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만의 집
전경린 지음 / 다산책방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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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만의 집》은 21살 호은이의 시선으로 전개된다. 엄마와 이혼해 따로 살고 있는 아빠가 대학생인 호은이 지내는 기숙사 앞으로 불쑥 찾아온다. 15살 이복동생 승지를 엄마에게 맡겨달라는 이해할 수 없는 말만 남긴 채 사라진다. 엄마 윤선은 호은, 승지와 함께 아빠를 찾아 나선다. 한 편의 로드무비처럼 아빠의 집과 직장, 친구들을 만나보지만 소용없다.

"어른들은 정말 너무들 했다. 엄마의 애인인 아저씨에다, 엄마의 전남편인 아빠, 내 양육권을 포기한 아빠가 키우는 아빠의 새로운 딸 승지...... 도대체 관계 정립이 안 되어 어색하게 방황하는 내 정신세계는 안중에도 없이 제멋대로들이다. 겨우겨우 근육을 풀어 엄마의 애인을 받아들였는데, 이번엔 동생이라니."
- 44면

"나에게 떠맡기겠다는 수작인 거야?"
엄마는 정말 숨이 턱 막히는 모양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이혼한 전처가, 전남편이 재혼해 생긴 아이를 맡는 일 같은 건 세상에 없는 일이다.
- 53면

어쩔 수 없이 세 사람은 윤선의 집에서 부대끼며 함께 한다. 관계 속에서 오해하고, 사랑하고, 외로워하고, 깨달아가는 과정들이 주옥같은 문장들로 얽혀 예술로 완성된다.

《자기만의 집》은 질문하는 소설이다.
인물과 이야기를 통해 쉴 새 없이 물음표를 던진다. 소설 속 인물들도 자신에게, 서로에게 수많은 질문을 한다. 그것들은 고스란히 독자에게 쏟아져 마음속에서 뒹군다.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세계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인생의 본질을 묻는 것 같았다.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냐고, 당신은 누구냐고 정답 없는 대답을 촉구한다. 인물들과 함께 고민하며 내 시선은 자주 책과 창밖 하늘을 오갔다. 어렵지만 풀다 보면 알 것 같았다. 답을 찾지 못해도, 답에 가까워지는 것 같아 충만해지는 것 같았다.

독서를 시작한 지 몇 년 되지 않아 모르는 작가들이 숱하지만, 이렇게나 훌륭한 소설가의 이름을 처음 들어봤다는 사실이 어리둥절하다. 서평단으로 엄청난 책들을 많이 만났지만, 《자기만의 집》처럼 대단한 책을 무료로 지원받아도 되나 죄송한 마음이 든 건 처음이다.

어느 페이지를 펼쳐도 밑줄 긋고, 인덱스로 표시하고 싶은 아름다운 문장이 수놓인 예술작품 같은 소설이었다. 한국문학의 독보적인 목소리, 삶을 꿰뚫는 감각적인 문장이라는 평을 듣는 전경린의 필력은 정말이지 어마어마하다. (미리보기로라도 당장 경험해 보시길!)

"If life gives you lemons, make lemonade!"
생은 시어빠진 레몬 따위나 줄 뿐이지만, 나는 그것을 내던지지 않고 레모네이드를 만들 것이다.
- 278면

"오즈의 마법사"처럼 토네이도에 집이 통째로 휩쓸려 세차게 흔들리다 다시 땅에 안착한 뒤, 호은이 간절하고도 다정하게 외치는 말이다. "내 존재로부터 솟아나 흐르는 물결 속에 얼굴을 담그고 있는 기분이었다. 물결은 점점 더 깊고 큰 강물이 되겠지. 나만의 강물이....."(278면) 호은은 알아버렸다. 모두가 자신만의 강을 가지고 있음을, 시어서 도저히 먹지 못할 것 같은 레몬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견디고 다룰 수 있게 되면 결국은 시원한 레모네이드가 만들어진다는 것을.

