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한 마음을 줄여드립니다 - 초조함 없이 평온한 뇌를 만드는 ‘자극 금식’의 기술
크리스 베일리 지음, 김미정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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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마음을 줄여드립니다》
제목에 혹하는 분들이 많을 것 같다. 현대인 중에 불안하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불안불안해하며 조급하게 사는 것이 당연한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저자 크리스 베일리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그는 어느 날 갑자기 터져버렸다.

'생산성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활발하게 연구하고 강의하며 지냈지만, 자기계발 전문가인 만큼 자신을 돌보는 것 또한 매우 잘 실천하는 사람이었다. 날마다 30분씩 명상하기, 일 년에 한두 번 침묵 명상 워크숍 참가하기, 꼬박꼬박 운동하기, 마사지 받기, 아내와 온천 가기, 책 읽기, 팟캐스트 듣기, 출장 중에 목욕하기 등 높은 생산성에 균형을 잡아줄 일상을 훌륭하게 챙기고 있었다.


그러던 그에게 100명의 청중을 마주한 무대에서 공황 발작이 시작됐다.
"나를 통째로 휘감은 묵직한 기분이 내 몸과 마음을 집어삼켰고 나는 초조함의 구덩이 저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마치 누가 공포라는 물약 한 병을 내 머릿속에 들이부은 듯했다. 단어 하나하나를 내뱉을 때마다 말을 더듬게 되자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입속에 구슬이 십수 개는 들어있는 느낌이었다. 심장이 급격히 빨리 뛰었고, 나는 또다시 곧 기절할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 20면


생산성에 한계를 긋지 못한 이유로 번아웃과 불안감을 겪으며 저자는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제대로' 자신을 돌볼 방법을 찾기로 마음먹자 하나의 질문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진정으로 평온한 상태를 만들고 이를 유지하기 위해 내가 할 일은 무엇이었을까?"


불안을 대적할 무기는 평온함이었다. 평온함에 이르는 수많은 시행착오와 결론이 《불안한 마음을 줄여드립니다》에 담겼다.


평온함은 불안의 반대편에 있다. '더 많이'의 성취 지향적 사고방식과 도파민 자극에 끝없이 노출된 뇌는 쉴 틈이 없다. 저자는 도파민과 번아웃을 뒤집어 평안으로 이르는 길을 찾는다.


도파민은 사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지원하며 논리적이고 창의적인 사고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신경전달물질이라 탄수화물을 금식할 수 없듯 도파민을 완전히 금식할 수는 없다.


재미있는 점은 도파민이 "쾌락, 즐거움"보다 "예상, 기대"의 화학물질에 가까워 우리를 산만하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신나게 이것저것 쇼핑하고, 물건이 도착할 날만 기대하고 있었으면서 막상 택배가 도착하면 뜯기조차 귀찮아지는 사태가 반복되고 있었던 것이다. (나만 그런 거 아니죠? ^^;;)


도파민 분비가 지나치면 평온함을 해치고 불안을 높여, 멀리 보면 역설적이게도 생산성을 떨어뜨린다. '더 많이' 성취하려 노력할수록 우리 행동은 도파민에 좌우된다. 하지만 그러한 사고방식은 절대로 우리를 만족시키지 못한다. 도파민의 쾌락은 일시적이다. 오히려 만성 스트레스를 유발하고, 지치게 하며, 냉소적이고 비효율적인 번아웃으로 끌고 간다.


도파민은 끝없이 불만족을 배양하며 불만족의 순환을 일으킨다. 현재에 충분히 머무를 수 없게 하고, 눈앞의 일과 자극에 자동반응하게 해 통제력을 점점 잃게 만든다. 우리가 정말로 가치있게 여기는 본질과 멀어지게 한다. 자투리 시간마저 물처럼 우리를 가득 채워 진지한 반성이나 쉼, 평온함을 누릴 기회를 모조리 앗아간다.


자책하지 말자. 도파민을 분비시키는 불필요한 습관을 제거하면 균형을 회복할 수 있다.


《불안한 마음을 줄여드립니다》에서는 그 방법을 "자극 금식"으로 제안한다. sns, 디지털 뉴스 같은 초자극제들은 피곤하고, 냉소적이고, 비생산적인 상태에 머무르게 한다. 사탕같이 달콤하지만 먹고 나면 몹시도 쓰기에 자극의 높이를 떨어뜨려 유지하기를 권한다.


즉각적이고 자극적인 디지털 대상에는 덜 집중하고, 생산적이고 중요한 것들에 더 주의를 쏟는 분리의 개념, 아날로그와 디지털 세계를 구분해 활동량을 따지고 균형을 맞추는 시도들이 참신했다. 효율적으로 하고 싶은 일은 디지털 세계에서, 경험에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싶으면 아날로그 세계에서 하라는 기준도 흥미롭다.


