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먼 - 인간에 대한 비공식 보고서
매트 헤이그 지음, 강동혁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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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란 중간 정도 지능을 가진 이족 보행 생명체로,
우주의 외딴 구석, 작고 침수된 행성에서
대체로 망상에 빠진 삶을 살고 있다."
- 11면

주인공은 외계의 고도 문명을 가진 종족인 보나도리아 외계인이다.
천재 수학자 앤드루 마틴이 100년 넘게 난제로 남은 '리만 가설'을 증명하자 보나도리아 외계인들(본체)은 그를 살해한다. 비이성적이고 불완전하며 감정에 휘둘리는 지구인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큰 진보를 이끌 비밀을 푼 것은 우주적인 위험이기 때문이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리만 가설과 관련 있는 자들을 모두 없애기 위해 앤드루 마틴의 몸을 똑같이 복제한 주인공을 지구에 보낸다. 그가 쓴 "인간에 대한 비공식 보고서"가 바로 이 책 《휴먼》이다. 보나도리아인을 독자로 상정했기에 지구인의 입장에서는 완전히 낯선 시각에서 인간과 삶과 사랑을 바라보게 한다.


"얼굴이 너무 이질적으로 보였다.
도무지 알 수 없는 구멍과 돌출부로 가득했다.
특히 코가 신경 쓰였다. 천진난만한 내 눈에는
그의 안에 다른 무언가가 들어 있어서 뚫고 나오려는 것처럼 보였다."
- 22면


알몸으로 차도를 배회하고, 침 뱉기를 인사로 오해해 여러 번 침을 뱉으며, 인간의 생김새를 조악하고 역겹게 느끼는 외계인의 좌충우돌 지구 적응기가 시작된다. 저자 매트 헤이그가 정말로 외계인이 아닐까 생각들 정도로 새로운 시선들이 즐비했다.


외계인의 눈으로 본 지구인은 우스꽝스럽고 말도 안 되게 이상한 종족이었다. 이 책을 읽으며 몇 번이나 파안대소했다. 초반의 유머 코드는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인생에 대한 깊은 통찰로 이어진다.


"인간 역사 전체가 불가능한 확률에 맞서 싸워온 사람들로 가득하다는 걸 알았다. 일부는 성공했고 대부분은 실패했다. 그래도 인간은 멈추지 않았다. 이 유인원에 대해 할 수 있는 말이 있다면, 끈질기다는 것이다. 인간은 희망을 품을 수 있다. 아아, 정말이지 희망은 있었다.
희망에 대해 또 하나 말할 수 있는 건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
- 238면


주인공은 그렇게 마흔세 살짜리 신생아로 시작해 아내와 아들이 있는 가족 안에서 인생을 배워간다. 앤드루 마틴이면서 앤드루 마틴이 아닌 삶, 그렇지만 결국은 인간이 되는 방법을 터득해가는 앤드루 마틴의 삶을 말이다.


"내가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책.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부은 책.
내가 세상에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들이 이 책에 담겼다."


동시에 여러 글을 쓰고 빠르게 작품을 발표하기로 유명한 작가인데 이 책은 출간까지 13년이 걸렸다고 한다. 탈고 후 편집에서 5만 단어를 지우고 새롭게 4만 단어를 추가하며 그야말로 그의 모든 것을 쏟아부은 책이었다. 우울증으로 삶을 포기할 뻔한 24세의 자신을 위해 쓴 자전적 소설을 통해 작가가 전하고 싶은 "가장 좋은 것들"이 무엇인지 내내 궁금했다.


"인간은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그 반대를 통과해야만 한다.
이 역설이 인간성을 완성하는 본질이다."
- 쇠렌 키르케고르, <두려움과 떨림>


책을 덮으며 이 문장이 떠올랐다. 작가가 소설에 쓴 인용문 중에 하나다. 비합리적이고 모순투성이인 인간, 무언가를 원하면 동시에 그 반대편을 경험하거나 감내해야 하는 인생. 하지만 그 속에 놓을 수 없는 가치와 아름다움을 간직한 삶의 역설적인 진리를 보여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사랑을 원하면 상실과 고통의 가능성을 받아들여야 한다. 자유를 원하면 책임과 불안을 떠안아야 한다. 삶을 원하면 죽음을 직시해야 한다. 양극단을 모두 끌어안아야 비로소 인간은 사람이 된다.