인생에 좋기만 하거나 나쁘기만 한 일은 없다. 언제나 좋은 일은 나쁜 일과 함께 온다. 반대로 나쁜 일에도 좋은 일이 끼어서 같이 온다. 빛과 그림자는 하나다. 그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것, 닫힌 문 뒤로 새롭게 열리는 문의 존재를 믿는 것. 나와 내가 거할 집, 우리가 함께 사는 세상 또한 그렇게 반대되고 모순되는 것들이 뒤엉켜 균열을 만든다. 깨질지라도 그게 바로 인생이라는 걸 받아들여야 하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였다.

인생의 깊이 있는 주제에 천착해 자신만의 길을 찾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나에게 더할 나위 없었다. 개인적으로 완벽한 해피엔딩을 읽는 기쁨이 컸던 《자기만의 집》. 강력 추천한다.

"네가 파고들 때마다 엄만 내 가슴이 이렇게 깊은가 하고 놀랐어. 그 연하고 따스하고 포근한 두 팔로 나의 목을 꽉 안고 눈물을 흘릴 때, 엄만 경험한 적 없는 감동에 젖었어. 자기에게 화를 내는 사람을 그토록 깊숙이 끌어안는 존재가 자식 외에 또 있을까........ 호은아, 난 그렇게 엄마가 되기 시작했어. 지금도 너를 안을 때마다 난 조금씩 더 큰 엄마가 되어가고 있어."
- 255면

#도서지원 #자기만의집 #전경린 #인생소설 #자립 #여성서사 #연대 #사랑 #인생 #삶 #천선란 #모우어 #양귀자 #모순 #책 #책추천 #소설 #소설추천 #인생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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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과 생각
정용준 지음 / 작가정신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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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준.
2009년부터 활동한 소설가다.
반갑게도 나와 같은 00학번이다.
젊은작가상, 황순원문학상, 문지문학상, 한무숙문학상, 소나기마을문학상, 오영수문학상, 젊은예술가상 등 화려한 수상경력에 '우와'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현재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인정받은 소설가가 쓴 산문이라니 무척이나 기대됐다. 그래서 외려 읽기에 방해가 되지 않을까 염려했지만, 작가의 말을 읽자마자 우려는 설렘으로 돌아섰다. '이 작가님, 완전 내 스타일이잖아!'

단문의 매력이 넘치는 문체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짧고 간결한 문장은 생각을 압축해서 전달했다. 속도감과 생동감이 따라왔다. 작가들만의 고유하고 독특한 감각이 신선한 비유와 은유로 빛났다. 일상적인 소재나 경험을 낯설게 비틀어 예상치 못한 연결로 전개되는 즐거움이 굉장했다.

《밑줄과 생각》은 여러 지면을 통해 "읽기와 쓰기가 우리에게 주는 모든 것"에 관한 기록 37편을 모은 책이다. 제목처럼 인상 깊었던 소설과 글 중 저자가 밑줄 그은 문장에서 시작된 생각들을 풀어냈다. 자유롭게 유영하는 소설가의 사유를 따라다니며 같이 여행하는 기분이었다. '행간은 이렇게 읽는 거야, 여기서 이런 감정과 통찰을 끌어낼 수 있어.' 독서법과 작법을 가르치는 선생님 같기도 했다. 내가 쓰는 어설픈 서평과 비교됐지만 편안하게 읽히면서도 개성이 뚜렷한 서평은 이런 글이구나, 이상향에 가까운 글을 만난 것 같다.

"문학이 아니었다면,
타인의 마음에
숲과 바다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을 것이고
인간의 감정과 감각에
바람과 별자리가 있다는 것도 몰랐을 것이다."

문학을 향한 찬가로도 읽히는 《밑줄과 생각》. 밑줄 친 언어들이 흔적과 흉터로 남아 정용준의 일부가 된 이야기였다. 개인적인 경험과 성찰에 그치지 않고, 사회의 부조리와 인간관계의 모순까지 포착하며 냉소적이고 비판적인 시선까지 담았다. 문학을 대할 때는 한없이 감성적이고 따뜻한 글이 예리하게 빛나는 매혹적인 책이다.

특히 글에 대한 작가의 시선을 엿볼 수 있어 좋았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 들려주는 책 이야기만큼 재미난 게 또 없다. 언어의 힘과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여러 작품을 소개받고, 언어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작가의 아름다운 글로 들을 수 있다니 신나지 않을 수 없다. 글의 아름다움과 가능성을 확인하고, 벼리고 벼려진 정영준만의 문체에 감탄하는 순간마다 행복했다.