《불안한 마음을 줄여드립니다》에서 가장 인상적인 내용은 "음미하기"였다.
더 많은 것을 축적하는 것이 더는 효과적이지 않은 시점이 있다는, 더 많이 추구하는 방식에는 대가가 따른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나니 음미하기로 멈추는 것, 순간에 의식적으로 주의를 기울이는 노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피부에 닿았다.


평균적으로 우리는 나쁜 일 하나에 좋은 일 세 가지를 경험한다고 한다. (여러 연구에서 재현된 비율이다) 그러나 위협에 민감한 본능으로 진화한 탓에 부정적인 정보를 철저히 처리하다 보니 체감하지 못할 뿐이다. 전체 시간의 4분의 3 정도는 스트레스 없이 불안해하지 않고 평온하게 보내는 것이 정상인 것이다.


음미하기는 인생의 좋은 것들을 즐길 줄 아는 기술이다. 무언가를 얻었다고 반드시 즐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얻느라 고생해놓고 정작 성취를 즐길 줄 모른다면 무슨 소용인가.


음미하기의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심취, 경탄, 감사를 실천하면 된다. 즐거웠던 과거를 회상하고, 빛날 미래를 예측하며 음미할 수도 있다. 삶을 채우는 긍정적인 경험을 의도적으로 즐길 때, 음미하는 수준이 높을수록 불안은 낮아지고 몰입은 더 높아진다. 즐거움으로 가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사소한 순간에 집중하는 노력으로 삶을 음미하면 편안함을 훨씬 자주 풍족하게 느낄 수 있다. 우리 삶에는 이미 좋은 것들이 너무도 많다. 이를 알아차리기만 하면 된다. 그러다 보면 끊임없이 무언가를 더 원하는 부정적인 태도가 허물어진다. 이것이 음미하기의 진정한 마법이다.


《불안한 마음을 줄여드립니다》를 읽으면서 김주환 교수님의 《내면 소통》이 내내 겹춰 보였다. 평온함은 곧 "편안전활" (편도체 안정화와 전전두피질 활성화)의 상태였다. 《불안한 마음을 줄여드립니다》에서 말하는 비본질의 한 예인 인정중독에서 벗어나 《내면 소통》이 말하는 자기존중, 타인존중으로 나아가는 길이 평온함의 결실이었다. 《내면 소통》에서도 강조하는 명상은 곧 음미하기였다. 지금 이 순간을 알아차리고 자각하는 것, 그래서 한층 더 의도적인 사람이 되는 것은 나를 인정하고 내 삶의 주인으로 사는 "자기결정성"을 회복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오랜만에 평생 들춰보고 싶은 책을 만났다. 유별나게 줄을 많이 그은 걸 보니 내용도 훌륭했지만, 저자의 똑똑한 글쓰기가 특히 놀라웠다. 번역된 문장임에도 불구하고 필력이 느껴졌다. 쉽게 서술했지만, 단어 하나하나로 뜻을 명확하게 강조하는 힘이 잽잽 펀치로 계속 날아왔다. 외우고 싶을 만큼 아름답고 서정적인 문장을 섞은 것도 좋았다.


마음의 균형을 잡아 평온함이 무럭무럭 자라날 공간을 만들고 싶은 모든 분께 《불안한 마음을 줄여드립니다》, 강추합니다.


⁠"평온함은 삶을 즐겁게 만드는 핵심 원천이다.
평온함은 갖가지 분주한 생활 저 밑에 숨은 우리의 자연스러운 존재 상태다.
목적의식을 토대로 한 분주함은 삶을 가치 있게 만든다. 목적 없는 삶은 의미도 없다. 하지만 평온함을 곁에 둘 때 삶이 훨씬 더 즐거워진다."
⁠- 329,330면


*** 출판사 알에이치코리아에서 지원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했습니다. 감사합니다. ***

#불안한마음을줄여드립니다 #크리스베일리 #도파민 #불안 #자극금식 #도파민디톡스 #번아웃 #스트레스 #생산성 #알에이치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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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에 합당한 우리 연애 - 박화성과 박서련의 소설, 잇다 6
박화성.박서련 지음 / 작가정신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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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잇다' 6번째 책
《정세에 합당한 우리 연애》


'소설, 잇다'는 백 년의 시공을 넘어 근대 여성 작가와 현대 여성 작가의 작품을 나란히 읽는 작가정신 출판사의 시리즈다. 한국문학의 또 다른 근원과 현재를 보여주고자 기획되었다.