덧없음을 알기에 순간의 소중함을 깨닫고, 관계를 깊이 가꿀 수 있다. 소멸을 전제로 하기에 예술과 철학, 사랑 같은 불가능함을 인간은 끊임없이 창조한다. 인생의 모순이야말로 인간을 특별하게 만드는 본질임을 작가는 외계인의 눈을 거울삼아 밝혀준 것 같다.


뭉클했다. 작가 자신이 경험한 칠흑 같은 어둠을 녹여내, 그 속에서도 끝끝내 빛을 찾으며 이야기를 완성했을 그 마음이 아프고 또 참 고마웠다.


결국은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작은 것들에서 행복과 의미를 찾는 고귀함을 '좋은 것'으로 선물 받은 기분이다. 우리의 평범한 일상과 가족, 사랑, 예술, 존재의 모순과 아름다움 등 인생을 통해 체득한 작가의 사색이 곳곳에 스며 있는 멋진 소설이었다.


<미드나잇 라이브버리> <라이프 임파서블>에 이어 메트 헤이그의 작품을 세 번째 만났다. 그중 《휴먼》이 가장 인상 깊었다. 외계 행성으로 시선을 멀리 보내야만 인간의 위대함과 기적과도 같은 사랑을 볼 수 있다니, 우리는 얼마나 어리석고도 놀라운 생명체인가. 이 어렵고도 즐거운 사실을 확실히 각인시켜준 사랑스럽고도 경이로운 이야기였다.


좋은 문장들이 많아 오랫만에 필사도 하며 외계인의 신선한 관점에서 기분 좋게 환기하는 시간이었다. 주인공이 지구인 아들에게 전한 "인간을 위한 조언" 97가지(주인공이 가장 좋아하는 숫자!)까지 보너스 선물로 꼼꼼히 챙겨본다.
그 중 몇 가지를 나눈다. 고도의 문명인다운 주옥 같은 조언들이 여러분의 마음에도 선물로 전해지기를.


1. 수치심은 족쇄다. 스스로 자유로워져라.
2. 네 능력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라.
너한테는 사랑할 능력이 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3.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해라.
우주적인 차원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곧 너다.
4. 기술은 인류를 구하지 못한다.
인간이 인간을 구할 것이다.
5. 웃어라. 네게 어울린다.


#도서지원 #휴먼 #매트헤이그 #소설추천 #인생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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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만 해방 - 가짜 허기에 중독된 두뇌를 리셋하다
데이비드 A. 케슬러 지음, 이충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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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체중이 늘어날까?
체중을 줄이기가 왜 그렇게 어려울까?
설령 체중을 줄이는 데 성공하더라도,
그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왜 불가능한 일처럼 느껴질까?"
-10면


저자인 데이비드 A. 케슬러, 전 미국 식품의약국(FDA) 국장은 명확히 지적한다. 뇌가 초조제식품에 중독되었기 때문이라고.


초조제(ultraformulated)식품이란?
지방, 설탕, 소금의 강력한 조합으로
아주 맛있고 에너지 밀도와 혈당 지수가 높아 거부하기 힘든 식품이다. 저자는 의도적으로 뇌의 보상 시스템을 조작하기 위해 설계되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렇다. 의도적이다.
거대 담배 회사가 조용하고 교활하게 니코틴 중독으로 사람들을 질병과 죽음의 주요 원인이 되는 습관에 빠뜨렸듯, 오늘날 식품 기업들도 동일한 전략과 중독 메커니즘으로 초조제식품을 퍼뜨리고 있다.


저자는 이 시대의 새로운 담배가 바로 초조제식품이라고 단언한다. 언제 어디서나 쉽게 구할 수 있다는 접근성을 무기로, 더 많이 더 자주 먹도록 교묘하게 설계된 식품의 정체를 드러낸다. 비만과 과체중 문제의 본질은 개인의 나약함이 아니라 중독을 유발하는 사회적 환경에 있었다.


"이 식품들은 조용히 우리의 뇌보상 중추를 장악했다.
간단히 말해, 이 식품들은 중독성이 있다.
우리 뇌에 지속적인 손상을 가하면서
중독 회로를 자극해
체중을 조절하는 신경 호르몬을 변화시킨다."
- 11면


초조제식품은 맛, 식감, 빠른 흡수 등으로 자연식품보다 훨씬 강하게 도파민을 분비시켜 중독처럼 작동한다. 초조제식품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면 ‘자기 통제의 브레이크’ 역할을 하는 전두엽 피질이 둔화돼 포만감을 느끼는 능력을 잃어 더 쉽게 중독 행동으로 이어진다.