"좋았다. 작가의 뉘앙스가 문장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이런 걸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 그는 기린처럼 길게 나타나 고요하게 머물다가 기린처럼 길게 사라졌다. 아, 기린은 평생 그 어떤 소리도 내지 않는다고 한다.(모든 개체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167면

글쓰기에 대한 용기도 얻었다. 공개하는 글이라면 일기 수준은 넘어서야 한다고 흔히들 말한다. 그래서 감히 일기 같은 글을 내보일 수 없어 오히려 글을 쓸 때마다 나는 용기를 내야했다. 하지만 정영준은 말한다.


"문학은 어떤 의미에서 철저히 작가만의 사적인 일기 비슷한 것이 되어야 한다. 김수용은 작가가 지닌 사적인 감각과 인식을 일기처럼 적나라하게 쓰기만 해도 그 자체로 훌륭한 문학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114면)

"작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어쨌거나 쓰는 것이다. 잘 쓰는 것은 그다음이다. 그러기 위해선 모든 마음을 글쓰기를 위한 재료로 사용할 필요가 있다. 모든 마음을 글로 쓰지 못하는 이유로 사용하는 것보다 윤리적이고 정당하다. 작가는 비윤리적인 것을 써내는 것이 차라리 윤리적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없다. 하지 않음으로서의 정의는 없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땅에 묻어두고 손해를 예방하는 것은 이미 어떤 것도 창조하지 않았으므로 가치가 없다."(119면)

작가는 아니지만, 쓰고 싶은 사람으로서 나에게도 적용하고 싶은 문장들이다. 아무것도 쓰지 않음으로서 손해를 예방하는 것은 가치가 없다는 말에 기대어 다짐한다. '엉망인 글이지만 계속 써보자, 그래도 된다잖아.' 나를 녹인 글을 뭐라도 어쨌거나 내놓는 것이 움츠리고 숨어들어 아무것도 쓰지 않는 편보다 훨씬 훌륭한 선택임을 배웠다.


《밑줄과 생각》은 행복하게 나를 깨뜨리고 일깨운다. 기꺼이 깨지고 그래서 더 커지고 싶은 모든 독자에게 《밑줄과 생각》을 강하게 추천한다.

#도서지원 #밑줄과생각 #정용준 #작정단13기 #산문집 #산문집추천 #작가정신 #소설가의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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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키 두 개 소설의 첫 만남 33
이희영 지음, 양양 그림 / 창비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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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첫사랑을 꿈꿨지만, 아쉽게도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 절호의 기회를 이야기 속에서 다시 찾으려 합니다."
- ⁠작가 소개에서


<페인트> 이희영의 신작 소설 《쿠키 두 개》는 꿈과 현실의 경계를 허물며 몽환적인 세계로 초대한다. 87페이지의 짧은 소설을 앉은 자리에서 한번에 읽었다. 수채화풍의 삽화처럼 물빛으로 젖어든 서정적인 이야기다.


매일 아침, 똑같은 시간에 두 개의 쿠키를 사 가는 소년. 투명한 손이 나타나 그 소년을 소개하고 사라지는 기이한 꿈. 방학을 맞아 엄마의 쿠키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 '나'는 낯설고 신비로운 소년에게 점점 마음을 빼앗긴다.


⁠"그 아이가 가게에 발길을 끊자 투명한 손도 모습을 감췄다. 덕분에 그토록 기묘하고 생생한 꿈을 더는 꿀 수 없게 되었다. 그즈음 나는 한 가지 습관이 생겨버렸는데, 테이블을 닦으면서도, 쿠키를 정리하면서도, 유리 진열장에 턱을 괸 채 커피우유를 마실 때조차 괜스레 이차선 도로를 살핀다는 것이다."
-⁠ 31면


꿈과 현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펼쳐지는 《쿠키 두 개》는 한 편의 꿈 같다. 매일 아침 쿠키 가게를 찾아오는 소년은 꿈속에서 걸어 나온 듯 신비롭다. 소년의 비밀은 무엇일까? 왜 매일 아침 두 개의 쿠키를 사 가는 걸까?