《정세에 합당한 우리 연애》에서는
"근대 한국문학의 출발점에 큰 시사점을 던진다"를 평을 받으며 한국문학사에서 가장 오랜 시간 활동해온 여성 작가인 박화성(1903~1988)과 2015년에 등단해 "전혀 다른 여성 서사"로 장르와 형식을 넘나들며 새로운 서사와 상상력을 선보여온 박서련이 만났다.


박화성 작가가 해방 전 가장 활발히 활동한 시기의 대표작 세 편이 수록됐다.
- 「하수도 공사」, 「홍수전후」, 「호박」
"제국주의와 식민지하의 궁핍하고 핍박받는 민중과 노동자, 여성 등이 처한 처참한 현실을 직시하는 작품들"이다.


박서련 작가의 작품은 박화성 작가의 「하수도 공사」를 새롭게 변주한 표제작인 「정세에 합당한 우리 연애」와 에세이 「총화」 두 편이 실렸다.


자연스럽게 「하수도 공사」와 「정세에 합당한 우리 연애」 두 작품에 집중하며 읽게 되었다.


"격분된 삼백 명의 노동자들은 중정대리를 끌고 경찰서에 쇄도하였다."
- 「하수도 공사」 첫 문장


1932년에 쓰인 「하수도 공사」는 일제 치하 노동자들이 착취 당하는 현실을 드러낸 박화성의 대표 노동소설이다.


실업구제를 목적으로 대규모 하수도공사가 시작되지만 계급층이 찬 뒤주머니 탓에 노동자들은 굶주리고 두드려 맞으면서도 넉 달째 품삯을 받지 못했다. 경찰서 서장에게 임금 지불을 요구하는 과정에서 일본어에 유창하고 영리한 "동권"이 노동자 대표로 나선다.

"그래 하루 종일 굶어가며 죽도록 당신네 일만 하는 것이 노동자의 실업 구제 목적인 하수도 공사이오? ........
당신네 손해 보지 않을 일만 생각하고 수백 명의 굶는 일은 생각지 못하오? ....... 서장! 이런 불법자들도 가만두어야 옳습니까?"
- 30면

겨우 임금을 받게 되지만, 청부계약자는 더 교묘한 방법으로 노동자를 착취한다. 동권은 노동자들에게 계급적 지식을 알려 주기에 남모르게 힘쓴다.

"그러기에 그렇게 한탄들만 할 것이 아니라 당신들도 생각이 있어야 한단 말이오."
70면


동권은 어릴 적부터 동무로 지내온 "용희"와 애틋한 마음을 나누지만 집안 형편이 맞지 않는 두 사람의 사랑은 어렵기만 하다.

"용희! 나는 용희를 정말로 사랑하오. 그러나 나는 우리의 사랑이 현재 우리 정세에 합당하지 못하기 때문에 항상 스스로 억제하는 때가 많소."
- 54면

"결혼할 수가 없는 사랑이 어찌 합당한 사랑이겠소. 내가 내 몸 하나도 변변치 처리 못하는 못난인데 어떻게 용희까지...... 무어 나는 아무리 생각했자 열에 하나도 좋은 조건이 없으니 영원한 사랑을 계속할 수는 없다는 말이오."
- 88면

게다가 동권은 다른 꿈을 펼칠 계획을 품고 있다. 항일 저항의식으로 마르크시즘에 영향을 받은 그는 더 나은 세상의 일꾼이 되기 위해 떠난다.

"이 굉장한 수도를 보는 자, 돈과 문명의 힘을 탄복하는 외에 누가 삼백 명 노동자의 숨은 피땀의 값을 생각할 것이며 죽교의 높은 이 다리를 건너는 자 부청의 선정을 감사하는 외에 누구라 이면의 숨은 흑막의 내용을 짐작이나 하랴."
- 91면


박서련의 「정세에 합당한 우리 연애」는 대학교 내 인문학 독서 동아리의 림과 진, 두 인물을 중심으로 흘러간다. 총여학생회를 재건하려는 목적으로 만든 동아리에서 이들은 박화성의 「하수도 공사」를 함께 읽는다. 동성애 커플인 둘은 동아리 회원들에게 커밍아웃을 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로 갈등하고 있다.


"여자 총학생회장을 본 적 없는 학교가 레즈비언 총학생회장은 괜찮게 생각할지 잘 모르겠어."

진에게는 총여학생회 재건이 그렇게도 중요한 위업이라는 것. 너무도 중요해서 표면에 조금의 흠집조차 내지 않으려 안간힘을 써야만 한다는 것. 이해할 수 있었기에 섭섭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좋아해.

조금 시간이 흐른 뒤에야 림은 그때 했어야 하는 말을 찾았다. 쓰인 지 백 년이 다 되어가는 소설에서였다.
언니는 우리 연애가 정세에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하는구나.
- 195, 196면


인권과 권리, 특히 여성으로 좁혀지는 관점에서 두 작품이 맞닿아 있지만 사실 나는 공감하지 못했다. 식민지 치하라는 시대에 거시적으로 펼쳐진 억압과 폭력이 현대로 이동하며 동성애를 인정받지 못하는 인권의 한계로 연결된다니, 너무 큰 격차가 느껴져 당황스러웠다.