도파민은 음식을 먹는 즐거움 자체보다 먹기 전에 '먹으면 기분이 좋아질 거야'라는 기대를 강화한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몇 번의 클릭으로 신속정확하게 배달되는 음식에 둘러싸여 “먹는 게 행복”이라는 잘못된 패턴을 뇌가 학습해버린 것 같다. 그러면 기대감에 중독돼 배가 안 고파도 먹는다. 잠깐의 쾌감을 충족시키는 음식 중독으로 우리는 진짜 행복에서 점점 더 멀어지고 있는 건 아닐까.



《비만 해방》은 다이어트 매뉴얼로만 읽을 책이 아니다. 거대한 사회 구조 속에서 형성된 식품 산업의 그림자와 교육적 책임을 깨닫게 했다. 비만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의 문제였다. 건강은 습관의 문제라기보다 환경의 문제도 컸다.


이 책이 꼽는 비만 해방의 가장 핵심적인 방법은 중독적 식품 환경에 휘둘리지 않고, 뇌의 도파민 회로와 행동을 재설계하는 선택과 환경 통제였다. 중독 메커니즘을 끊으려면 식단뿐 아니라 일상의 환경과 습관, 사고방식 전체를 바꾸는 종합적 행동 변화가 필수였다. 너무 어렵다고? 그만큼 인생을 결정짓는 중차대한 문제다!


"음식은 적이 아니다
자연식품(채소, 고기, 유제품을 포함해 어떤 것이건)은 일반적으로 뇌의 중독 회로를 강하게 자극하지 않는다.
진짜 문제는 초조제 식품인데,
이것은 사실상 매우 복잡한 종류의 약물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약물이 그렇듯이, 흡수 속도는 약물의 효능과 상관관계가 있다.
많은 자연식품은 영양소의 빠른 흡수와 에너지 추출에 저항한다. 대다수 사람들이 통감자나 두툼한 쇠고기 덩어리, 버터 조각을 크게 갈망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식품은 강렬한 보상 반응을 유발하는 방식으로 보상시스템을 자극하지 않는다."
-268면


초조제식품의 진짜 문제는 ‘맛’이 아니라 약물처럼 뇌를 조작한다는 점이다. 저자의 말처럼 음식은 적이 아니다. 우리의 '적'은 음식을 조작해 중독 회로를 강화하는 구조다. 이 책은 부모로서, 점점 더 편리해지는 시대를 사는 현대인으로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분명히 알려준다.


#도서지원 #비만해방 #데이비트A케슬러 #웅진지식하우스 #초조제식품 #음식중독 #도파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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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추지 못하는 뇌 - 삶의 에너지를 회복하는 진정한 멈춤의 과학
조지프 제벨리 지음, 고현석 옮김 / 갤리온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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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가장 효과적인 휴식의 방법을 찾아가는
과학적 탐험을 시작할 것이다.
마음 방황, 삼림욕, 혼자 있기, 수면, 놀이, 운동
그리고 네덜란드 사람들이 '닉센 niksen'이라고
부르는 어떤 행위가 이 여정에 포함될 것이다.
이 여정이 끝날 즈음, 당신도 깨닫게 되길 바란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당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생산적인
일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 86면


《멈추지 못하는 뇌》는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 오히려 뇌의 특정 영역들이 더 활발하게 작동한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려준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뇌에 큰 유익이 된다는 것과 일에서 손을 떼고 쉴 때 정신적, 신체적 건강에 핵심적인 도움을 주는 디폴트 네트워크 모드가 된다는 것을 밝힌다.


디폴트 네트워크는 멍 때리고, 몽상하며, 마음이 방황하게 하고, 성찰하고, 미래를 상상하게 해주는 뉴런들의 회로다. 특정한 일에 집중하지 않을 때 활성화된다. 쓸데없다고 치부하던 생각들이 떠오를 때, 마음이 자유롭게 유영할 때만 활성화된다. 바로 이때 지능, 창의력, 사회적 공감력, 장기적 생산성이 높아진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죄책감 없이 맘 편히 쉬도록 휴식에 대한 관점을 바꿔준다.


