 지고 함께 살며, 부딪히고 긁히면서도 서로를 이해하고 연대하게 된다. 타인의 모습과 관계 속에서 자신의 정체를 선명히 파악하는 고된 과정들이 그래도 결국은 빚을 지고 갚아가는 시간 속에서 위로와 힘을 준다는 믿음을 한 겹 더 채워준 이야기였다.
섬세하고 문학적인 문체로 인물들의 내면을 깊이 있게 묘사한 아름다운 문장들이 많았다. '소설가들이 뽑은 올해의 소설' 작가 예소연. 소설 「그 개와 혁명」으로 등단 4년 만에 2025년 제48회 이상문학상 대상을 받은 작가답게 인물과 사건들이 촘촘하게 얽혀 문학적 서사의 힘과 서정성을 강하게 전달하는 작품이었다. 다양한 비극적 사건들에 대한 성찰보다는 감정적인 측면에 치중한 점이 개인적으로는 조금 아쉬웠지만, 그만큼 인간의 심리를 심도 있게 드러내며 깊은 울림을 주었다.
《영원에 빚을 져서》는 영원에 빚을 지고 사는 삶의 새로운 측면을 보여주었다.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사람들과 세상에 큰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진심으로, 온 마음을 쏟으며 짐 지우고, 빚지고, 눈치 보고, 책임지며 계속 내 삶을 움직이고 싶다. 내 삶의 지분을 차지한 가족과 사람들과 사회의 수많은 조각들을 기쁨과 아픔으로 분류하기보다 다 같이 소중한 나의 일부로 끌어안는 용기를 내고 싶다. 개인주의가 만연한 현대 사회에서 공동체적 가치를 되새기게 하는 귀한 이야기로 오래 기억될 것 같다.
*** 출판사 현대문학의 도서지원을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했습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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