나는 동성애를 선천적으로 다르게 타고난 자들의 온당한 사랑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사랑이 결국은 개인의 선택에 의한 것이지, 어쩔 수 없는 본능에 의한 지당한 감정이라고 여기지 않는 것뿐이다. 그래서 요즘 수많은 미디어에서 동성 간의 사랑을 미화하고, 다른 사랑의 방식으로 인정하며 성 소수자의 인권을 높이는 흐름을 경계하고 있다.


나 같은 입장에서 두 작품을 나란히 놓고 불평등과 차별, 인권과 소수자의 연대 등을 논하는 것은 마땅치 않아 불편했다.


"우리는 정세에 합당한 연애를 하고 있어요.
정세에 합하지 않는 연애 같은 건 세상에 없어요."
- 202면


개인의 선택으로 인한 결과까지 사회가 인정하고 포용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들려 「정세에 합당한 우리 연애」의 림의 목소리는 「하수도 공사」의 용희의 목소리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정세에 합당한 우리 연애》 속 다양한 작품을 비교해 읽으며, 여성의 고통과 억압, 사회 변혁을 향한 열망과 투쟁, 연대와 공감, 인간의 존엄성 같은 주제가 시대와 공간을 넘어 여전히 보편적인 가치가 지닌다는 것을 되새길 수 있었다.

그래서 앞으로도 끊임없이 다양한 방식의 이야기가 새롭게 쓰이고 읽히며, 세상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모든 과정들이 중요하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책 한 권에서 백 년의 시차를 경험하는 색다른 문학의 즐거움을 맛보고 싶다면, 《정세에 합당한 우리 연애》 추천합니다.


*** 출판사 작가정신의 서포터즈 '작정단 13기'의 자격으로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했습니다. 감사합니다. ***


#정세에합당한우리연애 #박화성 #박서련 #소설잇다 #작가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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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때까지 나를 다스린다는 것 - 인생이라는 파도에 휩쓸리지 않는, 명상록 읽기
기시미 이치로 지음, 김지윤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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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때까지 나를 다스린다는 것》은
《미움받을 용기》로 오래도록 큰 사랑을 받고 있는 기시미 이치로의 2022년 책이다.

원제목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을 읽다"로, 약 2천 년 전 로마 황제였던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을 저자만의 방식으로 해석했다.


철학을 공부하던 학생 시절, 저자의 어머니가 갑자기 뇌경색으로 쓰러져 입원을 하셨다. 플라톤이 전공이었지만 간병하는 동안 평소에 읽지 못하는 책을 읽고자 <명상록>을 챙겼다. 죽음의 문턱에 선 어머니를 돌보고, 전쟁터에 나가 야영 텐트의 양초 불빛에 의지해 아우렐리우스가 쓴 <명상록>을 읽으며 저자는 "죽음과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 깊게 생각하게 됐다.

가족의 죽음을 눈앞에 두고, 인생의 끝을 어느때보다 절감하고 있던 철학도가 <명상록>과 함께 어지러운 마음을 달래며 인생을 고찰했을 밤들이 그려진다.


그렇게 <명상록>을 만나 쓰기 시작한 노트를 바탕으로 《죽을 때까지 나를 다스린다는 것》 책이 탄생했다.


철학자를 꿈꿨으나 황제가 될 수밖에 없었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인생론이 기록으로 살아남아 우리 손에 기적처럼 전해졌다.

<명상록>은 아우렐리우스 자신만을 위해 쓴 일기이기 때문에 아주 솔직하지만, 누구에게 보이려 한 글이 아니라서 잘 정리되지 않아 결코 읽기가 수월하지 않다.


《죽을 때까지 나를 다스린다는 것》의 기시미 이치로는 그러한 <명상록>을 불안의 시대를 건너가는 현대인을 위해 쉽게 풀어주었다.


《죽을 때까지 나를 다스린다는 것》은 말한다.
바쁜 일상에서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고, 진정한 나를 찾는 방법. 분노와 불안 같은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고요한 평점심을 유지하는 방법. 끊임없이 변하는 세상 속에서 삶의 의미를 잃지 않을 방법을. 그렇게 자신을 더 잘 이해하고, 고난을 극복하는 힘과 더 나은 삶을 위한 지혜를 기르도록 도와준다.


《죽을 때까지 나를 다스린다는 것》에서 가장 크게 배운 것은 이것이다.