이희영 작가는 섬세한 문체와 감각적인 묘사를 통해 독자를 이야기 속으로 깊숙이 끌어들인다. 한 편의 동화처럼, 하이틴 영화처럼 말간 분위기는 묘하게 매력적이다. 비밀스러운 전개는 궁금증을 자아내 긴장감을 만들고, 소년의 비밀이 밝혀지는 후반부는 반전과 함께 깊은 여운을 남긴다.


⁠"왜인지는 묻지 말아요. 그냥 주는 거니까. 진짜 그냥......."
반 아이들에게 쿠키를 나눠 준 것도, 꼬마에게 쿠키를 선물한 것도 모두 그냥이었다. 그러고 싶었고 그게 전부였다. 어떤 목적이나 이유 따위 없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이 단순한 마음을 믿지 않는 걸까? 의심하고 질타를 보낼까?
⁠- 47면


《쿠키 두 개》는 상실과 그리움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따뜻한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인물들은 각자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지만, 서로를 통해 위안을 얻고 성장한다. 삶의 소중한 의미를 곱씹게하는 특별한 이야기를 찾고 있다면, 짧은 소설이 선사하는 기나긴 감동에 꿈결같이 빠질 수 있을 것이다.


*** 출판사 창비의 도서지원을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했습니다. 감사합니다. ***

#쿠키두개 #이희영 #소설의첫만남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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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에 빚을 져서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54
예소연 지음 / 현대문학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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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궤적이 온전히 그 사람의 몫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한 사람의 궤적은 온 사람의 궤적이 되고 그 궤적은 종내 알 수 없는 문양을 한 채로 우리 모두를 잡아끈다."
-123면


9년 전, 캄보디아로 해외 봉사활동을 갔던 동이, 혜란, 석이.
그들은 한 학교의 선생님이 되어, 캄보디아 아이들과 4개월의 시간을 보낸다. 개교기념일이라 숙소에서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던 날, 핸드폰으로 중계되는 침몰하는 배를 보게 되고 세 친구들은 미묘한 변화를 겪게 된다. 한극으로 돌아온 후 졸업과 취업 등 각자의 삶을 사느라 서로에게 소홀하게 된 어느 날, 석이가 실종되었다는 이야기에 동이와 혜란은 다시 캄보디아로 떠나게 되는데....
- 출판사 책 소개


"《영원에 빚을 져서》는 실종된 친구를 찾아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사라진 사람의 흔적을 떠나 비로소 서로가 서로에게 연루된 존재임을 알게 되는 이야기이죠. 연루되는 일은 불가항력이지만 연루된 모든 존재를 놓치지 않고 톺아보는 일은 우리에게 주어진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작가의 말


《영원에 빚을 져서》는 세월호 참사, 어머니의 죽음, 캄보디아 압사 사고 등 우리 사회의 깊은 슬픔과 상처를 배경으로, 세 여성의 여정을 따라가며 삶의 의미를 되묻는다.


세 명의 인물들 속에서 나의 조각들을 찾을 수 있었다. 세월호나 이태원 참사 앞에서 슬픔에 쉽게 매몰되어 도리어 눈을 감아버리는 나, 타인이 쏟았던 마음의 크기를 이해하려 애쓰기보다 가늠하려던 나, 딴 세상에 있는 것처럼 불행을 혼자 짊어졌던 나. 뜨끔했고 아차 싶어 혼이 나는 기분이었다.


서로에게 의존하며 영향을 주고받고, 시간 속에서 서로의 일부가 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숙명을 생각하면 "빚을 짐으로써만 우리는 살아가게 된다."(-작품 해설, 140면)는 의미를 영원으로 확장시킨 소설의 제목을 이해하게 된다.


"너 요즘 힘들어?"
"어, 힘들어. 세상이 말도 안 되는 일투성이라서."
"그럼 도대체 어떡하자는 건데. 일어난 일을."
-60면

인간은 취약하기에 의존하며 빚을 진다. 세상의 상실과 상처에 노출되어 있지만 한편으로 일상을 유지하고 돌봐야 하기에, 세상의 아픔들을 잊거나 외면한다. 그런 핑계를 대며 상실과 애도를 제대로 겪어내지 못하는 것이, 슬픔은 극복되어 그것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강박이 실은 우리를 더 괴롭힌다는 사실을 《영원에 빚을 져서》는 낮게 들려준다.


