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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계곡
스콧 알렉산더 하워드 지음, 김보람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1월
평점 :
"가즈오 이시구로,
테드 창,
무라카미 하루키를 잇는
놀라운 데뷔작!"
- 조 하킨 (작가)
이 문구에 혹해 읽게 된 《시간의 계곡》
철학 박사인 스콧 알렉산더 하워드가 쓴 첫 소설이다.
데뷔작으로 억대 선인세 계약을 하고, 전 세계로 수출되며, 10개 사가 경쟁한 끝에 유니버설 스튜디오에서 영상화가 확정되었다. 워싱턴포스트 2024 뛰어난 소설 50선, 캐나다 공영방송 CBC 선정 2024년 최고의 책, 굿리즈 2024 초이스어워즈 후보작 등 화려하게 신고식을 치렀다.
저자는 어린 시절 절친하던 친구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겪었다. 살아갈 시간이 무한히 펼쳐져 있고 많은 일을 할 수 있다고 믿었던 저자는 이 일로 충격에 빠진다. 철학자의 길에 의문이 들면서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먼저 세상을 떠난,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 질문에서 《시간의 계곡》이 탄생했다.
《시간의 계곡》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배경이다. '동쪽으로 가면 20년 후의 미래, 서쪽으로 가면 20년 전의 과거'인 마을이 있다. 마을 사이는 철책으로 단절되어 이동할 수 없다. 하지만 사별을 당해 그 대상을 보지 않고서는 삶을 이어갈 수 없는 경우처럼 애도가 필요한 경우에만, 고위 공무원인 자문관의 허가를 받아 비밀리에 다른 마을을 방문할 수 있다.
"우리 밸리가 한가운데에 있다는 건 상대적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그들의 밸리가 중심에 있고 내가 사는 밸리가 옆으로 떨어져 있을 것이다. 내가 사는 이곳이 누군가에게는 미래이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과거인 것이다. "
- 66면
과거, 현재, 미래. 《시간의 계곡》은 시간의 상대성을 말하고 있었다. SF적인 설정이지만, 우리가 사는 현실과 그다지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높은 산으로 올라가면 다른 시간의 마을(밸리)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우리 역시 인식의 시선을 높이 올려 시간을 바라보면 과거와 현재, 미래를 한눈에 둘러볼 수 있다.
우리의 몸은 각각의 시간에서 동시에 존재할 수 없지만, 기억과 감정은 과거와 미래를 쉽게 오간다. 과거의 상처나 영광에 갇혀 현재를 살지 못하는 사람들, 미래의 불안에 잡혀 현재를 놓친 사람들처럼 말이다. 기억과 상실,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내면의 공간이 소설의 밸리처럼 우리 안에 존재하는 것이다.
《시간의 계곡》의 마을처럼 우리 안에 있는 시간의 계곡도 단절되어 현재밖에 모를 수 있다면 어떨까. 다들 현재를 살라고 조언하듯이 과거에 대한 후회도, 미래를 향한 두려움도 없다면 더 행복할까?
다른 밸리의 사람들과는 단절돼있지만, 애도를 위한 방문자에게는 시간 여행을 허용한다. 그들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다. 많은 위험을 초래할 수 있지만 그마저도 무릅쓰고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보여준 설정이 인상 깊었다. "산과 호수, 또 마을 하나. 하나의 밸리가 끝나는 곳에서 또 다른 밸리가 이어졌다." ( 15면) 밸리는 결국 서로 연결되어 있다. 현재만을 살면 단순하고 명쾌하게 행복할 것 같지만 인간은 인간 사이에서 기대 살듯, 시간의 관계에서도 현재는 과거와 미래에게 의지하며 살아야 하는 존재임을 말하는 것 같다.
주인공 16살 오딜은 엄마와 단둘이 산다. 엄마는 자문관이 되길 꿈꿨지만 기록보관실에서 일하며 진로를 정해야 하는 딸이 자문관이 되기를 고집한다. 똑똑하고 관찰력도 좋지만 말수가 적은 오딜은 반에서 괴롭힘을 당한다. 학교도 집도 안식처가 되지 못한 채, 수동적으로 엄마의 뜻대로 살아가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딜은 우연히 미래인 동쪽 마을에서 오딜의 마을로 망자를 보러 온 방문객을 목격한다. 그들은 친구 에드메의 부모님이었다. 미묘한 감정을 키워가며 사랑하게 된 에드메가 미래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나에게 상냥하게 대해준 친구는 에드메가 처음이었다. 그런데 에드메에게 조만간 무슨 일이 일어날 예정이고,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나밖에 없었다니. 앞으로 에드메의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할지 암울했다."
- 45면
결국 에드메는 갑작스럽게 목숨을 잃고 오딜은 깊은 슬픔에 빠진다. 하지만 오딜의 삶은 계속된다. 자문관이 아닌 헌병이 된 오딜은 미래의 자신을 보게 된다. 그리고 과거와 미래를 오갈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오딜은 에드메를 구할 수 있을까? 불행해보이던 자신의 미래를 바꿀 수 있을까?
《시간의 계곡》은 놀라운 흡입력을 가진 소설이다. 책장이 절로 넘어가는 동안 이야기에 금세 빠져버린다. 독특한 배경 속에 삶과 죽음, 사랑과 상실이라는 보편적인 주제를 자연스럽게 녹였다. 시간과 삶의 가치, 기억과 애도 등 이야기와 인물이 던지는 철학적인 사유와 질문들도 아름다웠다. 그러나 《시간의 계곡》이 내게 매력적이었던 가장 큰 이유는 독창적이고 섬세한 표현이었다.
"판화 정중앙에는 우리 작은 마을이 호수의 품에 기대어 있었고, 호수는 주먹에서 펼친 집게손가락처럼 수직으로 길게 뻗어 있었다." (15면)
(수직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니! 읽는 순간 어리둥절했다.)
'오딜 오잔' 알파벳들이 서로 기대어 자기 존재를 숨기려는 듯 한데 옹송그려 있었다. 내 이름은 에드메의 입을 타고 나올 때 훨씬 듣기 좋았다. '오딜, 안녕.'
( 44면)
(이름을 통해 오딜의 낮은 자존감과 에드메와의 풋풋한 설렘을 기막히게 드러낸다.)
세월이 흘러도 그의 고통은 줄지 않았다. 그의 고통은 바스러지지도 암반처럼 굳어지지도 않았다. (73면)
(고통이 지속되고 있음을 생생하게 그렸다.)
그 순간 내 입가의 미소가 사라졌다. 마치 모래알 사이로 스며드는 파도처럼. (77면)
(스콧 알렉산더 하워드는 태생부터 소설가였던 사람 같다!)
호수 반대편에는 헌병대가 대충 줄을 맞춰 피워놓은 모닥불의 불씨가 어둠 속에서 마치 우물 아래로 떨어진 목걸이처럼 반짝거렸다. (116면)
(독자의 눈앞에 사진처럼 장면을 절로 떠오르게 한다. 아름답다.)
《시간의 계곡》은 문학적인 재미와 철학적인 깊이를 모두 잡은 이야기다. 매력적인 서사, 생생한 인물과 감정 묘사, 독특한 배경 설정, 아름다운 문체로 읽는 이를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인다. 동시에 시간, 기억, 상실, 선택 등 철학적인 주제로 깊은 성찰의 자리까지 제공한다. 문학과 철학의 조화로 묘한 감동과 여운을 남기는 작품, 《시간의 계곡》을 거닐며 방구석 시간 여행을 떠나는 건 어떠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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