"아우렐리우스가 같은 이야기를 몇 번씩 반복해서 쓰고, 끊임없이 묻는 이유는 죽음뿐 아니라 많은 문제에는 정답이 없기 때문입니다."
- 10면

"정답을 알았다고 생각하면 보이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 11면


얼마 전에, 중동고등학교 철학교사인 안광복 작가님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왜 나쁜 사람들이 잘 먹고 잘 사느냐는 질문에 플라톤의 <국가론>을 꺼내신다. 600페이지에 걸쳐 플라톤이 하는 얘기가 바로 그것이었다. "왜 부정의한 사람이 잘 사느냐?" 그러나 플라톤은 이유를 설명하지 못했다.

그러나 플라톤이 내내 강조하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의롭게 살아야 한다."는 사실. 답이 없지만 답을 찾으며 살자고, 우리의 삶 자체가 수많은 철학적 물음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라고 말씀하셨다.


육아에는 정답이 없다는 말을 나도 모르게 자주 내뱉곤 했다. 이제보니 육아뿐 아니라 인생도 마찬가지인가 보다. 지금도 끙끙거리고 있는 고민을 예전 일기장에서 똑같이 발견할 때, 나는 발전이 없는 사람이구나 자책하곤 했다.

인생이란 끝없이 답을 찾는 과정이라고, 끊임없이 질문을 하고 탐구하며 사는 것이 당연하다는 말을 로마의 황제 아우렐리우스에게 들으니 큰 위로가 된다.


같은 질문이라도 반복해서 묻고, 꾸준히 찾는 태도. 정답을 알지 못하기에 더 넓은 세계를 만나고, 다른 기회를 만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용기가 솟는다.


“분노는 약자의 것. 고요하게 견뎌라”
"강함과 체력과 용기는 그러한 사람에게 갖춰지는 것이며, 분개하고 불만을 품는 사람에게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평정심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힘에도 가까운 것이기 때문이다. 또, 슬픔이 약자에게 늘 있는 것처럼 분노도 약자에게 늘 있다. 양쪽 모두가 상처받고 굴복하고 만 것이다."
83면

누군가 나를 방해하고 비난해도 끊임없이 파도가 밀려와 부딪히는 바위처럼 고고하게 살아가자. "바위는 엄숙히 서 있고, 물거품은 그 주위에서 잠든다" 쉽게 화내고, 쉽게 두려워하는 약한 사람에서 더 강한 사람으로 나를 키워보자.


"나에게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찾아가는 인생" 인생은 원래 그런 것이다. 정답을 모른다고 자신을 닦달하지 말자. 몰라서 그런 거니 실수하고 잘못했다고 자책하지 말자.


인생을 마지막 날처럼 살자. "인격의 완전이란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처럼 보내고, 거칠어지지 않고, 무기력해지지도 않으며, 위선을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일상에 쫓기다가도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멈춰 서서 내면을 들여다보자. "네가 그런 고통을 당하는 건 당연하다. 너는 오늘보다는 내일 선한 자가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계속 찾다보면 어떤 깨달음을 얻고, 전보다는 그래도 조금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겠지, 자신을 믿고 지금 시작하자.


스스로를 관찰하고, 성찰하며 가치관을 정립하기. 긍정적인 자기 대화로 자신을 늘 다스리고 현재에 집중하기. 감정을 조절하는 방법을 훈련함으로 외부 사건에 휘둘리지 않고 내면의 평화를 누리기. 이 모든 것이 《죽을 때까지 나를 다스린다는 것》 안에 잠잠하게 흐르고 있다.


《죽을 때까지 나를 다스린다는 것》은 쉽지만 절대 빨리 읽을 수 없다. 아우렐리우스의 질문과 계속되는 고민이 있고, 2천년 전 그가 잠정적으로 내린 답이 있다. 그 답과 우리의 삶을 이리저리 맞추며 결합하는 시간을 반드시 내어주어야 할 책이라고 생각한다.


삶이 흔들리고, 마음이 흐트러져 길이 보이지 않을 때 같이 고민해 줄 든든한 스승과도 같은 책, 《죽을 때까지 나를 다스린다는 것》이었다.


초판한정 필사노트까지 멋지게 제작되어 온전한 나만의 책으로 만들 수 있는 점도 정말 좋았다.


*** 출판사 위즈덤하우스의 지원을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했습니다. 감사합니다. ***


#죽을때까지나를다스린다는것 #기시미이치로 #위즈덤하우스 #마르쿠스아우렐리우스 #명상록 #고전추천 #삶의의미 #고전읽기 #필사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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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아이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84
로이스 로리 지음, 강나은 옮김 / 비룡소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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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아이》는 "빈데비 아이"라 불리는 늪지 미라의 사진 한 장에서 시작한다.
산성도가 높아 부패가 느린 습지에서 썩다만 유기물질인 토탄이 수백 년 동안 쌓여 축축한 늪이 된다. (토탄이 계속 탄화되면 석탄이 된다)


늪 속에서 시체는 몹시도 느리게 부패해 두개골과 피부, 털, 손톱까지도 썩지 않아 시신은 오그라든 고무 인형처럼 보존된다. 표정이 살아있고, 남자 턱에 짧게 깎은 수염과 땋은 머리카락 모양까지 그대로 남아 있기도 한다.