"나와 나 아닌 이들의 삶은 아주 복잡하고 교묘하게 얽혀 있고 그 얽힌 모양을 면밀히 바라볼 수 있으려면 우리는 다름 아닌 서로의 슬픔에 의연해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틈틈이 슬퍼하고 슬픔을 평생 간직하겠다는 태도야말로 나 그리고 우리를 더 단단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곰곰 생각해보면 슬픔은 정말 제 동반자 같기도 합니다. 제 일상에 집요하게 스며들어 삶의 의지를 미약하게나마 북돋아주기도 하고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거하게 저를 한번 울려버린 뒤 다시 일상을 시작할 수 있는 단초를 마련해주기도 하니까요. 그것이 삶이라고 한다면 사는 동안 저는 정말 빚진 것이 많습니다. 저를 가끔 기쁘게 하고 많이 울게 한 모든 것에 말입니다."
- 작가의 말




"너 지금은 어떤 손바닥이야?"
"손바닥?"
"움직이지 않고 불행한 손바닥 그대로야?"
그러자 혜란이 곰곰 생각해보더니 대답했다.
"아니, 조금 다른 것 같아."
"뒤집힐락 말락?"
혜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래. 왜 그럴까?"
"내가 조금씩 움직이는 것 같아서."
- 84면


누군가가 떠나고 나면 무엇이 남을까?
빈자리. 비어있는 그 자리를 남은 마음들이 채운다. 떠난 사람들이 남긴 기억을 추적한다. 그 과정은 고통 그 자체이지만, 그 고통 너머에 존재하는 희미한 마음이 있다. 건너보는 마음, 살펴보는 마음, 그 기억을 안고 내일을 살기 위해 다짐하는 마음들(69면) 말이다.


그렇게 남은 사람들이 자라는 것 같다. 소설에서 주인공들은 되고 싶은 자신을 말하며 "사람이 되는 게임"을 하다가, 문득 다른 사람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한다. 문제를 풀다 보면 나름의 방식을 알게 되는 것처럼, 떠난 이들을 함부로 잊지 않기 위해 가슴에 매서운 바람이 불어 쪼개질 것을 알아도 그 길을 살아 보는 마음들을 품는다. 그렇게 떠난 이들을 건너보고 살펴보며 자신의 마음들로 빈자리를 채운다.


"잘 살기 위해 운다" (115면)
《영원에 빚을 져서》가 하고 싶은 단 한 마디가 있다면 이 문장이 아닐까 싶다. 상실과 슬픔을 회피하기보다 울면서도 슬픔을 믿고 감싸안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슬퍼해도 괜찮다고, 오히려 더 괜찮아질 거라고, 자기의 삶을 제대로 깨닫기를 바라는 희망을 듣는다.


우리는 모두 행복하고 멋진 삶을 누릴 자격이 있다. 하지만 인생에서 중요하고 가치있는 일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인생의 선물을 받을 만큼 성숙한 큰 그릇이 되기 위해서는 숙성되는 기다림의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 기간 동안 우리는 서로에게 빚을 지고 함께 살며, 부딪히고 긁히면서도 서로를 이해하고 연대하게 된다. 타인의 모습과 관계 속에서 자신의 정체를 선명히 파악하는 고된 과정들이 그래도 결국은 빚을 지고 갚아가는 시간 속에서 위로와 힘을 준다는 믿음을 한 겹 더 채워준 이야기였다.


섬세하고 문학적인 문체로 인물들의 내면을 깊이 있게 묘사한 아름다운 문장들이 많았다. '소설가들이 뽑은 올해의 소설' 작가 예소연. 소설 「그 개와 혁명」으로 등단 4년 만에 2025년 제48회 이상문학상 대상을 받은 작가답게 인물과 사건들이 촘촘하게 얽혀 문학적 서사의 힘과 서정성을 강하게 전달하는 작품이었다. 다양한 비극적 사건들에 대한 성찰보다는 감정적인 측면에 치중한 점이 개인적으로는 조금 아쉬웠지만, 그만큼 인간의 심리를 심도 있게 드러내며 깊은 울림을 주었다.