5분간 과제와 아무 관련 없는 생각을 한 그룹이 더 높은 점수를 받고, 단 10분의 휴식만으로 과제 성과가 눈에 띄게 향상된다. 문제 해결, 공간적 통찰, 언어적 추론 과제도 30분간 휴식한 뒤 수행하면 훨씬 더 나은 결과를 보인다. 관련 연구는 수도 없이 많다. 유레카! 아르키메데스가 목욕을 하던 도중에 부력의 원리를 깨달았듯, 편안하게 쉴 때 뇌는 오히려 더 활기차게 움직이고 있었다!


궁극의 휴식이라는 닉센의 개념이 인상 깊었다.
닉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또는 목적 없는 활동을 의미한다. 네덜란드에서는 닉센이 일상의 일부로 자리잡았다고 한다.


"그렇게 가족을 위해 바쁘게 일하면서 어떻게 닉센할 시간을 내세요?"
내가 물었다. "아이를 키우는 사람들은 대개 자기 시간을 가질 틈이 없잖아요."
"마음가짐에 달린 거라고 생각해요. 닉센은 하루에 꼭 30분을 해야 한다는 식으로 하는 게 아니거든요. 그보다는 '사이의 순간들'을 이용하는 거예요. 예를 들면 '그래, 이제 소파에 앉아서 책 좀 읽고 차도 한잔 마셔야지'하고 생각하는 거죠. 그러고 나서 하던 일을 이어가거나 다른 일을 하면 돼요."
- 267면


닉센은 틀에 박힌 특정한 행동지침이 아니었다. 하루 일과의 틈 사이에 휴식을 끼워 넣는 것, 나를 쉬게 해주는 순간들을 허락하는 것이었다.
"내게 닉센은 차를 마시며 창밖을 바라보는 거죠.
마음을 비우는 겁니다.
그럴 때 기막힌 아이디어가 떠오르곤 해요."
'행복의 교황'이라는 별명을 가진 전설적인 학자, 뤼트 베인호번의 말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시간 낭비가 아니다. 잘 쉴수록 잘 일하게 된다. 너무 열심히 일하지 말자. 매일 '그냥 존재하는 시간'을 떼어두자. 과감하게 게을러지자. 더 많이 자고 더 많이 놀자. 가끔은 어떤 할 일도 약속도 없는 날을 만들자.


사람들을 관찰하고, 카페에 앉아 있는 것.
필요할 때마다 주저 없이 휴식을 취하는 것.
틈틈이 창밖을 멍하니 보고,
자연에서 긴 산책을 하고,
오후에 낮잠을 자고,
일과 중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끼워 넣는 것.


"영혼은 언제나 살짝 열려 있어야 한다.
황홀한 경험이 찾아들 수 있도록."
- 에밀리 디킨슨


자신을 내버려두기.
내가 꺼지는 순간, 뇌의 잠재력은 켜진다.
멈추는 순간 뇌는 오히려 더 활발해진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
소중한 것을 놓는 항복이 아니라
소중한 것을 되찾는 것이었다.


마음 깊이
마음껏
쉬고 노는 시간을
이제는 허락할게.
그동안 미안했어, 뇌야.


#도서지원 #멈추지못하는뇌 #조지프제벨리 #갤리온 #뇌과학책추천 #책추천 #뇌과학 #휴식 #멈춤의과학 #휴식하는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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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돌, 인생의 수읽기 - 반상 위의 전략으로 삶의 불확실성을 돌파하다
이세돌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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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에서 둘 수 있는 경우의 수는 10의 171승으로 우주의 원자수(10의 81승)보다 많다고 알려져있다. 전략적인 계산 게임이 아닌 모양과 흐름, 기세 같은 비정량적 요소에서 인간의 창의성과 감각이 열리는 철학적 놀이였던 것이다. 그렇게 바둑은 오랫동안 인공지능이 넘기 힘든 인간의 최후의 영역으로 여겨졌다.


그러던 2016년, 전투적이고 창의적인 천재 기사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국은 인공지능이 인간을 압도할 수 있다는 쇼크와 그럼에도 인간의 창의성은 여전히 통한다는 희망을 안겨주었다. 창의적인 인간을 대표한 이세돌의 통찰과 세계관을 그대로 담은 《이세돌, 인생의 수읽기》


특히 알파고와의 대국 후, 자세한 내막과 심경을 처음으로 공개한 챕터가 흥미진진했다.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대국 당시의 압박과 긴장감이 생생하게 전해져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패배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아 자신감 넘쳤던 1국, 3국까지 연달아 패하며 그 여파는 고스란히 충격과 초조함이 되었지만 그 속에서도 이세돌 특유의 긍정 마인드와 가족 간의 사랑으로 최선을 다했던 그였다. 인간적인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끝까지 버티며 4국에서 신의 한 수라 불리는 78수를 두며 1승을 거둔다.