사진의 늪지 미라 "빈데비 아이"는 1952년 독일에서 발견됐다. 특이한 점은 13살의 여자아이라는 것. (대부분의 늪지 미라는 성인이었다) 표정은 평화로웠고, 눈가리개를 하고 있었다. 부상 당한 흔적도 없이 금발이 남아 있었지만 머리의 왼쪽 머리카락은 깎여 있었다.


"나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다. 닫힌 문을 열어 보고, 구석진 곳을 들여다보고, 사람들을 그들 자신이게끔 하는 모든 이유를 알아내려 애쓰는 사람."
18면


《최초의 아이》의 저자 로이스 로리는 두 번이나 뉴베리상을 수상한 미국 청소년 문학의 대표 작가이다. 현대 고전 SF로 불리는 《기억 전달자》도 우리나라에서 오랜 사랑을 받고 있다.


자신을 이야기하는 사람으로 정의한 저자는 빈데비 소녀를 알게 되자 호기심에 온통 마음을 사로잡혔다. 그리고 역사에 남은 사실에서 아이의 흔적을 찾았다. 그렇게 모든 자료를 퍼즐 삼아 소녀의 이야기를 재창조한다.


"나는 이 여자아이의 퍼즐을 맞추고 싶었다. 이 아이의 이야기를 알고 싶었다."
18면


"각각의 사실에 자세한 내용을 더하면, 또 그 자세한 내용이 어떤 의미이고 얼마나 중요한지를 덧붙이면, 이야기가 채워지고 질문이 생겨나고 의미를 띄며, 점점 '나'에 가까워진다."
17면


"그들의 삶을 이해하려면 다른 자료에서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그런 자료마저 바닥나면, 그때부터는 추측할 수밖에 없다."
19면


그렇게 완성된 《최초의 아이》는 매우 독특한 구성을 취한다. 총 5개의 장에서 사이에 끼어있는 2장이 소설이고, 나머지 3장은 저자의 에세이이다.


그런데 2장의 소설은 주인공이 다르다. 친구인 두 아이의 관점에서 각각 쓰여 2편이 단편 연작소설처럼 읽힌다.


소설을 둘러싼 3장의 에세이에서 저자는 자신이 어떻게 이 소설을 시작하고 상상해서 완성했는지, 이야기의 창작 과정을 그대로 공개한다. 세상에 없던 새로운 세계를 어떻게 설계하고 건축하는지 작가의 작업을 엿볼 수 있어 정말 흥미로웠다. 해설서이자 제작기로 보여서 다큐멘터리와 영화를 동시에 감상하는 기분이었다.


역사와 이야기 사이를 지그재그로 건너다보니 《최초의 아이》의 이야기에 몰입하기 어려울까 우려도 헸지만 우리의 로이스 로리가 아니던가. 이상하지만 아름다운 이야기였다. 2000년 전 철기시대를 살다간 아이들은 너무 멀리 있지만 왠지 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인간은 억압과 차별 속에서 여전히 고통 받음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꿈꾸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최초의 아이》를 짓기 위해 인류학과 고고학까지 섭렵한 것이 틀림없다. 저자는 철기시대의 작은 마을을 생생히 살려내 독자의 눈 앞에 내놓는다. 고된 노동으로 종일 쉴 틈이 없지만 항상 굶주리고, 헐벗고, 추위에 떠는 혹독한 시대의 생활상을 자연스럽게 펼쳐냈다.


"봄에 폭우가 내리고, 여름에 가뭄이 와 지독한 흉작이 든 해였다. 그해 가을에 에스트릴트의 엄마가 낳은 남자아이는 얼마 안 가 비쩍 마른 채 이름도 없이, 울지도 않고 생을 마감했다. ... 갓 태어나 죽어 가는 자식들, 이미 다 자랐으나 굶주림에 겨울을 못 나고 죽어 간 자식들을 부르는 애달픈 신음과 처절한 울음소리. 가장자리에 선 에스트릴트는 그 모든 소리가 끔찍했고 배가 고팠다. 배가 고픈 자신이 미웠다."
52면


엄중한 성 역할을 깨고 최초의 여전사를 꿈꾸던 소녀, 에스트릴트. 하지만 나는 《최초의 아이》 두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 파리크가 좋았다. 태어나자마자 엄마를 여의고 아빠마저 전사해 평생을 고아로 산 아이. 척추 기형 탓에 절뚝거리는 불편한 몸으로 다섯 살부터 대장간 보조 일을 하며 헛간에서 혼자 살고 있다. 에스트릴트는 파리크의 유일한 친구다.