《영원에 빚을 져서》는 영원에 빚을 지고 사는 삶의 새로운 측면을 보여주었다.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사람들과 세상에 큰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진심으로, 온 마음을 쏟으며 짐 지우고, 빚지고, 눈치 보고, 책임지며 계속 내 삶을 움직이고 싶다. 내 삶의 지분을 차지한 가족과 사람들과 사회의 수많은 조각들을 기쁨과 아픔으로 분류하기보다 다 같이 소중한 나의 일부로 끌어안는 용기를 내고 싶다. 개인주의가 만연한 현대 사회에서 공동체적 가치를 되새기게 하는 귀한 이야기로 오래 기억될 것 같다.




*** 출판사 현대문학의 도서지원을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했습니다. 감사합니다. ***


#예소연 #영원에빚을져서 #현대문학 #현대문학핀시리즈 #소설추천 #상실 #애도 #공감 #그개와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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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계곡
스콧 알렉산더 하워드 지음, 김보람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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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즈오 이시구로,
테드 창,
무라카미 하루키를 잇는
놀라운 데뷔작!"
- 조 하킨 (작가)


이 문구에 혹해 읽게 된 《시간의 계곡》
철학 박사인 스콧 알렉산더 하워드가 쓴 첫 소설이다.
데뷔작으로 억대 선인세 계약을 하고, 전 세계로 수출되며, 10개 사가 경쟁한 끝에 유니버설 스튜디오에서 영상화가 확정되었다. 워싱턴포스트 2024 뛰어난 소설 50선, 캐나다 공영방송 CBC 선정 2024년 최고의 책, 굿리즈 2024 초이스어워즈 후보작 등 화려하게 신고식을 치렀다.


저자는 어린 시절 절친하던 친구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겪었다. 살아갈 시간이 무한히 펼쳐져 있고 많은 일을 할 수 있다고 믿었던 저자는 이 일로 충격에 빠진다. 철학자의 길에 의문이 들면서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먼저 세상을 떠난,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 질문에서 《시간의 계곡》이 탄생했다.


《시간의 계곡》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배경이다. '동쪽으로 가면 20년 후의 미래, 서쪽으로 가면 20년 전의 과거'인 마을이 있다. 마을 사이는 철책으로 단절되어 이동할 수 없다. 하지만 사별을 당해 그 대상을 보지 않고서는 삶을 이어갈 수 없는 경우처럼 애도가 필요한 경우에만, 고위 공무원인 자문관의 허가를 받아 비밀리에 다른 마을을 방문할 수 있다.


"우리 밸리가 한가운데에 있다는 건 상대적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그들의 밸리가 중심에 있고 내가 사는 밸리가 옆으로 떨어져 있을 것이다. 내가 사는 이곳이 누군가에게는 미래이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과거인 것이다. "
- 66면


과거, 현재, 미래. 《시간의 계곡》은 시간의 상대성을 말하고 있었다. SF적인 설정이지만, 우리가 사는 현실과 그다지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높은 산으로 올라가면 다른 시간의 마을(밸리)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우리 역시 인식의 시선을 높이 올려 시간을 바라보면 과거와 현재, 미래를 한눈에 둘러볼 수 있다.


우리의 몸은 각각의 시간에서 동시에 존재할 수 없지만, 기억과 감정은 과거와 미래를 쉽게 오간다. 과거의 상처나 영광에 갇혀 현재를 살지 못하는 사람들, 미래의 불안에 잡혀 현재를 놓친 사람들처럼 말이다. 기억과 상실,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내면의 공간이 소설의 밸리처럼 우리 안에 존재하는 것이다.


《시간의 계곡》의 마을처럼 우리 안에 있는 시간의 계곡도 단절되어 현재밖에 모를 수 있다면 어떨까. 다들 현재를 살라고 조언하듯이 과거에 대한 후회도, 미래를 향한 두려움도 없다면 더 행복할까?


다른 밸리의 사람들과는 단절돼있지만, 애도를 위한 방문자에게는 시간 여행을 허용한다. 그들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다. 많은 위험을 초래할 수 있지만 그마저도 무릅쓰고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보여준 설정이 인상 깊었다. "산과 호수, 또 마을 하나. 하나의 밸리가 끝나는 곳에서 또 다른 밸리가 이어졌다." ( 15면) 밸리는 결국 서로 연결되어 있다. 현재만을 살면 단순하고 명쾌하게 행복할 것 같지만 인간은 인간 사이에서 기대 살듯, 시간의 관계에서도 현재는 과거와 미래에게 의지하며 살아야 하는 존재임을 말하는 것 같다.