이 78수에 대한 이세돌의 생각은 의외였다.
"나 역시 매번 최선의 수를 두지는 못했다.
알파고와 치른 4국에서 내가 둔 78수가 대표적이다.
그 수는 '신의 한 수'로 불리며 극찬 받았지만 사실은
알파고의 약점을 찌른, 말 그대로 버그를 유도한 수였다.
승률을 끌어올리기 위한 전략적 수였을 뿐
최선의 수라할 수 없다.
그것이 바둑의 본질과 닿아 있었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 49면


이세돌에게 '최선의 수'란 무리를 감수하더라도 흐름이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수였다.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그림이 이어지는 마음으로 수를 놓는 것이다. 그것이 그만의 세계였고, 한 판의 대국 결과보다 장기적으로 그의 세계가 발전하길 기대하는 그만의 묘수였다. 그에게 바둑은 예술이었다.


하지만 알파고와의 대국은 승부를 넘어 흐름과 조화 속에서 상대와 함께 한 판의 우주를 완성하는 바둑일 수 없었다. 협력하고 교감할 수 있는 인간이 아닌 기계를 상대로 한 바둑이었기에 이세돌은 예술로서의 바둑을 펼칠 수 없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모든 최선을 다했던 그의 바둑은 예술가로서의 자기다운 바둑은 아니었을지 몰라도, 인간으로서의 존재를 역사에 각인시킨 인간 이세돌의 최선이었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바둑판을 넘어
인생 위에 나만의 수를 둬야 할 때다.

정해진 답은 없고,
누구도 대신 둘 수 없다.
돌고 돌아도 가장 나다운 수를 찾아가는 것,
지금 내가 가야 할 길이다."


인생에 정답이 없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많은 책을 리뷰하며 수많은 목소리를 들어왔지만 대부분의 메시지는 거의 맞다고 판단했다. 나의 비판력이 특히 약한 탓도 있지만 수년에서 수십 년간의 끈질긴 탐구 끝에 내놓은 각자의 의견은 틀리기가 어려워 보였다. 하지만 각 목소리는 서로 상충하기 쉬웠고 모두가 맞으면서 항상 옳을 수 없는 아이러니 속에서 나는 흔들리기 십상이었다.


이세돌이 말한 "나만의 수, 나다운 수"야말로 언제 어디서나 정답으로 통용될 해답이 아닐까. 답은 맥락에 따른 결과다. 고정된 절대 해답은 없다. 같은 수라도 상황에 따라 악수일 수도, 신의 수일 수도 있다. 맥락이 달라지면 답과 의미도 달라진다. '나'라는 맥락에 반응해, 내가 나로 남아 내가 한 선택이라는 설렘과 끝까지 내가 책임질 것이라는 의지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바둑은 누구 탓을 할 수 없는 게임이다.
한 수 한 수는 전부
돌을 둔 나에게서 비롯된다."
- 66면

이 책은 이세돌의 바둑 이야기가 아니라 나에게 “나만의 수를 두는 삶”을 묻는 하나의 질문이었다. 매 순간 내가 책임질 수 있는 수를 두는 것. 그것이 결국 인생이라는 대국에서 내가 남길 수 있는 단 하나의 해답일 것이다. 돌 하나에도 체면과 책임이 있듯, 내 삶의 선택에도 무게가 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두는 수는 얼마나 나다운가? 정답은 없다. 다만 끝까지 책임질 ‘나의 수’를 찾아갈 뿐이다.


#도서지원 #이세돌인생의수읽기 #이세돌 #데블스플랜 #알파고 #인생전략 #웅진지식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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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낯선 바다에서 가장 나다워졌다
허가윤 지음 / 부크럼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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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이자 배우인 허가윤에서
발리에서 Gaga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두 번째 인생의 주인공 허가윤이
에세이 작가로 나타났다.


포미닛의 메인보컬로 데뷔한 허가윤은 7년을 포미닛으로 쉬는 날도 없이 치열하게 달리며 꿈같았던 시간을 지나 보낸다. 그리고 그녀에게 전혀 다른 방향으로 삶을 바꾸는 계기가 다가왔다.