"사람은 죽기 전에 꼭 용감하고 좋은 일을 한 가지 해야 하는데, 우리 외삼촌은 그렇게 했대. 전쟁터에서 다른 전사를 도와줬거든. 용감하고 좋은 일을 했다면 충분히 준비된 채 죽은 거니까, 다른 사람들도 슬퍼하지 말아야 한대. 그 사람도, 그 사람이 한 일도 늘 기억될 테니까."
130면


에스트릴트가 파리크에게 해 준 말이다. 곱씹을수록 애달픈 말. (파리크의 마지막을 암시한다.) 파리크라는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없다. 파리크는 늘 배가 고팠다. 아이들은 늘 파리크를 업신여기고 따돌리고 조롱했다. 단 하나, 초원과 숲만은 항상 그를 편안하게 맞아주었다. 토끼와 들쥐, 몇몇 새들까지 파리크가 손을 내밀면 다가왔다. 이곳에서 친구들을 만난 것이다.


자연에서 죽어가는 동물 사체를 관찰하며 뼈 구조를 꼼꼼히 살피고 자신의 몸과 비교하며 어떻게 몸이 이루어지는지 스스로 공부한다. '배움의 선반'을 마련해 동물의 뼈를 모으며 더더 배우고픈 열정을 이어간다.


"파리크는? 과학이 존재하기도 전에 자라나는 과학자였다. ... 파리크처럼 강렬한 호기심과 학구열을 품은 젊은이들은 그 전부터 언제나 존재했을 것이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채로도 과학의 길을 터 왔을 것이다."
184면


《최초의 아이》 파리크가 자연 속에서 편안하게 숨을 쉬며 그 속의 생명들을 공부하고 소통하는 장면들이 좋았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은 지독히도 외로운 일생을 잘 웃고 넉넉한 마음으로 살아간 파리크의 강인한 따스함에 자꾸 울컥했다.


"절름발이 고아가 어떻게 아무도 몰래 또 하나의 삶을 살아왔는지, 들판과 늪과 숲에서 주운 이끼 낀 돌멩이, 죽은 다람쥐, 깃털, 딱정벌레, 뱀 허물, 동물 머리뼈 따위에서 어떻게 가치 있는 것을 배웠는지를 말읻. 그리고 그렇게 배운 것으로, 어떻게 내내 자신을 때리고 조롱하고 굶긴 사람을 치료해 줄 수가 있는지를 말이다."
172면


로이스 로리가 완성한 퍼즐 작품, 《최초의 아이》가 어떤 소설이라고 설명하고 싶지 않다. 마음이 가고 정이 가는 한 존재를 만났다고 그저 소개하고 싶다. 가상 인물이 아니라 현대를 사는 우리가 실제로 만날 수는 없지만 분명히 이러한 아이가 있었다고 믿을 수밖에 없는 이야기라고 그저 《최초의 아이》를 들려주고 싶다.


책을 덮으니 많은 물음표가 뛰쳐나온다. 소설이란 뭘까? 삶은? 역사는? 작가는? 답을 찾지 못해도, 답을 찾아가며 만나는 전에 없던 감정과 생각 끝에 맺힌 작은 이슬 한 방울이 보인다. 까마득한 역사 속을 살다 스러졌을 수많은 인생에게 소중한 것들을 빚지고 지금을 사는 우리라는 작디 작은 생명 한 방울을 말이다. 《최초의 아이》는 무구한 역사 속 반짝하고 사라진 별 같은 존재들을 향한 감사와 경이로움을 느끼게 했다.


로이스 로리가 천착한 주제로 보이는 "기억"이라는 실마리로 아름답게 직조한 《최초의 아이》 색다른 구성과 2천년 전 빈데비 소녀와 소년의 이야기를 만나는 시간은 절대 헛되지 않을 것이다.


*** 출판사 비룡소의 지원을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했습니다. 감사합니다. ***

#최초의아이 #로이스로리 #비룡소 #청소년소설추천 #청소년소설 #늪지미라 #빈데비아이 #앞서걸은이들을기억하는이야기의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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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삭임의 바다 다산책방 청소년문학 23
팀 보울러 지음, 서민아 옮김 / 다산책방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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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헤티를 몽상가라고 했다."
- 첫 문장


작고 외딴 섬 모라.
열다섯 살 헤티는 1살 때 폭풍으로 부모를 잃고 할머니와 산다. 헤티는 바다의 속삭임을 듣는다. 바다유리(깨진 유리 조각이 파도와 모래에 깎여 20~30년 후 매끈하고 영롱한 불투명한 보석처럼 되는 것)를 통해 어떤 형상을 본다.