주인공 16살 오딜은 엄마와 단둘이 산다. 엄마는 자문관이 되길 꿈꿨지만 기록보관실에서 일하며 진로를 정해야 하는 딸이 자문관이 되기를 고집한다. 똑똑하고 관찰력도 좋지만 말수가 적은 오딜은 반에서 괴롭힘을 당한다. 학교도 집도 안식처가 되지 못한 채, 수동적으로 엄마의 뜻대로 살아가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딜은 우연히 미래인 동쪽 마을에서 오딜의 마을로 망자를 보러 온 방문객을 목격한다. 그들은 친구 에드메의 부모님이었다. 미묘한 감정을 키워가며 사랑하게 된 에드메가 미래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나에게 상냥하게 대해준 친구는 에드메가 처음이었다. 그런데 에드메에게 조만간 무슨 일이 일어날 예정이고,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나밖에 없었다니. 앞으로 에드메의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할지 암울했다."
- 45면


결국 에드메는 갑작스럽게 목숨을 잃고 오딜은 깊은 슬픔에 빠진다. 하지만 오딜의 삶은 계속된다. 자문관이 아닌 헌병이 된 오딜은 미래의 자신을 보게 된다. 그리고 과거와 미래를 오갈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오딜은 에드메를 구할 수 있을까? 불행해보이던 자신의 미래를 바꿀 수 있을까?


《시간의 계곡》은 놀라운 흡입력을 가진 소설이다. 책장이 절로 넘어가는 동안 이야기에 금세 빠져버린다. 독특한 배경 속에 삶과 죽음, 사랑과 상실이라는 보편적인 주제를 자연스럽게 녹였다. 시간과 삶의 가치, 기억과 애도 등 이야기와 인물이 던지는 철학적인 사유와 질문들도 아름다웠다. 그러나 《시간의 계곡》이 내게 매력적이었던 가장 큰 이유는 독창적이고 섬세한 표현이었다.

"판화 정중앙에는 우리 작은 마을이 호수의 품에 기대어 있었고, 호수는 주먹에서 펼친 집게손가락처럼 수직으로 길게 뻗어 있었다." (15면)
(수직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니! 읽는 순간 어리둥절했다.)

'오딜 오잔' 알파벳들이 서로 기대어 자기 존재를 숨기려는 듯 한데 옹송그려 있었다. 내 이름은 에드메의 입을 타고 나올 때 훨씬 듣기 좋았다. '오딜, 안녕.'
( 44면)
(이름을 통해 오딜의 낮은 자존감과 에드메와의 풋풋한 설렘을 기막히게 드러낸다.)

세월이 흘러도 그의 고통은 줄지 않았다. 그의 고통은 바스러지지도 암반처럼 굳어지지도 않았다. (73면)
(고통이 지속되고 있음을 생생하게 그렸다.)

그 순간 내 입가의 미소가 사라졌다. 마치 모래알 사이로 스며드는 파도처럼. (77면)
(스콧 알렉산더 하워드는 태생부터 소설가였던 사람 같다!)

호수 반대편에는 헌병대가 대충 줄을 맞춰 피워놓은 모닥불의 불씨가 어둠 속에서 마치 우물 아래로 떨어진 목걸이처럼 반짝거렸다. (116면)
(독자의 눈앞에 사진처럼 장면을 절로 떠오르게 한다. 아름답다.)


《시간의 계곡》은 문학적인 재미와 철학적인 깊이를 모두 잡은 이야기다. 매력적인 서사, 생생한 인물과 감정 묘사, 독특한 배경 설정, 아름다운 문체로 읽는 이를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인다. 동시에 시간, 기억, 상실, 선택 등 철학적인 주제로 깊은 성찰의 자리까지 제공한다. 문학과 철학의 조화로 묘한 감동과 여운을 남기는 작품, 《시간의 계곡》을 거닐며 방구석 시간 여행을 떠나는 건 어떠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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