오빠의 갑작스러운 죽음, 폭식증, 불면증...
무기력에 빠져 있던 어느 날, 포미닛 멤버 지윤의 제안에 발리로 6일간 여행을 가게 된다. 발리는 그녀에게 전에 없던 편안함과 자유로움을 주었고 그렇게 두 달 살기를 위해 다시 발리로 떠난다.


"두 달 살기를 끝내고, 나는 확신이 들었다.
나의 행복은 발리에 있다고.
발리에서 새롭게 잘 살아 보고 싶다고 말이다.
오래 생각하고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나는 한국에서의 모든 것을 정리하고 발리에서 살기로 결심했다."
- 58면


지금은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터를 잡고 매일을 현재와 자신에게 집중하며 살아가고 있다. 미래에 대한 불안도 놓아두고, 그저 오늘과 내일이, 자신의 삶이 어떻게 흘러갈지 궁금해하며 행복하게 말이다.


스스로 삶의 전환점이 되는 선택을 한 사람이라니, 저자는 나와 전혀 다른 유형의 인간일 줄 알았다. 두려움이나 망설임 없이 실행력 만랩으로 인생을 사는 진취적이고 도전적인 사람 말이다. 하지만 《가장 낯선 바다에서 가장 나다워졌다》를 통해 본 그녀의 모습은 의외였다.


무엇이든 혼자서 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 혼자 국내 여행도, 혼밥도, 혼자 카페에 가본 적도 없었다. 배우 오디션에서 가수로서의 이미지보다 조용한 성격이란 말을 들으며 그 간극 사이에서 괴로워하기도 했다. 남에게는 관대하면서 자신에게만 엄격해 스스로를 옥죄었다. 그런 그녀에게서 내 모습도 조금씩 비쳐 보였다. 저자는 어떻게 이런 큰 용기를 낼 수 있었을까?


가족의 상실은 내일이 당연히 있을 거라는 믿음을 무너뜨려 오늘의 행복을 미루면 안 된다는 절박함을 만들고, 그것이 불씨가 됐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세상과 자신 사이에 선을 긋고 거리를 둔 건 그녀의 선택이었다.


성공한 가수로서의 성과와 타인의 기대라는 사회적 시선을 걷어내고 '허가윤' 자체로 존재하기 위해 다른 무대를 찾아 나선 건 자신을 향한 사랑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실패를 감수할 각오를 하고 불행한 확실성보다 불확실한 가능성을 택한 것은 자신을 믿는 믿음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나도 그녀처럼 나만의 발리를 찾고 싶다. 내가 아는 내가 아닌 것처럼 알 수 없는 힘이 나를 움직이게 하는 곳. 역할이 아닌 존재로, 성과가 아닌 일상의 내 모습 그대로를 봐주는 곳. 부족함이 결격 사유가 아니라 나만의 색깔이 되는 곳. 마치 다시 태어난 것처럼 새로운 인생으로 매일 아침 눈을 뜨며 오늘 하루를 기대하게 하는 곳.


하지만 다시 보니 그녀가 찾은 건 단지 발리라는 장소가 아니라 존재 방식이 바뀌는 환경이었다. 세상을 보는 다른 시선이 있고, 나의 취향과 감각을 알아보는 관계가 있으며, 켜켜이 쌓아온 나만의 리듬과 태도가 살아나는 곳이었다.


저자처럼 모든 것을 두고 머나먼 곳으로 떠나야만 하는 건 아니겠지만 그런 곳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지 사실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가 발리에서 보낸 시간과 경험들 덕분에 틀에 박힌 관념들이 많이 흔들렸다.


작은 용기를 낸다면 그녀처럼 행복하고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희망을 증명해준 이 책이 좋다. 인생엔 당연한 것이 없다는 걸, 새로운 변화는 언제 어디서든 찾아올 수 있고, 때로는 당장 내일 나 자신이 그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걸 조금 더 믿게 됐다.


"국화처럼 살아라.
씨가 바람에 날려 여기서 피고 저기서 피는 국화처럼.
어디에서 어떤 색으로 필지 모르는
생명력 강하고 향기로운 국화처럼 살아라."
그녀가 가슴 깊이 간직한 어떤 스님의 말씀처럼
이 책과, 이 글을 읽는 모두가 자신만의 발리에서
가장 나다워지는 행복을 누리며 꽃 피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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