그런 헤티를 바라보는 어른들의 태도는 다양하다. 바다유리로 무언가를 본다는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을 아이의 단순한 상상력쯤으로 치부한다. 헤티를 몽상가나 이상한 아이, 불안한 존재로 보며 배척하고 멀리하기도 한다. 반면 헤티의 할머니는 헤티의 능력을 인정하지만 세상이 이런 특별함을 받아들이지 못할 것을 걱정하며 헤티를 더 보호하려고 한다.

헤티는 예민한 소녀다. 마을사람들의 이 모든 시선들을 모두 파악하고 있을 것이다. 남들과 다르기 때문에 특별하지만 그래서 더 외롭고 혼란스럽다. 자신을 아무도 이해해주지 못하니 얼마나 외롭고 불안할까. (그래서인지 잘 먹지도 않고 까칠하긴하다^^;;) 하지만 헤티는 오히려 이 어려움을 자신을 성장시키는 동력으로 삼는 당찬 아이다.

100살이 넘어 섬에서 가장 나이 많은 어른인 퍼 노인과 헤티는 앙숙지간이다. 퍼 노인은 헤티를 경멸하듯 바라보기 일쑤고 중2병에 걸릴 나이라 그런지 헤티도 지지 않고 할 말을 다 한다.

"하긴, 그러고 보니 넌 내 말을 듣지도 않았지. 안 그러냐? 넌 한 번도 내 말을 귀 기울여 들은 적이 없어. 네가 내 말을 제대로 들었다면 말이다, 나는 바다유리인지 뭔지 하는 시답잖은 생각을 네 머릿속에서 당장 몰아냈을 거다."
"그리고 영감님의 엉터리 생각들을 제 머릿속에다 집어넣으셨겠죠."
96, 97면

그러던 어느 날, 거센 폭풍이 불고 작은 배에 탄 노파 한 명이 섬에서 발견된다. 퍼 노인은 사흘 연속으로 같은 꿈을 꾸었다며 모라 섬을 향해 악이 다가오고 있다고 말해왔다. 폭풍으로 섬의 자랑인 배가 부서지는 등 모든 사태의 원인을 노파에게 돌리며 노파를 섬의 적이자 악으로 규정한다.

"어둠 속으로 돌아가라, 이 마녀야!"
114면

하지만 헤티는 바다유리로 노파의 얼굴을 본 적이 있기에 정성을 다해 그녀를 돌보고 결국 살려낸다.
"죽으면 안 돼요. 절 찾으러 오셨잖아요."
117면

노파는 헤티가 운명적으로 이끌리는 사람처럼 등장한다. 이렇다할 서사 없이 노파를 감싸는 헤티가 이해되지 않았지만 결말에서 의문점이 해소되며 스토리에 신비로움을 더했다.

《속삭임의 바다》을 읽고나니 단어 하나가 남는다. 편견이다. 섬이라는 폐쇄적인 공간은 작은 사회를 하나로 강하게 결속시키지만 외부 세계와 교류가 제한되기 때문에 획일적인 가치관과 경험적 오류가 자리잡기 쉽다.

《속삭임의 바다》 속 어른들의 모습이 그랬다. 젊은 세대를 포용하지 못하고, 연륜으로 결정한 자신들의 선택을 따르라고 강요하는 듯했다.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익숙한 방식을 고집한다. 정보가 부족하니 고립되고
미지의 것을 두려워하여 더욱더 편견이 강화되는 악순환에 빠진 섬 사람들 같았다. 게다가 서로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 무시하며 소통이 단절되는 모습도 자주 등장했다.

반작용으로 섬과 바다는 헤티의 도전을 촉진하는 매개체로 작용한 것 같다.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좁은 섬을 떠나 바다 건너 새로운 세계를 꿈꾸게 한 것이다. 끊임없이 자유롭게 움직이고 변하는 바다, 헤티는 그런 바다를 보고 들으며 점점 바다처럼 도전할 줄 아는 어른으로 성숙해진다.

내가 《속삭임의 바다》 속 어른이었다면 헤티를 어떤 눈으로 바라봤을지 상상한다. 헤티처럼 우리 아이들도 저만의 소중한 달란트를 품고 있을텐데 고정관념과 신념으로 아이들을 제한하며 주체적인 결정을 막고 있는 섬 같은 부모는 아닌지 뒤돌아본다.

다름을 존중하고, 고립되어 정체되는 것을 경계할 것.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 것. 미지의 세계를 바라보며 도전을 꿈꿀 것. 《속삭임의 바다》가 전하는 용기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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